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왜 그랬냐니.”
“묻는 그대로입니다.”
예전이라면 도령의 정신이 달나라에서 춤을 추던, 신발 장수 딸까지 씹어 먹는 안줏거리가 되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다. 한데 이제 와 의뭉스러운 행동의 연유가 궁금해진 것이다.
“도령은 어째서 매병 환자 행세를 하는 거요?”
“행세.”
“하면 아닙니까?”
“사람들이 말 안 하던? 대감보고 사람 구실 못하고 밥만 축내는 자식새끼 산에 버려 두지 뭣 하러 끼고 사냐고. 가문을 이을 수도, 떳떳이 장가를 갈 수도, 세도가의 데릴사위로 밀어 넣을 패도 못 되는데.”
그는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은 냉한 어투로 이죽거렸다.
“너도 처음엔 나를 그리 여겼지 않아.”
까만 눈은 북해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간담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웃음을 낮게 흘렸다.
“아닙니다.”
“맞아.”
“도령이 그리 숨어 계시니 다들 오해를 하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매병 환자 행세를 하면서까지 바깥으로 나오질 않는 겁니까?”
말 없는 침묵에서 긍정이 읽혔다. 문구멍 틈새로 그림처럼 박힌 정적인 눈동자가 내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재고,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사실을 토해 낼지 말지, 그런 것들일까.
벽이 세워진 거리는 여전했다. 도령의 기척이 전보다 가까워진 걸 감지한 순간 내 입이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제게 얼굴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뺨을 세게 맞았다고 하니, 그 말이 사실이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부풀어 있을 것이고. 아라의 말을 확인하고 싶어서 얼굴을 내보여 달라고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도령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쌀쌀맞게 문구멍을 덮어 버렸다. 도로 껍질을 두른 게가 되어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문전박대당한 나는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도령과 나눠 먹으려고 가져온 것들을 그대로 싸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 뒤로 우리 사이가 약간 서먹해졌는데, 누가 먼저 앵돌아지고 말고의 좀스런 문제라기보다는 시기가 공교로웠다.
한창 바쁜 여름철. 나는 아침 내도록 논에서 살다 녹초가 되어 등 떠밀리듯 도령에게 갔다. 날마다 쏟아지는, 보수도 변변찮은 일감에 신물이 났고, 날은 빌어먹게 덥고, 자정까지 어머니 옆에서 졸며 삯바느질을 하다 기절하면 어김없이 또 고된 하루가 일감을 한 아름 안고 나를 기다렸다.
몸과 마음이 닳아서인가. 뭘 해도 의욕이 없고, 입맛이 뚝 떨어진 참이었다.
도령은 불퉁한 내 모습을 저 때문으로 오해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문 앞에 방치된 약을 노려보다가, 약만 놓고 터덜터덜 돌아서려는 내 뒤꿈치를 붙잡았다.
“내가 네 청을 들어주지 않아서 그래?”
“또 무얼 말입니까?”
“그때. 얼굴을 보여 달라며 추궁했잖아.”
“언제 추궁을 했다고…….”
“그럼 왜 전처럼 입을 놀리지 않지.”
말 한마디 없는 내 옆에서 도령은 덩달아 조가비가 되었다. 한동안은 그러고 버티는가 싶더니, 지루함에 패배했는지 낯을 바꾸고 물었다.
“묻잖아. 왜 조잘거리질 않느냐고.”
“…….”
“역시 난 병자라 네 다른 벗들과 노는 게 좋겠지.”
그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차가운 목소리로 열거했다. 나는 그러건 말건 묵묵히 내 할 일만 했다.
그 후 도령은 나를 하루 종일 지켜보는 게 엄중한 일인마냥 굴었다. 나는 무지근한 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약을 달이고, 도령은 그런 나를 엎드려 구경하고. 서늘한 눈이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내가 아예 방향을 돌려 앉으니,
“왜 내 얼굴이 궁금한데?”
이제는 돌아선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별걸 다 이유를 묻는다. 불덩이 앞에서 한 시진을 죽치니 땀이 나고 신경질이 솟았다.
새콤한 포도 향을 맡고 달려든 날파리는 내 콧잔등에 알이라도 깔 기세로 붙어 댔다. 달큰한 냄새의 출처는 오전 내내 포도밭에서 뒹굴다 온 내 몸뚱어리였다.
수고비로 포도 다섯 송이를 얻었으나 썩 기껍진 않았다. 오자마자 도령에게 한 송이 먹으라고 통으로 줘 버린 참이었다.
“왜긴 왜요. 그때 도령이 대감과 다투었다는 소식을 듣고 혹 상처가 난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보려 한 것이지.”
나는 거칠게 손부채질을 하며 뇌까렸다. 파리를 잡으려다가 스스로 뺨만 갈긴 꼴이었다. 분노가 이글이글 끓었다. 정신 사납게 날아다니는 저 파리를 모조리 태워 버릴 생각으로 불붙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다 지쳐서 도로 주저앉았다.
“걱정?”
“예.”
숨을 한 토막 뱉고 그가 되물었다.
“나를 걱정했다고.”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 이러다 모시는 주인 낯바대기 한번 구경 못 하고 떠나려나 싶어서.”
지친 나는 관자놀이에 콕콕 박혀 오는 시선도 죄다 흘려 넘기고 힘없이 불만 쏘삭였다.
무릿매골을 떠날 날을 착잡한 마음으로 기다린 건 언제고, 벌써부터 질려 버린 여름이 어서 지나가면 좋겠다는 생각만 넘쳐났다. 쌓인 일감을 해치우느라 잠을 못 잤더니 졸음까지 때맞추어 몰려왔다.
“흐응.”
저놈도 불볕더위에 미쳐 가는 게 틀림없다. 도령은 말린 복어처럼 쭈그려 앉은 날 보며 이상한 소리로 웃고 있었다.
“포도 먹어.”
무릎을 쭈그리고 앉은 내 꼴이 퍽 가련해 보였나 보다. 도령의 말씨가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얼핏 다정하게 들리기까지 하였으니.
나는 됐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뺨을 무릎 위에 짓누르고 반쯤 감긴 눈에 힘을 주었다. 자면 약이 졸아붙고 말 터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끓여야겠지…….
끊어진 이성이 돌아온 것은 바닥에 깔린 노을이 발목을 타 넘을 무렵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일어났다. 아주 편하게 엎드려 잔 모양인지 묵은 피로가 사라지고 개운하기까지 했다.
맑아진 정신처럼 약도 맑게 우려졌으면 좋으련만. 잔뜩 졸아붙을 것을 예상하고 불 쪽으로 허둥대며 시선을 돌렸으나 웬걸 탕기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여름이지만 해가 떨어져 제법 쌀쌀할 텐데 추위도 못 느끼고 달게 잔 이유가 있었다. 작게 줄여진 불꽃. 텅 빈 사기그릇. 그 모든 정황을 물끄러미 보다 도령의 방문 앞을 찾아갔다.
“도령.”
큰 소리로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머리를 두드리고 간 생각이 망상이라고 비웃는 것처럼 도령은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 * *
“버들아, 여기!”
열흘이 훌쩍 지나 벌써 1년에 한 번뿐인 소루강 제삿날이었다.
볼 것 없는 시골 마을에서 기리는 몇 없는 의미 있는 날이라 이웃 마을에서도 구경꾼이 떼지어 몰려왔다. 사흘간 제사가 이어지는 동안 방문객들을 위해 여러 볼거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내가 관심 있는 건 시시한 바람개비나 해묵은 종이 연극 따위가 아니었다.
“얼른. 늦겠어.”
윤후가 멀리서 낡아빠진 목검을 쥐고 흔들어 댔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너른 공터까지 뛰었다. 거기엔 나처럼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코흘리개들 열댓 명과 스승을 자처한 중년 사내가 성가신 표정으로 연죽을 물고 서 있었다.
남장한 나를 제외하고 열에 아홉은 사내애들이었다. 그 애들은 무딘 목검을 하나씩 받고 짚을 꼬아 만든 인형 앞에 서서 대단한 무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뽐내듯 검을 찌르고 베었다. 어설픈 동작들이 눈에 보이는데도 사내는 고쳐 줄 정성이 없었다.
“어차피 호미나 휘두르다 죽을 놈들이 무슨 검을 배우겠다고.”
괜히 왔나. 나는 어수선한 풍경에서 홀로 어정쩡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거야?”
“미안, 버들아. 분명 훌륭한 무사라고 하셨는데.”
“그건 나도 들었어.”
다들 장난치기 바쁘고, 나와 윤후만 열심이었다.
“네들 뭐가 되고 싶으냐.”
팔짱 낀 중년 사내가 대뜸 물었다.
“가업을 물려받아야죠.”
“소달구지 끄는 것 말고 더 있답니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인가 싶어 나와 윤후도 하던 짓을 멈추고 저 게으른 입에서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지켜보았다. 사내애 중 몇은 좋아하는 여자애 이름을 대며 걔랑 혼인하는 게 꿈이라고 수줍게 웃는 애들도 있었다.
“하루만 말을 타고 가도 해상 무역이 발달한 마을이 있는데. 수도에서 한 자락 하는 거부가 되고 싶다든가, 뛰어난 무사가 되겠다든가. 뭐 그런 거 없어? 어째 다 시답잖은 꿈이야.”
“시골 촌민 주제에 뭘 바라요?”
“이 마을에 눌러사는 게 운명인걸요.”
“나는 난희랑 혼인할 수만 있으면 여기서 평생을 썩어도 돼.”
검을 배우려고 왔으면서 도통 열의는 없는 그들의 태도가 뒤늦게 이해 갔다. 배워 봤자 먹고 사는 데에 쓸모가 없는 거다. 농사나 짓고 도기나 굴릴 운명인 이들에게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없겠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그들은 귀 따갑게 왁자지껄 웃기 바빴다. 그 나이 사내아이다운 우악스러움과 단순함이었다.
분수. 내 귀에서는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어서서 볏짚을 흠씬 두들겨 패는 사람은 나뿐이고, 중년 사내는 나를 별종 보듯 돌아보았다.
“재는 뭔데 저렇게 열심이야?”
“어차피 제 어미처럼 무릿매골에서 잡일이나 하며 품삯 벌어먹고 사는 주제에.”
그 수군거림에 나는 떠밀리듯 검을 내려놓았다. 윤후가 다른 사내애들 모인 곳으로 가 엉거주춤 앉을 때까지도 내게 붙은 시선이며 귀엣말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쟤 누구지?”
“왜, 빈촌에 사는 애잖아. 1년 전에 무릿매골로 이사 온 무당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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