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Wrath (Im Sorry, Shara) - 5
언니네 가게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사람을 죽이고 피를 씻어낸 뒤 손님과 함께 섹스를 즐긴 뒤 샤워를 한 뒤였다. 정말 오랜시간만에 삼촌이 찾아온 것이다.
“여!”
그는 반갑게 인사했지만 난 곧바로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 겨누었다. 첫 번째로는 시답잖은 군인임무를 맡길 생각이라면 죽으라는 의미였고 두 번째로는 손님으로서 온 거라면 역시 죽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간단히 내 총구를 돌리고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게 뺏어버렸다. 뒤질세라 바로 칼을 꺼내 목을 겨누어주었다. 서로 언제든지 죽여버릴 수 있는 자세들이 되었다.
“오랜만에 봐서 기쁜건 알겠는데 과한거 아냐? 조카.”
“이상하다. 난 분명 기쁘지가 않는데 삼촌은 왜 기쁘다고 할까? 시발.”
“너무 그러지마. 최근에 니가 ‘리재혁’이라는 간첩놈 빡촌 조져놓은거, 뒷감당 다 내가 했거든? 그거 생각해서라도 좀 살갑게 대해주면 안되겠니?”
“응.”
“허허, 거참.”
그가 먼저 총구를 겨눠 다니 내게로 돌려주고 그때서야 나도 칼을 내려놓았다. 일단 따로 임무를 맡기러 온건 아닌 듯 했다.
“소식을 하나 가져왔어. 너한테는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무슨 소식? 아빠새끼가 뒤지기라고 했어? 아니면 또 시발 누가 대딸잡아달래?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삼촌 손님들 맞이용으로 쓰여야 돼? 꼬추 큰 새끼들도 없어서 좆같은데.”
“형수님이 돌아가셨어.”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뭐? 누가 죽었다고? 머릿속으로 다시 재생시켜보지만 삼촌의 말은 하나도 스크래치가 난 게 없었다.
“교단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화재사고로.”
“......그래, 그렇구나.”
엄마가 죽었다. 삼촌은 그 소식을 전하며 담배를 물었고 난 멍한 시선으로 그가 들어온 문만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그 너머로 엄마가 서서 날 맞이해줄 것만 같은 이 망상은.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이 제대로 쉬기가 불편했다. 그걸 억지로 뚫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섹스용으로 입었던 란제리를 벗어 던지고 제대로된 속옷과 사복용으로 사 놓은 검은색의 블라우스를 입었다.
“장례식은?”
“치루지 않았대. 그저 조용히, 형이 하늘로 떠나보냈어.”
“......잠시 나갔다 올게.”
“돈 줄까?”
“그건 지겹게 많아.”
삼촌을 내 방에 혼자두고 카운터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언니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내가 향한 곳은 한 술집이었다. 단골은 아니고 그냥 보이는 대로 들어간 아주 비싼 술집이었다. 그곳에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술부터 하나씩 주문했다. 한 잔이 아닌 한 병씩. 먼저 나오는 순으로 병채로 들이켰고 병을 비우면 안주 없이 다음것을 들이켰다. 마시고, 목으로 넘기고, 중간에 화장실을 가서 토했다가도 입을 깨끗이 닦고 나와서는 또 마셨다. 중간에 한 남자가 작업을 걸어왔지만 꺼지라고 한 뒤에 계속 주문했다. 병이 쌓여갔다. 알코올이 들어오면서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래도 마셨다. 계속, 쭉 계속. 너무 버겁다 싶으면 한 턴 쉬며 물을 마시고 다시 주문. 바텐더가 나를 쳐다보며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 미리 카드를 줘버리고 또 주문. 그런식으로 퍼부었다. 이후에는 기억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내 방이었다. 옆에는 대충 입었던 옷들이 벗겨져 있었고 여기저기 씻겨져 있는 흔적들이 많았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엄마가 죽었다는 소리만이 오갔으니까. 이불을 치우고 일어서자 이불이 걷혀지면서 간단히 속옷만 입혀져 있는 내 모습이 드러났다. 그 위에 벗겨져 있던 블라우스를 다시 입고 밑에는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또 나가려 했다.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서 밖으로. 그런데 마침 카운터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언니가 나를 불러세웠다.
“또 마시러 가니?”
“......신경 꺼.”
“어떻게 신경을 안 쓰니. 슬퍼하는 애를?”
“슬퍼? 내가? 지랄.”
난 슬프지 않았다. 그 증거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단지 갑작스레 그런 소식을 들으니 혼란스러움과 함께 생각이 복잡해진 것 뿐이었다. 그러니 난 슬프지 않았다.
“너도 참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네. 아니면 그렇게 키워진 건가?”
“이상한 개소리 작작해. 난 그런거 몰라.”
“이번에도 술먹고 쓰러지면 애들보고 데리고 오라고 안 할거야. 어제 너 찾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찾지마. 알아서 돌아올 테니까.”
짜증나서 대충 대답하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리고 향한곳? 당연히 술집이었다. 낮에는 어제처럼 고급스러운 곳이 여는 데가 없어서 편의점에 들러 바구니에 소주를 한 가득 담아 계산하고 그대로 봉지에 넣고서 근처의 한강 변두리로 향했다. 강을 보면서, 바로 앞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소주를 깠다. 한 병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두 병, 세 병, 네 병, 다섯 병, 여섯 병, 마지막 일곱병 째를 마시다가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직 반은 남아있었을 소주가 그대로 쏟아져버리고 말았다. 진짜 시발, 좆같네. 눈도 스르르 감기려 했다.
이런식으로 난, 엄마를 떠나보냈다. 이따금씩 언니가 내게 슬프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답했다. 울지 않았고 눈물조차도 흘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째선지, 그 빌어쳐먹을 질문을 들으면 계속 가슴이 먹먹하는가 하면 엄마가 떠올랐다. 그래, 그리워 한다는 것 정도는 인정해 주자. 그걸로 퉁쳤다. 있잖아, 엄마.
“......잘 가.”
달빛이 떠오른 밤이 되었다. 사라는 코에를 안고서 잠에 들었고 자은도 자성과 함께 침대에서 잠에 빠져버렸다. 그럼 남은 인원은? 나와 동호였다. 우리 둘은 각자 전투를 담당하는 인원이었다. 원래는 번갈아가면서 보초를 서는게 어떻겠느냐고 동호가 먼저 제의를 했지만 난 바로 거절했다. 창호라는 변수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그에게 먼저 자라고 했지만 거절하더니, 그러면 차라리 같이 보초를 서겠다고 했다. 짜증났지만 한숨을 쉬면서 그러라고 허락했다. 나는 사라의 옆에 의자를 두고서, 그는 자은이 누운 침대에 걸쳐 앉아서 서로의 사람들을 보호했다.
“너희들은 여기저기 떠돈다고 했었지?”
먼저 말을 건 것은 나였다.
“네. 유목민 같이 말이죠.”
“......섹터같은 곳은 들려본 적 없어?”
“있었지만 좋은 기억은 많이 없었습니다. 모두 아내를 노려왔었으니까요.”
“그래? 하기야, 여자는 귀해졌으니까.”
“......물건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크립톤도 여자를 노리고 있는 마당에 비슷한 개념이지 않아?”
“제 아내는 물건 따위가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도 사라가 있듯이.”
“......맞아, 사라는 물건이 아니지. 나 혼자만 물건이지. 하하.”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에서 왔어? 아니,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한거야?”
“저희는 대전에서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작년 5월까지는 남아있던 식량들로 버텼지만 근처에 있던 것들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조금씩 이동하다가 지금이 되어버렸습니다.”
“크립톤과는 싸워봤어?”
“운나쁘게 소리로 들켜서 한 마리. 도끼를 들고 있었기에 제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아내와 처남을 지킬 수 있었죠.”
“중학생 애한테 처남이라니. 당신이 훨 배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몇 살이야?”
“저는 36, 아내는 27.”
“와, 시발. 도둑놈새끼네.”
“많이 듣는 소리였죠.”
코에가 뒤척였다. 꼬맹이는 사라의 품 안에 안겨서 잘 자다가 몸을 옆으로 눕더니 다리 한 쪽이 내 엉덩이에 닿고 있었다.
“그럼, 사람과는 싸워봤어?”
“......네. 원치 않았지만.”
“태권도 했었다니까 두들켜 팼을테지......죽였어?”
“......약탈자들이었고 방법이 없었습니다.”
죽였다는 소리였다. 다음 질문은 떠오르는 대로 말하게 되었다.
“사람을 죽인 널 보고 자은은 뭐라고 했었어? 지금 사이 보니까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던데.”
“처음에는 그랬습니다만 나중에는 점차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이해해주었습니다.”
“뭐야, 시시하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뭘?”
“살아남으면서 잊지 말라고.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간직하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속죄하라는 의미죠.”
“헤에.”
역시 시시했다. 속죄라. 나한테 그런 단어는 생소했다.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딱히 죄책감이 든 것도 아니었고 가끔 돈 문제로 후회한 적은 있어도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느꼈던 감정은 모두 즐거움 뿐이었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죽일 때마다.
“그 뒤에는 계속 여행만 했다는 거네.”
“그렇죠.”
“여행 도중에 있었던, 뭐 아무거나 좋으니까 큰 사건이라던가 재밌는 일은 없었어?”
“글쎄요. 괴물들이 나도는 마당에 재밌는 일이라. 살아남은 것도 겨우 웃을 수 있는데.”
“그럼 안 좋았던 일은?”
“그건 수도 없이 많았죠.”
“하나 들려주라.”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듣기 거북할 겁니다.”
“상관없어.”
“......한 생존자 무리를 만났었습니다. 그들은 두 젊은 대학생이 무장을 하고서 이끌고 있는 집단이었죠. 한 명은 이재욱이라는 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윤지연이라는 학생이었습니다. 둘은 매일 아침마다 토론하고 서로의 얘기를 나누면서 식량은 어떻게 나눌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 회의했습니다. 매번 좋은 의견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능한 일들을 하면서 당신들처럼 부산으로 향해갔습니다.”
우리 말고도 부산으로 향하는 무리가 있긴 있었나보다. 약간 반가웠다.
“하지만 어느 날, 약탈자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모두 싸움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나마 지연과 재욱학생, 저와 아내가 저항했지만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잡히는 대로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 20명 남짓했던 사람들이 6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거나 죽었죠. 심지어 죽은 사람들 중에는 겨우 고등학생 밖에 되지 않았던 애들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때를 떠올리면 지키지 못한 저를 탓하곤 합니다.”
꽤나 난폭한 약탈자 새끼들인가 보네.
“그 뒤로는?”
“저희는 한 경유지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부산으로, 저희는 시골쪽으로 가자는 의견이였기 때문입니다. 지연학생이 한 차례 붙잡기는 했지만 끝끝내 의견은 갈렸고 지금, 이곳에 온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 그것도 사람에 의해서. 크립톤의 발톱에 죽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건’이 일어나고 1년까지의 이야기. 무정부 상태가 되고 세상이 멸망해버렸다고 생각되는 작년 1월부터 난 수없이 보았다. 서울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밤에 들려오는 비명소리보다 낮에 들려오는 비명소리들이 더 많은 정도였다. 그 속에서도 내게 시비를 걸어오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떡이라도 쳐보려는 새끼들이 많이들 찾아왔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내 손에 뒤져버렸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씨부리는 건 참 상황이 재밌어져서 였다. ‘사건’이전까지는 사람을 죽이면 증거를 숨기고, 목격자를 처리하고, 뒷정리를 깔끔히 해서 들켜서는 안됐는데 지금은 어떤식으로 어떻게 죽이든, 목격자를 내버려두든 말든, 뒷정리를 하든 말든 들켜도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나마 살인을 막는건 개개인이 지닌 ‘윤리’라는 것이였는데 그것마저도 기준이 달라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사라의 ‘윤리’는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절대 안되고 무조건 도와야 하는 것이지만 내 ‘윤리’에는 그딴게 없었다. 이런 거다. 애초에 그런 개념이 존재하겠냐만은. 오로지 본능만이 남은 쓰레기년인데.
‘살인’도 본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이 지닌 자연적인 ‘공격성’의 절정 혹은 그쪽으로 본능의 방향을 틀어버린 결과니까. 그런 본능이 억제되었던 사회인 만큼 ‘사건’ 이후의 여파는 굉장했던 것이다. 내가 원하던 세상이기도 했다. 크립톤만 없고 여전히 사라와 사이가 좋았다면 더 완벽했을 건데.
“엔씨의 이야기도 들려주시죠.”
“내 얘기? 어떤게 궁금해?”
“사라씨와 코에, 3명이서 함께하는 동안 겪었던 이야기.”
“흠......그럼 이건 아직 코에와 만나기 전이 이야기인데, 다 압축해서 말하자면 난 어떤 쓰레기같은 새끼의 제자였어. 훈련이라는 말을 하면서 내게 늘 고문을 해왔고 싸움을 가르쳤던 남자였지. 어릴 때, 그에게서 탈출해 벗어나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었는데 반드시 그 개새끼를 죽이겠다는 다짐이었어. 결과는? 이루어냈지. 여기로 오기 전, 한 동네에서 운 더럽게 마주했고 사라를 인질까지 삼으면서 나에게 압박을 해왔지만 다 좆까고 이겨버렸어. 마지막에 허무하게 뒤져버리기는 했어도 아무튼 복수하는데 성공했고 그 대가인지 사라가 알아서는 안될 나의 비밀을 알아버린거야. 너도, 자은도 눈치를 챘겠지만 나와 사라의 사이, 어색해.”
“그건 식사때도 느꼈습니다. 코에와는 좋아보이는데 말이죠.”
“빌어쳐먹을 정도로 어색해져 버려서, 사라는 내게 한 번도 보이지 않던 가시를 보였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되버렸어.”
“무슨 비밀이었길래 그 정도로.”
“나한테는 겨우 지나간 과거일 뿐이지만 사라의생각에는 ‘사람’으로조차 비춰보이지 않을 정도의 쓰레기같은 과거야.”
코에가 다시 뒤척였다. 이번에는 자신의 손 하나를 내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작은 손은 당장 내가 쥐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
“묻지 말아야겠죠?”
“눈치가 있다면 그래야겠지.”
[언니......]
급기야 꼬맹이가 이불을 발로 차는 듯 하면서 침대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빠르게 권총을 놓고 몸을 틀어 손으로 잡아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했다. 하마터면 바닥과 마주시킬 뻔했다.
“엔?”
그리고 사라가 깨어나고 말았다. 그녀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눈을 뜬 상태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크게 움직인 탓이었다. 나는 따로 대답하지 않고 코에를 살살 밀어 다시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춥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까지도 사라는 눈을 감지 않고서 나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정확히는 빗겨간 천장쪽이었지만.
“자, 사라.”
“......너는?”
“알잖아. 난 됐어.”
“하지만 오늘 엔은 낮잠조차도 자지 않았잖아.”
“......필요없어.”
“필요해.”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찾으며 헤매다가 허리를 잡더니 끌어당겼다. 미약한 힘이라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강한 주장을 펼치기에는 충분한 정도였다.
“알았어. 따로 잘테니까.”
“여기서 자.”
......순간 잘못들었나 싶었다. 지금 그녀가 내게, 이 침대에서 자라고 말했다. 예전이었다면 바로 몸을 움직여 그녀의 곁에 붙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창호도 있었고. 하지만 사라는 말을 물리지 않았다. 계속 내 허리 잡아당겼다. 빈 옷소매가 흔들렸다.
“사라씨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깨어있을테니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십시요.”
“......”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아까전부터 졸음이 오고 있던 것은 맞았다. 버티는 거야 쉽지만 지금처럼, 또 누군가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잠을 잘 기회는 있지 않았다. 나도 안다. 눈이라도 붙여야 한다는 걸. 하지만 덥석 물기에는 역시 창호때문에.
“엔, 너도 사람이야.”
......충격받았다. 사라가 나를 가리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때처럼. 그것도 지금. 분명 내 정체에 대해 알고서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마치 몇 일 동안은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빠르게 눈이 내려가며 몸을 쓰러트렸다. 그 자리는 코에를 사이에 두고서 사라의 맞은편, 침대의 끝, 코에가 떨어지려 했던.
손에 권총을 쥐었던 감각이 사라지면서 편안함이 내 몸을 덮어갔다. 기분은 그대로인데 몸이 달라졌다. 아, 뭐야 이거. 섹스할 때보다 훨씬 좋았다. 거기다 이런 느낌, 지금까지 그 어떤 잠자리에서도 가져보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라는 정말로 특별한 여자였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자 동반자와도 같은 그런 사람. 이 뒤는 따로 없었다. 난 정말로,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버렸으니까. 마지막으로 보였던 건 나를 향해 푸른 눈동자를 보였던 사라의 얼굴과 우리 사이에서 이제는 나에게도 손을 뻗어 품에 안겨오는 코에였다. 순간 느꼈다. 만약 나에게도, 정말 만약에 정상적인 가족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고.
[아줌마, 일어나!]
눈을 감고서 꿈따위 없이 잘 자고 있었는데 어린 목소리가 나를 깨우려 했다. 귀찮아서 손을 휘저으며 밀어내 보았지만 쉽사리 밀어지지가 않았다. 왜 이렇게 힘이 센 걸까. 그냥 몸을 돌려 버렸다.
[일어나라니까!]
“커헉.”
잘 자면서 긴장이 풀린 내 옆구리로 무거운 무언가가 급습했다. 그 아픔에 잠시 주춤하다가 강제로 눈을 뜨고 어떤 개쌍놈인지 찾으려 몸을 일으켰다. 바로 눈앞에 보인건 코에였다. 방에는 나와 이 꼬맹이뿐이었는데 분명 어제까지 무서워서 뭘 못하던 코에가 내 앞에, 그것도 사라도 없이 당당히 서서 말하는 것이었다.
[야, 꼬맹이]
[일어난거야?]
[......하아.]
됐다. 화를 내려다가 관뒀다. 이런 꼬맹이를 상대로 뭘 하겠다는 걸까. 덮었던 이불을 걷어버리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왜 방에 나 혼자 남았는지 알기 위해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가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보았다. 일단 창문 틈으로 보이는 햇빛의 방향과 기온을 볼 때 오전이었다. 거기다 밑에서 약하지만 음식 냄새가 맡아져 오는 것을 보니 아침인게 확실하다고 느껴졌다. 모두 식사때문에 내려간 걸까.
“......아!”
식사. 꼬맹이를 데리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테이블에는 사라와 동호가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자은과 창호가 함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따라 내려온 코에는 자성이라는 애에게 다가가 말을걸고 있었다. 내가 우려했던 일은......없었다.
“일었났어요? 엔씨.”
아침을 알리는 첫 인사는 사라가 아닌 자은이었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프라이팬을 다루면서 계란말이를 하고 있었다. 창호는 옆에서 어제 먹었던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었는데 마침 자은이 숟가락을 들고 마시며 적당하다고 했다. 사실상 나 대신 저 개자식이 음식에 이상한 짓을 못하도록 봐주고 있던 것이다. 일단 안심했다.
“엔?”
두 번째로 날 부른게 사라였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서 급히 뛰쳐나온 내 소리에 놀란 것이다. 동호는 나 대신 밤을 지새었는데도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체력도 좋으셔라.
“......아냐, 아무것도.”
멍하게 서있자니 괜시리 시선들만 뺏어버릴 것 같아서 나도 테이블에 앉았다. 우선은 코에가 앉을 자리의 옆이었다. 나와 사라의 사이에 여전한 한 칸의 공석이 생겼다.
“아침은 든든해야 하니까요. 창호씨의 배려덕분에 충분한 양을 만들 수 있었어요.”
“뭐, 맞는 말 아이가. 든든히 먹어야지.”
둘이서 사이좋게 음식을 들고나오고 있었다. 자은은 그렇다쳐도 창호는 거북했다. 그래도 밥은 맛있어보였다. 꽤나 사용했는지 계란말이의 양은 7명이 먹기에 충분했고 된장찌개도 아침의 쌀쌀함을 덜어내주기에는 충분했다. 밥과 숟가락들이 놓여지고 늦게 일어난 나까지 합류해 다같이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거 먹고 바로 가실거죠?”
중간, 자은이 물어왔다. 아마 오늘 잔해를 치울거라고 말했던 것 때문일것이다.
“어. 사라와 코에도 갈거야.”
“창호씨의 집에 두는게 더 안전하지 않나요? 어제처럼 멧돼지라도 만나면.”
보통 이럴때 사라가 옆에서 나를 따라가는게 더 좋다고 말해줬을 텐데, 오늘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말해야 했다.
“내가 좀 불안증세가 심해서 말이야. 옆에 두지 않으면 일을 못해.”
“흐음. 그래도.”
“어차피 총도 챙겨갈 거야. 잔해를 빨리 치워야 하는건 맞지만 사라와 코에도 내게 중요해.”
“완고하시네요. 그러면 창호씨, 잠깐 자성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천천히 갔다오그라. 내 기다리고 있을게.”
바로 표정을 확인했다. 뭔가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애초에 코에까지 데려가 버리니 조건이 안 맞는데 몰래 의식을 할 틈은 없겠지. 오늘 점심도 일찍 돌아올 생각이고.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어제 빌렸던 삽과 톱을 다시 챙겼다. 정확히는 동호가 톱을 챙기고 내가 삽을 챙겼다. 다를 바 없이 내 옷자락을 잡고 따라오는 사라였지만 꼬맹이에게 변화가 생겼다. 사라 뒤에 숨어있는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붙어서 따라걷는 것이다. 이제 내가 상당히 만만해졌나 보다.
자은쪽은 아까 말한대로 자성이를 맡겨두고 부부끼리 꽁냥거리며 따라왔다. 시발, 누구는 이제 그러지도 못하는데 옆에서 엄청나게 지랄이네. 욕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사라에게 더 안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점수를 까일 수는 없기에 조용히 꼬맹이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면서 잔해까지 걸었다.
잔해는 어제 내가 딱 치운 정도만 남아있었다. 사라와 코에는 바로 옆 정류장 의자에 앉히고 일을 시작했다. 우선 아직도 다 잘라내지 못한 굵은 가지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동호가 근육이 붙은 팔로 톱을 잡으며 맡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은 흙, 흙들도 쓸려 내려와 막고 있었는데 이건 자은이, 마지막으로 난돌을 치우기로 했다. 한 손 뿐이기는 해도 힘 좀 쓰는 사람이니 방해되는 돌들을 치우기로 한 것이다. 대략 순서는 이렇게 되었다. 동호가 굵은 가지들을 알맞게 자르면 자은과 나는 하던 일을 잠깐 멈춰 가지를 빼낸 뒤 원래일로 복귀. 역할 분배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했다. 벌써 속도가 붙으면서 잔해가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으니까. 나 혼자서는 오랜 시간이 걸렸던 작업들도 모두 순식간이 되었다.
중간, 동호가 톱질을 실수하는 바람에 손가락을 베이게 되었다. 다행히 들고 있는 도구의 위험도와는 달리 살짝 베인 것이었다.
“잠시 쉬자.”
베인 상처를 치료할 겸 잠시 쉬기로 했다. 자은은 항상 소지하고 있는지 밴드를 하나 꺼내었다. 물이 없어서 상처를 햝아 피를 닦아내고 그 위에 붙여주는 부부였다. 난 사라의 옆에 앉았다. 그녀와는 함께만 있을 뿐이었고 사실상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코에였다.
[아줌마 보기보다 열심히야.]
[칭찬이냐? 비꼬는 거냐?]
[칭찬!]
그러면서 내 빈 옷소매를 잡기도 했다. 정말 겁대가리가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참고 접근해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괜시리 다가와 다치지 않았으면.......음? 내가 왜 꼬맹이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아마 옆에 있는 사라때문일 것이다. 그런거라고 내 멋대로 확신했다.
[옷은 편하냐?]
[응. 편해.]
다행이네. 또 옷을 보러 가기는 귀찮으니까. 꼬맹이는 내가 유일하게 소통을 할 수 있는 대화상대라 그런지 정말 말이 많았다. 이건 무엇이고, 이건 왜 그렇고, 정말 많은 질문들을 해왔다. 내 과거와는 반대인, 순수한 애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더 다가오지 말았으면 했다.
한창 코에를 돌봐주다가 사라를 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다가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했는데 지금, 어제처럼 또 우리 뒤에 있는 숲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사라.”
“어......어?”
반응도 느렸다. 잠이라도 자다 깨어난 것 마냥.
“어제처럼 숲 쪽에서 소리가 들리기라도?”
“믿지 않겠지만, 응. 들려왔어. 또 나무를 타면서 떠나갔어.”
“믿어. 넌 귀가 좋으니까.”
아무래도 불친절한 손님이 온 듯 했다. 이거, 확실히 수색을 해보지 않는 이상 알 턱이 없어보였다. 좋지 않은 감이 일었다. 언제나 적중했었는데 이번에도 적중할 것 같았다. 역시, 수색을 해야겠다. 지금이라면 가능할 테니까. 오후, 그 시간대에 해보기로 했다.
“사라, 코에 잘 데리고 있어.”
“응.”
누군가들은 나에게 멧돼지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럴 리가. 나무를 타고 다니는 소리와 숲의 땅을 밟고 걷는 소리는 엄격히 다르다. 거기다 사라가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귀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건 믿을만한 정보였다.
“빨리하고 가자!”
10분 정도 휴식시간을 가지고 바로 잔해 치우는 것을 재개했다. 자은과 동호가 다시 도구를 들었고 빠르게 잔해를 치워나갔다.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잔해들을 치워나갈 수 있었다. 혼자였을 때는 오전시간을 거의 다 써서 했는데 반의 반도 못 쓸어냈지만 지금은 경차 한 대 정도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조금만 더 손을 쓰면 충분히 내 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너머로는 텅텅 빈 도로니까.
“올라가자. 밥은 먹고 해야지.”
점심이 다가오던 때, 올라가기로 했다. 자은과 동호도 땀을 좀 흘렸고 오후에는 내 개인적으로 해야할 일이 생겼으니까. 톱과 삽을 챙기고 돌아오던 중, 옷소매를 잡고 따라오는 사라에게 조용히 물었다. 손은 권총에 가져가면서.
“사라, 소리는?”
“없어. 완전히 떠난 것 같아.”
이 근처에는 없고 완전히 떠난 듯 했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우리를 노렸다는 것은 변치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동물이었다면 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방향에 나타날 리가 없지. 거기다 분명 창호는 이 근처에 있는 동물은 멧돼지와 고라니뿐이라고 했었고 새일 수도 있었지만 독수리라도 앉았다가 가지 않는 이상 나무를 타고 다니는 듯한 소리가 날 리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게 날아다니고 있다면 사라가 날개짓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집에 도착한 후 사라와 코에는 윗층으로 올려보내고 자은은 아직 힘이 남아있는지 부엌으로 향했다. 창호가 반갑게 맞이하며 재료들을 하나둘 꺼내놓았다. 동호는 무사히 기다리고 있던 자성과 얘기를 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어디로 갈까 하다가 부엌에 서서 둘의 요리를 지켜보았다.
자은의 요리는 빈틈이 없었다. 창호가 재료를 꺼낼 때마다 자연스럽게 지켜보았고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면서 사용할 것들을 정해갔다. 그러면서 뒤에 있던 내게 점심으로 스튜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고기는 없어서 야채들과 다른 조미료로 맛을 낸다고 했다. 스튜라, 별로 먹어본 적 없는 음식 중 하나였다. 배만 채울 수 있다면 아무 상관 없다만.
요리를 지켜보면서도 숲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 이상했던 점이 있었나? 없었다. 오로지 사라가 들은 소리뿐이었다. 일단 그 소리가 들렸다던, 창호의 집과 잔해 사이에 있는 숲을 먼저 뒤적거려볼 예정이었다. 무기로는 권총 한 자루면 충분했다. 저격총을 들고가봐야 한 손뿐이라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퇴로를 만들 용도로 창호에게 말해 밀가루를 봉지에 넣어 챙기고 연막탄 대용으로 사용하고 근접으로는 주환이 챙겨준나이프가 있지만 쿠크리보다 짧아서 식칼이라도 하나 더 챙길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계획을 구상을 다 했을 때쯤 점심이 완성되었다. 각자 테이블로 완성한 음식들을 옮기고 사라와 코에를 불러 테이블에 앉았다. 사라에게는 단순한 순가락이 아닌 우동스푼을 쥐어주었다. 건더기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위한 것이었다. 자은의 스튜는 야채뿐이라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사라는 마음에 들어했다.
[야채뿐이야.]
예상은 했다만 코에가 또 투정을 부렸다.
[그거 안먹으면 떼놓고 간다.]
[그건 싫어.]
빈말인 협박이다만 코에에게는 제대로 통한건지 살짝 울먹거리면서도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그래, 잘 먹네. 사라는 우리의 대화에 궁금해하기보다는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코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와 딸 같았다. 자매가 아니라.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그릇들을 치우고 사라와 코에를 데리고서 윗층으로 올라갔다. 이어서 자은쪽도 모두를 데리고서 올라왔는데 자성이 빼고 그 부부를 조용히 불러 잠시 문 밖으로 데리고 갔다. 목소리를 낮추고 그들에게 말했다.
“부탁할게 있어.”
“부탁이요?”
원래의 나라면 입에서 쉽사리 나오지 않을 말을, 그것도 지나가던 남에게 내뱉고 있었다. 그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둘로 나뉠 수는 없는거니까.
“잔해는 내일 오전에 치워도 이제 금방이니까 냅두고 지금부터 난 해가 지기 전까지 숲을 다녀올 생각이야.”
“갑자기 숲을요? 위험해요. 아직 그 멧돼지들이 있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