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Wrath (I'm Sorry, Shara) - 1
오늘도 다른 일 없이 차를 타고 달렸다. 보기도 힘든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길을 찾아 헤메고, 중간에 마트나 편의점들이 보이면 먹을 것들이 있나 뒤적거려보기도 하고, 옷 매장에서 새로운 후드 자켓을 찾아보기도 했다. 일단 먹을 것은 역시나 통조림뿐이었고 옷은 새로운 후드 청자켓을 구하기는 했다. 역시나 남색으로. 아무 무늬도 들어가지 않은 단색의 청자켓이었다. 잘 곳은 뭐, 역시 병원이라던가 높은 건물들이었다. 추우면 불을 지폈고 사라에게는 침낭을 주었다.
여기까지는 여느때처럼 다를 바가 없어보이지만 사실 큰 변화가 있었다. 사라가 내게 말을 잘 걸지도 않았고 옆으로도 오지 않는다는 거. 운나쁘게 내가 ‘서울의 마녀’라는 것을 들킨 뒤로 말이다. 밥을 먹거나 이동을 할 때에는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정말 필요한 대화만 했고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잘 때도 내 옆에 좀처럼 오려고 하지 않았으며 차를 타고 달릴 때에도 앞이나 내쪽이 아닌 창밖만을 볼 뿐이었다.
“사라. 밥먹자.”
“응.”
밥 먹을 때의 대화.
“사라, 가자.”
“응.”
이동할 때의 대화.
“사라, 잘 자.”
“......”
이건 대답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밉거나 싫은건 아니었다. 난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고 좋아했다. 이 마음은 절대 변치 않았지만 속상하거나 쓸쓸한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걸 호소할 수는 없었다. 난 그녀가 싫어하는 ‘살인자’고 ‘쓰레기’니까. 젠장할.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 사라가 일어나서 눈을 비볐지만 나를 찾지는 않았다. 이제는 혼자서 일어나 지팡이를 꺼내더니 혼자서 걸음 연습을 해갔다. 한 번은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아니야. 혼자서 할게.”
라며 거절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몰래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개새끼들이데려갈까봐. 그 과정에서 어떤 잡놈 3명이 덤벼왔지만 내가 질 리가 있나, 반 죽일 정도로 두드려 패고 쫓아내 버렸다. 그렇다, 쫓아냈다. 죽이지 않았다. 사라가 이 이상 날 미워할까봐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사지를 찢든 목을 자르든 내 재미로 여러 방법으로 죽여버렸을 텐데. 시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차에 올라서 지도를 보고 길을 달렸다. 언제나처럼 막혀있는 길목들과 버려진 차들 때문에 새로운길을 찾아 오르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화내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겨우 국도 하나에 올랐고 마침 시간도 점심이라 지나가다가 보인 커다란 마트 한 곳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뭐, 통조림이기는 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밥이랑 도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환의 구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덕분에 쌀과 감자, 옥수수 등 여려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하루에 한 끼 정도는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물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넉넉했기에 앞으로 몇 일 간은 든든히 챙겨먹을 생각이었다.
마트 앞에서 나뒹굴던 의자와 테이블을 주워 세우고 사라의 손을 잡고 앉힌 뒤 트렁크에서 2인분의 쌀과 냄비, 물, 라이터와 가운데 구멍을 뚫어놓은 임시 받침대, 말라비틀어진 종이를 꺼냈다. 받침대는 간이식으로 만든 건데 철판을 하나 주워서 양쪽을 직각모양으로 구부리고 가운데에 칼로 네모난 구멍을 꿇어 불이 들어오도록 했다. 꺼낸 종이에 우선 불을 붙이고 잘라놓은 장작들을 넣으면 밥을 먹을 준비가 끝난다. 그동안 사라는 고개를아래로 떨구고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 밥 먹어.”
밥이 완성되고 같이 먹을 감자와 불 근처에서 데운 통조림 햄을 올렸다. 이정도면 푸짐한 점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라가 영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사라?”
“소리가 들려.”
이게 대답이었다. 또 소리가 들린댄다. 귀찮거나 한 건 아니었다. 사라의 귀는 무척이나 정확하니까. 조심히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발걸음이야?”
“응. 그런데 작아. 작은 발걸음이야.”
“호오.”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건가. 의자를 뒤로하고 일어섰다.
“어딘데?”
“......가르쳐주면 죽이러 갈거야?”
“......저새끼들 행동 봐서.”
“......죽일거구나?”
“행동 봐서 판단한다고. 방향이나 말해. 우리가 먼저 공격당하면 좆같으니까.”
지금의 사라는 이랬다. 이전까지는 내가 방향이나 위치를 물으면 바로 답을해주었고 숨기거나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말을 잘 들어줬는데 이제는 내게 묻고 있었다. 죽일거냐고. 솔직히 내 대답은 언제나 예스이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그러지 못했다. 죽이려고 하면 사라의 말들이 계속 맴돌았으니까.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젠장, 왜 이렇게 된 걸까.
사라가 계속 머뭇거리다가 방향을 가리켰다. 난 바로 베레타를 앞세우면서 그 방향으로 조심히 다가갔다. 또 어떤 놈이 우리를 습격하려고 했을지, 그 생각만을 하면서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옮겼다. 젠장, 사라. 서서히 나도 그녀가 들었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작은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면 발소리를 죽인것이 아니었다.
마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진열대 하나에 엄폐하는 동시에 고개를 조금 내밀어 확인했다. 좌, 우를 차례로 확인하고 혹시 몰라서 천장들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카운터 안 쪽도 확인, 역시나 없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 보려다가 사라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선은 돌아갔다. 그러면서 뒤도 신경썼다. 그 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뒤를 돌아서 조준했다. 문에서 작은 무언가가 숨는게 보였다.
“야! 나와! 너 있는거 다 알거든? 특별히 열 셀건데 안 나오면 뒤진다. 하나, 둘, 셋.”
‘탁...탁...탁...’
열을 세는 것으로 협박에서 조용히 끝내려는데 어느순간 나의 뒤로 사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서. 난 그 행동에 당황해서 급히 걸음을 뒤로 하고 그녀의 앞에 막아섰다.
“사라, 미쳤어? 섣불리 움직이지마.”
“엔이야말로 섣불리 죽인다는 소리 하지마.”
그러고는 날 옆으로 밀치며 계속 앞으로 향하려 했다.
“사라! 지금 세상은 전쟁뿐이야! 지금 저 안에 있는 놈이 널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할건데?”
“죽이지 않아. 저 발걸음 소리, 들어본 적이 있어.”
“농담 할 때가 아니야.”
난 진지한데 사라는 계속 발걸음을 앞으로 했다. 그러면 내가 또 막아섰다.
“사라. 니가 날 미워하는건 알겠지만 상황 좀 가려서 해.”
“......비켜줘, 엔.”
“......”
충격을 받았다. 비켜달랜다. 그것도 나보고. 거기다 이미 그녀는 대답이 없는 나를 옆으로 밀고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 마트의 문 앞에 섰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빠르게 그녀의 앞에 서서 모든 신경을 세우며 경계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오든 쏠 수 있도록. 그런데 사라의 행동은 달랐다.
“해치지 않아. 괜찮으니까 나와도 돼.”
부드러운 목소리.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엄마같은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꼬마? 어느정도 짐작은 했지만 정말 꼬마라고?
‘팅......’
마트 바닥으로 캔이 하나가 굴러왔다. 뚜껑이 열려있는 통조림이었다. 과일 통조림.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들려온 발소리의 작은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꼬마아이였다. 사라의 말이 맞았다. 10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였다.
“사라, 네 말대로 꼬마이기는 한데 확인할게 있어. 주변에 다른 발소리같은건 없어?”
“......없어. 아무도. 그러니까 총 내려, 엔.”
“칫.”
내리지 않았다. 왜냐고? 당해본 것이니까. 어린아이를 앞세워서 상대방을 방심시키고 습격하는 것을. 나도 몇 번 당하기는 했지만 모두 일부러 당한 것이었다. 역으로 습격을 하기 위해서. 그때마다 최고의 방법은 아이를 인질로 잡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행동은 하나였다. 베레타를 여자애한테 겨누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마트 안이나 밖에 있는 새끼들은 들어! 지금 당장 모습 안보이면 이 꼬맹이 새끼는 죽는다. 그러니 알아서 기어나와!”
“엔!”
[엄마!]
......일본어? 이 꼬마가 소리친 언어는 일본어였다. 그것도 엄마를 찾는 목소리. 그때서야 이 꼬마의 표정을 난 볼 수 있었다. 엄청 두려워 하는 표정,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무서워 하는 표정이었다. 한 때 내가 아빠새끼를 바라보던 그 표정이었다. 시발, 좋지 않은 기억이 겹쳤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셋 셀거야, 하나.”
“엔, 제발 그만해.”
“둘!”
“엔!”
“셋!”
“그만하란 말이야!”
방아쇠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직전, 사라가 움직였다. 이럴때만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녀는 내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막아섰다. 뒤의 꼬마는 완전히 가려질 정도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도 엄청......매서웠다. 가끔씩 나한테 화내거나 했지만 이정도로 표정이 일그러지지는 않았었다. 그런 표정을, 그녀가 내게 보였다.
잠시, 사라를 뒤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움직이는 기척도,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함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꼬마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쏘려는 것도 행동하는 척일 뿐이었지만 이미 사라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 했다.
“엔, 넌!......사람도 아니야.”
뒤에 있던 꼬마애가 사라에게 들러붙었다.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것을 안건지 엄청 세게 끌어안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 그런 꼬마의 시선은 익숙해서 상관없다지만 사라의 시선은 달랐다. 나를 엄청나게 찌르며 들어왔다. 그리고 방금 말, 언제나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그녀에게 들으니 또 은근히 상처가 되었다.
“......알아, 나도. 난 ‘서울의 마녀’니까. 안그래? 하지만 사라, 나라도 꼬마를 죽이는 취미는 없어. 단지, 함정일 수도 있었기에 어디까지나 ‘척’을 한 것 뿐이야.”
“상대는 어린아이였어. 총을 겨눈 것부터 넌 잘못한 거야.”
“잘못? 만약에 진짜로 함정이었으면 어쩔 생각이었는데?”
“고작 그런 이유라서 어린애를 겨누어도 된다는 거야? 넌 정말.”
“난!”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커졌다. 전혀 의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사라가 내 심정의 일부라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널 지키려고 했을 뿐이야. 단지 그거라고.”
“......그렇다면 엔, 너는 실패했어. 정말로 날 지켜줄 거라면 이 아이에게 그런식으로 하면 안되는 거였어.”
시발.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건데. 알지를 못하겠다. 난 분명히 사라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꼬마애를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난 정말로, 그저 시발, 그녀를 지키려 한 행동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았다. 젠장, 짜증이 솟구쳤다. 너무도 짜증이 나서 권총을 집어넣고 주변에 굴러다니던 통조림을 세게 걷어차 버렸다. 통조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트 안을 굴렀다.
“됐어. 아무튼 적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밥먹고 떠나자. 여기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어.”
그 말만을 하고 밥을 먹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마침 밥도 완성되어 있었고 불을 발로 밟아 꺼트린 뒤, 일회용 숟가락 2개를 꺼내 준비를 마쳤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사라가 마트 안의 꼬마와 함께 돌아온 것이다. 참고로 저 꼬마가 먹을 밥 따위는 없었다. 우리 것만 넉넉할 뿐이었다.
“......사라, 참고로 말하지만 그 꼬맹이 몫은 없어.”
“아까 이 아이의 배에서 배고픈 소리가 들렸어. 거기다 만져보니까 살도 많이 빠진 아이야. 먹여야 해.”
“안돼. 우리 것도 부족해.”
“내가 굶을게.”
“안돼. 넌 굶으면 가장 곤란하니까 그냥 그 꼬마애 원래 자리에 두고와.”
“싫어.”
깊은 분노가 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래, 상대는 사라다. 저 약해 보이는 꼬마를 만난 시점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한숨을 깊게 쉬고 눈을 감았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더럽게 안풀리네, 시발.
의자를 뒤로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라의 손에서 꼬마애의 손을 억지로 낚아채었다. 순간 꼬마가 저항했지만 내 힘에 이기지 못해 어림도 없었다.
“엔!”
사라가 뒤에서 급하게 소리쳤지만 듣지 않았다. 꼬마애도 날 뿌리치기 위해 눈물섞인 눈으로 계속 반항했지만 그럴수록 내 힘은 더 강하게 이끌었을 뿐이었다. 그대로, 마트까지 데려간 뒤 안에 밀어 넣었다. 넘어지게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꺼져.]
[......왜 나한테만 그러는거야?......]
[내 알바냐? 멀리 사라지기나 해. 난 너 따위 돌볼 생각 없으니까.]
[아줌마도 똑같아!]
그러더니 마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 이걸로 된 거지. 나는 다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마트쪽으로 사라가 급히 지팡이도 두드리지 않으며 다가오고 있길래 그녀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걸었다. 아니, 걸으려 했다.
“이거 놔!”
사라가 크게 소리를 치면서 내 손을 강하게 뿌리친 것이다. 한 번도 그녀에게서 이런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치도 못할 정도였다. 햇빛 아래, 하얀색의 사라가 푸른 눈동자로 차갑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난 것이다.
“아이를 다시 데려와, 엔.”
“안된다고 했어.”
“아니, 데려와야 해.”
“사라.”
“네가 싫다면 내가 데려올거야.”
“사라, 말 좀 들어.”
“말을 들어야 할 건 엔이야.”
“말 좀 들으라고!”
다시 우리는 격해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사라가 한발 물러날 만도 했는데 그녀의 고집은 꺾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똑같이 나를 격하게 대하고 있었다.
“엔이야말로 좀 들어!”
오죽 크게 소리쳤으면 나조차도 입을 잠깐이나마 다물 정도였다. 그리고 그 틈으로 그녀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거기다가 상대는 아이야. 우리처럼 다 큰 어른도 아닌 어린아이란 말이야. 어떻게 넌 그런 아이를 보고도 내쫓을 수 있어? 우린 같은 사람이잖아. 크립톤같은 괴물이 아닌 사람이란 말이야.”
“닥쳐! 사라. 세상은 변했다고. 이제는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따위 없는 세상이야! 각자의 입을 챙기기도 힘들어. 우리도 마찬가지야. 아이라서 뭐? 어린아이라서 뭐 어쩌라는 건데?! 입이 늘어나봤자 우리만 힘들어. 그런것까지 감수하면서 저딴 꼬마애와 함께할 이유가 있어? 단지 같은 사람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족하지 않아. 다시 새겨줄까? 지금 세상은!......제 몫을 하지 못하면 그저 짐이 될 뿐이야.”
“......그래? 그러면 나도 짐이겠네.”
시발, 얘기가 뒤틀렸다. 순간 나도 아차 싶었다.
“난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언제나 너에게 짐이었겠네. 그동안 해주었던 위로는 모두 거짓말이었던 거야?”
“아냐. 그건.”
“아니라면 그동안 했던 말들은 뭐야? 엔, 넌 여전히 ‘서울의 마녀’인거야?”
급기야 사라의 입에서 나의 과거시절이 언급되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정말로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나를 덮었다. 왜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라고 답하는게 맞았다. 그래서 억지로 입을 벌렸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라가 머뭇거린 틈으로 다시 마트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바로 손을 뻗으며 붙잡으려 했지만 걸음이 나아가지 않았다. 사라가 싫어서? 절대 아니다. 그런데 왜 걸음이 나가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모르겠다. 난 그저 그녀를 지키고 싶은 것뿐인데.
“얘야.”
마트 안에 들어선 사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꼬마를 불렀다. 나와 대화 도중에 너무 격하게 말해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으며 꼬마를 찾아나섰다. 안에는 밟고 넘어질 것들과 부딪히기 쉬운 것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사라는 깊숙히, 안으로 들어갔다.
“.......젠장, 진짜.”
결국에 보다 못한 나도 걸음을 억지로 떼가며 옮겼다. 저대로 두면 분명 부딪히거나 넘어지면서 다칠 것이다. 그런건 나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따라서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야, 사라!”
이미 사라는 마트 안을 완전히 헤집고 있었다. 지팡이는 계속 두드리면서. 그녀의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잡았다.
“내가 다시 데려올 테니까 가만히 있어. 마트 안에서 니가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해.”
“싫어.”
거절당했다. 그것도 단칼에. 이미 눈동자에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내가 데려오겠다니까.”
“그러면서 무슨 짓을 하려고?”
완전히 불신하는 태도. 이미 ‘서울의 마녀’라고 밝혀진 마당에 아까 싸우기까지 했으니 이해 못 할 것까지는 없다만 내 속을 서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결국에는 안되겠다 싶어서 그녀가 들어가려는 쪽으로 내가 먼저 발을 들였다. 뒤에서 또 뭐라고 하기는 했지만 무시하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문이 하나 있었고 손잡이를 돌려 열자 아주 작은 창고가 나왔다. 양옆으로 뜯겨진 식품과 물품들이 난잡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 들어가기가 정말 좁은 곳이었다. 그 안을 한 손으로 밀면서 들어가야 했다. 내가 들어오길 잘했다. 사라가 들어왔다면 부딪히면서 어떻게 다쳤을지 모른다.
안도 마찬가지로 햇빛이 들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섰다가는 괜한 꼴만 당할 것이다. 아무튼, 이 망할놈의 잔재를 헤치고 들어가자 잽싸게 들어갔던 꼬맹이가 어디서 주운 코트를 덮고서 구석에 앉아있었다. 그 주위에는 어렵사리 뜯어먹은 것들인지 통조림들과 과자 봉지 몇몇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따로 옷은 보이지 않았고 속옷 몇 개가 더렵혀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악취도 장난 아니었다.
[야, 꼬맹이.]
[오지마!]
겨우 고개를 들이밀었을 뿐인데 이 썩을 놈의 꼬맹이가 자기 옆에 있던 파리채를 줍더니 내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있는 힘껏 때려와서 따가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아팠다. 손으로 막으면서 화를 냈다.
[망할 새끼야! 무작정 때리지 말라고!]
[아줌마도 똑같은 사람이야!]
[도대체 뭐가 똑같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우선 내 말을 좀 들어. 안 그러면 많이 화난 내 여자친구가 더 화낼 것 같거든?]
[싫어!]
“아, 시발 진짜!”
그냥 내 손으로 직접 끌고 나오기로 했다. 맞고있던 파리채를 빼앗아 옆에 던져버리고 꼬맹이의 팔을 잡고 끌었다. 꼬마는 악착같이 버티겠다고 힘을 주고서 눌러 앉았지만 내 힘이 더 우세여서 그대로 끌려나왔다. 곧바로 억지로 일으키고 옆의 잔재들을 치우면서 빛이 있는 밖까지 데리고 나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창고의 문 바로 옆에는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과 함께 지팡이를 이리저리 두드리고 있는 사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데리고 나온 꼬마를 바로 그녀의 곁에 보내주었다.
[아줌마 싫어!]
“엔!”
바로 한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바래서 데리고 나와주었는데 또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의 사라는 나도 알아가기 힘들었다.
“데리고 나왔어. 밥 하나 더 차릴 테니까 이제 돌아가자.”
“......”
사라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바로 닫았다.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닐 것 같았다. 꼬마는 사라의 판초자락을 꽉 잡으며 뒤에 숨어버렸다. 그러면서도 내가 또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까 고개를 조금 내밀며 쳐다보았다. 이제 모든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젠장할, 나보고 뭐 어쩌라고, 진짜.
사라는 내가 아직도 마트안에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꼬마애를 숨기려 들었다. 한숨을 쉬고 먼저 밖으로 나가 밥이 완성된 테이블로 향했다. 그제서야 사라도 천천히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꼬마의 손을 잡고서 밖으로 나와주었다. 정말로 늦어버린 점심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나 빼고. 완성된 밥을 한입 먹고 바로 일어섰다. 그리고 차로 가서 남은 식량을 체크하고 다가온 사라에게로 향했다.
“사라. 꼬맹이 것도 따로 차려놨으니까. 앉아서 먹어.”
“......엔은?”
“알아서 먹을거야. 어차피 신경도 안쓰겠지만.”
“.....”
이번에도 사라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는 꼬맹이를 자신의 자리에 앉혀주고 일회용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내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꼬맹이는 계속 눈치를 보다가 고픈 소리를 내고 급하게 먹기 시작했다. 몇 일 굶은 것인지 물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 행동의 소리를 들은 사라는 주환의 구역에서부터 내게 보이지 않던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칫.”
나는 식량 체크를 끝내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순간 꼬마의 숟가락질이 멈추었지만 먹으라는 눈치를 주고 사라의 손에 똑같은 일회용 숟가락과 밥과 햄 통조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먹어. 넌 굶으면 곤란해.”
그리고 난 자리를 잠시 떴다. 멀리 가지는 않았다. 사라를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은 전혀 없는 나니까. 저 꼬마애가 함정수단이 아니여서 당장은 이 근처에 약탈자 무리가 없겠지만은 지나가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습격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한 순찰이라고 보면 되었다. 동시에 사라와 꼬맹이가 밥을 먹는데 체하지 않게 시야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주변을 여러모로 돌아다니며 메뚜기같은 곤충들이 있으면 잡아다가 머리를 따고 씹어먹었다. 맛은 당연히 더럽게 없었다.
일단 주변을 둘러본 결과 딱히 이렇다할 습격자들의 조짐이나 크립톤, 돌연변이들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엄청 다행이지만 어째선지 뒷골이 서늘했다. 그래서 빠르게 테이블로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는 이미 둘 모두 밥을 다 먹은 뒤였다. 꼬마는 자신이 앉던 자리에서 사라의 무릎 위로 옮겨가 있었다. 원래는 내 배게나 다름없는 그곳에 허락도 없이 말이다. 이것만 해도 짜증나는데 할 술 더 떠서 사라가 꼬마을 부드럽게 안아주고 있었다. 서로 언어는 통하지 않을 텐데도!
“이름이 뭐니?”
[......어......그게.]
역시 통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통역이 필요했다.
[이름을 묻고 있는 거야, 꼬맹이.]
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꼬마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고 나를 힐끔 보자마자 사라에게 깊숙이 안겼다.
“엔.”
“미리 말하는데 난 니 말을 통역만 해줬어.”
“......정말이지?”
“정말이야.”
사라도 내 쪽을 바라보다가 꼬마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효과가 있던 것인지 꼬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머리를 내밀었다.
“괜찮아. 험한 사람이기는 해도 언니랑 있으면 해코지 하지 않아.”
그제서야 꼬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알려주기 싫으면 말고.]
[......코ㅇ..]
[뭐라고? 안들려. 크게 말해봐.]
[카노 코에, 에요]
“카노 코에.”
‘목소리’를 일본어로 한 이름이었다. 앞은 성씨인데 잘 모르겠고 이름만 번역한다면 그렇다. 얘네 부모님이 어지간히도 목소리 같은걸 좋아했나 보지.
“사라. 꼬맹이 이름 ‘코에’야.”
“코에......”
사라도 꼬마의 이름을 한 번 읊었다. 그녀가 부르는 어감과 내가 부르는 어감의 느낌이 꽤나 달랐다. 그래서인지 꼬마는 나보다 사라가 불러주는 이름에 더 반응을 보였다. 그게 또 짜증났다.
“안녕, 코에. 나는 ‘사라’라고 해.”
[사라?]
“응, 사라.”
이건 또 통역을 안해줘도 용케 알아듣네. 머리가 나쁜 꼬맹이는 아니었다.
“엔. 이 아이가 왜 여기에 혼자 있었는지 물어봐줘.”
“그건 또 알아서 뭐하게?”
“이상하니까. 엔은 그렇게 생각안해?”
전혀. 세상이 이렇게 된 판국에 꼬마애가 혼자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밀지 않았다. 사라가 있으니까.
“하......”
일단 나도 자리에 앉았다. 다리가 아프다. 2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로 어째선지 몸 여기저기가 뻐근한 감들이 많았다.
[코에. 넌 왜 여기에 혼자 있던거지? 부모님이라 어른은 어디있어?]
어두워지는 눈, 숙여지는 고개. 아, 어디서 많이 봤던 모습인데.
‘산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아.’
그래, 옛날의 내 모습하고 비슷해 보였다. 어디까지나 비슷했을 뿐, 겹쳐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엄마랑 아빠는 괴물이 데려갔어.]
크립톤한테 당한건가.
[다른 어른들이나 사람들은 없었냐?]
[아저씨들이랑 아줌마들이랑 같이 왔었는데, 나보고 마트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었어. 그런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
[몇 일?]
몇 시간도 아닌 몇 일이라고 묻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꼬마가 지낸걸로 보였던 그 창고 안, 굴러다니는 통조림과 속옷들만 보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3일.]
[호오.]
3일 동안 기다렸다는 건, 이 꼬마가 혼자서 버틴 시간 역시 3일이라는 소리인데 어떤 의미로 대단한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 크립톤으로부터 살아남았으니까.
우선 정리를 해보았다. 이 꼬마의 말들을 종합해보자면 부모님은 크립톤에게 죽었고 어디서 같이 지낸 건지는 파악이 되지는 않다만 버려진 것이다. 어른들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지만 3일이 지나서 그 누구도 오지 않을 것만 봐도 답은 나온다. 뭐, 아니면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른들은 정말로 데리러 오려고 했는데 중간에 사고를 당했다던가. 하지만 아까 꼬마는 내가 내쳤을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아줌마도 똑같아!’ 라거나 ‘아줌마도 똑같은 사람이야!’ 라고. 나 말고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어느정도 차별을 받았거나 내쳐졌다는 소리다. 이상할 건 없었다. 섹터에서, 그것도 부모님 없는 아이에다가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니니 버릴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세상이다.
자, 이걸 사라가 과연 받아들일까. 그녀에게 있어 이 이야기는 그저 잔혹하기만 할 것이다. 내가 머물던 곳에는 고사하고 이런 이야기조차 거북해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사라였다. 하지만 말 않고 가만히만 있으면 또 내가 의심만 받겠지. 안그래도 최악인 지금의 우리 사이에서 더 안좋게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라, 이 꼬맹이, 버려진 애야.”
“버려졌다니?”
“말 그대로야. 부모님은 죽었고 얘를 키우던 곳이 캠프인지 섹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데리고 있기를 거부한거지. 거기다 3일, 그 시간동안 이 꼬맹이는 혼자 여기에 있었어. 어른들이 데려오겠다고 말하고지난 시간이야. 이정도면 상황파악 되지?”
“......역시 이해할 수 없어.”
“니가 바라던 ‘이해’는 이제 없어. 이게 ‘현실’이야. 오래전부터 케케묵은 채 기다리고만 있던 개같은 세상이란 소리지.”
“엔, 이 아이.”
“안돼.”
빠른 거절. 그만큼 사라의 다음 말은 무척이나 뻔했다. 그녀의 성격이나 마음씨는 지겹도록 봐왔으니까. 그러니 더더욱 안되었다. 우리의 식량과 식수, 앞으로의 여행을 생각한다면 이런 꼬마를 데리고 다닐 여유가 없었다. 사라가 정을 붙이기 전에 빠르게 떼어내는 게 맞았다.
“사라, 우리 상황 잘 알면서 그래? 여유 없는거 너도 알잖아.”
“어린아이야, 엔. 혼자서 헤쳐나가지 못하는 아이란 말이야. 도와줘야 해. 안그러면 여기서 죽고 말거야.”
“그게 뭔 상관인데?”
“엔!”
“사라!”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만큼 우리를 격앙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이나 이러는지 모르겠다. 코에는 시끄러운지 두 귀를 막고서 사라를 올려다보며 품에 더 안겨갔다. 두 작은 손으로 그녀의 판초를 꼭 잡아 쥐었다.
“우린 사람이야. 다른 섹터들처럼 그런 괴물들이 아니야. 엔, 아무리 너라도 이런 아이한테 베풀 마음 정도는 남아있지 않아?”
“없으면 어쩔건데? 살아남는 것에 있어서 필요한 건 ‘양심’따위가 아니야!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생존이야. 너도 지금까지 여러번 겪어봤으면서 그래? 도대체!......언제까지 그런 어린 생각으로 살아갈건데......”
“......겪어봤으니까, 다쳐보기고 하도 마음도 상해봤으니까 나 하나라도 지켜야 하는 거야. 엔, 너도 봤잖아. 너의 말처럼 모두가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거. 태영씨도, 송혜선생님도 모두를 위해서 힘썼어. 그럼에도 살아남았어.”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저 운이 아니야. ‘혼자’가 아닌 ‘모두’와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거야.”
“지랄하지마. 태영새끼의 섹터도, 송혜의 섹터도 내가 싸워서 이뤄낸거야. 아니야?”
“모두 도왔어. 엔의 활약이 크긴 했지만 태영씨랑 송혜선생님도 작게나마 활약했기에 가능했던 거였어.”
“하? 착각이야. 애초에 그 두 새끼는 내가 없었으면 진작에 죽었어.”
“아니, 우리도 죽었겠지.”
“후......시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릿속 어딘가의 끈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아, 멈춰야 한다. 안그래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