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Greed (Don't Hate Me. Shara) - 9
“있잖아, 삼촌.”
“응?”
별장이었다. 삼촌과 함께 휴가를 가지고서 놀러오게 되었다. 내가 삼촌 밑을 떠나기 전에 둘이서 ‘가족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놀러오게 되었다. 해외까지는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던산 속의 별장에 도착했다.
“삼촌은 나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네.”
맞다. 뜬금없다. 하지만 삼촌과 함께 하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냥 물어보았다. 조카가 이정도 묻는건 상관없겠지.
“음......말 더럽게 안 듣는 문제아 정도?”
“뭐야, 개썅년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조카한테 어떻게 그런 소리하냐. 이거나 필래?”
그는 내게 담뱃갑을 건넸다. 한 개비 꺼냈다가 역시 담배는 싫어서 저 멀리, 마당에 던져버렸다.
“야! 비싼거야!”
“어쩌라고. 목숨 좀 늘려줬으면 감사해야지.”
“아이고! 내 담배!”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이왕 산에 온 거 구경이나 해봐야지.
“야, 진영아. 이거 들고가.”
그런 나를 삼촌이벌러덩 누우면서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지갑을 내게 던졌다. 현금이 두둑한 지갑이었다. 카드도 상당수가 들어있었다.
“올 때 술이랑 고기도 좀 사오고 나머지는 적당히 쓰고 돌아와. 다시 말하지만 적당히 써라. 알겠냐?”
“그걸 믿어?”
바로 잽싸게 달려나갔다. 별장에서부터 삼촌의 뒤늦은 외침이 들렸지만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조금 떨어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돈도 생겼겠다, 왕창 놀고 올 생각이었다. 저녁 먹기 전까지만 들어가면 되니까 시간도 넉넉했다. 이제 막 점심이 되어가려던 참이었다.
일단 여긴 도시는 아니었다. 뭐, 웬만한 상가나 건물들은 있었지만 도시까지는 아니었다. 지금 삼촌의 별장도 마을에서 떨어진 시골단지에 있는 별장이었으니까. 버스는 서울보다 엄청 늦게 도착했고 그런 불편한 교통수단을 타고서 사내까지 나갔다, 첫 번째로 어디로 향할지는 이미 눈여겨 본 곳이 있었다. 결국 이런곳에도 빡촌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다만 낮에도 오픈할 지가문제였는데 도착하자마자 문을 두드려본 결과 나를 비웃듯 닫혀있었다. 바로 욕이 튀어나갔다.
“시발! 내 섹스!”
주위의 시선이 내게 향했지만 좆까라 하고 일어서서 방황하듯 걸었다. 젠장할, 오랜만에 건전하게 좀 즐기려고 했는데 내 계획이 시작부터 꼬이고 말았다. 두 번째는 미리 정하지도 않았는데. 목적없는 나그네처럼 걷다가 시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안에는 여러 잡물품들과 촌스러운 옷, 안경점이 있는가 하면 수산물부터 정육점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그 중 분식이 보이길래 점심도 안 먹었겠다, 그곳에서 떡볶이랑 오뎅을 씹으며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삼촌은 알아서 먹겠지.
점심을 먹고 나서는 PC방이나 당구장 같은 곳들을 찾아봤지만 도시만큼이나 시설이 좋은 곳이 없어서 포기,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아무것도 못한 채 마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질 좋아보이는 고기들과 소주, 쌈 싸먹을 야채들을 샀다. 2명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양이었다.
봉투에 모두 집어넣고 다시 버스를 탄 채로 돌아가자 삼촌의 별장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신음소리였다. 그것도 방 안이었다. 현관문이 아닌마당의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 방해를 하기 위해서였다. 사온 것들을 주방에 놓고 바로 옆에 있는 삼촌의 침실의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셋을 세고서 강하게 문을 열어 재꼈다.
“삼촌! 뭐해?!”
일부러 엿먹으라고 크게 소리쳐주는 건 덤이었다. 그런데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난 분명 또 미리 꼬셔둔 여자를 불러서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날 보고 여자가 기겁을 하고서 도망가고 삼촌이 열받은 표정으로 빡쳐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어라? 안녕, 노중위. 오랜만이네.”
시발, 아는 여자였다. 삼촌의 밑에서 군번없는 용병으로 일하다가 만난 여자. 똑같은 일을 한 건 아니지만 주로 보급품을 담당하고 삼촌 다음으로 날 짜증나게 만들었던 그 여자였다. 이름도 짜증나게 내 이름과 비슷한 ‘최진연’이었다.
“아줌마가 왜 여기에 있어?”
“너야말로 문을 확 여는거 아니지 않아? 하하!”
거기다 성격도 더럽게 호쾌한 여자라서 더욱이 짜증나는 여자였다. 덕분에 삼촌은 나를 힐끗 보다가 내가 보는 앞에서 한 번 싸고 천천히 팬티를 주워입고서는 사온 것들을 정리했다. 여자는 삼촌이랑 떡친걸 자랑하는 건지 똑같이 속옷만 입고서 앞으로 다가와 허락도 없이 머리카락을 만져왔다.
“스위스에서 고생한 것 치고는 멀쩡히 돌아왔네.”
“왜? 콱 뒤져버렸으면 했냐?”
“그건 아니고~”
그녀는 남의 별장 냉장고에서 멋대로 주스를 꺼내 마시고는 내 뺨까지 만져대면서 완전히 가지고 놀 생각을 했다. 권총이나 칼만 있었다면 바로 들고서 반쯤 죽여버렸을 것이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진심이라고는 1도 안느껴지는데.”
“정말 까칠하다니까.”
“그럼 나가!”
“안그래도 그럴 거야. 난 할 일들이 있어서. 그럼 먼저 가볼께요, 사령관님. 다음에 또 해요.”
“여! 잘 가!”
“오지마!”
떠나는 뒷모습까지 소리쳐주고 이를 갈았다. 다시 내 눈앞에 보이면 그 때는 진짜로 주먹부터 날릴 생각이었다. 삼촌 밑에 있었을 시절때야 그 빌어먹을 짬밥관계 때문에 크게 지랄을 못했지만 곧 있으면 난 그곳을 떠날거고 계급체계도 사라지니까 얼마든지 지랄을 할 수 있었다. 내 스트레스는 여자가 떠나자마자 바로 삼촌에게로 향했다.
“다음부터 저 여자, 내 앞에 데려오지마!”
“네가 일찍 올 줄은 몰랐지.”
“이게 일찍이야? 해진거 안보여?”
“하하하! 나도 남자라서 말이야.”
“고기나 구워!”
봉투에서 고기가 담긴 비닐팩을 들고 던졌다. 그는 여유롭게 받아서 바로 프라이팬을 꺼냈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내가 야채를 씻었고 삼촌이 고기를 구웠다. 저녁상이 완성되어서는 바로 술을 마셨다. 잔따위는 필요 없었고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소주가 마음에 들었다.
“진영아.”
그러다 삼촌이 갑자기 분위기를 잡더니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것처럼 나를 불렀다.
“왜?”
“넌 이제 뭘 하거냐? 내 밑에서 떠나면.”
“뭘 할거냐니. 서울로 돌아가야지.”
“돌아가면?”
“그 언니네에서 또 몸 팔다가 알아서 지내겠지 뭐.”
“흠......그래. 그렇구만.”
그러고는 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있잖냐. 넌 다른 여자애들처럼 평범한 여자애들처럼 평범한 가정집 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냐?”
“없어.”
단칼에 대답했다.
“왜?”
“그런거 살아보고 싶다고 백날 말해봐야 지금 내 인생이 변하는 것도 아니잖아.”
“하하하! 역시 내 조카답네!”
“웃겨?”
나름 진지하게 답해줬는데 웃어버리니까 기분이 나빠졌다. 차마 삼촌이라서 술병을 들고 휘두를 수는 없었다. 내가 꾹 참기로 했다.
“엔.”
그런데 또 갑자기 본명이 아닌 내가 바꾼 이름으로 날 불렀다. 거기다가 분위기도 달리했다. 아까는 무언가 쓸쓸한 미소와 함께 했다면 지금은 정말로 진지한, 싸움에 임할 때나 보이던 삼촌의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순간 긴장했을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이제부터라도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해.”
그러고는 내뱉는 말이 남들처럼 살으라는 말. 웃기네.
“애초에 사람답게 사는게 뭔데?”
“평범.”
“그러니까 그 평범한게 뭐냐고.”
“살다보면 알겠지.”
“그래? 그런데 말이야, 난 알고 싶지 않아. 이미 내게 평범한 삶 따위 올 리도 없고 사람답게라기에는 멀리 왔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그게 이 사회란 놈들이 만든 기준이잖아. 안그래?”
“.......하하.”
또 그는 웃었다. 하지만 받아칠 힘이 없었다.
“그렇네.”
“그러니까 고기나 먹어. 식으니까.”
“그래, 그러자.”
우리는 이후 계속 술을 들이부었고 남은 고기들을 먹었다. 내일이면 난 떠날 채비를 갖추고 며칠 뒤에 완전히 삼촌 밑을 떠나게 된다. 이후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서울로 가서 그 언니에게로 다시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게 내 인생이라고생각이 들었다. 물론 중간에 계획이 바뀌어서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 말고는 다른 방향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인생’에 대해서 궁금증이 들었다. 도움은 안되겠지만 눈앞에 있는 삼촌에게 물었다.
“삼촌. 애초에 인생이라는 게 뭘까?”
“응?”
“말 그대로야.”
“인생이라. 지금의 너에게는 어려울 거지만 뭐, 살다보면 알게 될거야.”
“아까 대답 우려먹는거 같은데.”
“아니, 정말로. 살다보면 언젠가 알게 될거야. 그러니까 일단 살아.”
“좆같아도?”
“응, 좆같아도.”
그리고 우리는 차례로 쓰러졌다. 먼저 술에 개가 되어서 뻗은건 삼촌이었고 다음은 나였다. 그대로 푹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 날, 나는 다시 서울로 향하게 되었다. 19살이라는 나이에.
“다 비켜! 용혁씨 불러와, 빨리! 뭐해?! 너네! 당장 텐트에침대 깔고 의료품 싹 다 가져와!”
“예! 형님!”
“남은 놈들은 아침까지 이 구역 방어벽에 모두 배치해서 경계한다. 크립톤 한 마리도 들이지마. 알겠어?!”
“예! 애들 배치하겠습니다!”
주환씨가......다급하게......크게 말했다. 하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나를 업고서 달리고 있는 그의 급박한 목소리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서 점점 이성을 놓고 있는 나였다.
“나 불렀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이 여자, 당장 치료해. 어서!”
“상태가 말이 아니군. 지금 나랑 농담하자는 건 아니겠지?”
“치료하라고 했어.”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지금 어떤 모습들이 오가는지 소리를 들으면서도 머리로 그려가지 않았다. 아니, 그리기 싫었다. 분명 이건꿈일 것이다. 절대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엔이 평소처럼, 언제나처럼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상처가 심한 정도가 아니야. 몸 일부가 그냥 날아갔어. 살리지 못해. 이 여자는 죽어.”
“아니, 당신이 치료하기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문제지. 마지막으로 말하지. 치료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 다음이야.”
“고얀 놈. 의료품은 다 들고왔나?”
“형님! 가져왔습니다!”
“세팅해!”
공기가 무거웠다. 주환씨가 날 어딘가에 앉히고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다른 발소리들도 들려왔지만 어떤게 누구들 것인지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엔의 목소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다시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엔은 항상 돌아왔으니까. 위험하니까 나를 잠시 내버려둔 것이다. 그러니까 돌아올 것이다.
“엔.”
“의식조차 잡지 못해. 심장이 멈추고 있어. 애초에 무리야. 포기해.”
“피가 부족한가? 아니면 뭐가 부족하지? 마취제라도 들고오면 되겠나?”
“고집 그만부려! 애석한 놈. 더 이상 들어주지도 못하겠군. 다시 말하지. 이 여자는, ‘엔’은 죽었어!”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엔은 죽었어.’ 그 말만이 내 머리를 헤집으며 멤돌았다. 아니었다. 엔은 죽지 않았다. 그저 많이 힘들 뿐이었고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절대로, 절대로 죽지 않았다.
“형님......”
“이봐, 숨은 붙여둘 수 있겠지?”
“그래도 죽는다.”
“상관없어. 숨만이라도 붙여줘.”
“아니야!”
모두가 숨죽이고 대화소리를 죽여가는 가운데 내가 외쳤다.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외쳤다. 지금 내 귀로 들리는 이 모든 상황은 거짓이었다. 모두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엔은!......엔은 죽지 않았어. 많이 다쳤을 뿐이니까, 치료해줘요. 제발요. 부탁할게요. 제발......”
누군가 일어서려는 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아파올 정도였다. 두 손목 모두 붙잡혀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다리를 움직이는게 전부였다.
“......여기 있는 모두 듣도록. 엔을 치료한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다가 숨이 끊어지면......무덤자리 하나 정도는 마련해주도록.”
“안돼! 아니야! 엔은.”
“현실을 직시해라! 엔은 살리지 못한다. 네가 그렇게 부르던 엔은 ‘낚시꾼’과의 싸움으로 상처를 크게 입었어! 의사도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저꺼져가는 숨을 조금 미루는 게 전부다. 알겠나? 엔은!......죽는다.”
“아아......”
날 붙잡던 강한 힘이 사라지고 나의 몸이 흘러내렸다. 무릎으로 차가운 땅이 느껴져 오고 고개가 아래로 내려가는게 느껴졌다. 주환씨의 목소리가, 말했다. 엔은 죽는다고. 아닐거라고, 거짓말일거라고 계속 부정하던 나의 생각들이 급격하게 사라져가며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엔은......
“용혁씨가 치료하는 동안 너희들은 텐트 밖을 지켜라. 그 누구도 들이지 말도록.”
“예!”
“넌 나와 가지. 이곳에서 소리만 질러봐야 방해다. 치료가 어느정도 끝나면 엔의 옆에 있게 해주겠다.”
다시 손목이 잡히고 강제로 걷게 되었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뜨거웠던 공기가 달라졌다. 차갑게, 아주 차가운 공기로 변해서 나를 괴롭혀왔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이제는 나의 모든 생각들을 차지해버렸다. 힘없는 걸음이, 계속 쓰러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듣기 싫었다. 이제 어디로도 가기 싫었다. 그녀는 나를 구하려다가......
“나......때문이야.”
“무슨 소리지?”
그렇다. 모두 나 때문이었다. 엔이 죽은 건 나 때문이다. 주환씨의 말도, 나를 인질로 잡았던 엔의 스승이라는 사람의 말이 모두 맞았다. 나라는 ‘짐’ 때문에 엔이 죽은 것이다. 내가 없었더라면 엔은 나를 구하려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밤시간에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죽인 것이다. 내가 엔을 죽였다. 두영오빠의 말도 따라 들어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내가 원인이었다. 그 결과가 엔의 죽음이었다.
“내가.....죽였어....내가!”
잡혔던 손목을 강하게 뿌리치고 다시 땅과 마주했다. 이제는 몸에 힘을 넣는것 조차 싫어졌다. 그냥 나 자신이 싫어졌다. 적어도 앞이 보였더라면 달랐을까? 애초에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엔은 그때 날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는 조용히 지나갔을 것이고 이런 결말따위 맞이하지 않았을 테니까. 차라리 그런 끔찍한 일들을 계속 당하면서 잡혀 있어야 했다. 그게 맞았다. 나는....내가 엔을 죽인 것이다.
“내가....엔을.....죽인거야.”
“......미치겠군.”
죽고싶었다. 난 이미 살인자나 다름없었다. 내가 존재했기에 엔이 죽었으니까, 난 살인자였다. 그저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이다. 어떻게 일이, 어떤 일이 있었든 내가 죽였으니까 나는, 엔을 죽인 살인자다.
“내가.....내가......내가! 내가!”
“진정해라.”
두 손으로 머리를부여잡고 미쳐버릴 것만 같은 내게로 주환씨의목소리가 낮게, 아주 낮게 흘러들어왔다. 잠시나마, 조금밖에 남지 않은 이성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소리가 들려온 위로, 고개를 들었다. 달빛 때문일까, 빛이 느껴져 왔다.
“슬픈가? 엔이 죽는게.”
“......그걸 말이라고....하는 거에요? 엔이 죽는다구요. 저 때문에 엔이!....죽는단 말이에요.”
“들어라.”
그가 내 두 손을 머리에서 천천히 떼어내고 숨결을 가까이 했다. 진정되지는 않았지만 내 귀를 기울이게 했다.
“난 위로같은 것에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남들의 생각을 바꿔줄 수는 있지. 넌 엔이 죽는다고 해서 슬퍼한다고 말했다. 그건 엔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너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보통 선량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너에게서 그 사람은 엔일테고.”
“엔은 사람들을 구했어요.”
“맞다. 조금이지만 얘기를 들었지. 그중에는 너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가 과거에 사람들을 죽였다는 건 알고있나?”
“......모르지는 않아요. 하지만 엔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했어요. ‘군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그건 너만의 착각이지.”
“네?”
이야기가 점점 바뀌고 있었다. 분명 엔에 대한 얘기인데 불안감이 다가왔다. 왜?
“넌 ‘군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를 좋아하나?”
“그런 나쁜 사람들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 그 속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있지. 실제로 넌 날 싫어하고 있고 말이다.”
“뭘 말하고 싶은 거에요?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요. 날 가만히.”
“미안하지만 그건 안되겠군. 엔에게 약속을 받아서 말이지. 자신이 죽으면 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널 보살피라고 했다.”
“엔이, 그런 약속을?”
몰랐다. 엔은 이런 와중에도 날 감쌀 생각만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난 ‘짐’밖에 되지 않아서.
“헌데 이대로 내버려두면 스스로 죽는 것도 서슴치 않을 것 같군. 그러니 난 그녀와의 다른 약속을 어겨서라도 널 살려야겠다.”
“말할거면 그냥 말해요!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구요!”
“좋다. 말해주지. 넌 분명 살인자를 싫다고 했다. 그럼 너의 엔에 대한 슬픈 생각을 바꿀 수 있는데는 충분하지. 잘 들어라.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다.”
“진....실?”
“엔, 그녀는 ‘낚시꾼’의 딸이자 한국 최악의 살인마이며 전 세계에서도 노리고 있던 희대의 살인마.”
......설마......아닐거야. 지금 이 남자는.
“서울의 마녀다.”
“아, 시발.”
첫 마디였고.
“눈 아프네.”
두 마디였다. 날아갈 듯 편안해졌던 느낌이 사라지고 서서히 빛이 느껴져 왔다. 감겨있는 나의 두 눈으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참 좆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눈을 떳다. 빛이 느껴져 왔길래 뭔가 엄청 밝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의외랄까, 빛이라고는 옛날 느낌이 진하게 느껴져 오는 등들이 전부였다.그것도 높고 높은 책장에 붙어서.
“......시발?”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의 불빛들 아래로 아예 벽을 쌓은 것처럼 책장들이 높게 서 있었다. 더불어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고 내가 모르는 언어들로 제목들이 적혀져 있었다. 여긴 어디일까. 그전에 난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조금 뒤,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면서 쓸쓸하게 웃게 되었다. 난 죽었다. 사라를 구하기 위해 아빠새끼랑 싸우고나서. 그렇다면 여긴 지옥인가? 그런것 치고는 너무 고풍스러운 곳이다. 그리고 같이 뒤졌을 아빠새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마저도 마주쳤다면 기분 더러웠을 텐데 다행이었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책장과 수많은 책들 뿐이었다. 주황색의 등불이 내 모습을 비추면서 조용히 밝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게도 변화가 있음을 깨달았다. 옷이 바뀌어 있었다. 아빠새끼를 죽이기 위해 갈아입었던 옷이 사라지고 내가 즐겨입던, 정확히는 ‘마녀’라고 불리던 시절에 입고 있었던 남색의 후드자켓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은색의 바지는 덤. 자른 머리카락은 그대로였다.
“흠......”
걸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이 안을. 가만히 있는다고 뭔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고 내 성격과 맞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비록 총과 나이프는 없지만 아직 주먹이 남아 있어서 이상한게 나타나도 후드려 패면 되겠지. 그래봐야 성경에서 나왔던 괴물밖에 더 있겠냐만은. 거기다 이미 죽은 몸이라 한 번 더 죽지는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단점이 있다면 내 옆에, 내 손을 따스하게 잡았던 사라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 마지막 사랑을 나누지 못했는데. 미련이라면 미련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그녀를 구했고 살렸으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애초에 죽을 것도 각오한 일이었고.
조금 걸으며 책장으로 이루어진 미로를 탐험했다. 여전히 빛은 등불들이 전부였고 책장 외에는 따로 보이는게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가 누워있던 곳처럼 조금 넓은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열린 문 너머로 책상이 보였다.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여기는 절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 나타났다. 나의 머리 위, 높은 책장들 사이에서 꽤 많은 책들이 펼쳐진 채로 붕 떠 있었다. 아래에 받침이라던가 그런건 아예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마법이었다. 이것 참, 여기 지옥맞아?
“놀랐어요. 설마 여기로 불려올 줄은.”
바로 몸을 돌렸다. 내가 들어왔던 문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군청색의 코트에 검은색의 바지를 입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기억에 없는 남자였다. 그리고 어째선지, 무기를 들고 있는 것도 체격이 다부진 것도 아니었는데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여기 주인이야?”
“주인......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여기도 제 공간 중 일부니까요.”
조금 머리가 이상한 놈인 것 같았다.
“그럼 무슨 지옥인지 좀 설명해줄래? 나 방금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손님이니까.”
“지옥?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하하.”
지옥이라는 말에 그가 웃었다. 솔직히 면상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다.
“여기는 지옥이 아닙니다. 엔씨.”
“너 진짜로 뭐하는 놈이냐?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도 알고있고. ‘신’이야?”
“아니요. 저는 그런 거창한 존재가 아닙니다.”
청년은 천천히 내게 다가오다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어 펼쳤다. 그리고 몇 문장을 읽고 난 뒤 나를 바라보고서 미소를 짓고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작가’입니다. 문장을 쓰며 세계를 만드는 ‘지켜보는 자’입니다.”
“‘작가’? 소설쓰는 작가? 장난하냐?”
얼탱이가 없었다. 죽어서 만난 알 수 없는 첫 사람이 자기소개랍시고 한다는 게 ‘작가’라니. 말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장난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가 지옥이 아니라고 했지? 그러면 여기는 어딘데? 글쓰는 놈이 있다니까 뭐 자기 개인 서재라기라도 해? 그러면 칭찬해줄게. 어떻게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렇게 책도 떠나니게 하는거 보면 마법같은 것도 겸하고 있나보네.”
“예상을 했지만 말이 많으시군요. 하하.”
거 기분 더럽게 웃네.
“천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앉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청년이 손가락을 튕겼고 순간 시야가 뒤틀리더니 우리는 이 방에 있던 책상을 사이에 두고서 마주보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의자에 앉아있었고 눈앞에는 따뜻한 커피가 놓여져 있었다. 혹시 환상은 아닐까 하고 만져보지만 진짜로 커피가 든 머그잔이었다. 이 새끼, 절대로 글따위나 쓰고 있는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위압감이 느껴졌던게 이해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총이든 칼이든 들고 있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이기에 우선은 조용히 앉기로 했다.
“우선 이곳에 대해 물으셨었죠? 원래는 당신이 들어오면 안 되는 장소입니다만, 이미 들켜버렸으니 알려드릴게요. 이곳은 모든 이들의 역사가 기록되는 서재입니다. 저는 단순히 그렇게 부르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기원의 서재’라고 부르고 있죠.”
“모든 사람들의 역사라면 내 것도 있겠네.”
“방금 펼쳤던 책이 당신의 것입니다.”
호오.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좆같은 과거도 기억하기도 싫은데 다시 읽는 건 더 그랬다.
“미래도 알 수 있냐?”
“예측뿐이지만, 물론입니다.”
그것 참 대단하네. 재미없게도.
“방금 네가 ‘불려온다’고 말했었는데 그건?”
“당신이 죽는 순간에, 제가 불렀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놀란겁니다.”
“불렀다? 너 분명 아까 신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
“네. 저는 ‘작가’입니다. 그저 지켜보는 사람이죠.”
“아무리 봐도 ‘신’인데.”
“하하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긴 하겠군요.”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따로 없습니다. 그저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간 존나 큰 새끼네. 무슨 얘기를 나누려고?”
“그러게요. 음......”
“이런 시발! 얘기 나누려고 불렀으면 생각을 해놔야 할 거 아냐?!”
“막상 마주보게 되니까 떠오르지가 않네요.”
“병신. 그러면 내가 좀 물어봐도 되겠지?”
“그것도 좋겠네요.”
내 말을 시작으로 스스로를 ‘작가’라고 말하는 이상한 남자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등불은 흔들림이 없었다.
“좋아. 우선 당신을 더 이상 ‘신’으로는 생각치 않겠다만 웬만한 모든 걸 알고있는 놈으로 생각하고 물을게. 난 죽으면 어디로 가는거지?”
“‘사후세계’에 대해 물으시는 건가요?”
“그래.”
“죄송하지만 그건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되거든요.”
“‘스포일러’? 존나 뜬금없는 말인거 알고 있지?”
“그런가요? 애초에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부터도 그 범주에요.”
“여기가 그렇게 대단한 곳이야?”
“원래 이곳은 저의 허락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전 당신을 신기하게 보고 있습니다.”
“신기할 게 아니라 대단한 미친년인거지. 하! 잘 기억해두라고.”
“과자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죽어서도 먹을 수 있는 거였냐? 그러면 좀 줘. 가능하다면 저 밑에 아직 살아있는 내 여자친구에게도 전해주고.”
“사라씨를 말하는 거겠죠?”
“새끼, 다 알고 있네.”
“직접적으로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 간접적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보통은 안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든 주겠다는 마음가짐이 아주 마음에 드네.”
“‘지켜보는 자’이기는 하지만 ‘전개’에 지장이 없는 범위라면 간접적으로나마 돕고 있죠.”
“돕는다라. 그러면 크립톤 새끼들 좀 족쳐주던가.”
“그건 간섭할 수 없는 범위입니다.”
“......야, 잠깐, 너 아까 자기소개 할 때 세계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었냐?”
“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니새끼가 크립톤을 만든거냐?”
“......의심을 받게되었군요. 해명하자면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온 세계의 크립톤은 오로지 그 세계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저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흠......그럼 됐어. 이미 간섭했다면 나같은 건 진작에 죽었겠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까 미래도 안다면서.”
“예측일뿐, 바뀌는 경우도 여럿 있습니다.”
“뭐야, 만능서재인 줄 알았는데.”
“기록을 할 뿐입니다.”
“그러면 그 새끼것도 있냐?”
“‘노길홍’씨 것을 말하는 겁니까?”
“우와, 생각도 쳐 읽고 있네.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