16화
“닮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길래요?”
“기세는 신기를 일컫는 것일 테고, 닮지 말아야 할 것은 홍운영의 연민이겠지. 그분은 왕에게 칭송을 받을 만큼 대단한 귀인이었으나 결국 마음을 다잡지 못하여 밀국에 재앙을 끌고 들어왔다.”
“…….”
“네 운명을 들을 적 나는 대업에 코웃음 쳤고, 너는 후자에 콧방귀를 뀌었지.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에게 내줄 동정이 어딨냐며. 내 허리께에도 닿지 않았던 작은 네가 돈을 주면 생각해 보겠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나도, 그 무녀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단다. 농처럼 끝이 난 얘기였지.”
내게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신당을 갔던 기억이 없다. 유년의 기억이라곤 온종일 도망 다니며 군불 연기가 퍼지지 않게 숨어서 밥을 해 먹고, 또 도망치다, 먹을 것과 일감을 얻으려고 여기저기 발품 판 기억뿐이었다. 낡고 해진 옷과 신발을 닳도록 기워 입고 신으면서.
“제가 그랬어요?”
“그래. 내가 말하고픈 것은, 홍사혜 너는 누구보다 신의 영기를 짙게 이어받았으니 약해 빠진 정신력으로 잡귀가 붙는 일 따위는 없을 거란 거다.”
누구보다 풍림의 피를 짙게 타고난 사람…….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눕히며 몽롱히 생각했다. 아, 그 때문에 신내림도 받지 않은 주제에 바람을 끌어낼 수 있었던가. 그렇다면 혹 어머니도 짐작하고 계시는 걸까.
사악, 사악.
다시 비의 뭉툭한 끄트머리가 가르마를 따라 움직였다. 내 머리를 느리게 어루만져 주는 손길에 얼크러진 생각이 저편으로 물러간다. 졸음을 참기 힘들었다.
나는 자장가처럼 단 어머니의 목소리를 베고 수마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 무릎에 기대어 드는 잠은 무척이나 깊고 달았다.
* * *
짧은 이틀 동안 도령이 요귀들과 어울리는 꼴은 보지 못했다. 약속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틀째 되는 날, 나는 도령이 귀띔한 전각의 뒷문으로 밀사처럼 향했다.
물론 도령과의 약속도 있었으나, 내가 여길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근래에 요귀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건 아닐 테고 분명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을 터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더욱 확신이 생겼다. 요귀들도 맛깔스레 여기는 사내라니. 타고나길 나만큼 기구한 팔자가 아닌가.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건대, 요귀의 출처에 관해 짐작 가는 바도 있었다. 하여 기씨 대감도 부재중이겠다, 도령께서 먼저 대문을 열어 주니 겸사겸사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다.
미리 언질받은 청지기에게 손인사 하고 대감 댁 뒷문을 넘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전각 주위부터 맴돌며 찬찬히 둘러보았다.
도령은 여전히 바깥채 신세이지만 못 보던 모종이 군데군데 심겨 있어 전보다 사람 냄새가 났다. 둘 뿐이지만 상주하는 시비도 있고, 조막만 한 꽃밭은 손질한 태가 났다.
그러나 그뿐. 도령의 형제들이 거하는 안채에 비하면 한참 격이 모자란 초름한 꼴이었다.
기 도령은 대청에 올라앉아 한쪽 무릎을 접고 팔을 기대고 있었는데, 그 눈이 평소와 달랐다. 도령! 나는 힘차게 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시큰한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도령은 힘줄이 잘려 손발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사람처럼 앉아서는, 안채를 건너다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운 소식을 물어다 줄 청조의 노래.
차마 내가 왔다고 알리지도 못하고 정승처럼 우두커니 섰다. 내가 퇴거한 뒤 도령은 딴채에 덩그러니 남아 무얼 하며 온밤을 지새우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담 너머를 오매불망 보고 있을까?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찾아가면 될 것을요.”
인기척에 노랫가락이 뚝 끊겼다. 한순간 싸늘하게 식은 눈은 나를 알아보자마자 유들유들하게 휘어졌다.
“이상한 소리를 하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왔으면 말을 하지.”
“했는데 도령이 못 들은 겁니다. 병세도 좋아졌는데 식솔들과 함께 안채에서 생활하지 않고요.”
“내가 여기가 편하다고 해서.”
단호한 눈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한데. 사람이 그리워 안달 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나는 얕게 한숨을 쉬며 그의 곁에 걸터앉았다.
“여기도 오랜만입니다.”
“세 이레도 안 지났는데?”
도령은 제비꽃물을 들인 도포와 연노랑색 요대, 손에는 끝이 부러진 긴 나뭇가지를 쥐고 있었다. 대청 밑 모랫바닥을 내키는 대로 헤집다가 온 모양새였다.
있는 듯 없는 듯 다가온 시동은 다기와 견과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이게 공부하는 서책입니까?”
나는 나뒹구는 책 하나를 발견하고 화제를 돌렸다.
“네가 오기 전에 걔들이 왔다 갔어.”
“어울리지 마시라고 당부했는데도.”
“어제 몸이 아파 글방에 나가지 못했는데. 난 부른 적도 없는데 어제 배운 내용 알려 주겠다며 막무가내로 찾아온 거야.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뒤처질 순 없잖아, 응?”
학문에는 하등 관심 없어 뵈는데, 열심히 따라잡으려는 모습이 의외였다. 나만 아는 사정임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구 그러셨어요, 하며 어깨라도 두들겨 주고 싶다.
한데 상상에 그쳐야 할 것을, 도령이 안타깝고 기특한 나머지 주제넘게 행동으로 옮기고 말았다.
“손대지 마.”
냉한 말투에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던 손을 겸연쩍게 떼어 냈다. 내가 만지는 게 저리 오만상 찌푸릴 일인가. 하기야 그는 신분 높은 양반이니 밑바닥 평민이 제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걸 질색할 수 있겠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무릎에 얌전히 손을 올렸다.
“한데 아프셨다고요.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하루 앓다가 말았어.”
매병은 나아도 지병은 깨끗이 털어 내지 못한 도령이었다. 간간이 숨쉬기가 불편하고 열이 끓는다던데.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며 낯빛을 어둡게 물들이는 도령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루 만에 열이 내리셨다니 다행입니다.”
“또 그런 눈으로 보네.”
나의 걱정을 동정으로 보았는지 날 선 반응이었다. 도령은 내 앞에서 병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다. 치부라도 들킨 것처럼 말을 피했다.
“어떻게 받아들이시던 저는 그저 도령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오해 마세요……. 그나저나 이것 아주 귀한 책이 아닙니까? 깡시골 세책방에도 이런 걸 들일 줄은.”
나는 도령의 책을 가져다 가지런히 무릎에 펼쳐 한 장씩 넘겨 보았다. 제목도 못 알아먹으니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지만 다 안다는 듯이 꿋꿋이 책장을 넘겼다. 고개는 아래로, 눈은 은밀히 주위를 훑었다.
앓는 걸 질색하는 도령이니 악귀 붙은 물건을 찾아다가 해치우면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것이 방문의 목적이기도 했고.
‘요귀가 달라붙을 만한 것.’
애착을 가지는 물건, 혹은 이 집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나무에 붙어서는 숙주의 생기를 쪽쪽 빠는 것들이 요귀인데.
‘그러고 보니 제삿날에도 감나무 위에 요귀가 나타났고.’
하면 저 실한 나무가 원흉이려나.
담장 너머로 늘어진 감나무 가지를 노려보는데, 눈꺼풀 위로 짙은 그림자가 쏟아졌다. 그 직후 커다란 손이 다가와 내 고개를 휘이 채갔다.
“뭐 해?”
“예?”
내 턱을 감싸 제게로 돌린 도령이 가늘게 눈을 당겼다.
“무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 그것이.”
……티가 났나?
“왜, 뭐가 보여?”
툭, 턱을 감싼 손은 곧바로 떨어졌으나 내 심장까지 그날로 함께 굴러떨어지는 줄 알았다. 돌연한 행동에 놀란 것은 둘째였다. 가슴이 내려앉은 까닭은 한순간 불쑥 다가온 도령과의 거리 때문일 터다.
그날, 엉겁결에 도령의 무릎을 베게 삼아 누웠을 때처럼 몹시 가까웠다. 찌푸린 미간이며 닿을 듯 찌르는 콧날이며 지근거리에서 아른거린다.
“뭐가 보이는데, 응?”
“보이긴 무슨…….”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그의 어깨를 후다닥 치고 물러났다.
“아니면 되었지 호들갑은.”
나는 민망함을 떨구기 위해 거칠게 책을 넘겼고, 도령은 대청에 드러누웠다. 혼자만 몹시도 평온한 낯빛이었다. 그런 반면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 얽으며 아무 말이나 쏟아 내고 있었으니.
이건 아니다.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어. 분명 평소처럼 담소를 나누는데, 도령이 한 번 불쑥 다가왔다고 며칠 새에 심장을 바꿔 낀 것처럼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그, 그나저나 대감은 언제 귀가하십니까?”
“한 시진 뒤랬나.”
“저, 잠시.”
단단히 눈치를 일러두어 망정이지, 까딱하면 사내 앞에서 순진하게 뺨이나 붉힐 뻔했다. 내 처지를 생각하면 위험한 짓이었다.
나는 뒷간을 갔다 온다는 핑계로 부리나케 전각을 빠져나왔다. 대감 댁을 둘러보려고 나온 것도 이유지만 우선은 저 바늘방석에서 벗어나야겠다.
콧등을 사각사각 긁는 바람을 맞으며, 시종들의 눈을 피해 움직였다.
메꽃과 해란초가 흐드러진 정원.
품종을 개량해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진 연꽃이 독처럼 피어난 연못 쪽에서부터 아까부터 음충맞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씨 영감이 종들의 출입조차 막은 누각이 있던 곳이었다. 칡넝쿨처럼 뻗어 난 연뿌리가 수면을 거미줄처럼 덮고 있다.
호화로운 단청을 새긴 붉은 누각. 거기서 여느 밤처럼 흥겨운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설마 벌써 대감이 돌아왔나? 내가 여기서 얼쩡거렸단 걸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나는 심호흡하고 짙은 요기가 느껴지는 누각으로 걸어갔다. 대감이 돌아온 것은 맞지만 그는 춤판을 벌이는 대신, 안채의 기둥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시선은 밑바닥에, 다른 손으로 삽을 쥐고 흙더미를 파헤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