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Greed (Don't Hate Me. Shara) - 3
‘아아악!’
제일 먼저 앞서오던 놈이 사람이나 내지를 법한 울음소리와 함께 달려 들어왔다. 그 녀석의 초점은 오로지 내게로만 향해 있었다. 뭐, 여튼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로 뭉개주었다. 휘둘러오던 발톱을 옆으로 비켜 피하고 머리를 베어주었다. 나의 나이프에 잘린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이어서 두 놈, 한 놈은 몸을 숙여 등을 이용해 잠시 뒤로 보내고 다른 하나도 머리를 잘라주었다.
‘아악!’
외팔이, 한 팔만 크립톤으로 변형된, 두 다리로 달려오던 놈이 자신의 굵직한 팔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저 무지막지한 힘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굳이 큰 힘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서 역시 옆으로 비켜 피하고 나이프를 한 차례 고쳐잡으며 심장이 위치한 가슴, 급소를 깊숙이 찔러 죽였다. 크립톤의 약점은 2개, 머리와 심장. 위치는 사람과 똑같아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잠시 뒤로 보냈던 놈이 달려 들어오길래 몸을 돌리며 정확히 머리를 차주고 남은 두 놈을 차례로 베었다. 아래에서 위로, 고쳐잡은 뒤 위에서 아래로. 이후 마지막으로 남은, 내 발차기에 나가떨어졌던 놈의 머리를 찍어내렸다. 특유의 주황색 피가 흘러나왔다. 사람의 피처럼. 더 끈적임이 강한 그 피는 언제봐도 달갑지 않았다.
나이프를 세게 휘둘러 묻은 피를 대충 털고 도로 넣었다.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주환은 이런 결과가 될거라고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고 부하놈들은 몇몇은 입을 벌리면서까지 놀라했다. 사라는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서 내가 있는 대략적인 방향만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끝은 황폐해졌다고 보기 어려운 먼 밤 시골 풍경을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봐도 귀엽네.
몸을 한차례 확인했다. 작은 상처라도 생겼을까 하고. 물론 없었다. 일체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처음 크립톤들을 상대했을 때는 싸움 방법이라던가 약점들을 몰라서 자잘한 상처들을 새기며 고생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찐득하게 데이트를 주구장창 한 뒤에는 그럴 일이 잘 없었다.
“야! 문 열......”
문으로 다가가면서 아까처럼 열으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저 괴물놈들을 압살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알아서 열어주었다. 이제야 좀 기특해 보이네. 열리는 문으로 발을 들이며 다시 주환의 구역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굳이 이 싸움에 낄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의 부하들에게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어도 되었지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 째, 주환의 부하들에게 나를 잘못건드리면 좆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더더욱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잘못되면 이런 나와 싸울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고, 둘 째, 남의 영역에서의 서열정리를 위함이었다. 서열을 정리해두면 이쪽 업계에서는 암묵적으로 비상사태시에 내게도 일부 지휘권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차할 때 써먹을 수 있도록.
들어서자마자 인기스타라도 된 마냥 여러 남자의 시선들을 받았다. 깡그리 무시하고 바로 사라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떨고있는 손을 잡아주자 먼 배경만을 보았던 푸른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빠왔다.”
내 목소리에 그녀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겨주었다. 나 역시 그런 사라의 미소를 보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뭐같은 놈들 처리도 했겠다, 우리는 바로 텐트로 돌아갔다. 나에게는 싸움의 시간이었지만 사라에게는 잠에 빠질 시간이었다. 여기는 섹터도 아닌지라 부산으로 향하던 길의 페이스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밤을 지세우고 해가 떠오르면 바로 아빠새끼의 흔적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꼬리를 잡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서 일찍일찍 움직여야 했다.
텐트안 침대의 이불을 정리하고 사라를 먼저 눕혔다. 그리고 곁에 앉아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틈으로 들어오는 저 먼 달빛과 근처에서 피워지는 불들이 헤집어 들어왔다. 사라에게는 달빛이, 나에게는 불꽃의 빛이, 각자 다르게 드리웠다. 그 속에서 한 마디, 읆조렸다.
“잘 자, 사라.”
주환이 돌아온 시간은 사라가 잠들고 조금 뒤였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코트는 없고 가벼운 자켓을 입고 있었다. 역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들어오는데 다른 놈들처럼 그저 폼을 잡는게 아니라는 걸 본능처럼 느꼈다.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을 무턱대고 어길 쓰레기는 아니여서 다행이었다.
“안 자나?”
“너같으면 자겠냐? 이런 지랄맞은 곳에서.”
“괜한걸 물어봤군.”
그는 의자에 앉고서 잠시 눈을 감다가 한 손을 꺼내 테이블을 세 번 두드렸다. 나보고 자신의 앞으로 오라는 소리였다. 귀찮아서 한숨을 쉬고 여전히 사라가 잘 자고 있는지 한 번 더 돌아본 뒤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권총은 집어넣는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위에 있는 램프의 빛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깜빡였다.
“‘사건’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도쿄’에 있던 유명 야쿠자 파벌들이 무더기로 몰살된 사건이 있었지.”
“그래서, 뭐?”
새삼스레 과거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어느새 너도 괴물이 되었더군, 엔. ‘낚시꾼’을 따라서.”
“그 새끼......입에 담지마. 난 그 망할놈의 길따위 따라갈 생각 없으니까.”
“너 자신이 거부한다 해도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지.”
“사라만 없었다면 당신도 죽었어.”
“알고 있다. 그래서 난 저 여자에게 일부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없었다면 널 이렇게 마주할 일도 없었겠지.”
“알면 더 잘 알고 있도록 해. 대가리 잘리기 싫으면.”
얘기를 이어갔다.
“도쿄에서 마주했던 야쿠자들은 어땠지?”
“어떻고 자시고, 힘은 있어보이긴 했는데 막상 쳐들어가보니까 별로. 그냥 정부새끼한테 돈 먹이고 뒤에 세워서 공권력이니 뭐니 하는 비겁자 새끼들 뿐이었어.”
“규모는?”
“당연히 당신네 보다는 크지. 본가가 쩔어주더라.”
“마찰이 있었나?”
“응.”
“꽤나 네 심기를 건드렸었나 보군.”
“당연하지! 그 개새끼들이 내가 애용하던 라면집을 부숴 먹었었거든.”
“라면집?”
“그 형사새끼 때문에 잠깐 일본에 놀러간건데 유일하게 내 입에 맞던 라면집이었단 말이야. 근데 그 개새끼들이 뭔 이유인지 갑자기 쳐 부숴놔준 덕분에 빡돌아서 다 죽여버렸어.”
“겨우 그런 이유였나?”
“나한테는 중요한 곳이었다고.”
“참 대단한 이유군. 그런면에서는 또 ‘낚시꾼’과는 다르단 말이지.”
“그새끼 입에 담지 말랬지.”
권총을 들어보였다. 물론 이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출발에 앞서 필요한게 있나?”
“총알 있냐? 9mm로”
“충분하지.”
“그거면돼.”
“부하 몇 놈 정도 붙여줄 수 있다만.”
“필요없어. 오히려 부하만 개죽음 시키는 꼴이야. 방해되니까 집어치워.”
“그렇게 하지.”
과거로 시작한 지루한 얘기가 막을 내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의 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크립톤들은 더이상 찾아올 기색이 없어보였다. 도시보다는 확실히 수가 적다는 소리였다. 먹이가 적으니까. 이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려다가 문득 떠오른게 있어서 주환을 째려보았다.
“뭐지?”
“당신, 재혁이네한테 마약 판 적 있어?”
“오래전이다. 1년도 더 된 이야기지.”
“접촉은 했었네.”
“그 여자는 아직도 살아있나?”
“몰라. 중간에 만나서 눈깔 하나 지져놓고 배에다가 총알을 쳐박기는 했는데......아마 뒤졌겠지, 뭐.”
“그렇군. 별로 흥미있는 이야기는 아니군.”
“당신은 안 자? 부하놈들 세워놨잖아.”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말이지.”
“그 망할새끼 딸내미인데 손님 취급은 해주나 보지?”
“후훗, 너야말로 잠을 자야하지 않겠나? 아침 일찍 갈 거라면.”
“여행페이스를 망치고 싶지는 않아. 그 새끼를 죽이고 나서도 부산으로 향해야 하니까.”
“그렇군. 그래도 조금이나마 내가 있을 때 자두는 걸 추천하지. 이곳에서 여자들은 쉽게 잠들기 힘드니까.”
“알 바 아냐. 내 모든 걸 통제하려 하지마.”
“통제가 아니라 추천이다.”
“......알아서 할거야.”
의자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사라의 곁으로 돌아갔다. 아직까지도 곤히 자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취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다 가라앉고 작은 숨을 쉬면서 자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예뻤다. 잠시, 아주 잠시 권총을 내려놓고 뺨을 만져보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볼살이었다.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피부. 여전히.
내일, 흔적을 쫓기 시작하면 아빠새끼도 분명 냄새를 맡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나라면. 그래서 평소보다 더한 경계심을 가져야 했다. 그저 내 몸 혼자 찾아가서 싸우는 거라면 막 싸워도 되겠지만 사라가 동행하면 얘기가 다를 테니까. 한 편으로는 드디어 그 새끼를 죽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다른 한편으로는 사라에 대한 걱정이 오갔다. 그가 사라에게 손을 댈까? 댈 것이다. 의문따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도 살인자였다. 자신의 본능을 따라서 죽이는 미친새끼. 분명히 나를 상대하면서도 사라를 계속 노리겠지.
주환은 사라의 곁을 떠나지 않는 나를 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시 우리만이 텐트에 남게 되었다. 깜빡이는 램프는 조용해질 밤을 내게 새겨주었다. 덕분에 또 그 시절의 느낌이, ‘마녀’가 덮쳐왔다. 빌어먹게도.
“사라, 일어나, 우리 애기.”
아침해가 서서히 떠오를 때, 사라를 깨웠다. 천천히 몸을 흔들며. 그녀는 바로 깨어나지는 못했고 잠꼬대를 하다가 몸을 뒤척이며 천천히 눈을 뜨고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니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엔......”
“그래, 나야. 일어나서 밥먹자.”
“응......”
그녀를 깨우기 전, 주환이 아침밥이라며 양은냄비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계란죽과 감자 몇 개와 구운 고기 몇 점을 주고갔다. 이 귀한 것들을 어디서 구한 건지 대단했다. 먼 곳에서 가축이라도 키우나. 2인분이 담긴 죽은 테이블 위에서 식지 않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의 손을 잡고 먼저 의자에 앉힌 뒤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먹었다. 어제 이런저런 긴장할 만한 일들이 있던만큼 배고플 것이다.
“죽이야. 먼저 먹고 있어.”
“엔은? 같이 먹자.”
“난 오줌마려.”
대충 같잖은 이유를 대고 밖으로 잠시 나왔다. 그녀가 혼자서 배불리 먹을 때까지 기다릴 생강이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계속 챙겨주려 하면서 배불리 먹지 못할게 뻔히 보였다. 지금도, 앞으로도 더 많이 먹어야 하는 것은 사라였다. 나처럼 길가다가 벌레들을 주워먹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캠프, 난 이제 이곳을 구역이라기보다는 캠프라 부르기로 했다. 주환의 부하들이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난민들도 있으니 캠프가 딱 어울렸다. 아무튼, 캠프의 아침은 어제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드럼통에 불을 지피거나 혹은 모닥불을 만들고 그 주위에 둘러앉아서 아침들을 챙겨먹고 있었다. 이곳은 아예 따로 배급을 받고 있었다. 규모는 분명 캠프인데 먹는건 어째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어디서 식량을 조달해오는 것일까. 그런 궁금함이 들 때 남자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주환의 부하중 한명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누님.”
“누님?”
얼굴을 봐야 기껏 어제가 전부인데 날 누님이라고 불렀다. 서열정리를 위해 대활약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걸로 이렇게 빨리 누님이라 불릴 정도는 아닌데.“형님께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까지 들었냐?”
“천막 안까지 들릴겁니다.”
“새끼, 다 들었네. 너 뭐야? 부두목쯤 되냐?”
“글쎄요. 비서에 좀 더 가깝기는 합니다만.”
납득. 그러면 내가 누구였는지, 뭐하던 미친년인지 알테니 어느 정도 날 ‘누님’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이해가 되었다.
“여긴 항상 배급이야?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네. 아침과 저녁은 제대로 된 끼니를, 점심은 적은 양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재료는?”
“조금 멀리, 크립톤이 건들지 않는 농경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쌀을 기본으로 다른 농작물들을 재배하죠. 조금 있으면 남자들과 함께 가꾸러 갑니다. 제가 총괄을 맡고 있죠.”
“뭐야? 노동하는 캠프였네.”
“그래야 살아가니까요.”
알고보니 섹터들보다 생존성이 더 뛰어난 캠프였다. 특히 난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농경지가 있다는 것이다. ‘사건’이후로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데 원래 시골이었던 곳은 좀 다른 건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자 끊기지 않을 식량줄이었다. 흉작이 있을 수는 있지만 비축만 잘해둔다면 계속 먹을 수 있으니까.
“누님. 한 가지 경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간 크네? 니네 형님도 아니 어중이 새끼가 나한테 경고? 뒤질래?”
“들어도 나쁠건 없을 겁니다.”
“내 기분이 나빠, 개새끼야. 뭐, 그래도 용기가 기특하니까 들어는 줄게. 뭔데?”
“여자인 몸이니까 혼자돌아다니지 마십시요. 이곳 난민들이 언제 덮쳐올지 모릅니다. 당장만 해도 아침에 일이 있었습니다.”
같잖은 경고였다.
“그건 나 알아서 잘해. 건들면 죽여버릴 거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니네들은 어떻게 처리해? 캠프에서 쫓아내냐?”
“아니요. 형님께서는 그저 눈에 보일 경우에 중재만 하라고 했습니다. 별다른 조치는 없습니다.”
“이유는?”
“그게 사람의 본능이니까요.”
“‘본능’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성욕도 엄연히 본능중 하나였다. 그런거 억제만 시켜봤자 나중에 일이 꼬일 뿐이지 제때 알아서 해결하라지. 그저 난 사라만 건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남사정까지 봐줄 여유는 없었다.
이제쯤이면 다 먹었겠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라가 가능한 많이 먹어놨으면 하는데. 만약 조금만 먹고 배부르다는 소리를 하면 내가 직접 먹여줄 생각이었다. 그러자고 텐트의 입구를 손으로 잡아 열었을 때 나의 뒤로 재밌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잠시 고개를 돌리고 뒤를 보았다. 여럿, 자신감있어 보이는 몇 난민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 있었다. 피식 웃고 한 마디 경고를 던져주었다.
“알아서 눈치껏들 치워라. 내 가랑이가 아니라 총구멍에 꼬추 박히는 수가 있다. 협박이 아니라 경고야.”
텐트 안에서는 역시 사라가숟가락을 들도 있었는데 더이상 먹지는 않고 있었다. 과연 내가 바라던 결과는? 꽝이었다. 먹긴 먹었는데 계속 깨작거리기만 했는지 반도 먹지 않고 있었다. 내가 나가줬는데도 이렇게 밖에 못 먹었다고? 그녀의 볼을 한 번 꼬집고 이번에는 맞은편이 아닌 바로 옆에 앉았다.
“사라. 왜 이렇게 깨작댄거야? 잘 먹어야 내 맘이 놓이는거 몰라?”
“하지만 엔이 아직......”
“양 많으니까 팍팍 먹으라고. 숟가락내놔!”
안되겠다 싶어서 숟가락을 뺏고 직접 먹여주기로 했다. 냄비에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죽을 떠서 한 입씩 먹여주었다. 또 그녀의 착한 성격 때문에 거절당했지만 제대로 먹지 않으면 내가 굶어버리겠다고 협박해서 뒤늦게라도 먹게 만들었다. 진작에 이렇게 먹었어야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졌다.
“계속 그렇게 했다간 네가 못 버틸 거다. 엔.”
“뭐야?! 시발!”
잘 먹이고 있던 와중 갑자기 주환이 튀어나왔다. 내가느끼지도 못할 인기척으로 다가온 그는 내 앞에 죽이 담긴 냄비를 하나 더 내려놓았다. 놀란 내 마음과 표정은 풀어줄 생각도 않은 채.
“잊지 말아라. 싸우는 건 너고, 행동역시 더 많은게 너다. 과연 그 여자가 더 먹는게 맞다고 생각하나?”
“엔, 역시......”
“아, 아니야! 사라. 당신은 닥치고 있어! 나도 많이 먹었거든!”
그의 눈이 사라 앞의 냄비를 훑고 지나갔다.
“그래! 사라는 더 먹이긴 했어. 당장은 그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겠지. 근데 난 여기 나가서 벌레라도 씹을 수 있는 몸이거든? 그러니 사람답게 먹을 수 있을 때는 사라를 미리 먹이는게 나아.”
“눈이 멀었군. 그 녀석도 그렇게 가르치친 않았을텐데?”
“내가 그 개새끼 언급.”
“닥치고 들어라. 다시 말하지만 저 여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싸움, 수집, 경계, 모두 너 혼자서 전담하고 있을 거다. 그러면 당연히 행동과 체력소모가 많은 건 너다. 벌레? 언제나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회와 문명이 무너진 지금에서는 언제, 어떻게 목숨을 위협할 싸움이 다가올 지 모른다. 그 때 공복이 발목을 잡으면 너나 저 여자나 죽어버리는 건 분명하지. 아무리 너라도 말이다. 엔, 나라면 차라리 저 여자가 벌레나 남은 음식을 먹게 할 것이다. 진짜로 죽어버리기 직전이 아니라면.”
“아가리 닥쳐!”
중간에 화가 나서 나이프를 뽑아 그의 목에가져가댔다. 이 이상 말하면 정말로 사라에게 상처가 될 말들이었다. 그러니 협박을 해서든 닥치게 해야했다. 그런데도, 그는 간단히 자신의 나이프를 꺼내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라’라고 했던가. 너에게 묻지. 넌 그 식량을 엔보다 먼저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게.”
“망설이는 것을 보니 스스로 잘 알고 있나보군. 착각하지 말도록. 넌 눈을 잃은 장애인이자 지금의 세상에서는 그저 짐덩어리일 뿐이다. 엔의 보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지. 자신의 목숨을 더 연장하고 싶다면 앞으로 엔을 우선시해라. 그녀가 쓰러지면 넌 죽는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이런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지. 알겠나?”
“닥치라고 했잖아!”
“너야말로 닥쳐라! 아끼는 사람에 눈이 멀어서 제 몸도 챙기지 못한다면 제일 후회하고 효율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나? 이런 상태로 ‘낚시꾼’을 상대하지 못할 거다.”
나이프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 그런데도 벌어진 거리는 불과 1m였다. 이젠 반대로 그의 나이프가 내 목을 위협해왔다. 재빨리 방어한 덕분에 상처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여기에서 머물 동안은 둘 모두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사를 대접하지. 하지만 추후 떠날 때에는 다시 생각해보도록. 어떻게 하는게 서로가 더 오래 생존할 나갈 수 있는지.”
그러고 그는 나가버렸다. 밥먹고 있는데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는 생 난리판이나 쳐 만들고 가다니. 몇대라도 좋으니까 후려치고 싶었다. 잡친 기분 그대로 욕을 뱉었다.
“시발!”
나이프를 도로 집어넣기보다 바닥에 대충 던져버리고 의자에 앉았다. 나의 앞에, 막 가져다준 새로운 죽이 많은 양의 고기가 담긴 채 뜨거운 김을 내고 있었다. 숟가락을 들고 짜증스럽게 한 입 먹었다. 기분 나쁘게 맛있었다.
“저기, 엔.”
이제 세 숟가락 쯤 떠먹었을 때 사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녀는 딱 봐도 엄청나게풀이 죽어있었다. 젠장, 사라의 기분까지 더럽히고 가버리네. 잠시 숟가락을 냄비에 던져놓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방금말, 신경쓰지마. 니가 풀 죽을 이유는 하나도 없어. 지금까지도 잘 살아남아 왔잖아. 그거면 된거야.”
“하지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엔, 지금까지 나한테만 먹을 걸 넘겨줬던 거야? 그것만이라도 답해줘.”
“......맞아, 넘겼어. 난 이런 일들에 단련되어 있지만 넌 아니니까. 그래서 더 많이 먹였던 거야.”
“그랬구나......”
작게 미소짓는 표정. 어째선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것보다는 슬프다거나 안타까워 하는 기색이 더 강해보였다. 이게 다 주환 그놈 때문이었다. 우리끼리 잘만 해결하며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개지랄을 떠들고 가다니. 젠장할, 다시 숟가락을 들고 기분 더러운 아침을 먹었다. 내 죽에 있던 고기들은 사라 몰래 그녀의 그릇으로 넘겨 먹게 했고 배가 다 차지 않은 부분은 사라가 남긴 죽을 먹으며 대신했다. 해는 떳는데 구름이 존나게 낀 아침이었다.
사라와 조금 어색한 기운을 품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지금부터 아빠새끼의 추적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우선은 주환이 모자를 찾았다던, 시골 변두리 마을의 슈퍼마켓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곳은 여기에서부터 좀 떨어진 곳이었고 규모는 엄청나게 작았다. 대충 지도를 보아도 20가구는 살고 있으려나 정도.
차의 뒷좌석에는 우리의 것과 함께 주환에게서 받은 몇 가지의 물건들이 실렸다. 이곳의 지도는 당연하고 약품과 점심에 먹을 식량을 받았다.
“찾았네.”
지도를 따라가는 건 다행히 쉬웠다. 도시들의 지도처럼 중구난방 길들이 펼쳐져 있지 않아서 길 2개 정도만 쭉 따라서 달리다 보니 금새 슈퍼마켓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떠나 금이 가고 먼지가 쌓인 자택들이 여럿, 감상평을 내리자면 도시보다는 눈을 호강시킬 수 있었다. 완전히 황폐화가 되지 않아서 중간마다 나 있는 풀들도 있었고 산도 반 정도는 멀쩡한 상태였다. 잘만하면 뭐라도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마을 입구쯤에 세우고 먼저 내려서 주위들을 훑어보았다. 혹여나 아직도 이곳에서 머물고 있을 까봐였다. 혼자서 행동하는 것에 능한 놈인만큼 최대로 경계한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보이지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서 조수석의 문을 열고 사라를 내리게 했다. 시골의 맑은 공기를 맡게 해주는 건 덤. 그녀는 내리자마자 지팡이를 펼치며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시 감상을 했다.
오랜만에 들려보는 시골은 크립톤이 있음에도 공기가 무척이나 깨끗했다. 아니, 오히려 ‘사건’이 일어나기 전 사회의 문명이 찬란했던 때보다 훨씬. 나도 사라를 따라서 크게 숨을 들이내쉬고 잠시나마라도 머리를 맑게 해보았다. 한결 나아진 느낌. 그렇다고 아침에 있었던 기분 잡치던 일이 사라지는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시골을 들렸던 건 삼촌을 따라서 휴양을 왔던 때였다. 이름없는 군인에서 전역하기 몇 일 전, 그는 조금 긴 휴가를 내더니 강원도 어딘가에 있던 별장으로 날 데려갔었고 그곳에서 몇몇 일들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9살다운 짧은 시간을 보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밭일을 돕다가 장을 보러 가기도 했고 영화도 봤었다. 영화는 자주 봤었지만 그나마 가족이라고 여겼던 삼촌과 봤던건 처음이었다. 수박도 먹고 옷도 샀었고 휴대폰도 새로 맞추고. 내게 굳이 추억이란걸 찾으라고 한다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엔, 새소리야.”
“그러게.”
경치도 좋지만 소리도 편안했다. 새들이 꽤나 남아있는지 까마귀들 따위가 아닌 참새나 종종 신기하게만 들렸던 다른 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크립톤들은 동물을 잘 노리지 않으니까. 지금 이곳은 사라에게도, 나에게도 조금이나마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감상을 마치고 나서는 바로 슈퍼마켓의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의자가 보이는 곳에 사라를 앉히고 안을 둘러보았다. 과자나 먹을게 진열되어 있었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주환네 애들이 싹쓸어 갔겠지. 더불어 담배도. 마실 것들도 텅텅 비어있었다. 애초에 작은 규모의 슈퍼마켓인 만큼 별로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으로 더 들어가 방안을 살펴보았다. 다 부서져 가는 이불 서랍장과 깨진 유리, 맛이 간 라디오와 아날로그 TV. 싸움이 있었는지 오래 지난 피가 묻어있었다. 사람의 피였다. 누구의 것일까.
아빠새끼의 흔적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모자가 있던 자리까지는 듣지 않아서 과연 여기에 흔적이 더 있을까 싶었던 때쯤, 먼지를 잔뜩 먹고 버려진 신발 아래, 나를 흥분케하고 심장을 뛰게 만다는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나 빨리? 몸을 숙여 신발을 치우고 그 밑에 있던 담배꽁초를 집어 확인했다.
“씹새끼, 여기있었네.”
담배, 틀림없는 그 새끼의 것이었다. 브랜드도 내가 아는 그게 맞았다. 주위에 있던 흡연자들이 맛없다고 입모아 말하던 것이었다. 아빠새끼는 사람을 죽이기 전, 내 훈련을 행하기 전후마다 항상 이 담배를 쳐물고 폈었다. 좆같은 냄새가 여전히 기억에 선명했다. 내 앞에서도 피우면서 괴롭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내가 피우지는 못하게 했다. 절대로.
대충 상태를 봐서는 몇 일 된 것이었다. 이미 이곳에서는 떠난 것이다. 그래도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엔, 어때?”
“일단 확실히 살아있다는 건 알겠어. 위치는 모르겠고.”
“찾아낼 수 있겠어? 웬지 엔의 스승님이라면 더 위험한 사람일 것 같아.”
“그래도 찾아낼 거야. 빌어 쳐먹을 악연은 확실히 끊어야지.”
사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마냥 돌아가기에는 수확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집들을 더 조사해보기로 했다. 사라는 차에 태울지 고민하다가 데려가기로 했다. 도둑질에도 능했던 놈이다. 차 문을 잠궈봤자 간단하게 열어서 쉽게 사라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는게 훨 나았다.
우선은 슈처마켓 근처의 집들을 조사해보기로 했다. 눈앞에 보이는 집부터 길을 따라 한 채씩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이정도로 평화롭고 숨기 좋은 마을이면 몇 일 정도는 머물다 갔을 것이다. 그 뒷받침 되는 증거가 담배였다. 담배를 피울 정도로 평화롭게 잘 지냈던 마을이란 소리다.
처음 들린 집은 마당에 작은 채소밭이 있는 집이었다. 현관문은 박살나있고 안에 있던 가구들은 부서져 있었지만 그곳에 불을 피운 흔적이 있었다. 재는 날아갔어도 불을 피우기 위해 만든 모닥불의 그을린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밤에 이용했다기 보다는 뭔가다른 목적으로 피운 것 같았다.
두 번째로 들린 집은 담벼락이 모두 엎어진 곳이었다. 개라도 키웠는지 마당에 개집이 있었고 끊어진 빨랫줄과 플라스틱 바구니가 굴러다녔다. 이곳에는 딱히 생활의 흔적들이 없었지만 나름 중요한 걸 찾게 되었다. 슈퍼마켓에서 보았던 그 담배꽁초,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5개씩이나. 이 집에서 잠자고 생활을 했던 걸까.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집은 잠자기에는 좋지 않았다. 크립톤을 막아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빠새끼는 왜 이렇게 여러 집을 쏘다닌 거람.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나머지 집들을 뒤적거려 봤지만 담배꽁초와 담뱃갑말고는 찾을 수 있는게 없었다. 그저 수 차례 담배를 피웠다는 근황만 있었고 잠을 잤다거나 그런건 없었다. 그래서 난 한가지 의문점을 가졌는데 여기에 제대로 머물 것도 아니라면 왜 있었던 걸까? 담배를 피운 양만 봐도 몇 일 정도는 계속 이곳을 찾아왔다는 소리였는데, 감이 잡히는게 없었다. 살인을 하러 온 것도 아닐테고.
“몰라,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