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버들아, 고생 많았다.”
“별말씀을요.”
집으로 오는 길에 이웃집 일을 도왔다. 아들이 발목을 다쳤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다며 내 저고리를 잡아당긴 금씨 아주머니 댁이었다.
말이 잠깐이지, 어찌나 일을 많이 시키던지 내 옷은 흙먼지투성이고 허리는 호미 옆에 두면 딱이었다.
“내가 딸만 있었어도 우리 버들이를 사위 삼아서…….”
또 그놈의 사위 얘기. 사위 삼아 실컷 부려 먹었겠지.
아낙의 함박웃음이 내가 일군 밭뙈기만치 기름졌다. 그 미소는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조만간 지붕에 새 이엉을 올리려 하는데, 그때도 야무진 손 좀 빌려주어.”
수고비는 역시나 떨이로 남은 사과 두 알이었다. 무보수로 일할 때보단 사정이 나아진 건가. 아니, 이걸 나아졌다 할 수나 있나?
씁쓸해하며 담장을 돌아가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술병을 들고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게 보였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발목이 부었다던 아낙의 아들이 강건한 두 다리를 휘적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제 발 저린 도둑마냥 후다닥 길을 꺾었다. 그리고 꽁지에 불을 달고 달려가 버렸다. 아주 그 어미에 그 아들이지. 입 안에 감기는 과일의 단맛이 아주 뚝 떨어지는 저녁이었다.
사실은 나나 어머니나 여전히 마을에서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쯤은 눈치껏 알고 있었는데.
먹던 사과를 바닥에 내버리고 주머니에 고이 모셔 둔 나머지 한 알도 발로 으깨고 나서야 화가 좀 가라앉았다. 도망가는 비열한 뒤통수에 던져 주지 못한 게 한이었다.
* * *
“왜 한숨이야?”
푹푹 꺼뜨리는 숨이 거슬렸는지 도령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말해 뭣 합니까. 해결하지도 못하는 거.”
“지금 뭐 하는 건데.”
어김없이 기씨 댁에 발 도장을 찍었다. 나는 도령의 옆에서 시간을 죽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는데, 바로 바느질이었다. 도령은 내 한숨은 싫어했으나 별것도 아닌 바느질에는 관심을 보였다.
“범씨 아주머니 일을 돕는 겁니다.”
“품삯 받으며 살아?”
“부잣집 도령은 이해 못 하시겠지만, 대부분 촌민들 삶이 이렇습니다.”
특히 나처럼 빈촌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고야 말해 무엇할까.
이런 시골 마을에도 신분의 격차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같은 평민들 사이에서도 빈촌이냐, 마을 중심에 사느냐 따위로 품위와 계급이 갈렸는데, 나와 어머니는 빈촌 사람으로 명백한 하층민이었다.
“얼마를 받는데.”
“그냥 해 주는 겁니다.”
“대가도 아니 받고?”
“먹을 걸 받았어요.”
말하는데 수치심이 몰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의 생활상을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받아먹으며 산다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한데 막상 내 입으로 찬거리 구걸하며 근근이 먹고 산다고 실토하니 귀가 뜨거워졌다.
키들키들. 예의 정신 나간 웃음이 귀를 쑤셨다. 나는 분한 눈길을 어둠 속의 도령에게 틀었다. 속을 뚫는 그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굽이치고 있었다.
“참고 사는구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어미의 말씨가 여기 토착민들과 아주 다르던데.”
“해서요.”
“다른 고장 출신이지? 해서 무릿매골에 섞이지 못하는 거고.”
“…….”
“고향은 남부의 희백산 근처인가.”
“무슨 소리를…….”
나는 억지 미소를 걸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듯 보여도 가끔 오싹할 정도로 예리한 사내였다. 억양만으로 외지에서 온 우리네 처지를 꿰뚫는 것도 모자라 고향까지 간파하다니.
미친 사람치고 확실히 명민한 구석이 있었다. 혹은 미쳤기에 다른 이들은 듣고 보지 못하는 걸 귀신같이 잡아챈다던가.
도령이 말한 희백산 언저리엔 세 개의 마을이 있다. 개 중 하나는 요귀의 습격에 쓸려 나갔으니 남은 건 풍림과 소리굴뿐. 해서 도령이 희백 운운했을 때 까무러칠 뻔하였다.
“그러는 도령은 답답하게 안에 계시지만 말고 마당이라도 거니시는 게 어떠한지.”
나는 화제를 전환하고 그에게 새로운 간식을 내어 주었다. 그는 얌전히 내가 준비한 설탕에 절인 과일을 집어 먹었다.
간간이 인사 나오는 손등은 햇빛에 타지 않아 보얗고, 손마디는 사내답게 길쭉하고 단단하였다. 껍질에 발라진 설탕을 바작바작 씹는 소리도 들려온다. 오늘따라 고분고분. 매일이 이렇다면 오죽 좋을까.
나는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구경하며 향긋한 봄의 끝자락을 깊이 들이마셨다. 1년 전. 무릿매골 이장에게 처음 인사하였을 때도 오늘처럼 쌉싸름한 늦봄이었다.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우리 모녀에게 기씨 댁으로 가 보라고 추천해 준 것도 그 영감이었다.
눈칫밥 먹으며 참고 살았던 시간도 딱 그만큼이던가. 아니, 평생을 남 눈치를 보며 살았었지. 도령이 불쑥 찌른 구석이 따끔했다.
나는 과일 씹히는 소리를 들으며 과거 대신 미래를 짚어 보았다. 나는 무릿매골을 곧 떠나고, 저이는…….
“도령.”
생각해 보니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과일은 어떤 걸 좋아하십니까? 저는 산딸기를 참 좋아하는데.”
“달라고?”
“하면 주시게요?”
“내가 왜.”
얄밉게 이죽대는 저 사내가 받아 둔 반년의 생을 곰곰이 셈했다. 저 애는 제 운명을 알까. 모르니 저리 속 잃고 웃는 거겠지.
그렇다면 아들을 한 번도 찾지 않는 기씨 대감은 알고 있을까. 역시 모르니 아들을 찾지 않는 것일 터였다.
도령은 저 좋은 것만 먹고 과일 그릇을 치웠다. 그날, 수북하게 남은 산딸기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 * *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도령은 근래에 불만 없이 식후 약을 받아먹었다. 날이 더워지니 짜증도 지친 모양이다. 하지만 또 언제 비뚤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은 오수에 든 모양이신지, 문 너머로 색색 곤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늘 치 탕약을 마루에 내려놓고 녀석이 깨기만을 기다렸다. 양갓집 공자를 아랫것이 소리쳐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인내의 미덕을 발휘할 때였다.
무얼 하며 시간을 내버릴까.
품 안에 항상 차고 다니던 목검이 손에 잡혔다. 홍씨 가문은 대대로 파마(破魔)의 보검이 전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진검은 무리라고 어머니가 손도 못 대게 하셨다.
나는 잠든 도령과 넓은 안마당을 번갈아 훑었다. 나를 보는 이도, 찾을 이도 없는 전각 마당에서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팔뚝만 한 검날을 타고 은은히 흐르는 빛줄기가 눈꺼풀을 찔렀다.
나는 뭉툭한 검 손잡이를 만지작대다가 일직선으로 내뻗은 검을 곡예 하듯 사선으로 그었다.
후우웅.
어머니는 내게 검을 배우라 명령했으나 호신에 그칠 뿐, 홍운영의 검무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 그딴 걸 배울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보름밤마다 달빛을 벗 삼아 검무를 추는 것을 여러 해 동안 지켜보았다. 한이 넘쳐흘러 내 옷깃까지 적시는 가무를 어찌 외면할까.
한때는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에게 검무는, 딸자식에게 전수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깊은 한과 노여움의 결정(結晶)이었다.
나는 어머니 몰래 훔쳐본 검의 궤적을 따라 했다. 칼끝으로 해를 찌르고, 나비처럼 휘돌아 사뿐히 땅에 착지했다. 너른 검의 면적으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갈랐다.
홍운영의 칼춤은 절도가 있었다. 군더더기 없되 화려함을 갖추었다. 나는 홍운영을 좋아하지 않으나 그녀가 혼을 쏟아 탄생시킨 검무만은 사랑했다. 경외고 자긍심이었다. 어머니가 들으면 대대손손 가시밭길이나 뿌려 놓은 조상에게 경외는 얼어 죽을, 하며 코웃음 치겠지만.
후두둑.
모래 바닥에 짙은 물 자국이 떨어졌다. 한동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몰두하던 나는 벌겋게 익은 뺨에서 땀을 훔쳐 내며 지친 검을 축 늘어뜨렸다. 어째 뒤통수가 싸했다.
문구멍 틈으로 서늘한 눈이 비쳤다. 도령은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지. 긴 속눈썹을 매단 눈이 기다렸다는 듯 어여쁘게 반달 진다. 소리도 기척도 없고, 참말 귀신같은 사내였다.
“일어났으면 말을 하시지 입 두었다 뭘 하신답니까. 다시 약 데워 올 테니 기다리세요.”
“아니.”
그는 턱을 팔에 괴고 나른히 엎드렸다. 지금껏 본 어떤 것보다 흥이 동한 얼굴로 오만하게 턱짓을 했다.
“더 해 봐.”
“무얼. 칼춤을요?”
“응.”
무엇에도 관심 갖지 않던 도령이 처음으로 내어 준 한 자락 흥미에 나는 갈등했다. 봉마술로 무예를 곁들이는 일가는 많으니 검무가 풍림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이 아주 근질근질했다. 홀로 몇 해를 성실히 수련한 무예를 뽐내고 싶은 마음이 저를 알아 달라며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고민 끝에 주저하며 중얼거렸다.
“하면 도령께서 곡조를 타 주시렵니까. 본디 검무는 노랫가락을 더해야 완성되는 법이니까요.”
만약 저 이의 정신이 온전했다면 즉답으로 거절할 수 있을 터다. 한데 어째서인지 얼굴 없는 미치광이 도령 앞에서만큼은 잠깐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도령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원앙도 짝을 잊고 돌아설 만치 유들거리는 목소리로 곡을 뽑기 시작했다. 무어라고 해야 할까. 벽을 허무는 재주가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홀린 듯 발을 움직였다. 모래바람을 가르는 칼춤을 도령은 집요하게 좇았다. 송곳 같은 시선은 간혹 내 눈코입, 뺨을 타고 미끄러지기도 하다가, 무엇에 자극당했는지 종종 가락을 잃기도 했다.
허공에 뚝 끊어진 노랫말은 한참 뒤에 느릿느릿 따라붙었다. 하필이면 듣는 이의 억장을 뭉그러뜨리는 한 맺힌 노래라니.
도령은 타고난 예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래 솜씨가 남달랐다. 오랜 칩거 생활 탓에 세속을 모르는 목소리는 투명한 개울 같았고, 때가 타지 않아 순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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