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86)

15화

“갈 길이 바빠 이만 가야겠어.”

결국 내 말을 안 듣는 쪽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간특한 요귀의 꾐에 넘어갔나. 음습한 놈들을 달고 다니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더욱이 걔 중 하나는 도령의 어깨에 칡넝쿨처럼 몸을 휘감으며 뾰족한 혀를 도령의 귓속에 후비려 들고 있는데도 그는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비켜.”

“도령!”

필사적인 목소리가 먹혀들었는지 도령이 짜증스럽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나를 오래 노려봤다. 그러다가 성가시다는 듯 제 친우들에게 잠깐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수틀리면 달려들기부터 할 요귀인 것을.

“말해.”

“저들을 어디에서 만났습니까?”

“서당.”

“어느 집 자제들입니까?”

“네게 말할 이유가 있나.”

“저들과 어울리지 마세요.”

도령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이내 붉은 입술이 벌어지더니 길게 찢어졌다. 하, 하하.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이 딸려 왔다.

황당하다는 눈, 차갑게 비틀린 입술.

“왜?”

“저들은―”

“네가 무어라고.”

저들은 도령의 몸속을 파고들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목구멍 끝에 말이 걸렸다. 도령의 말이 내 속을 쿡쿡 찔러서만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을 내뱉었다간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 게 뻔하고, 자칫 둘 다 요귀의 식사가 될 위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도령을 괴물들 틈바구니에 두고 오자니 사달이 날 게 분명한데.

요귀가 백주 대로에 멀쩡히 돌아다니는데도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하셨다. 그만큼 어머니의 기가 쇠하신 건지, 놈들의 요기가 강한 건지.

지금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께 사정을 말해도 시큰둥해하실 게 분명했다. 어차피 우리는 곧 무릿매골을 떠날 예정이고, 사람들에게 이골 난 어머니는 마을이 홍수에 잠기든 지진이 일든 우리네 안위만 지키면 그만인 분이셨으니까.

“먼저 다가온 이들을 내 쪽에서 어찌 내치겠어?”

도령이 빙글 웃었다. 저것도 오랜만에 보니 가식인지 진심인지 구별이 가질 않았다.

“아니면 혹 뭐가 보이나.”

“예?”

“무당들은 관상과 기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던데. 저들의 기운이 좋지 못해 나더러 멀리하라는 거야?”

이거다. 뜻밖에 도령이 열쇠를 건네주었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령은 ‘그래?’ 되묻더니 내 말을 들어줄 것처럼 과장되게 놀란 얼굴을 하다가 또 조소했다.

“그럼 나도 한번 읽어 봐. 숙환을 달고 사는 나는 언제쯤 명이 다할까. 아버지 뜻대로 장성하여 가문의 부를 쌓을까, 가진 건 돈뿐인 파락호가 될까. 알려 줘, 버들아.”

윤후가 부를 때 나의 이름을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멈칫한 날 보더니 입술을 끌어올리며 ‘버들아.’ 다시 한번 요요하게 속살거린다.

“저들은 내 몇 없는 벗인데. 마침 아버지께 소개도 시켜 드릴 겸 집으로 초청한 참이지.”

도령이 손가락으로 내 뒤편을 가리켰다. 인내가 바닥 친 요귀들은 날카롭게 벼린 손톱을 숨기지 않고 무리 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도령이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어머니의 말이 귓가에 요동친다. 분명 요귀가 기생하는 뿌리가 있을 테니 그것부터 찾아 없애야 했다. 도령의 전각일까? 그도 아니면 도령의 방 안에 있는 물건?

분명한 건 나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란 것. 까딱했다가 내가 먼저 놈들의 손톱에 목이 잘려 나가리란 스산한 깨달음이었다.

“도령. 그때에는 제가 말이 심하였습니다.”

“…….”

그러니 나를 벗으로 받아 달란 소리였다. 다른 변명이 없었다. 우선 군침 흘리는 저것들부터 떼어 놓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놈들의 뿌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도령의 거처로 들어가야 했다.

그가 입가로 제 손을 가져갔다. 손등 아래 묻은 웃음이 틈새로 비쳤다. 고생을 모르는 미끈한 손가락이 천천히 턱을 쓸며 내려가고, 달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부탁이건대 저 치들과 다시는 엮이지 마세요. 들붙으려거든 떼어 내시고, 그래도 안 떨어지면 저를 부르시고, 예?”

“음.”

집에 돌아가 어머니의 부적을 몇 장 챙겨 올 요량이었다. 먹힐지는 모르겠으나 최소의 방책이라도 필요했다. 도령의 청명한 눈을 보아하니 아직 정신까지 먹힌 것 같지는 않았다. 요기가 옅다. 이 정도면 시일을 두고서 정화할 수 있다.

슬며시 도령의 안색을 살폈다. 매끈한 돌처럼 반들반들한 얼굴을 보니 그간 잘 먹고 잘 잤나 보다. 괜스레 안심이 되었다.

도령은 내 부탁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슬몃 눈을 내리깔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튿날 아버지 귀가가 늦으시는데.”

“그럼 그때 찾아가겠습니다.”

내가 대감 때문에 저를 피해 다니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도령은 그 말을 남기고 인사도 없이 떠났다. 뒤쫓아오는 ‘친우’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직 도령을 좌지우지할 힘이 부족해 보이는 놈들은 주춤대다가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그 살의가 내게로 쏠리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니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잔뜩 힘 들어간 어깨가 스르륵 풀렸다. 안도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금방이라도 일을 저지를 것 같던 요귀가 무슨 변덕으로 꼬릴 말고 물러났는지 모르겠다만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 * *

“어머니, 저 왔어요.”

그날 저녁은 내가 손을 꼽아 가며 기다리던 날이었다. 무사히 일을 마치고 귀가한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얌전히 머리를 기대고, 사그락사그락 머리칼을 빗어 넘겨 주는 손길을 느끼며 흐뭇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요귀가 빌붙기 좋아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지요?”

스무 날에 한 번, 거스러미처럼 정수리부터 붉게 자라나는 내 머리칼에 염료를 바르는 시간이었다. 이때에 어머니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나와 꼭 닮은 어머니의 아름다운 석류빛 눈동자를 오래 마주 볼 수 있었다.

목침처럼 기댄 어머니의 무릎이 겨울 구름 사이로 빠져나온 햇귀처럼 포근했다.

“가만히 있어.”

그 안락함에 기분이 좋아진 내가 몸을 어쩌지 못하고 살랑살랑 좌우로 흔드니 이마를 찰싹 얻어맞았다.

이 염료로 말하자면, 어머니의 부적으로 희석한 신묘한 약이라 물에도 잘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시일이 지나면 주기적으로 덧발라 줘야 하지만 한번 바르면 유지는 잘 되었다.

세심히 가르마를 타고, 어디 덜 물들인 곳은 없나 살피며, 어머니는 내 머리를 빗살로 슥슥 긁었다. 위로, 아래로. 사선으로, 다시 머리를 넘기고 새까만 염료를 도포한다.

정수리는 차고, 내 귀를 붙든 손은 따뜻하고, 잠은 솔솔 밀려들었다.

“첫째로 기가 허한 자들이겠지. 몸이 약하면 잡귀가 붙기 쉽다.”

“그건 저도 알아요.”

“둘째로 정신이 불안정한 자다. 공포, 증오, 악심으로 배를 채운 자들은 요귀의 좋은 먹잇감이니 말할 것이 없겠고, 결핍된 자들도 요귀들에게 쉬이 걸려든다. 고독, 나타. 잡귀를 꾀는 부정적인 것들이지.”

외로움이라. 거기다 병까지.

“도령도 좋은 먹잇감이겠네요.”

빗으로 내 머리칼을 문지르던 어머니가 멈칫했다.

“너 아직도 그 집 아들이랑 어울리느냐?”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두 번째 거짓말은 쉬웠다. 나는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 숨기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마음이 불편했으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내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할 줄 아는 나이인데 행동 하나하나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나, 하는 반발심도 들었고 말이다.

“길 가다가 가끔 볼 뿐이에요.”

“괜한 짓거리 하고 다니지 말아. 시병(侍病)할 때도 그 애의 기운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니.”

매번 도령 얘기를 꺼낼 때마다 안 좋은 소리만 골라 하니, 이제는 금기어로 모자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망령이 머리맡을 뛰노는 아이. 사자의 손을 잡고 명부로 향할 아이. 암운의 냄새. 도령에 대한 어머니의 평은 너무할 정도로 박하고 모질었다. 끝말은 항상 ‘가엽지만, 어쩌겠어.’였다.

“마지막으로, ‘통로’가 열린 자들도 요귀가 잘 붙는 체질이다.”

“통로?”

영령의 출입을 허하는 그 통로에 신이 깃들 수도, 잡귀들이 파고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한데 통로를 따라 들어온 놈이 내 마음에 온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 좋은 놈인지 나쁜 새끼인지 분간할 방법은 없다고 했다.

“우리네 같은 무녀들은 신이 통로를 단단히 막아 지켜 주고 있기에, 요귀에게 홀릴 일은 없다.”

“하면 저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신은 수호목과 함께 잘려 나갔으니 영영 죽어 없어졌다. 그리하여 내가 평범하느냐 하면 어폐가 있다. 신내림을 거부한 이후에도 신의 도움을 두 번씩이나 넙죽 받았으니.

떨쳐 내려고 해도 완전히 떨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는 모호한 반쪽짜리였다. 어머니는 조용히 빗과 그릇을 내려놓고는 고운 손으로 내 이마를 덮으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사혜야.”

“예.”

“네가 어릴 적, 신점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가느다란 날숨이 콧잔등을 쓸었다. 미끄러져 내려온 어머니의 손이 이번에는 내 눈두덩을 부드러이 덮었다. 다정한 듯, 낯선 손길.

나는 가만히 숨을 참았다. 후우, 뱉었다간 콧잔등에 앉은 나비가 날아간 것처럼 어머니의 손도 떠나갈 것만 같아서.

“네 명줄이 얼마나 길까 해서. 그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너는 조상의 강건한 기세를 쏙 빼닮아 정도를 걸으면 대업을 이룰 것이나, 닮지 말아야 할 것들 역시 물려받아 스스로 피를 볼 운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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