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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86)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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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에서 한 번도 못 봐서 저런 애가 있는 줄도 몰랐어.”

“냄새나는 빈촌 거지한테 뭘 바라?”

“한데 무당 아들이면, 쟤도 무당인가? 아비는 바람난 백정이라며?”

“아라가 저놈한테 죽고 못 살잖아. 저따위 비실비실한 기생오라비 같은 놈 봐 줄 곳이 어디 있다고. 하여간 계집애들은…….”

시선을 받기 싫었다. 어머니는 나에 관한 티끌만 한 것이라도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길 원치 않았고, 나는 어머니에게 애먼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굉장한 설득이 필요했다. 해서 겨우 온 건데, 몇 번을 생각해도 괜한 짓이었다.

저 남자애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우호적이지 못했다. 빈촌을 향한 무시, 별 볼 일 없는 가난뱅이 주제에 왜 여자애들이 쟤를 챙기냐며 시시때때로 주먹을 흔들다가, 내가 검을 들고 설치니 굼벵이가 재주를 부린다며 사방에서 왁자하게 비웃었다.

소심한 윤후는 마을에서 모두의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줄 용기가 없는 아이였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대장간 아들이 느닷없이 시비를 걸어왔다. 철없는 사내애들을 이끌고 건방을 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였다. 연장을 쥐는 법을 아는 놈이다.

놈이 내 앞에 마주 섰다. 그러더니 제 아비의 야장에서 훔쳐 온 가검을 틈도 주지 않고 무식한 힘으로 검을 내리쳤다. 위에서 아래로 정직하게도 내리꽂는 공격을 비틀어 피하니 처음의 기세를 잃고 당황한 놈이 씩씩대며 돌진했다.

때리면 막고, 옆으로 치고 들어오면 반대로 떨치고. 들이박으면 피하고, 위에서 찍으려 들면 찍기도 전에 급소를 쳤다.

마침내 놈의 칼등이 핑글 공중제비를 돌며 튕겨 나갔을 때. 덩치는 먼지를 일으키며 엎어져 있었다. 구경꾼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펴기도 전이었다.

“와. 쟤가 이겼어?”

“섭이가 진 거야?”

수치로 시뻘개진 눈이 나를 할퀴듯 노려보고 있었다.

“저 새끼, 분명 이상한 수 썼어. 귀신 보는 어미한테 요술을 배워서 나한테 써먹는 거라고!”

사람을 지키는 무녀는 대접을 받고, 그 하위인 무당은 앙알이 하는 천직(賤職) 취급이었다. 저보다 한참은 작은 내게 당했다는 사실을 겪고도 못 믿겼는지 막소리를 지껄인다.

검을 잃은 대장간 망나니가 두툼한 팔로 내 허리를 껴안아 패대기치려 들었다. 날 집어던져 내다 꽂으려는 팔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우리는 함께 흙바닥을 굴러다녔다.

“와아, 싸운다. 싸워!”

“싸워라, 싸워라!”

환호하며 휘파람 부는 애들 사이에서 반죽처럼 놈과 엉켰다. 열일곱을 먹고, 내일모레 혼사니 무어니 말이 나올 나이에, 이성을 떠나보내고 주먹다짐을 했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소문보다 이 새끼를 기필코 때려눕혀야겠다는 일념만 한가득이었다.

“오갈 곳 없는 거지새끼 받아 줬더니 분수도 모르고…… 악!”

“거지새끼한테 시비 걸다 얻어터지는 네 분수는 그리 대단해? 그리 무시하던 백정 아들 털끝도 못 건드는 검은 왜 차고 다녀, 응?”

“이, 악! 내 머리! 안 꺼져? 저리 비…… 아악!”

보다 못한 중년 사내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떨어졌을 땐 나보다 걔의 얼굴이 더 상해 있었다. 심하게 망가져 피멍이 가득했다. 푸른 눈두덩을 비비며 피해자처럼 코를 훌쩍대며 우는 덩치를 보니 더 달려들지 못한 게 한이었다.

“방금 사람 패는 거 봤어? 무섭다 쟤, 백정 아들이란 소문이 사실인가 봐.”

“사생아라면서?”

“쟤 엄마랑 쟤랑 다 버리고 도망친 거라고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수군거리는 소리, 흉보는 시선, 찌르는 아픔.

나는 엎드려 소금을 짜대는 녀석의 발치에 침을 뱉어 주고 돌아섰다. 다시는 이쪽으로 고개도 안 뉘이리라 다짐하면서.

아무도 날 붙잡지 않았다.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짐승 잡는 백정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쓰고 악당처럼 퇴장했다. 지들도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걸 봤으면서도 내게만 바가지로 욕을 던진다.

돌아가는 내내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얻어맞은 자리가 말도 못 하게 아팠으나 걔보단 멀쩡히 걸어갔으니 내가 승자였다. 이겼는데 울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차마 집은 못 가겠다. 어머니가 혀를 깨물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진창 얻어맞은 곳 어머니께 두 번, 세 번 더 맞기밖에 더 할까 싶었다.

노을 진 거리에 한참 바람을 맞고 서 있다가, 부랑자처럼 정처 없이 길목을 헤집고 다녔다. 자각 못 하는 새에 내 발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축제라던데.”

집보다 여기가 편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햇볕을 먹어 따뜻해진 기둥에 만신창이가 된 등을 기대고 있으니 나의 어린 주인이 알은체를 해 왔다. 왜 여기까지 기어 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일이 마지막 제사라고 했던가.”

“예.”

“오늘은 쉰다면서 왔네. 한데 꼴이 왜 그래.”

“밭에서 굴렀습니다.”

“거짓말.”

저 좁은 문구멍으로도 알아챌 만큼 내 상태가 심각한가. 모르는 척했다. 그러다 문득 선득한 느낌에 발목 언저리로 홱 고개를 트니, 그의 긴 팔이 뻗어 나와 내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 부분. 대장간 놈과 엉기다가 발목을 접질렸는지, 발에 채였는지 하여간 무지 아팠다. 피멍 든 줄도 모르고 넝마가 된 발목으로 쏘다녔더니 탱탱 부어 있었다.

“싸웠어요.”

“누구와?”

“대장간 아들.”

“진 모양이야.”

물살처럼 찬 손이 내 발목을 어루만졌다. 나는 주먹을 쥐고 우격다짐하듯 말했다.

“그 녀석한테 졌으면 여길 찾지도 않아요. 억울해서 끝장을 보고 말지.”

도령은 어쩌다 싸웠는지 이유도 경위도 묻지 않고 고생했다는 듯 발목을 토닥였다.

어머니는 나보고 일 키우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했다. 눈에 띄지 말고 수그리며 다니라고, 억울하겠지만 그게 우리에게 남은 삶이라면서 너는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라고 했다.

사지육신 찢겨 죽지 않으면 한생 잘 살다 간 거라고. 네 자식도 끌려가는 꼴 볼 수 있겠냐면서. 그 말을 귀에 징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았다.

그래도 희망을 못 버렸는데, 오늘 그 중년 사내가 무얼 하며 살고 싶냐고 물었을 때, 무녀의 삶을 빼앗기고부터는 거기서도 할 말이 없어지게 되었다. 팔자에도 없는 검을 배우겠답시고 모인 애들도 적어도 제 갈 길은 아는 듯했다. 거기서부터 이미 마음이 삐걱댔다.

나는 아라한에 가서도 팔다 남은 과일 따위를 받아먹으며 일을 하겠고, 양반들의 비위를 맞추며 종으로 살다 종으로 죽을 테지. 무릿매골 아이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 묻히듯이, 역적의 자손인 나는 죽어서까지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하다 도망자로 이 땅에서 버려질 것이었다.

뻔한 결말에 분노보다 슬픔이 찾아왔다. 고작 그따위 걸 꿈이랍시고 떠드냐며 아이들을 비웃었던 중년 사내는, 내가 품은 희망에 똑같이 비웃음을 돌려줄 것이다.

“도령께서는 그리운 사람이 있소?”

“그리운?”

“예.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리워할 얼굴조차 모르는데도 그리운 사람이요.”

그는 내 발목을 제 살처럼 쓸어 만지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

여느 때처럼 속에 든 감정을 후련히 비우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혔다. 목이 막혀 목소리까지 쪼그라들었다.

도령은 벽에 꼭 붙어 앉아 몸을 떠는 나를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노랫소리가 들렸는데, 그 별것 아닌 가락에 몸보다 얻어맞은 마음이 익은 복숭아처럼 물렁해졌다. 별생각 없이 발목을 도닥이는 도령의 손길마저 한도 없이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나는 따스한 볕을 이불 삼아, 어린 주인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시 눈을 붙였다. 도령은 곤한 나를 깨우지 않았다.

자는 동안 꿈을 꾸었다. 본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 그럼에도 그리움을 자아내는 얼굴들 사이에서 나도, 어머니도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산 것이라서 이대로 영영 꿈속에 머무르길 바랄 정도였다.

아버지와 인사를 했다. 상상에서 그려 보던 오라버니와 꽃이 핀 들판을 누볐다. 어머니는 내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그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더없이 행복한…….

‘한데 저건 뭐지?’

허공에서 음산한 것이 나풀거린다.

또다, 신병을 앓았을 때 본 새빨간 실타래 같은 것. 잠시 몸이 아팠다고 또 헛것을 보는 건가.

들판의 끝에는, 아까 전에는 없던 도령의 전각이 우두커니 자리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모두 사라지고, 검은 형상들이 전각 주변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시끄러워……. 뭐라는 거야.’

점점 커지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귀 아닌 머리를 쇠 날처럼 관통하는 형체 없는 울림이었다. 그 끔찍한 비명 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호해져 갈 때 즈음,

끼이익―

열린 문틈으로 시퍼런 눈알이 드러났다. 무섭도록 제자리에 서, 나를 갉아 먹을 듯 응시하는 눈은 싸늘한 악의를 담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

누군가 옷깃을 세차게 흔드는 통에 번뜩 눈이 뜨였다.

기억이 신통찮은 꿈을 꾸고 일어나니 이마가 땀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해가 보였는데. 캄캄해진 사위에 놀라 비틀대며 댓돌을 밟고 뛰어내렸다. 그러다가 허벅지까지 내려간 이불보를 발견하고 그것을 조심히 주워 들었다.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는데.”

“하면 웅크리고 식은땀 흘리면서 벌벌 떠는 걸 그냥 둘까? 가, 얼른.”

“한데요, 도령. 혹시 이 방에서 뭐 이상한 것 본 적 없으신지요?”

잘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그 검은 안개 같은 것들이 도령의 방 근처를 빌빌거리며 돌아다니는데, 보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여긴 나 말고 아무도 없어.”

그럼 역시 개꿈이었나.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한기가 들러붙었다. 이러다 또 몸이 축나고 어머니께 한 소리 들을까 무서웠다. 신을 온전히 꿰어 신지도 못하고 바삐 집까지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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