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Greed (Don't Hate Me. Shara) - 2
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우리의 주위로 주환의 차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우리 차 안에는 그가 뒷좌석에 앉아서 직접 길을 안내하며 감시하고 있었다. 진짜, 완벽하게 도망 그 자체를 차단시키려는 것이다. 뒤에서 권총을 들고 겨누지는 않았지만 언제든지 뽑아서 쏠 수 있도록 대비를 해놨겠지. 짜증나는 남자다.
주위는 여전히 깡촌이었는데 그래도 지났던 도시들보다는 멀쩡한 숲들이 산들을 이루고 있었다. 오히려 황폐한 것은 건물들이었다. 숲과 산들 사이로 이제는 덩그러니 버려진 공장 건물들.
도로는 부서진 흔적들이 많았다. 달리면서 차가 여러 번 덜컹거리기까지 했다. 엉덩이가 아파오고 아픈 허리가 더 쑤셔왔다. 도대체 나 하나 데리러 얼마나 멀리서 온걸까. 벌써 10분째 달리고 있는데 영 보이는게 없었다. 다 무너져 가는 시골집들 뿐, 벌써부터 짜증이, 아니, 10분이면 오래 지났지. 아무튼 짜증이 났다.
“어디까지 가야 나오냐? 마중 참 멀리도 왔네. 시발.”
“곧이다.”
“곧? 시발 그 소리만 2번은 들은 거 같은데......저거냐?”
언제 나오나 열심히 달리던 중 대충 둘러싼 잡다한 것으로 이루어진 벽이 보였다. 울퉁불퉁 회색의 콘크리트 돌들로 쌓고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는 철창들로 완전히 막아놓았다. 문은 딱히 특징 없는 나무문이었고 벽들 위에는 설 수 있는 발판이라도 만들어놨는지 보초들이 있었다. 그 자만심 가득했던 노인네 섹터와 달리 눈을 바짝뜨고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며. 뿐만 아니라 주환이 내리지 않았음에도 알아서들 비켜주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원하지도 않았던 그의 구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안은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일단 건물이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창고로나 쓰는 용도의 작은 건물. 그게 끝이었다. 대신 수많은 작고 큰 텐트와 천막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노숙자들이 모이는 거리의 향연처럼 가운데 길을 열어놓고 각자들의 자리를 잡고 모여있었다. 생활용품들도 하나둘 보였고 중간마다 불을 지피는 용도의 드럼통과 모닥불들이 불이 붙어있거나 탄 흔적들을 보이고 있었다.
주위의 경치는 크게 말할게 없었다. 이곳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어디를 둘러보든 나무라던가 뿐이었고 그나마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쪽이 뚫려있긴 했지만 멀리 보이는 무너진 밭과 폐공장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그야말로 문명의 회귀였다. 어차피 세상이 망해버려서 이미 사라진 문명이긴 했지만 여기는 그 정도가 심했다. 전기도, 집도 없이 모두 불에만 의존하고 있는 마당이니.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에게 하나 질문을 던졌다.
“여기 사람들은 다 뭐야?”
바로 사람들. 분명 이들은 최악의 깡패놈들이고 내가 인정한 몇 안되는 수준높은 조직이었다. 그만큼 세력이 탄탄한 것도 있지만 또 그만큼 악랄한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 사람들을 감금시키거나 묶어논 것도 아니고 다른 섹터들마냥 데리고 있는 것이었다. 전부 다 인상 드러운 남자들뿐이지만.
“인류는 살아야하니까.”
“그래서 웬일로 자원봉사 하고 있었냐?”
“공짜는 아니다.”
뭔가로는 받고 있다는 소리였다. 내가 내리고 사라가 이어서 내리려 할 때 잠시 그녀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왜 자신이 내리지 못하게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해서 임시방편으로 다른 위험요소가 있는지 먼저 둘러보겠다고 거짓말을 해두었다. 사라는 내 말을 듣고 조금 서운해 할 법도 한데 다른 군소리 하지 않고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존나게 끌어안아 줘야지.
자신의 텐트가 있다며 바로 안내하려는 주환을 불러세웠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변할 기미조차 없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미리 말해둘 게 있어.”
“뭐지?”
“사라 앞에서 내가 ‘서울의 마녀’라는거, 입도 뻥긋하지마.”
“저 여자, 모르는 건가?”
“내가 말 안했으니까.”
“왜지?”
“그녀는 우리랑 세계가 다른 평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마녀’에 대해서 입 열지마. 난 그저 ‘엔’이야. 알겠어?”
“......그 정도는 들어주도록 하지.”
크게 걱정한 것과 달리 그 정도는 간단히 해주겠다며 내 의견을 받아주었다. 실은 여기까지 붙잡혀 오면서 가장 크게 걱정되었던 부분이었다. 주환이 날 한번이라도 ‘마녀’로 부르거나 그 시절 얘기를 꺼내며 말을 걸어 올까봐. 대답을 듣고 나서는 바로 사라가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조심히 그녀의 손을 잡고서 모셨다. 그런데 어째 사라가 내리자마자 이쪽으로 몰려오는 시선들의 상당수가 느껴져 왔다. 그 범인들은 굳이 멀리까지 가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바로 옆에들 있었으니까. 부하 놈들중 일부분, 그리고 이곳에서 지낸다는 사람들에게서. 덮치려거나 하려는 낌새는 없었지만 충분히 내 경각심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아, 그리고 말을 깜빡했는데 내 부하들 중에 있는 여자들에게도 경고해 줬지만 함부로 이 안을 혼자 다니는 건 좋지 않을거다. 범해지기 싫으면.”
참 조언같은 경고였다. 빨리도 말해주네. 물론 나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옆에서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라에게 붙이는 말이었다. 그녀는 주환의 말 뜻을 이해했는지 평소보다 더 내 손을 꽉 쥐어왔다. 아무래도 이거, 사라의 입장에서는 호랑이 굴이 아닌 사자의 무리속으로 대놓고 들어온 토끼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혹여나 이런 일도 있을까봐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고 했던 건데.
그는 우리보다 걸음을 앞세우며 캠핑 천막들 사이를 지나 중앙쯤에 있는 커다란 텐트로 안내했다. 얼마냐 크나면, 20명쯤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화장실은 없었다. 그리고 텐트의 뒤로 또다른 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주로 아이들과 노인, 힘이 약한 여자들과 몇몇의 젊은 남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도 데리고 있다는 소리다. 정말, 내가 아는 주환이라는 남자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 정도의 난민들을 지금까지 보호하고 있었다는 소리니까.
텐트 안에는 책상과 의자, 침상 2개에 작은 서랍장이 놓여져 있고 중앙의 기둥에 램프가 매달려 있었다. 슬슬 날이 풀리고는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밤은 여전히 쌀쌀한데 이정도로 추위를 버틸 수 있기는 한가. 그러다가도 그 걱정은 접어두게 되었다. 잘 안보였는데 화목난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앉지.”
“손님왔는데 마실거 하나 안주냐?”
“필요한가? 당장 우유 정도는 가져다 줄 수는 있다만.”
“우유? 존나 뜬금없네. 술은 없어?”
“자네의 대답을 듣고 판단하지. 보상이 될지, 처벌이 될지.”
“칫.”
사라를 먼저 가장 안전하고 편해보이는 의자에 앉히고 난 등받이가 부서진 것에 앉았다. 램프의 유리는 기둥 위에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엔.”
불안한 사라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떨림과 긴장, 그리고 걱정.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그래도 앞을 보지 못하는데 웬놈들이 과격하게 습격을 해왔고 나에게 협박까지 한 뒤 이상한 곳으로 끌고 왔으며 심지어는 안전한 곳도 아니라니까. 여긴 섹터가 아닐 뿐더러 마음대로 쏘다닐 수 없는 것도 크게 한 몫 했다. 모든게 위험천만한 것이다. 사라에게는.
“사라. 걱정말고 내 옆에만 있으면 돼. 사이좋다고는 못하겠지만 무턱대고 우리를 건드릴 남자는 아니야.”
“그래도 무서워.”
“잠시 끼어들자면 엔의 말이 맞다. 난 너희들이 여기서 사고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건들 생각이 없다. 적어도 나와 내 애들은 말이지.”
“저 깡촌놈들은 제어가 안되나 보지?”
“내 눈이 모든 곳을 볼 수는 없으니까.”
“자랑이다, 시발.”
이런 얘기를 하던 중 주환의 부하 한 명이 갑자기 들어와 사라의 앞에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머그컵. 그 안에는 정말로 우유가 담겨있었다. 전혀 썩은게 아닌 진짜 우유가 말이다. 나는 주환을 째려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였다. 정작 그 본인은 내 시선을 보더니 무덤덤하게 답할 뿐이었다.
“그냥 우유일 뿐이다. 독같은 것은 타지 않았어.”
“......사라, 지금 네 앞에 우유가 담긴 머그컵이 있어. 목이 마르면 마셔둬.”
“응.”
기운빠지는 대답, 여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럼 바로 얘기하지. 엔, 너에게 일을 하나 의뢰하겠다.”
“나 손 씻었는데. 복직하면 추가금 붙는데 상관없는거지?”
“상관없다. 보상은 두둑히 주도록 하지.”
“호오. 그래서 무슨 일을 의뢰하고 싶은데?”
“‘낚시꾼’을 죽여줬으면 하군.”
“......지랄하지마.”
‘낚시꾼’. 그 단어에 내 몸에 새겨진 온갖 고문들의 흔적과 그의 피가 들끓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몰아쳤다. 분노와 두려움, 2개의 감정이 뒤섞이면서. 지금 주환은 다른 말 없이 ‘낚시꾼’이라는 단어를 내게 말했다. 순간 주위의 공기들이 역겹게바뀌어갔다. 나조차도 속이 메스꺼워 구토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손이 떨리고 몸도 떨렸다. ‘낚시꾼’의 얼굴이 떠올라서. 죽여버리고 싶어서.
“그 새끼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언젠가 내가 찾아서 죽여버릴거긴 한데 지금 이 빌어먹을 깡촌에서 찾자는 소리야?”
......실수했다. 바로 옆에 사라가 있는데. 이미 그녀도 일부분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불과 몇 일 전에 스스로 실토하기는 했지만 내가 직접적으로나마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빠르게 그녀의 눈치를 보았지만 우유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아직까지는 우리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아직까지는.
여전히 내 몸은 떨고 있었다. 그만큼 ‘낚시꾼’의 파급력은 컸다. 송혜에게서 그 개새끼가 살아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다시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주환의 입에서.
“찾는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분명히 이 지역에 있으니까.”
“뭐? 내가 지랄하지 말라고 했지. 그 새끼는!”
‘툭.’
흥분하면서 반응하는 내 앞으로 물건 하나가 올려졌다. 책상 위, 나의 시선을 받으며 들어온 그건 내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왜 주환이 그가 여기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증거가 되는 물건이기도 했다. 나는 조심히 손을 뻗어서 내 손에 들었다. 정말로 그의 것이 맞는지, 내 기억속에 있는 그 모자가 맞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시도에 그치더라도 좋다. 의뢰를 받아들이기만 해도 네 옆에 있는 여자의 24시간 보호는 물론 여기에 머무는 동안의 식사와 생활은 보장하도록 하지. ‘낚시꾼’을 처리하는데 이용할 물자도 지원해주겠다. 보상도 부족하지 않게 챙겨줄거고.”
모자를 뒤집었다. 두 손이 아닌 한 손이라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내 시선은 모자의 가장자리를 쳐다보았다. 이제 다 닳아버리기는 했지만 ‘동한디자인’이라는 브랜드명과 바로 옆에 새겨진 ‘노길홍’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했다. 틀림없는 그 새끼의 것이었다.나를 이렇게 키우고 만들어낸 아빠새끼.
“받아들이겠나?”
주환이 물었다. 사라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부산을 가는 중이었다. 그게 사라와의 목숨을 건 약속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다시는 만나보기 힘들 기회가 굴러들어왔다. 내 모든 쓰레기같은 인생의 종지부와 그의 흔적을 지워버릴 절호의 기회가. 만약 다른 제안들이었다면 때려치우라며 꺼지라 한 다음에 떠나버렸을 것이다. 주환이 좆같긴해도 의뢰를 거절한다 해서 해코지할 정도로 속 좁은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떠나버릴 수 있었다. 유유히.
역겨운 흔적의 모자를 내려놓았다. 벌써부터 내 손이 더렵혀진 기분이었다. 떨리던 것은 좀 멈췄는데 머리에 나도는 혼란은 여전했다. 진짜 좆같은 상황이네. 오죽하면 피식 웃어버리기까지 했다. 기뻐서? 아니, 어이가 없고 너무 좆같아서. 사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언제나 어지러운 나를 진정케 해주었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꽉 잡고서 놓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며 정말 미쳐버릴 것이다.
역겹기만 한 공기속, 대답을 기다리는 주환, 내가 어떤 대답을 하지 몰라하는 사라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모자를 바라보며, 어릴 적의 내 과거를 떠올리며 역대 최악의 대답을 넌지시......던졌다.
“술 가져와.”
아직까지 해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떨어진 것만 같았다.
몇 년간 도망만 치면서 가끔씩 찾아해멨다. 나 나름대로 실력이 된다고 생각했던, 삼촌에게 키워지고 ‘서울의 마녀’라는 호칭이 붙여졌을 때 일주일 정도 진심으로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아빠새끼랑 조금이라도 연이 있던 놈들을 찾아가서 두드려 패든, 몸을 팔든 해서라도 정보를 뜯어내고 다녔었다. 하지만 꼬리조차도 잡지 못했고 포기한 뒤 세월을 보내다가 ‘사건’을 터지고 다시는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놈을,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찾게 되었다. 좋은 걸까?
사라가 없었다면 벌써 좋다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녀를 주환에게 맡길 수 있느냐고 묻겠지만 문제는 그 새끼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몇 명이 몇 시간이고 사라에게 붙어서 경호를 한 들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아빠새끼라면 충분히 뚫고 들어와 언제든 사라를 처리할 수 있어다. 거기다가 이미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지.
맥주 한 모금. 아빠새끼의 별명은 ‘낚시꾼’이었다. 호수에 가서 물고기 따위를 낚는게 아니다. 도심이라는 양식장에서 마음 편히 사람을 낚아올라 죽이는 인간이었다. 그 수법이 대단해서 경찰놈들이 전혀 잡지 못했고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그 새끼가 엮여있을 수도 있다는 임무가 내려왔고 떼를 써서라도 참여해 쳐들어갔지만 허탕이었던 적도 있었다. 여유롭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람을 낚아 죽이고 흔적도 없이 떠나는 남자. 그래서 우리같은 놈들 입에서 ‘낚시꾼’이라고 불렸다. 참고로 사진역시 찍힌게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엄마랑 함께 살았을 때에도 가족사진 하나 찍지 않았었다.
“시발.”
머리를 환기시키려고 밖에 있는데 역시 변함없이 좆같기만 했다. 나의 앞으로 난민 몇 놈이 힘끌 기회를 엿보며 지나갔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나의 모든 신경이 아빠새끼에게 쏠려있었다.
“엔, 있어?”
유일하게 나이 신경을 돌려주는 목소리, 사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걸음운동을 하다가 나를 불렀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부터 걱정이 가득이었다. 그럴만하지. 오늘 내 목소리는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목소리가 아니라 한숨만이 쉬어지는 늙은 목소리였으니까.
“그래, 있어.”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고서 조심히 다가왔다. 손을 뻗어 나를 찾다가 내 귀를 잡고는 앉아씨다는 것을 알고 따라 옆에 앉았다. 난민들의 시선들이 더 따가워졌다.
“있잖아, 엔.”
“응?”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엔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해왔던 거야?”
“......부정은 않아. 사실이니까.”
“어떤 일이었어?”
직접적으로 물어왔다. 평소라면, 그냥 평범히 내 과거를 묻는 질문이었다면 대충 얼머부리고 넘겼을 테지만 오늘은 무리였다. 이미 사라가 눈치채가는 과정에서 계속 숨기기만 해봐야 의심만 더 받을 것이다. 조금은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삼촌 밑에서 일했던 시절을 들려주기로 했다. 그때도 사람을 죽였지만 최소한 ‘살인자’인 과거보다는 그녀가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다. 다시 맥주 한 모금, 그리고 처음으로 사라에게 재미없는 내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7살에 총쏘는 용병질을 했었어. 삼촌이 카센터 열기전에 꽤나 쩔어주는 군인이었데더럽게 키워진 날 보고서 마음에 들어했거든. 원래는 당연이 안되지만 난 특수한 케이스로 들어갔고 이름없는 군인으로 삼촌의 바로 밑에 들어가서 여러 임무를 수행했어. 사람죽이는 임무. 주로 부패한 정치인이나 범죄조직, 테러리스트, 별개로는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리는사람들을 총으로 쐈지. 19살에는 그딴거 졸업했지만 큰일이 터지거나 심심하면 불려가기도 했었고.”
“17살이면 겨우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잖아.”
“나한테는 그곳이 학교대신이었어. 다른 애들은 책을 보면서 연필을 쥐었을 때 난 사람이 죽는 걸 보며 총과 칼을 들었을 뿐이야.”
“역시 엔은......다르게 살았구나.”
“내가 싫어졌어?”
중요한 질문. 사람이 죽는게 싫은 그녀에게, 아무리 짧게나마 군인이었지만 여럿 사람을 죽였었다고 실토했다. 사라는......
“사람을 죽였었다는게 싫지만, 군인이었다면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
“거, 참. 좋게도 봐주네.”
마지막 한모금을 마시고 빈 맥주병을 아무렇게나 버렸다. 요란한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 엔, ‘낚시꾼’은 누구야? 그리고 왜 죽이려는 거야?”
“그 새끼는......”
이것도 말해야 하나. 돌려서라면 들키지 않게 말할 수 있기는 했다. 고민에 고민. 이것도 일부분만 들려주기로 했다. 이미 내가 뱉어버린 말이었으니까.
“삼촌을 만나기 전, 내 스승이었어. 무기를 다루는 법이나 생존법을 배웠었지.”
“생존법?”
“산이든 바다든, 더 나아가서는 문명이 끊어진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메뚜기나 뱀을 잡아먹기도 했고 이상한 벌레를 쳐먹기도 했고 살아있는 갖가지를 쳐먹었어. 또 언제는 내성을 기르겠다고 일부러 소량의 독이나 마약을 내 몸에 투약시키기까지 했었고. 개 좆같은 고문들을 쉴새 없이 받다보니까 나중에는 뭘 쳐먹든, 무슨 약을 하든 멀쩡하더라.”
“그건 생존법이 아니잖아.”
“그래서 말했잖아. 개 좆같은 고문이라고. 아무튼 내 스승이었지만 지금은 원수새끼야. 날 이따구로 만들어놨으니까.”
“그 사람도 군인이었어?”
“아니. 한 낱 범죄자 새끼야.”
마지막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노을이 저무려 하고 있었다. 벌써 저녁시간인 것이다. 차츰 시선들도 사라지고 주환의 부하들이 밤을 대비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거는 병신같아도 무기는 훑어만 봐도 쓸만한 것들이 많이있었다. 시끄러운 밤이 될 것이다.
“가자, 사라. 곧있으면 밤이야.”
“응.”
사라가 내 손을 잡았다. 따듯한 온기가 좋았다. 그녀를 일으키고 주환이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도를 펼치며 부두목들로 보이는 애들에게 여러가지를 지시했다. 각자들에게 어떤 벽에서 어떻게 해라, 몇 시간 단위로 교대해라, 크립톤과 불가피한 교전 시 수칙같은 걸 열심히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사라와 함께.
“사라, 나 잠 좀 잘테니까 총소리 들리면 깨워줘.”
“크립톤들하고 싸울 생각이야?”
“어쩌면 그렇게 될 지도 모르지. 근데 먼저 나설 생각은 아니야. 얘네들이 있으니까.”
“의사선생님이 가능한 싸움은 피하라고......”
“괜찮아. 안 맞으면 돼.”
평소처럼 몸이 나른해졌다. 이대로 눈을 감고 조금만, 잠을 자도록 하자. 그런데 그 소망을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까까지 부하들에게 설명을 하던 주환이 내 이름을 부른 것이다.
“엔, 잠자는 시간을 조금 미뤄줬으면 하는군.”
“아?”
잠에 들려는 날 깨워서 그를 짜증스럽게 쳐다보았다.
“너도 우리 애들과 함께 경비대로 편성되어 줬으면 하는데.”
“......꺼져. 잘거야.”
무시해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경비대? 웃기는 소리 말라지. 그런걸 해줄 만큼의 정은 없었다. 지금 나와 그의 관계는 적의 적, 공통 목표가 있는 일시적인 아군인뿐, 동료도 아니었다. 그 새끼만 죽이면 이놈과도 영원히 안녕이었다. 이번에는 사라도 도와주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쌤통이다. 그런 속 시원한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ㅇ,에, 에....더, 더!”
나의 몸 주위로 여러개의 빈 주사기들이 굴러다녔다. 안에 들어있던 소량의 약물들은 모두 내 몸에 들어와 여기저기들을 기분 좋게 괴롭혀왔다. 중학생 이후로 오랜만에 맞아보는 약들에 정신과 몸이 제대로 지탱하지를 못했다. 그냥 다 필요없고 기분이 좋았다. 동시에 나의 그곳으로 쉴 개 없이 꼬추들이 박혀왔다. 이미 아랫도리랑 입에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정액들로 범벅이 되었다.
“윽!”
“아!”
다 시 한발, 나의 배 안으로 따듯한 액의 감촉이 어루만져왔다. 안그래도 꽉 차버렸는데 새로운 액이 들어오면서 넘쳐흐르기까지 했다. 잠시 손가락을 넣었을 뿐인데 민감해진 몸이 짜릿했고 여러 번 긁어대고 쉬지 않고서 액들이 뿜어져 나왔다. 진짜 쾌락이 이런걸까?
“미친년, 존나 앵기네. 야! 더 박을 새끼 있어?”
“나.”
지금까지 몇 번 박혔냐면, 몰라, 그냥 기분만 좋으면 그만이지. 생각없이 즐기고, 생각없이 빨아재끼고, 생각없이 박혀대면서. 나중에는 뒷구멍으로도 여러번 박혔다. 안은 젤로 한 가득 차버러서 끈적거리면서 미끌거리는 느낌까지 한 몫 했다. 진짜, 존나게 좋아. 그새 또 새로운 게 박혀들어왔다. 내 속을 헤집으면서 다시 쾌락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제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벌써 눈이 뒤집히면서 의식도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게 섹스지, 시발.
“웁!”
박히고 있던 도중에 입으로 쑥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이미 정액으로 가득한 속인데 또 채워지겠네. 처음에는 별로 맛이 없었는데 약을 맞으며 계속 먹다보니까 먹을 만했다. 충분히.
“다음!”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날 쳐다보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 그랬지. 이것도 훈련이었다. 싸우는 법과 동시에 성고문에서 버티도록. 근데 어쩌겠어, 쾌락뿐인걸. 미쳐버릴 정도로.
‘탕!’
총성소리에 눈을 떴다. 본능에 충실한 개처럼. 동시에 사라가 내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
“엔!”
일어났다는 의미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어났고 대충 권총과 나이프를 확인한 뒤 일어섰다. 텐트의 입구, 그곳으로 주환이 위엄있는 걸음으로 들어왔다.
“크립톤이야?”
“7마리가 찾아왔다. 방금 총성으로 한 마리를 죽여서 이제는 6마리.”
“어디로?”
“정문이다. 너와 함께 들어온 그곳.”
“시발, 귀찮게.”
뻐근한 목을 풀며 일어섰다.
“엔, 싸울 생각이야?”
“아니, 허리 아파서. 구경이나 해야지.”
불안한 표정인 사라를 이끌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램프들 대신에 불을 지핀 드럼통들과 모닥불이 중세시대마냥 밖을 비추고 있었다. 크립톤때문인지 우리들을 힐끗 쳐다보던 놈들은 죄다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죽기 싫으면 알아서들 몸을 사려야겠지.
텐트들의 행렬을 지나 엉성하게 세워진 벽, 대충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저 너머를 쳐다보았다. 사라에게는 춥지 않도록 내 후드자켓을 걸쳐주고 옆에 선 주환과 함께 밖을 보았다. 오랜만에 직접적으로 보는 크립톤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과 비슷한 얼굴이 박힌 대가리와 커다란 앞발에는 발톱이, 뒷다리는 짧지만 역시 발톱들이 위협적이었다. 일부는 개가 아닌 사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사람의 팔을 달고 있는 놈도 있었다. 역겨운 모습은 전혀 변한게 없었다.
“조준해.”
주환의 부하들이 권총을 들고 쏴갈길 준비를 했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 그에게 물었다.
“총쏘면 더 몰려오는 거 아냐?”
“그래봐야 3마리 정도다.”
“몰려드는 거잖아, 그게. 씹새야.”
6마리. 내가 한번에 최대로 상대했던 숫자보다는 적었다. 최근 크립톤들과 싸운 적이 있었던가? 없다. 가능하면 피했고 사라와 다니고 나서부터는 그녀의 안전을 생각해 더더욱 피하며 다녔다. 송혜의 섹터에서 마주하기는 했지만 그 여우새끼는 크립톤 같지 않으니까 패스. 아무튼, 그래서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오랜만에 저새끼들과의 감각이 남아있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애들 보고 총 치우라고 해. 시끄러우니까.”
“직접 나설 생각인가?”
“오랜만에. 감 뒤졌는지 확인하러.”
“엔.” 계단을 내려가며 전투를 준비하려는데 사라가 나를 불렀다. 확실히 송혜를 만나기 전보다는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여전히 송혜가 말했던 ‘싸움금지’를 신경쓰고 있었다. 몸이 좀 뻐근하기는 해도 저 정도 숫자를 감당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공백이 있긴해도 항상 해오던 싸움이었으니까. 나이프를 잠시 내려놓고 사라의 손을 잡았다. 왕자님이 나타난 것처럼.
“사라, 오늘 나랑 꼭 붙어서 자자.”
“그래도.”
“잠깐이면 돼.”
마지막 인사를 해주고 문 뒤에 섰다. 옆에는 총을 든 다른 부하가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참 눈치껏 행동해줬으면 하는데 전혀 융통성이 없는 놈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직접 말해야 할 정도였다.
“열어.”
“그러면 크립톤이.”
“열으라고.”
남자는 나를 보다가 자신의 대장인 주환을 쳐다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나 대신 사라를 옆에 두고있는 그는 열으라며 가벼운 고개짓을 보였다. 뒤늦게나마 문이 열리고 바깥세상이, 크립톤의 무대가 나를 맞이했다. 벽 위에서 보는거랑 아래에 직접 나서서 보는것은 역시 느낌이 좀 달랐다. 더 역겨워졌다.
‘우어어어!’
나를 보자마자 더 미친듯이 다가오는 크립톤들. 그 중 가장 선두에 섰던 놈이 자신의 발톱을 앞세웠다. 날카롭기보다는 뾰족하고 굵어서 한 번만 찔려도 작지 않은 구멍이 생길 정도였다. 더군다나 지금의 내 상태면 송혜가 지랄하다 못해 어쩌면 욕까지 박을 정도의 상처가 더 생길지로 모르지. 하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있지 않았다. 나이프를 단단히 쥐었다.
“여전히 시끄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