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Sloth (Bless You, Shara) - 3
“......뭔, 시발 지랄같은 소리야?”
“말 그대로야. 지금 부산은 육상로를 이용해서는 진입이 불가능해. 벽으로 막아놨거든.”
“벽? 그딴거 넘으면 그만이지. 아니면 부숴버리거나.”
“그럼 가서 해볼래? 높이 30m에 두께 3m의 벽인데 단순히 콘크리트만 부운게 아닌 벙커에서 쓰는 재질도 몇 종류 가져다가 사용했거든. 수류탄 몇 개 정도는 빌려줄 수 있어.”
“애초에 부산에 그딴게 왜 있는건데? 미친 정부놈들이 세워놓은거야? 뉴스에서도 못 봤던 소식이야.”
“그럴만하지. 언론통제는 물론이고 인력과 돈도 엄청 쏟아부어서 만든 벽이니까. 참고로 건설에 강제로 참여했던 몇몇 주요 인물들도 살해당했어. 엄청난 벽이지?”
“누가......그런......”
처음으로 사라가 입을 열었다.
“신뢰가 안가. 그 벽이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건데? 기념사진이라도 찍은거 있으면 보여주던가.”
“사진도 금지였지만 장담할 수 있어. 내가 거기 1차 관리자였거든.”
“관리자?”
세상이 변하면서 괴물만 변한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벽이 세워졌다는 것에 참 ‘좆같은 세상이구나’를 다시 느꼈다. 관리자가 뭘 하던 역할인지는 몰라도 지금 선배는 그곳에서 머무르다 왔다는 소리였다. 충분히 지인으로서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선배쪽에서는 거래를 하려는 것인데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안을 둘러보았고 범백팀이 어떤 목적으로 마트에 왔는지, 목포라는 도시에 어떤 약탈자들이 있는지 파악을 끝내둔 상태였다.
“자기가 증인이라는 거네. 하지만 그거 선배 혼자면 의미 없는거 알지?”
“확실한 증거를 보여달라는 거야? 거짓말 아닌데.”
“그건 모르지. 지금 선배쪽 상황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니까.”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는지 당황한 표정을 했다. 그러다 곧 다시 말을 꺼냈다. 벽에 대한 얘기를 포기하고 다른 것을 내게 제시한 것이다. 옥상으로 바람쐬러 온다는 인간이 실은 나와의 거래를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쪽에는 배가 있어. 차도 충분히 싣고 이동할 수 있는 배야.”
“호오. 그건 좀 흥미 있는데.”
확실히 배가 있으면 편했다. 부산도 항구가 많고 어디든 들어가서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라라면 크립톤의 위험도 피할 수 있었다. 그놈들이 육상에서 지랄인거지 바다에서 지랄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우리에게 있어 꽤나 큰 카드였다.
“그럼 내게서 얻어가려는 건 뭔데?”
“......역시 눈치채고 있었어?”
“부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견적 나오잖아. 왜 그래? 찌질이같이.”
“하하하! 역시 이거 안되겠네. 일단 배는 너희한테 좋은 소식이 맞는거지?”
“원래는 그것도 말해주면 안되지만 선배니까 특별 서비스 해줄게. 맞아, 우리한테는 무척이나 좋은 소식이지. 막힌 고속도로들을 뱅뱅 돌며 갈 필요도 없고 크립톤의 위험에서도 벗어나는 거니까.”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라고 생각안하네?”
“이미 여기에도 배 2척이 보이는 데다가 금방 들통난 거짓말을 할 정도로 선배는 멍청하지 않잖아.”
“고평가야?”
“저평가야.”
다 태운 담배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바라던 것을 내비췄다.
“너라는 전력이 필요해, 엔. 구체적으로는 현재 목포에 상주해 생존자들을 약탈 및 납치를 행하는 반란군 토벌과 바다에 정체불명의 배가 떠 있는데 그 배를 수색해줬으면 해.”
“반란군이면 그 노란자켓 새끼들을 말하는 거겠지?”
“노란색 자켓으로 아군을 구별하는 놈들이지. 다수의 건달, 조폭, 동화된 생존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지만 우리에 비해 숫자가 많아. 그나마 다행인 소식은 오늘 습격 예정이었던 마트를 네가 정리해 줬다는 거지. 거기다 부두목인 ‘우성’까지 처리해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어.”
“그딴 새끼가 부두목이라고? 장난해? 선배 혼자 쳐들어가도 처리할 수 있는 잔챙이 새끼들이었는데 겨우 그런 병신들한테 애를 먹어?”
“말했잖아. 숫자가 많다고.”
“오늘 내가 처리한 놈들이 40명은 족히 넘어.”
“그게 반란군 총 전력의 20분의 1이야, 엔.”
“......시발. 바퀴벌레 새끼들인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나름 근거지를 습격한 거였고 그곳에 40명쯤 있었으니까 은신처랑 다 해서 150명 정도로 예상했었다. 그 새끼한테 얻은 정보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단 알겠고, 배는 뭐야?”
“아직 우리도 많이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크레이터’라는 곳에서 만든 배인데.”
“크레이터? 또 그 새끼들인가.”
“뭐야? 이미 엮인 적이 있었어?”
“직접은 아냐. 송혜가 있던 섹터, 그곳에서 여우의 형태를 했던 크립톤을 상대했었는데 그걸 그 놈들이 만들었다고 들었어. 송혜가. 거기다 도시에서 만났던 환각 보여주던 놈, 그것도 그 놈들이 만들었다 하더라고. 이건 재혁이가.”
“이야, 제대로 얽혀있었네. 아까 얘기에는 없었잖아.”
“딱히 관련 있어보이지는 않아서. 애초에 나한테는 그저 지나가는 놈들이었다고.”
“이제는 아닐걸? 지금 부산 상황은 나도 모르지만 앞서 말했던 벽 있지? 그 자원 후원목록에 크레이터가 있었어.”
“크립톤을 만든것도 모자라서 벽까지 세웠다고? 뭐하는 놈들이야 대체.”
“너도 그 쪽 의심하고 있었어?”
“심증뿐이라고 했어. 역시 송혜가.”
여러모로 계속 엮이는 느낌이었다. 분명 나랑은 1도 관련이 없는 곳인데 왜 자꾸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지, 관계자를 만나면 총알이라고 한 발씩 박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어서 말해봐. 배쪽은 어떻게 해달라는 건데?”
“배 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있어. 그 괴물을 처리하고 안쪽에 있는 문서나 정보들을 빼와줬으면 해.”
“......아예 군인으로 복귀하라고 하지 그래? 배 한 척 빌려주는데 2배로 받아쳐먹는거 아냐?”
“우리도 없는 기름 쏟아서 데려다 주는 거야. 물론 작전에 대한 지원들은 필히 해줄거고.”
솔직히 말해 조금 비싸게 받아먹기는 했지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작전 몇 개만 뛰어주고 이후 안전이 보장된 이동수단으로 단번에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도로를 달리며 고생했던 것들을 떠올리면 이쪽이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아직 의견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옆에 있던 사라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할래? 사라. 나와 선배의 대화이기는 했지만 너도 충분히 이해했을 거라고 보는데.”
“......나는, 그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애초에 나도 물어보기는 했어도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조심히 물어본 것이다. 선배는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작게, 훈련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반란군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괴물, 많이 위험한가요?”
“내버려두면 언제 이곳을 덮쳐올지 모르는 위험이긴 해요. 사라씨, 그래서 엔이라는 귀중한 전력을 빌리고 싶습니다.”
“엔이 다치면요?”
“걱정마세요. 저희도 충분히 지원을 할 거고 무엇보다 엔이니까 가능한 작전들입니다. 그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저는......”
옷자락을 잡는 힘이 강해져 있었다. 그녀는 이미 어두운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모르겠어요.”
그 한마디로 결정권을 다시 내게로 넘겨버렸다. 때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전까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만 들으면 내게 고집스럽게 부탁해왔던 모습이 사라져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코에의 죽음이 크게 다가온 걸지도 모른다.
다시 결정권이 내게로 넘어오게 되었다. 머리로 많은 손익을 따졌다. 선배가 말하는 작전은 지원이 있다는 가정하에서는 별반 어렵지 않았다. 당장 지원 없이도 근거지 하나를 몰살시켰으니까 하나씩 처리해나가다 보면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배 쪽이 변수였다.
괴물은 있다고 하는데 선배쪽도 크게 정보는 없어보였다. 미지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래봐야 ‘시드’나 불을 뿜어내던 멧돼지 괴물, 아빠새끼만큼이나 좆같겠냐만은 정보가 없는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위험한 행동은 없으니까. 다만 보상이 끌리다보니 저울질을 하게 된 것이다. 배쪽을 빼달라고 협상을 해볼수도 있겠지만 선배쪽 상황도 간절해보였다. 이미 갑과 을은 완전히 나눠져 있었다. 별 수 없나. 아무래도 처음부터 내 선택은 정해져 있었나 보다.
“좋아. 반란군들을 처리랑 배 쪽의 괴물 처리 및 문서와 자료 회수. 내가 해주는 작전들을 여기까지야. 그 외의 범주는 하지 않을거야.”
“거래 성립이네. 오히려 환영이야, 엔.”
“당연히 머물 곳은 준비했겠지? 하루만에 끝날리가 없으니까.”
“원래라면 너와 사라씨가 분리되어 생활해야 하지만 넌 손님이고 병사보다는 용병에 가까우니까 난민구역 중에 텐트 하나를 준비하도록 할게.”
“밥도.”
“당연하지. 참고로 우리 부대는 도심으로 내려온 동물을 사냥하거나 목축을 해서 일부 해결하고 있으니까 고기는 충분히 대접해 줄게.”
“호오. 오늘도 포함해서 매일?”
“당연히 매일.”
성사되었다. 그 의미로 간단히 악수를 했다. 선배와 함께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역시 차를 한 잔씩 더 내주었고 비스킷을 몇 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직 해줄 말이 더 있다고 한다.
“작전은 엄연히 군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야. 그러니 너한테도 임시로나마 계급을 부여할게. 어디, 복귀가 맞을라나? 노중위.”
“엔이라고 불러.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로.”
“알겠어. 계급은 중위지만 실질적으로는 내 대리인 직책을 줄게. 뿐만 아니라 우리 부대의 정예인 범백팀의 팀장으로 임명하겠어.”
“어떻게 굴리든 상관없는거지?”
“그건 상관없지만 되도록이면 생환을 우선적으로 해줘.”
“노력은 해볼게. 자신없지만.”
“3명은 돌아왔고 나머지 2명은 복귀하지 않았으니까 소개는 내일로 미루고......아, 그리고 중요한 거 하나.”
“뭔데?”
“난민구역에서 만큼은 사고없이 지내줘. 외부의 적 때문에 민감한데 내부의 적까지 생기면 곤란해.”
“모르는 새끼들이 시비만 걸지 않으면 얼마든지. 텐트나 안내해줘.”
“아, 잠시만.”
선배는 비스킷을 입에 문 채로 뒤에 있던 통신기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방을 준비해달라는 말과 함께 안내도 해줘야 하니 이쪽으로 와달라고 했다.
“말해뒀어. 곧 안내자가 올거야. 너도 아는 사람일거니까 편하게 대할 수 있겠지.”
“아는 사람?”
한 둘이 아니라서 머리에 떠오르는 이들이 너무 많은데. 알고 친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 잊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봐야 했다. 나는 뒤늦게서라도 떠오른 질문을 선배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까 잠깐 잊었는데, 여기 크립톤 상황은 어때?”
“크립톤이라. 안심할 수 있기는 해. 도심쪽은 반란군들이 매일 대치하고 있는데 적절히 대처해서인지 딱히 피해도 없고 우리는 뭐, 한결 낫달까. 보시다시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섬 중 하나인데다가 삼면이 바다라서 정문쪽만 잘 막으면 쉽게 막을 수 있어. 애초에 잘 나타나지도 않지만.”
최소한 다른 섹터들보다는 안전하다는 소리였다. 이후 우리는 잠시 옛날얘기 몇 개를 또다른 디저트로 삼아 나누었다. 대부분 군에 있었을 때의 얘기였고 사라는 재미를 느끼지 못할 만한 얘기들 뿐이었다. 그게 끝나갈 때쯤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우리를 데리러 온다는 안내인 이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선배 다음으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을까, 안내인이라고 했던 사람, 그녀는.
“오랜만이네, 엔. 2년만인가. 거기다 많이 변했네.”
“시, 시발. 언니가 왜 여깄어?”
아빠새끼한테서 벗어나 여기저기 몸팔면서 생활을 지냈던 내게, 삼촌의 개입이 있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낼 곳을 주었고 PC방겸, 노래방겸, 모텔겸, 빡촌을 운영하며 내게 청부살인 일을 맡겼던 여자, 그 언니였으니까.
“옆에 여자애는 누구니?”
곧바로 사라에게 관심을 보이는 장사꾼 언니였다.
“당신이 사라 리즈......예쁜 이름에 예쁜 아이네. 내 장사가 멀쩡했다면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을거야. 안 그래? 엔.”
“좆까. 언니라도 얘 건들면 쏴버릴 수도 있어.”
“더 거칠어졌네. 농담도 못해.”
“할 농담을 해야지.”
우리는 언니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선배는 할 일이 있다면서 밤에 어울려 주겠다고 했고 오후 시간대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쉬기로 했다. 언니는 우리를 이끌고 아마 편히 지낼 수 있을거라며 난민구역을 가로지르며 한 텐트를 소개해주었는데 정확히는 폐건물 안에 있는 초록색의 텐트였다. 바로 앞에 램프 하나와 화장실 대용인지 칸막이가 쳐져 있는 좁은 공간이 보였다.
“여기서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날 찾도록 하고.”
“필요한 건 됐고 언니가 왜 여기있는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서울이 ‘사건’에게 당하고 여자저차 해서 여기에 정착하게 됐어. 벌써 반년도 넘었는걸.”
“무슨 이유로?”
“난민구역 관리자로. 이래봬도 맡은 직책은 다하고 있단다.”
“시발, 오늘 들었던 말 중에 제일 개같은 말이었어. 나도 똑같이 짖어줄까?”
“그런면에서는 여전하구나?”
“소개 끝났으면 나가.”
“오랜만에 봤는데 매정하네. 이 구역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나봐?”
“잠만 잘 수 있으면 됐어. 그리고 언니가 있으면 사라만 더 위험해질 뿐이야.”
“그쪽 업계라면 손 땠어. 여기서까지 그럴 이유는 없잖아.”
“설령 그렇더라고 마찬가지야. 저리 가버려.”
“그럼 나도 일이 있긴 하니까. 대신에 다른 이를 보내줄게. 우선 쉬어.”
그렇게 언니를 보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정착생활을 만들어주고 일거리도 주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날 삼촌에 팔아넘긴 전적이 있었고 어디까지나 공동의 이익이었던 관계였을 뿐이다. 거기다 빚이라면 여러 번의 청부살인과 건물 경호로 충분히 갚았다. 그래도 좀 살갑게 대해 줄 수 있기도 했지만 내 상태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이 무언가로 옥죄어지는 느낌이었다. 계속 좆같은 기분만이 날 자꾸 덮치려 했다.
[아줌마도 천천히 먹어야 해!]
“시발!”
결국 참다 못하다가 소리치고 말았다. 또 들려오고 있었다. 코에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선배를 만나고 언니를 거치면서 조금 나아졌다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슴이 더욱 아파왔고 당장 화를 풀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내 옆에는 사라가 있었다. 분명 자칫 화를 냈다가 그녀에게까지 피해를 줄 것이다. 숨을 고르고, 크게 내쉬며 겨우 넘길 수 있었다. 겨우.
“엔?”
그녀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 대신 강제로 내 옷깃을 잡게 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지도를 그려주기 위해서였다.
“화장실 알려줄게.”
무덤덤한 척, 한 마디를 시작으로 이 텐트와 화장실의 구조에 대해 알려주었다. 우선 칸막이로 막혀있던 곳은 화장실이 맞았다. 임시로 문을 만들었고 나름 구조를 갖춘 곳이었다. 냄새도 생각만큼 심하지 않아서 괜찮았다. 원래는 이 부대 구석탱이에 따로 마련된 장소가 있어 보통 그곳을 사용하지만 우리처럼 거처에 화장실이 있는 곳도 적게나마 있다고 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잠을 자는데 냄새가 흘러나오면 어쩌나 싶었지만 벽쪽으로 환기구를 만들어 바깥으로 냄새를 빼내는 구조였고 텐트와는 단단히 막혀있었다. 일단 안심했다.
사라에게 화장실을 알려주고 나서는 바로 텐트를 만지게 했다. 어디까지나 잠만 잘 수 있는 용도의 텐트였다. 3명 정도가 누워 잠을 청할 수 있었고 담요 2개와 천을 감싼 배게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텐트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텐트가 끝나고 나서는 이 폐건물을 만지게 했다. 칸막이 화장실 쪽 빼고 천장이 날아가서 그렇지 안에는 낡은 벤치와 함께 불을 지피는 용도인지 시꺼먼 재들과 타다 만 장작이 들어있는 드럼통이 있었다.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사라가 손으로 만져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억했어?”
“......응, 일단은.”
“그래.”
집 소개가 끝난 뒤에는 곧장 누웠다. 벌써 한 차례 잠이 쏟아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을 새웠고 아침부터 격렬하게 싸운 탓이었다. 그러다 한 가지 깜빡한 게 있어서 강제로 눈을 떠야 했다. 우리의 점심을 챙기지 않았다. 젠장, 중요한 식사시간을 놓치고 있었다. 쏟아지는 잠을 억지로 버티며 두 다리를 세웠다. 그리고 두 가지의 경우를 떠올렸다. 하나는 다시 선배에게 돌아가서 밥달라고 하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차까지 걸어서 우리의 것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어느 쪽으로 결정을 하면 좋을까 하다가 선배한테 뜯어오기로 했다. 차까지의 거리가 더 멀었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잠시 여기에 놔두고 가려다가 같이 가기로 했다. 역시 혼자 내버려 두는 건 불안했다.
“사라, 점심 먹으러 바로 이동할거야. 원래 챙겨줬어야 하는데 지금 떠올랐어. 가자.”
“응.”
그녀의 손이 움직이며 내 옷자락을 찾았다. 조금 움직여서 내 청자켓의 끝자락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손이 이리저리 허공을 휘젖다가 겨우 찾은 옷자락을 잡았고 이 폐건물 밖으로 향할......터였다.
“사라...누나?”
우리 앞으로 쟁반 위에 점심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가져온 젊은 청년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아래거나 동갑으로 보였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를 보고 사라를 한 번 보더니 ‘사라누나’라고 말한 것이다. 순간 나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정작 이름이 불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았다. 사라도 잠시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놀라하다가 이내 대답을 이어갔다.
“휘온......이야?”
“아는 남자야?”
아무래도 오늘, 이 우연이라는 놈이 미쳐 날뛰는 모양이었다.
휘온이라는 남자애가 들고온 것은 예상대로 점심식사였다. 밥과 함께 나무젖가락 2개, 불에 익히기만 한 고기와 디저트인지 안주거리로 나와야 할 콩이 작은 접시에 담아져 있었다. 약속대로 고기를 제공받았다. 그것도 점심부터. 특히 우리는 몇 일간 고기를 거의 접하지 못했기에 지금이 기회였다. 배불리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그런 기회. 하지만 젖가락을 들고 먼저 먹기 시작한 건 나 혼자였다.
“누나, 살아있었구나.”
“휘온도, 정말 다행이야.”
방금 막 재회한 휘온이라는 남자를 사라가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두영을 스쳐보내고 술집에서 사라가 얘기를 꺼냈을 때, 언급이 됐었다. 분명 나 이전, 그러니까 ‘그 친구들’에게 붙잡히기 직전까지 함께 다녔었다던 생존자 동료였다. 그녀는 ‘서울의 마녀’라고 까발려진 이후부터 쉽게 밝게 짓지 못했던 표정을 한 껏 보여주었다.
솔직히 말해 질투가 났고 당장 저 썩을놈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지금만큼은 참기로 했다. 겨우 사라의 기분이 풀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조용히, 이 둘의 대화를 들으며 잠자코 점심을 먹었다.
“그 때, 난 정말로 누나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그래서 한껏 우울했었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사실 죽은 거나 다름없었어.”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온거에요?”
“얘기하자면 길어. 정확히는 빠져나왔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갔었어. 앞이 보이지 않아서 어떤 남자들이었는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어.”
“약탈자들인가요?”
고개를 젓는 사라였다. 그리고 자신의 트라우마인 만큼 조심히, 고개를 숙이고서 작게 답했다.
“단순한 약탈자들이 아니었어. 그들은 서울에서 자신들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어. 납치되었던 첫 날부터 내 몸을 건드려왔거든. 보이지 않는 날 묶고서, 다른 소리들은 들리지 않는 방에 가두고 매일같이 범해왔어.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했지만....알잖아? 나 힘도 없고 약한거. 그래서 당해야만 했어. 하루는......”
“됐어요. 그만 얘기해줘요. 나도 괴로워지니까.”
남자는 정말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마냥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1년, 오랜 시간이 흘렀어.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제는 ‘죽고싶다’라는 생각도 가졌었는데, 그 때 가까스로 구해졌어. ‘엔’에게.”
다시 내 이름이 나오면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신경쓰지 않는척 계속 밥을 먹었다. 남자가 나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사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했다.
“그 뒤로 함께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고 많은 일들을 겪었어. 그리고 지금, 여기에 도착하게 된 거야.”
“들려달라고 하면 실례겠죠?”
“아니, 괜찮아. 들려줬으면 하는거야?”
“조금은.”
지랄. 존나게 듣고 싶어하는 눈빛이 보였다. 그래도 뭐, 다른 누군가들처럼 억지로 캐내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아서 조용히 밥을 꾸역꾸역 넘기며 인내를 키워나갔다.
“......좋은 얘기는 아니겠지만.”
그러면서 사라는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얘기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본 것은 없었기에 자신이 들었던 소리들로 풀어나갔다. 원래라면 내가 끼어들어서 보충 설명을 해주는게 맞지만 그러지 않았다. 괜히 끼어들어봐야 좋은 소리는 없을 것이니까.
“‘엔’씨라고 했죠?”
사라의 기나길었던 얘기가 끝나자 남자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사라누나를 구해주시고 함께 해주셔서.”
“......오냐.”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엔’씨의 눈동자, 원래부터 그랬던 건가요?”
“노랗지? 나도 몰라. 어쩌다 보니까.”
“팔은......아니에요. 아무것도.”
호기심이 많은 놈이었다. 그래도 인성은 된 놈인지 이미 입밖으로 내뱉기는 했지만 금방 거둬들였다. 마음에 드는 정도는 아니라도 흥미 정도는 느껴지는 남자였다. 사라와 연관만 없었다면 한 번 즐겼을 지도 모른다. 참고로 사라의 얘기에서 내가 ‘서울의 마녀’라는 건 빠져 있었다. ‘코에’의 이야기는 들려주기는 했지만 끝을 흐리면서 끝내버렸다. 이건 사라도, 나도 결코 좋은 얘기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뭐랄까, 이상하네요.”
휘온이 호기심을 거둬들이고 새로운 호기심을 꺼내들었다. 그건 사라에게 건네는 질문이었다.
“응?”
“누나 말대로라면 ‘엔’씨는 수많은 사람들도 구했고 누나를 구한 은인인데......왜 이렇게 어색해하세요? 아니, 피하는 느낌인데 혹시 싸우기라도 했어요?”
“그게......싸운건 아닌데......”
새끼, 눈치가 빨랐다. 분위기 읽는 속도가 제법 되었다.
“그러면요?”
사라는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 이 부대에서 내가 ‘서울의 마녀’라는 걸 아는 사람은 선배와 언니, 사라뿐이었다. 애초에 밝혀지면 부대가 뒤집어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걸 사라도 아는건지 속시원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내가 직접 폭탄 발언을 하게 되었다.
“휘온이라고 했지? 너, 비밀 잘 지킬 수 있어?”
“갑자기 비밀이요?”
“대답이나 해. 입 무겁냐고.”
“무거운 편이에요. 남의 비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긴 하지만.”
“......좋아. 잘 들어.”
“네.”
“내가 ‘서울의 마녀’야.”
“......네?”
휘온은 단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사실확인을 위해서인지 사라에게도 묻는 그였다.
“누나, 저게 무슨 소리에요?”
“......들은 대로야, 휘온. 엔은 ‘서울의 마녀’야.”
그 직후였다. 휘온은 내가 ‘서울의 마녀’라는 것이 확실시 되었는지 급히 사라를 뒤로 물리며 자신의 품 안에서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사람을 베기보다는 가축이나 동물을 잡을 때 쓰는 사냥용 나이프였다. 난 별로 놀라지 않은 채 먹던 밥이나 계속 먹어갔다.
“당신, 사라누나한테 무슨 목적으로 접근한거야?”
“이유? 이미 사라가 설명했는데 굳이 또 말해야 해?”
“거짓말 하지마.”
젖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단단히 나를 경계하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어. 하지만 사라가 내게서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안 이후로는......여친이라고 생각해, 난.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야.”
“빈말이겠지.”
“이해해. 나같이 버리지만도 못한 쓰레기 새끼가 말해봐야 전부 거짓말로 들린다는거. 하지만 아무리 사라의 지인이라도 이 이상 나대면 나도 어떻게 나갈지 몰라. 그러니까 칼 내려놔.”
“거절하겠어. 지금이라도 사령관님께 말씀드려서.”
“알아, 그 선배도.”
“뭐?”
“그 선배도 내가 ‘서울의 마녀’라는걸 알고 있다고. 아무래도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나랑 거래했거든. 우리를 부산까지 안전하게 배로 데려다주는 대신 여기에 있다는 반란군과 저 바다에 떠 있다는 괴물을 죽여주기로.”
“하지만, 당신은.”
“야, 꼬맹아.”
참다 못한 내가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거면 됐다. 휘온의 칼을 쥔 손목을 빠르게 꺾어 뺴앗기에는. 이제는 내가 협박하는 입장이 되었다. 사냥용 나이프의 날이 그의 목에 닿았다. 조금만 그어도 피가 쏟아질 정도로. 이어 경고했다.
“내가 누군지 알면 입 닥치고 조용히 지내는게 좋을거야. 난 정말로 미친 여자에다가 ‘마녀’라서 널 어떻게 해버릴지 장담 못 해. 사라의 지인인거지, 내 지인이 아니잖아, 넌.”
그리고 나이프를 대충 바닥에 던져버렸다. 애초에 이런 꼬맹이 새끼가 사람을 상대로 쓸 무기가 아니었다. 더더욱 나에게는 말이다. 휘온은 순간 당했던 것에 진이 빠졌는지 몸을 휘청거렸다. 사라도 급작스러웠던 분위기에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였다면 분명히 내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만두라며, 무슨 짓이냐며.
천천히 사라에게 다가가 다시 자리에 앉히고 내가 먹었던 점심이 담긴 쟁반을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에는 젖가락을, 왼손에는 어떤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깜빡할 뻔한 점심을 먹였다. 억지로 먹는 감이 있기는 했지만 입에 댄 것을 확인한 나는 콩 3개를 집어먹고 텐트에 누워버렸다. 이제는 한계였다. 잠을 자야 했다. 그래야 밤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