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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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촌 아이들은 글보다 셈하는 법을 앞서 배운다. 윤후는 제 이름만 겨우 쓸 줄 알고, 나는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어머니에 비하면 한참 배운 게 없었다. 어물어물 글을 배워도 쓸 일이 없으니 다 잊었다.
그래도 내 가문은 뼈대가 굵었다. 더럽혀지긴 했어도 과거에는 명예도 있고, 여느 양반처럼 남부럽잖게 배에 기름칠하며 살기도 했었다.
나의 어머니는 양갓집 규수 못잖게 교양이 깊고 박식하며, 글이며 자수며 시 짓기며 못 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인데, 내게는 그런 것들을 일절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무녀가 되려면 고서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부적을 쓰려면 획을 그을 줄도 알아야 하거늘.
생각해 보니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는 나를 무녀로 키울 마음이 없던 듯했다.
윤후는 붓보다 새총을 먼저 잡고, 활자보다 셈법을 먼저 배운 애였다. 나나 어머니나 장사치랑은 거리가 멀어 자주 등쳐 먹혔는데, 그런 내게 물가를 가르치고 흥정하는 법을 알려 준 애가 윤후였다.
“버들아, 연습은 좀 해 보았어?”
배가 부를 때쯤 윤후는 날 공터로 데려가 작은 새총을 쥐여 주었다. 거기는 기씨 댁 종들이 장작을 패는 곳이고, 출입 제한도 없어 마음 놓고 돌아다녀도 되었다.
“이걸로 맞추는 연습을 먼저 해 보랬잖아.”
“아무리 그래도 활이랑은 좀 다르지 않아?”
“크게 다르지도 않아.”
배에 고기도 잔뜩 넣었겠다, 여유로워진 난 자신만만하게 새총을 받아 들었다. 윤후가 나무의 패인 자국을 가리켰다.
“움직이는 건 무리고, 나무의 중앙부터 맞춰 보아. 시범 보여 줄게.”
윤후가 쏘아 올린 돌멩이는 목표 지점에 명확히 맞아 떨어졌다. 꽤 쉬워 보였다. 그만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만하며 흉내 냈는데, 뭘 어떻게 한 건지 새총까지 함께 담장 밖으로 넘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와 버들아, 너 힘 좋다.”
“기다려. 도로 가져올 테니.”
담장에 개구멍이 하나 있었다. 저길 넘어도 되는 건가, 의심스럽게 보다가 뒷머리를 긁으며 그 안으로 끙끙대며 들어갔다.
“어디에 있지.”
아무리 익숙한 대감 댁이더라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 있다. 짐작건대 여기는 내가 담 너머로만 흘긋대던 곳으로, 대감이 정체 모를 객들과 시시덕대던 누각이 있는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양 갈래 길.
우측은 대감의 꽃밭. 좌측은 기씨 형제들이 사슴처럼 뛰노는 숲으로, 역시 대감의 사유 재산이었다.
어느 쪽이든 좋지 못했다. 특히 기씨 대감은 어머니와 나를 비롯한 종들에게 누각 쪽은 얼씬도 말라 단단히 일러두었다. 허락 없이 발을 들였다간 발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아무리 고개를 휘적여도 망할 새총은 발이 달려 도망친 건지 보이질 않았다. 차마 깊은 안쪽으로 꺾어 들어가진 못하고 담장 옆 덤불만 뒤지는데, 지쳐서 포기할 때쯤 풀밭에 떨어진 새총이 보였다. 나는 얼른 줍고 떠나려고 했다.
“어.”
한데 그것이 손에 닿을라치면 바람에 저만큼 떠밀려가고, 또 한 뼘 뻗으면 농락하듯 멀어지는 게 아닌가. 처음엔 얄미운 바람의 농간인 줄 알았는데.
“…….”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약 올리듯 조금씩, 조금씩.
스스―
슥.
스슥―
나는 덤불 바깥으로 몸을 흔들며 빠져나왔다. 발이 달린 것처럼 뒷걸음질 치는 새총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바닥을 기는 것도 모자라 잡아채이듯 공중에 휙 떠올라, 멀찍이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누군가의 손아귀로 달랑달랑 되돌아갔다.
“여기 오면 안 되는데.”
“아, 죄송합니다. 물건만 찾고 금방 돌아…… 도령?”
담장에 주저앉아 새총을 묶은 실을 얄밉게 흔들고 있는 사람이 눈에 익었다. 실에 달린 새총을 대롱대롱 흔들고 있는 도령을 보고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잔칫상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질문 공세를 받고 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서 기웃거리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알은체했는데. 아까는 왜 무시했어?”
“무슨 짓입니까? 어서 돌려주세요.”
“이거?”
그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둘이 재밌어 보이길래.”
“윤후를 봤어요?”
“내가 부를 땐 안 오더니.”
윤후를 알아봤냐는 물음에 딴소리만 돌아온다. 설마 그때 손짓이 오라는 뜻이었나.
“무슨 배짱으로 도령 앉아 있는 곳까지 갑니까? 앞으로는 이 집에도 못 옵니다.”
“왜?”
“도령의 병이 나았으니 올 이유가 없지요.”
대감이 수고했다며 우리 모녀의 손에 쥐여 준 보수를 끝으로 다시 여기에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쪽 보는 일도 없을 테고.”
“…….”
“저와 어머니 일은 다 끝난 겁니다, 끝.”
자박자박,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도령은 내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엉거주춤 무릎을 굽히고 있는 내게 그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저 부들부들한 손을 흙 묻은 손바닥으로 잡으면 경을 치려나,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먼저 나를 콱 붙잡아 일으켰다.
“아버지가 오지 말라던?”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하.”
용케 알아먹은 건지, 도령은 저가 붙잡은 내 손을 가느다란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힘을 풀었다.
“저,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빼앗긴 윤후의 물건을 돌려받고 뒤돌아섰다. 뒤따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끄고 내 갈 길을 가는데 개구멍 앞까지 줄기차게 따라오고 있었다. 홱 돌아보자 뒷짐을 지고 가만히 서 있는 도령이 보였다.
“어서 가세요.”
잔치가 한창인 곳을 가리켰다. 무슨 핑계로 빠져나왔는지 모르겠으나 벌써부터 사라진 도령을 찾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러고 함께 다니는 꼴을 들키면 대감의 약속을 어기게 되는 꼴인데, 돈이 궁한 나는 받은 돈을 도로 빼앗길까 불안해졌다.
“오늘도 약을 기다리고 있는데 너 대신 칠십 줄은 먹은 영감이 와서 맥을 짚더라고.”
“그분이 도령의 주치의입니다.”
“넌?”
“말씀드렸다시피…….”
“내일은 오나?”
“아뇨.”
도령의 곧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온이 가시고 언짢음이 떠올랐다. 도령은 말없이 나를 보다가, 내 손에 덜렁거리는 새총을 노려보다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다가왔다. 그 살풋 찡그린 얼굴마저 곱살스런 사내였다.
“날 걱정했으면서.”
“걱정은 걱정이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쨌거나 대감이 단단히 주지시킨 바도 있으니 그와 어울리는 낌새를 내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뒷걸음질 치다 개구멍으로 훌렁 허리를 밀어 넣었다.
그때였다. 수초처럼 냉하고 촉촉한 손이 발목을 휘어감았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뒷골부터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그대로 구멍 밖으로 달아나려다가 어정쩡하게 낀 자세로 굳었다. 내 발목을 쥔 그의 손을 털어 내려고 다리를 흔들었으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자세가 조금 민망스러웠다. 나는 구멍에 낑겨 상체는 담 너머로, 하체는 도령에게 붙들려 이도 저도 못 하는 중이었다.
“내가 보고 싶다지 않았어?”
“놓아주세요.”
“걱정됐다면서?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지 않아. 한 번 봤으니 이젠 필요 없다, 이건가?”
“잠깐…….”
때마침 낯선 발소리가 나타났다.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도령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망아지처럼 냅다 발을 털고 쏜살같이 반대편 구멍으로 기어 나갔다.
“도련님,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주인 나리께서 한참 찾으셨어요.”
불청객은 기씨 형제를 보살피는 유모였다.
“어서 갑시다, 가요. 혼자 이렇게 나와 계시면 아니 됩니다.”
끌고 가고자 하는 이와 남겠다는 이 사이에서 실랑이가 이어졌다. 도령은 체할 것 같은 밥상머리에 두 번 앉고 싶지 않아 했고, 유모는 아까 구멍에 엉덩이가 낀 이가 누구냐고 추궁했다.
도령은 내게 보복하듯 ‘도둑’이라고 답했고, 유모는 다행히 정신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주인을 믿어 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잔치로 북적이는 대낮에 꽁무니를 들키는 어설픈 도둑이 어디 있겠냐며 한 소리까지.
엄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함부로 나돌아 다니면 안 된다고, 도련님께서 이 숲을 돌아다니는 꼴을 보았다간 어르신께서 탐탁지 않아 하실 거라고.
잦아드는 음성을 뒤로하고 나는 냅다 윤후에게로 뛰어갔다.
* * *
뒤뜰에서 놀다 배가 고프면 잔칫상에서 밥 한 숟갈을 떠먹고, 배가 차면 다시 뜰에서 놀았다.
오늘 하루 기씨 대감은 대문을 열어 두었다. 잘 조성된 앞마당은 훤히 개방되어 누구라도 방문할 수 있었다. 무릿매골 아이들은 꽃이 심어진 기씨 댁 마당에서 진귀한 식물과 새콤한 향을 뿜는 꽃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도 거기에 있었다. 따가운 시선이 등에, 허리에, 옆통수에 화살처럼 꽂힌다. 멀리 있는데, 멀지가 않았다.
나는 한창 모래 바닥에 쭈그려 앉아 윤후의 강의를 복습하던 중이었다. 풍향과 풍속, 목표물까지의 거리, 포물선을 그리는 살의 궤도와 팔의 힘. 어깨의 방향. 윤후가 알려 준 내용을 머릿속에 꼼꼼히 넣는 와중, 별안간 머리 위로 길쭉한 그림자가 졌다.
“저놈 말고 나랑 노는 건 어때.”
모래 그림을 대단한 명화마냥 뚫어져라 보고 있느라 주위가 지나치게 고요하단 것도 몰랐다. 주변에 떠들던 아이들이 홍해처럼 갈라섰다.
선득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역광이 드리워진 도령의 새카만 얼굴이 시선 끝에 있었다.
나는 흠칫 떨었다. 한 번 문 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도사견에 비유하기엔 저 사내가 지나치게 곱고. 그렇다면 무엇에 그를 빗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