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Greed (Don't Hate Me. Shara) - 4
출발지점이었던 슈퍼마켓 근처로 돌아와 지붕만 날아간 정좌에 잠시 앉았다. 사라에게는 걷기 운동을 시키고 나는 지켜보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되새겨 보았다. 과거의 기억이든 뭐든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거라면 죄다 떠올려보면서 찾아봤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차라리 그 새끼의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사라가 어떤 한 전봇대에 이마를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멍청아!”
저 걸음 연습은 언제까지 해야 숙련 될련지. 하여튼, 반응이 너무 느렸다. 웬만한 일반인들은 지팡이에 뭔가 부딪히면 바로 피할텐데 사라는 어디가 문제인 걸까. 시각장애인들은 감각이 다른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영원히 모를 것 같았다.
부딪힌 사라의 이마를 확인하기 위해 정좌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보나마나 부딪힌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안그래도 가녀린 피부인데 계속 했다가는 정말 헐어버릴까 걱정되었다.
“이마 봐봐.”
조심히 그녀의 앞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보았다. 역시 자그마한 붉은 흔적이 있었다. 피는 아니고 피부가 조금 붉어진 것 뿐이었다. 혹이나 멍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당장 전봇대를 부숴버렸을 것이다.
“왜 이렇게 반응이 느린건데?! 진짜 멍청이냐고.”
“미안, 헤헤.”
“웃지마. 칭찬 아니야.”
“응......”
이쯤 할까. 걷기 운동도 시켰고 아빠새끼에 대해서도 도저히 답이 나오는 것도 없겠다, 다른 곳을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사라의 상처를 신경쓴다고 보지 못했던 물이 가득찬 논에 무언가가 나의시선을 가로채었다. 짙은 회색의 물이 가득한 수면 위로, 그것도 중앙에 크립톤 시체 하나가 모습을 조금 내밀고서 가라앉아 있었다. 등만 보면 모르지만 저 꺾여서 수면 위로 조금 튀어나온 앞발이 크립톤임을 알려주었다. 엄청나게 뜬금없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싸움이라도 벌였었던 걸까? 단순히 시체일 뿐인데 엄청난 위화감과 위험하다는 감까이 내 몸을 덮었다. 어쩌면 아빠새끼가?
“사라, 잠시만 여기에 서있어.”
논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고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근처에 있던 길고 큰 나뭇가지를 주웠다. 시체를 건드려보기 위해 몸을 숙이고 팔을 뻗었고 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수 있었다. 그대로 툭툭 건드려보지만 아무 반응도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로 주황색의 점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냥 시체일 뿐인건가. 괜히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수도.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가려 했는데 이게 안일한 생각이 되어 독이 되고 말았다.
‘첨벙!’
갑자기 탁한 물 안에서 두 손이 튀어나오며 내 목을 올가메었다. 지금까지 줄곧 기다려왔다는 포식자처럼. 동작도 빨라서 내가 반응을 했음에도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몸을 뒤로 빼려 해도 이미 늦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한 손으로 떼어내려고 했는데도 무리였다. 힘이 아니라 올가메는 손과 팔동작을 단단히 한 것이다. 그대로 물 속으로, 얼굴이 들어가고 말았다.
‘푸헉’
물속이긴 한데 탁한 물속이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목을 잡는 이 느낌, 몸이 단단히 새기고 있는 감촉이었다. 이 새끼, 설마 여기서 지금까지 잠복하고서 기다리고 있던건가. 충분히 그럴만 했다. 그는 ‘낚시꾼’이니까.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져 갔다. 그의 미끼를 물어버렸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발.
“엔?”
사라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대답해줄 상황이 되지 못했다. 의식도 꺼져가려 했다.
“엔!”
‘다가오지마, 사라.’
젠장, 한 팔로 이 올가미를 벗겨낼 수가 없었다. 철저한 나의 패배였다. 왜 이렇게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치 않았던 거지? 나의 실수였다. 남아있던 의식도 사라지며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 실수로나마 뜬 눈으로 그의 얼굴이 내 앞에 드러났다. 역시, 그는......아빠새끼였다.
무언가를 불에 태우는 소리였다. ‘탁탁’하고 불똥튀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리고 따뜻하다. 아침의 쌀쌀한 기운을 몰아내 줄 정도로. 그 이상함에 바로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프면서 점점 돌아오는 시야로 처음 보는 공간이면서 내게 익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공장. 무엇을 만들던 곳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폐공장이었다. 동시에 창고로 이용을 한 건지 몇몇 컨테이너들이 쌓여있는게 보였다. 용도를 모르겠는 기계들과 전기 관련된 장비들, 천장에 붙어있는 파이프들,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깨져있는 작은 창문들.
“시발.”
입은 제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 때문인가 하고 보니 내 다리에 여러모로 테이프들이 붙여져 있었다. 그런데 꽉 붙여져 있지는 않았다. 식상하리만큼 어중간하게 붙어있어서 다리의 힘을 이용해 떼어내 버렸다. 다음은 손목, 케이블 타이들을 연달아 이어 파이프에 묶어놓고 있었다. 역시 느슨했다. 제대로 묶어두려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일단은 좀 아프겠지만 이빨로 어느 정도 흠을 낸 뒤 힘으로 끊어버렸다. 그렇게 몸의 자유를 되찾고 바로 주위의 모든 것들을 경계했다. 이렇게 대충 묶어두겠다는 건 나를 지켜보겠다거나 가지고 놀겠다는 의미인데 어울려줄 생각 따윈 없었다.
“젠장, 사라.”
그런데 그것도 혼자 붙잡혔을 때 얘기지, 내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사라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나도 정말로, 그 새끼가 어디로 끌고 갔는지, 살아는 있는지 너무도 불안했다. 그렇다고 마냥 소리를 지르며 찾아낼 수도 없었다. 바로 위치가 노출되니까. 조용히, 빠르게 찾아 나서야 했다.
글록17을 뽑아 폐공장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동시에 탈출로가 있는지도 살펴두었다.
내 심장은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찾으려던 놈을 만난 건 좋은데 이렇게 빨리 마주할 줄도 몰랐고 이딴 최악의 상황으로 급반전 될지도 예상치 못했다. 6년, 그 새끼와 얼굴 안 보고 살은 지 6년이란 시간이 지난 데다가 도망을 잘 쳐서 찾는데 일주일 정도는 걸릴 줄 알았다. 그런 내 예상을 깨고 친히 마중을 나올 것은 깊게 생각치 않았다. 실수였다. 그래도 반대로 보면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놈을 하루 빨리 죽여버릴 수 있었다. 그거라도 만족해야겠지.
먼지 가득한 폐공장의 냄새는딱히 없었다. ‘사건’이 지나고 그냥 이대로만 쭉 이어져 온 것이다. 크립톤들 몇 마리 정도는 지나갔을 지도. 아무튼 그렇다.
기계의 숲을 지나서 먼지 잡초를 밟으며 나아가는 발걸음. 멀리 가지도 않고서 사라를 찾을 수 있었다. 천장의 유리에서 내려오는 햇빛을 받으며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그녀, 주위에는 컨테이너들이 울타리 마냥 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살아있었다. 다만 무사하지는 못했다. 무언가라도 당했는지 기운이 빠져보이고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왜지?’하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주사기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안돼, 사라!”
그녀는 나와 다르다. 상태가 정상이 아닐 것이다. 그 생각에 무작정 발이 뛰쳐나갔다. 사라를구하는게 우선시되었다. 눈이 멀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난 가장 기초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탕!’
총성, 그것도 나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뛰쳐나가던 발걸음이 꼬이고 세게 넘어지고 말았다. 총성과 함께 날아온 총알이 내 오른쪽 다리를 꿰뚫은 것이다. 그곳은 이미 한 번 다쳤던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피가 흐르며 욱씬거리는 고통이 몰려왔다. 누가 쐈는지는 볼 것도 없었다. 익숙하고 짜증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내 인생 최대의 원수, 아빠새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 가져갔는지 모자와 함께 낚시꾼들이나 쳐입는 조끼아래 운동복을 입고 짙은 회색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의 과거가 떠오를 정도로 역겨운 모습이었다.
“......엔?”
“사라!”
아픈 다리를 억지로 일으키며 몸을 지탱했다. 뒤지도록 아픈 것 뿐이지, 움직이지 못할 건 아니었다. 거기에 사라가 정신을 깼는지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옆으로 아빠새끼가 다가갔다.
“딸아.”
“개새끼가!”
총구를 겨눴다. 하지마 쏘지 못했다. 그도 총구를 겨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사라에게.
“재밌는 장난감을 들고 다니더구나.”
“총구 치워 시발새끼야!”
“난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특히나 이런 짐밖에 되지 않는 여자와 다닐 줄은.”
“치우라고!”
별다른 협박이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빠새끼는 다른 어중이들과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만 해도 사라를 죽일 것이다. 내 인생 최대의 궁지였다.
“당신이......엔의 스승인가요?”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못하며 서로 살기 가득한 눈빛만 주고받던 중간으로 사라가 끼어들었다. 지금만큼은 그녀가 아무 말 않기를 바랬다.
“호오, 나 알고있나?”
그는 사라에게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전혀 눈을 떼지 않았다. 역시 철저한 놈이다.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쏴버릴 생각이었는데.
“엔에게 들었어요.”
“흐음......아까부터 엔이라고 부르던데, 그네 지금 너의 이름이더냐? 진영아.”
“왜? 꼬와? 그럼 이름 좀 이쁘장하게 지어주던가.”
오랜만에 듣는 내 본명이 썩 달갑지 않았다.
“너의 이름은 뭐지?”
“......사라 리즈.”
“사라, 넌 왜 진영이와 함께 다니고 있지?”
“절 구해줬으니까요.”
“구해줬다?”
난 바라보던 눈빛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아무것도 없는 눈빛.
“재밌군. 네가 사람을 구했다? 왜 구했지? 길상이가 그렇게 가르쳤나?”
“알 거 없고, 니새끼야 말로 왜 그 논 안에 있었냐? 오랜만에 봐서 엄청 정겨웠나 보네.”
“어제 네가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주환과 합류하는것도. 그래서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곳에서.”
“참 눈물겹네. 그럴 시간에 도망이나 치지 그랬어.”
“오랜만에 내 딸을 만나는데 도망은 예의가 아니지.”
“그 예의가 시발 총부터 냅다 갈기는 거였냐?”
“테스트였다. 동시에 이 여자가 너에게서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도 알기 위해서였고.”
“신청도 안한 테스트한다고 아주 시발 고생 많으시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단히 실망했단다. 나에게 벗어난 것부터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몸에 총알이 박히는 걸 허용하더니.”
“총알? 엔, 설마 맞은거야?”
나중에 잔소리 존나게 듣겠네. 그렇더라도 지금만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해야 했다.
“어차피 총알 박히는 거 하루이틀 아니거든? 니가 날 그렇게 키웠잖아, 시발아. 겨우 이거 하나 쳐맞고 몸하나 못 움직일 것 같아?”
“해볼 생각인거냐?”
“정정당당하게 칼빵할래?”
“거절하지. 굳이 내가 유리한 것을 불확실과 뒤바꾸고 싶지는 않군. 오히려 난 오랜만에 만난 너와 오붓이 대화를 나누었으면 한단다.”
“그럼 그 빌어먹을 총구부터 치워!”
“그것도 거절하지.”
“시발......”
진짜 좆됐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를 주시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 방법이 없었다. 무언가 사용할 만한게 전혀 없었다. 최악의 수로 가야하나? 순순히 꿇고 들어가면 사라 정도는 그냥 보내줄지도 모른다. 그러자, 일단은 그렇게 하자며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무슨 속셈이지?”
“대화하고 싶다며.”
아예 글록을 바닥에 내리고 그에게 밀어주기까지 했다. 확실히 보여야 했다. 지금만큼은 내가 개기지 않을 거라고. 내 최후의 메시지였다. 통했을까? 그는 잠시 고민에 빠진 것처럼 표정을 짓다가 나처럼 천천히, 따라서 총구를 내려주었다. 일단은 안심했다. 사라가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안도하는 순간, 뒷통수를 맞게 되었다. 갑자기 그가 사라를 잡아 일으키더니 내 쪽으로 세게 던지는 것이었다.
“꺄아!”
“사라!”
던져진 그녀를 받기 위해 몸을 앞세웠다. 내 뻗어진 손은 오로지 그녀만을 받기 위해 움직였고 다행히도 바닥에 넘어져 상처가 생기기 전에 내 품 안으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내가 했던 말 중, 사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몸도 던질 수 있다고 했었다. 그 말을 본능적으로 지켜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아빠새끼가 바로 총구를 올리더니 정확히 사라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이미 손가락은 방아쇠에 올려져 있었고 궤도역시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말할 틈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빠르게 내 몸에 힘을 싣고 사라를 가리며 내 등을 내어주었다.
‘탕!’
총성이 폐공장을 울렸다.
‘컥!’
꽤 아프다. 당연하지, 총에 맞았는데. 그것도 정통으로.
“엔?”
눈을 순간 지끈 감았던 사라가 날 불렀지만 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급소는 피했지만 하필이면 허리쪽을 맞은 것이다. 이미 다쳤던 허리를.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남색의 후드자켓을 더 짙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사......라.”
“엔!”
이미 사라도 눈치채고 말았다. 제대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으니까. 따뜻한 온기의 두 손이 지금만큼은 피가 흘러 뜨거워진 내 몸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한 곳, 방금 총에 맞은 상처 위로 손이 멈추었다. 나의 피가, 이 더러운 피가 그녀의 손을 적셨다. 아빠새끼의 것이 섞인 끔직한 것이.
“엔, 설마.”
“가만히 있어, 사라. 아직 움직일 수는 있으니까.”
“안돼......”
아프다. 정말로 더럽게. 그래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단지 한 다리가 불편해지고 허리를 이용하는 큰 동작 정도만 못 할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라가 다치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만, 엔.”
“탈출 할 수 있으니까, 걱정마.”
사실 개소리다. 솔직히 탈출이 어려웠다. 내가 두 방이나 맞았고 그에 비해 아빠새끼는 너무도 멀쩡했다. 그래도 천천히 사라를 내 품에서 놓고 몸을 돌렸다. 그가 날 보면서 무표정하게, 눈빛은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고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끝까지 실망시키는 구나, 딸아.”
“난 기대 그 이상으로 완벽했어.”
“그 여자는 너헌테 대체 무엇이지? 내 가르침을 무시하면서까지 지킬 가치가 있는 정도인가?”
“가르침? 시발, 좆까. 착각하나본데 기분 더럽게도 니 새끼 가르침은 그대로야. 내 몸에 낙인 찍힌것 마냥.”
“그럼 왜 그 여자는 지킨거냐?”
“새로 배웠거든. 아무리 최악의 괴물새끼라도 소중히 하고 싶은 게하나쯤은 있다고.”
“변했구나.”
“아니, 이게 원래 나야. 변한건 세상이지. 그러니까, 이 이상으로 사라 건드릴 생각하지마. 모가지 날아가기 싫으면.”
“쓸데없구나. 지금의 너가 뭘 할 수 있지?”
“발악.”
“아무것도 없으면서 발악이라. 어울리지 않는군.나라면 그 여자를 방패로 삼아 도망쳤을 것이다. 너같이 그 여자 때문에 다치지 않고서.”
“닥쳐.”
“이름이 ‘사라’라고 했더냐. 하나 말해주마. 사라, 너 때문에 진영이가 크게 다쳤단다.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쾌하구나. 니까짓 년 때문에 내 딸아이가 이렇게 허술해지다니.”
“닥치라고!”
이 새끼, 쉽게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벌써 사라의 성격과 신념을 꾀고 있었다.
“나......때문에.”
“아냐! 사라! 저 새끼말, 듣지마.”
“하지만, 엔이.”
“시끄러!”
나도 모르게 무작정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이럴수록 침착해야 하는데 도저히 불가능했다. 총알 박힌 곳은 계속 내 정신을 갉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젠장할!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난 여기서 죽더라도 어떻게든 사라만큼은 도망치게 해야했다. 그게 급선무였다.
“사라. 내가 저 새끼 이목을 잠깐이라도 끌어볼 테니까 도망치고 있어줘.”
“싫어, 엔. 다쳤잖아.”
“닥치고 들어! 사라, 도망쳐.”
“그럴 수 없어.”
“꺼지란 말이야!”
억지로 사라의 몸을 돌리게 하고 밀쳤다. 컨테이너의 벽 중 유일한 입출구로. 당연히 아빠새끼가 그녀를 조준조차 못하도록 등으로 막아서면서. 그녀는 강제로 몇 걸음 벗어나게 되었다. 이쯤이면 제발 나가주기를 바랬다. 그런데도 사라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라......”
“난.”
“거기까지 하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검은 목소리. 본능, 감각, 모든 걸 싣고서 뒤로 나이프를 휘둘렀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막히고 내가 걷어 차이고 말았다. 배로 들어온 공격은 강했다. 지탱하던 중심이 무너지고 몸은 바닥을 굴렀다. 피가 흐르던 곳들에서도 핏방울들이 튀었다. 여기저기.
“정말 더 이상 봐줄 수가 없구나. 여자 한 명 때문에 자신이 죽어가는데도 감싸려 들다니.”
“큭, 아직!”
“일어서지 말거라.”
다시 걷어차였다. 몸이 구르면서 녹슨 컨테이너에 부딪히게 되었다. 아픈 곳들이 더 세게 쑤셔왔다. 가까스로 땅바닥을 짚으며 일어서지만 이미 제대로 싸우기에는 글러먹은 몸이었다. 글록도, 나이프도 바닥에 버려졌고 내게 남은 건 총맞은 몸과 주먹 하나, 그리고 짜증과 초조 뿐이었다. 그는 조금씩 사라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진영아, 내 딸아. 이 여자만 아니었다면 넌 무사했을 것이다. 다칠 일도 없이.”
“사라에게서......떨어져.”
“다시 가르칠 필요가 있겠군. 그럼.”
그가 권총을 들었다. 조준의 끝에는 사라의 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발새끼가!”
“다시 시작해 보자꾸나.”
‘탕!’
또 울리는 총성. 억지로 몸을 날려봤지만 총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이대로 끝난다고? 아니야. 아니기를 빌었다. 차라리 내가 죽어야 했다. 그녀는 역시 이딴 세계와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 차라리 서울에 계속 틀어박혀 있을걸 그랬나? 모르겠다. 그냥 이 상황 자체를부정하고 싶었다. 당장 내가 죽어도 되니까 부정하고 싶었다. 그게 지금, 내게 가장 바라는 소원이었고 마리아에게 바치는 내 기도였다. 그만큼 간절해서일까, 내게 찾아오려던 최악의 현실이 부정되었다.
“꽤 비겁하게 노는군.”
“......오랜만이구만.”
“글쎄. 오랜만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정겹지는 않아서 말이지.”
주환이었다. 어디로 들어온 것인지 그가 나타났다. 컨테이너의 위에서. 그리고 방금 총성은 아빠새끼의 것이 아닌 주환의 것이었다. 사라는 무사한 상태였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나? 또 왜 머리를 맞추지 않았지?”
아빠새끼가 총알에 맞은 어깨에 흐트려진 총구를 사라에게 재조준하며 물었다.
“너처럼 모든게 완벽한 놈은 아니지만 한 구석만큼은 완벽한 부하가 있지. 내 영역에서 모습을 비추고서 어딜 숨으려고? 머리를 맞추지 않은 것은 내 건강이 좋지 않았던걸 다행으로 여겨라. 너나 나나 늙은 몸이다.”
주환역시 총을 겨누었다.
“누구를 구하러 왔나? 진영이인가?”
“진영? 그게 엔의 이름인가 보군. 아무튼, 원래라면 네놈의 딸만 회수해갈 생각이었다만 거래조건이 있어서 말이지. 거기 있는 시각장애인 여자에게서 떨어져라. 그러면 우리도 한 번 물러나 주도록 하지.”
“우리?”
‘철컥.’
사라의 뒤에서 또 다른 장전 소리가 들렸다. 이미 아는 얼굴, 주환의 비서같은 존재라 자칭하고 나의 과거에 대해 들었던 남자, 손에는 한 발만 쏴도 머리정도는 가뿐히 날려벌릴 데저트를 들고 있었다.
“누님, 아직 살아있습니까?”
“......존나 반갑네.”
“무사하지는 못하군요,”
“알면 묻지마.”
“자, 어떻게 할테지? 낚시꾼.”
“흠......”
아빠새끼는 자신을 둘러싼 자들의 얼굴들을 보다가 마지막에는 사라의 얼굴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리고 대답을 내었다.
“거래하지.”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남기는 말 없이 쿨하게 물러나기로 했다. 그래도 총구는 여전히 사라에게로 겨누며 걸음을 뒤로 했다. 그렇게 조용히, 저 컨테이너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주환도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나의 앞으로 내려왔다.
“자, 그럼 우리가 큰 손해를 봤으니 메꿔주실까? 엔.”
“......칫.”
그가 말하는 손해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인정하기 좆같지만 그의 입장에서 사라가 다치든 말든 버림말로 사용했다면 충분히 낚시꾼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회를 날린 손해. 그걸 내게서 메꾸겠다고 말한 것이다. 원해 내 성격이라면 지랄을 했겠지만 지금만큼은 접고 들어갔다. 주환도 원래는 사라를 죽이려고 했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남자였으니까.
“엔.”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사라의 목소리. 그녀는 재빠르게 내게로 다가와서 뺨을 손으로 만져주고 있었다. 너무 따뜻해서, 아직도 따뜻한게 다행이라서 마음이 놓였다.
이후 우리는 폐공장에서 나와 아빠새끼가 잠시 뺏어탄 우리의 차를 타고 주환의 캠프로 돌아오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로 치료에 들어갔고 사라는 옆에 있겠다고 했지만 주환에 의해 강제로 격리당하고 말았다. 이것도 딱히 지랄하지는 못했다. 이제 내가 확실한 ‘을’이 되어버렸으니까.
“인생 좆같네. 시발.”
걱정거리가 늘었고 머리가 아팠다. 총알을 빼내는 과정도 마찬가지. 마취제가 없어서 맨정신그대로 부위를 째 빼내고 벌어져 버린 허리를 치료해야 했다. 이건 나도 한 순간 버티지 못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사건’이 터지고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좆같은 날들 중 오늘이 최악이었다. 자칫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사라가 죽을 뻔한 최악의 날. 동시에 내가 ‘을’이 되버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