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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86)

12화

그는 내가 큰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 풀어 주었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같은 장면을 곱씹었다.

서화는 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직접 본 도령은 귀신처럼 괴괴한 사내가 아니라 생기를 지닌 아름다운 사내였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요란한 첫 만남이었으나, 감상을 말하자면 그러했다.

“이제 오는구나.”

“어머니, 먼저 드시질 않구요.”

손부채질을 하며 걸으니 벌써 집 안마당이었다. 늦저녁까지 기씨 댁 뒤치다꺼리를 끝내고 온 어머니는 밥상 앞에서 고단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남몰래 행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신내림도 못 받은 처지에 무녀처럼 행동했다는 걸 어머니께서 아셨을 때 돌아올 반응이 두려웠다.

여섯 살 때였나. 신내림을 받기 한참 모자란 나이였을 때, 꽃밭에서 놀던 내 뒤로 온갖 나비들이 꼬여 든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보고 기겁했다. 당장 나를 옆구리에 끼고 사당 할매에게 데려가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물으셨다.

‘이 애한테 절대 이름을 주지 마.’

‘할머니, 제 이름은 이미 있어요. 홍사혜라구, 어머니가 지어 주셨는데.’

‘일찍 죽고 싶어 이래? 그게 어딜 보아 네 이름이야!’

그 할머니는 눈까지 뒤집으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미 주인 있는 육신인데 남처럼 행세해야 쓰겠어! 그러다 제 몸도 못 찾고 벌레만 드글드글 꼬이지! 네 운명도 참 딱하구나, 아이야.’

어머니는 나를 보자기에 싸서 뛰쳐나왔고, 사당 앞에 침을 뱉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내 양손을 잡아 앉히곤 무섭게 다그치셨다.

‘그 할머니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다시는 꽃밭 근처에 얼씬도 말고, 항상 어미가 보는 앞에 있어라.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머리부터 자르자.’

주인 있는 몸.

불쾌한 한마디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머릿속에 똑똑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물을 때마다 어머니는 불같이 성을 내며 그따위 망발은 잊어버리라 하시니, 차마 더 캐내지 못하고 묻어 두어야 했다.

그날 밤 이부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를 곱씹어 봤다. 요귀도 요귀이지만 그 나비들. 귀띔해야 하나, 다물어야 하나. 어머니가 아시면 어찌 되는 것이지?

‘역시 말을 삼가는 편이 좋겠지.’

또 날 어느 이상한 사찰에 끌고 가 앉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그때처럼 별스런 소리나 들을 테고.

뭣보다, 안 그래도 심신이 미약하신 어머니가 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길 원치 않았다. 만약 그 나비가 해악한 영물이라면 진즉 사달이 났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밤이었다.

* * *

이튿날은 온종일 마을이 시끄러웠다. 기씨 댁 앞은 8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막내 도령을 보려고, 혹은 이 기회를 잡아 대감에게 꼬리 흔들려고 아침 댓바람부터 장사진을 이루었다.

대감이 막내 도령의 쾌차를 기뻐하며 잔치를 연 통에 나흘 굶은 비렁뱅이부터 돌도 안 지난 젖먹이까지 다 모여서 아주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자제분이 몹시도 수려하십니다요.”

“이렇게 고운 아드님이 8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으니 얼마나 속을 썩혔습니까? 대감.”

“오늘 같은 날이 마을의 경사이지 무엇이겠습니까?”

저마다 아부 한마디씩 던졌다. 아니, 예상을 뒤엎은 도령의 외양을 흠모하는 저 눈빛들은 진심 같았다.

대감 등쳐 먹고 사는 가난한 이웃 양반들은 상석에 달라붙고, 그네들이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온 식솔들은 다 혼기가 가까운 여식들이었다. 윗사람 분위기는 벌써부터 상견례고, 아랫사람은 잔칫상이나 배부르게 얻어먹으면 족했다.

어머니와 내 앞에도 전이 놓여졌다. 대감은 우리를 따로 불러 그간 고생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섭섭지 않은 액수의 돈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아들을 위해 애써 준 건 고맙지만, 앞으로 볼 일 없었으면 하네. 내 말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처음 내 어머니를 불렀을 때도 비밀스럽긴 했다. 어머니는 빈촌의 무당이었고, 좀 사는 집 양반들은 잡귀를 몰고 다니는 무당을 문턱에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당신의 아들이 굿을 받았다는 소문을 감추느라 대감은 야단이었다. 그 이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고서부터는 우리를 일절 상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돈을 먹고 떨어졌다. 한데 이유를 알 수 없게도 내 마음의 작은 일부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어차피 내 팔자에 오래갈 연이 없음을 알긴 알지만.

나는 멀리서 제 아비 옆에 무릎 꿇고 단정히 앉아 있는 도령을 곁눈질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셨습니까? 돌팔이들이 불치병이라고 떠들어 댄 탓에 마음고생 심하셨지요.”

“대감께서 소루강 신께 매해 제사를 드리니 이렇게 큰 기쁨으로 보답을 해 주시는 듯합니다.”

자신에게 일쑤 말을 거는 어른들을 대할 때도 그는 감흥 없는 표정을 했다. 어젯밤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이 바뀌었나. 웃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술잔을 받았고, 목소리는 가식적이었으며, 눈은 혹한보다 냉랭하였다.

처음엔 도령이 낯을 가려서 이리 샐쭉하나 우스갯소리를 던지다 그 농담에도 반응이 없으니 다들 도령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하, 훔쳐보던 나는 웃고야 말았다. 그래, 내가 저 냉대를 장장 1년이나 버텼지.

“공자께서 아직 정신이 없으신 모양이지요.”

“제 아들 녀석이 면학을 도울 수 있을 겝니다, 대감. 배움이 조금 늦어도 금방 앞지르실 테고요. 왜, 늦깎이들이 더 열성이란 말도 있잖습니까? 하물며 누구 아드님인데.”

“대감, 이 애는 저희 막내딸인데…….”

“제 아들부터 봐 주십시오. 도령과 비슷한 나이 또래이니 가깝게 어울리면 좋을 듯합니다.”

저런 소리를 징글징글하게도 들으니 나 같아도 밥상을 엎고 뛰쳐나가고 싶겠다. 양반들은 광대처럼 웃었다. 그 사이에 낀 도령을 어떻게 쪼개 먹을까 판돈을 걸고 하나라도 가져가려고 안달복달하는 것 같았다.

도령은 저리 파리 떼처럼 귀찮게 구는 거 싫어하는데.

그때에 시선이 마주쳤다. 도령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다 나를 본 것이다.

필요 없어진 무당 부자를 대하는 대감의 태도는 섭섭할 정도로 냉담했으나 소나기밥을 차려 주었다. 나물도 여덟 가지고 고기반찬에 양념을 묻힌 귀한 생선까지. 큼지막이 한 수저 떠 막 입으로 밀어 넣던 찰나였다.

누가 봐도 선머슴인 내 꼬락서니를 보고 도령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의뭉스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인사인가. 나는 고개만 까딱이고 마저 밥을 펐다.

식사에 집중하면서 내일의 할 일을 곱씹었다. 이제 도령도 나았으니 벌이가 막힌 어머니와 나는 바빠질 참이었다.

윤후랑 뒷산으로 가 덫을 좀 놓고 오기로 했다. 돈 될 만한 약초도 캐고, 산짐승도 잡고, 근처 강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통발이며 추 달린 괭이도 준비해 두었다.

오늘 만난 윤후는 그날 싸움이 났던 날, 날 막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죽을죄라도 지은 양 굴었다. 혼자 계속 죄책감을 이고 있다가 부탁하지도 않은 굴비 반 토막을 조심스럽게 내밀었고, 그걸로 우리 사이는 풀렸다. 애초에 난 걔한테 유감이 없어 걔 혼자 풀은 것이지만.

듣기로 도령은 내일부터 글방에 다닌다고 했다.

‘앞으로 엇갈리는 구석이 조금도 없겠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담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 그럼 얼마나 행복할까.”

소고기 뭇국 건더기를 건져 먹던 윤후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선망의 눈은 상석에 앉은 기씨 대감과 그의 아들들을 부러운 듯 훔쳐보고 있었다.

행복. 뭐 그래, 누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막내 도령의 실상을 알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싶지마는.

“꼭 그런 것도 아니던데.”

“응?”

“제 몫을 해야 인정해 주는 건 윗사람들이 더 해. 윤후 넌 공부 싫어하잖아.”

찔린 녀석이 귀를 붉혔다.

“재주 하나쯤 있어야 양반도 양반 대접받는 거야.”

“그래도…….”

“아님 사람대접도 안 해 준다. 네 부모님이 널 자식 취급 안 해 준 적 있어? 없잖아.”

순진한 녀석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태어났을 때부터 양손에 복을 쥐고 태어난 양반 자제들에 대한 질투와 동경은 물욕 없는 윤후라고 해도 다를 게 없나 보다.

“아님 다음 생까지 멀리 갈 것도 없이 돈 벌어 양반 직위 사시던가.”

“아, 아차. 그런 방법도 있었지.”

코를 훔치며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걸 곧이곧대로 수긍하는 모습을 보니 애석했다.

내 친구라지만 녀석은 머리가 썩 좋은 편도, 행동이 빠릿빠릿한 것도 아니고 힘도, 용모도, 성격도 고만고만하였다.

감자 같은 귀여운 얼굴에 순박한 코, 소처럼 둥그런 눈망울. 죽자 사자 생계를 꾸리는 악바리도 아니고, 욕심도, 배짱도 없다.

그래도 제 부모 하나는 잘 모신다. 효심이 지극하다면 지극하고, 어머니 치마폭에 쩔쩔맨다면 그럴 것이다. 윤후의 내자 될 사람은 뒤웅박에 쌀은커녕 여물이나 담을 팔자겠고.

여하간 특별히 모난 구석은 없었으나 특별히 눈길도 가지 않은 그저 그런 시골 소년이었다. 돈으로 관직을 사면 그만인 시대였으니 저런 애도 양반이 될 수 있기는 하겠다. 가능성이야 글쎄. 저 수더분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희박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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