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17 (완)
“피해!”
다급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눈이 떠졌다. 여전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불꽃들. 그 앞으로 한 남자가 뛰쳐들어왔다. 한 손에는 급하게 구한 방패같은 것을 들고서. 그는 진욱이었다. 불꽃은 나에게 닿지 못하고 그의 방패에 맞았고 폭발들이 일었다.
‘펑!’
폭발한 불꽃들은 옆에 들에 불똥들을 튀겼고 진욱을 강하게 밀쳐버렸다. 그가 힘을 주면서 중심을 잡으려던 다리가 공중에 뜨고 그대로 튕겨져 나의 옆으로 날아왔다. ‘퍽’하고 들리는 소리가 강했다.
“괜찮아?”
분명히 자신이 더 아플텐데도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서는 나를 먼저 보살펴주었다. 그가 들었던 방패, 커다란 뚜껑같은 것은 모양이 멀쩡하기는 했지만 금이 가 있었다. 큰 폭발이었으니 부서지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나저나 괴물이 저런 공격까지 해오다니.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크립톤도, 돌연변이들도 저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눈앞에 마치 상상속에서나 나오는 괴물이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저보다 진욱씨가.]
“나 걱정해주는 건가?”
진욱씨는 미소로 화답하고 나의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어떠한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앞에 선 것이다.
“도망갈 수 있어?”
한 마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진욱씨가 괴물의 관심을 돌려준다면 난 여기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어서서 그의 옆에 섰다. 이미 들고있던 우지의 탄창은 비어버린 지 오래였다. 방아쇠를 당겨보지만 ‘틱틱’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조용히 옆에 버리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도망치지 않아요.]
“......용감하네.”
괴물은 이제 잔해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꼬리는 4개지만 끝에 다시 불꽃들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위협적인 앞발을 들어 우리를 향했다.
“......건우, 너의 복수심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미쳐서 괴물까지 될 줄이야.”
“마녀!”
“그만 잠들자. 내가 대신 미안하다.”
짧고 일방적인 대화지만 저 괴물에게 하는 소리였다. 진욱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건우씨의 옛 친구. 지금은 사이가 갈라졌지만 가장 친했다고 나에게 얘기를 꺼내준 적이 있었다. 건우씨가.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서도, 지금의 진욱의 목소리에서도 사이가 틀어졌다기에는 서로를 아껴주는 느낌이 있었다. 그저한 가지의 일로 인해 사이가 잠깐 멀어졌을 뿐 실은 둘 모두 계속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과 괴물로 만나 싸우고 있었다. 그게 안타까웠고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와요.]
그걸 이제는 알지 못할 괴물이 뒷발을 박찼다. 이제는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뛰어오고 있었다. 살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숨이 가빠졌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진욱이 있기는 했지만 그도 아까와 지금의 상처가 겹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당하기는 싫었다. 이미 도망칠 길도 없었다. 그렇게 괴물을 맞이했다. 큰 앞발들이 우리를 찢으려 했다. 진욱은 이미 싸울 자세를 잡고 있었고 나도 바닥에 있던 철근 하나를 주워서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찾았다! 시발새끼야!”
드디어 이 빌어먹을 개새끼를 찾을 수 있었다. 나에게 꼬리 3개가 잘리고 도망쳐서는 멀리 사라져버린 새끼. 난 당연히 사라에게 찾아갈 줄 알아서 급하게 뛰었고 예상은 적중했었다. 송혜의 병원, 진료실 쪽의 벽이 날아간 것은 물론이고 안에 들어가니 썅년이 겨우 팔을 들어 올리면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었다. 그걸 듣자마자 뛰쳐나왔다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길래 따라왔더니 이 망할 새끼가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거기다 진욱이랑 미유키를 노리면서. 보자마자 반갑고 빡치는 마음에 주먹을 한 대 갈겨주었다. 아직 사람의 얼굴이 남아있는 쪽에.
“이새끼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들어?!”
이어서 나이프를 뽑아서 턱을 한 번 쑤시면서 구미호의 몸을 순간 들어올리고 가슴쪽을 찔러 무너진 잔해까지 쭉 힘으로 밀어붙였다. 경로의 끝에서 발로 걷어차 넘어트리고 어째서인지 4개밖에 남아있지 않은 꼬리 중 2개를 잘라버렸다.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버리고 하나 더 잘라내려고 했을 때 앞발이 내 옆구리를 때리면서 밀쳐냈다. 올라탔던 난 그대로 떨어져 나갔지만 바로 일어서서 다시 달려들었다. 구미호도 겨우 일어서서 나를 꼬리로 치려던 참이었다. 그러면 나야 땡큐지. 몸을 숙여 피하며 하나를 더 잘라주었다. 이제 남은 꼬리를 하나였다.
“마녀! 마녀! 마녀!”
애틋하게 불러주네. 그런데 기쁘지는 않았다. 나는 사라에게 불리고 싶지 이딴 괴물새끼한테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구미호는 마지막 발악인지 뒷발을 세게 쳐서 내게로 빠르게 날아왔다. 마치 총알같이 몸을 날린 것이다. 피하지 않았다. 나이프를 들고 옆으로 비키며 정확히 등을 찔러주었다. 푹 꽂혀들어간 나이프, 그것을 꽉 쥔 나머지 날려진 구미호의 몸을 따라 나도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몸이 계속 험하게 굴려졌지만 이 망할새끼를 죽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마녀......”
“이제 힘 좀 빠지냐? 시발아.”
옆으로 굴러서 일어서고 구미호도 앞발을 이용해 일어섰다. 다행히 나만 지친게 아니었다. 이 녀석도 점점 체력이 지쳐가고 있는게 보였다 상처들이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고 꼬리에 계속 붙던 불은 이제 꺼져가고 있었다. 그 뭔지도 모를 불꽃을 던질 일은 피하게 되었다. 그래도 저 두꺼운 꼬리는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좀 끝내자.”
나는 다시 달려들 준비를 했다. 순간 발목이 아파서 잠시 균형을 잃었지만 억지로 힘을 주고 일어서면서 나이프를 고쳐잡았다. 뒤에서는 진욱과 미유키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옘병, 이 괴물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조금 몸을 숙였다. 또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도망친다면 목적지는 뻔했다. 사라가 있는 병원. 다급히 멈출 방법이 필요했다. 송혜가 있긴 하지만 그녀는 이 새끼의 약점을 모르고 팔도 아직 회복을 하지 못 한 상태였다. 분명히 당할 것이다. 거기다 미유키도, 진욱도 모두 여기에 있었다. 이런 시발. 어떻게 멈추지? 방법이......떠올랐다. 뒤에 진욱이 있기는 했지만 사라를 살리려면 그것밖에 없었다. 입을 열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직 생각이 남아있기를 바라며 구미호에게, 건우새끼에게 외쳤다.
“야! 니네 엄마, 애기분말 맥이고 떡쳤는데 조금 구수한 맛이 죽이더라! 너같은 자식새끼를 가졌던 몸 치고는 말이야. 한 번 빨아주니까 훅 가던데!”
구미호가 뒤를 돌았다. 아직 남아있던 건우의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나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니네 아빠 거시기 잘라서 마지막으로 쳐박게라도 해줬을 걸 존나게 후회해! 아니면 최후로 그 새끼 꼬추잡고 딜도로 쓰면서 시체섹스라고 해볼걸 그랬나봐!”
“마녀!”
완전히 나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괴물이 되었음에도 사람의 표정을 하고서 나에 대한 분노를, 증오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이걸로 된 것이다. 뒤에 있던 진욱도 따라서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프를 손에 꽉 쥐었다. 뒷발을 차면서 급발진한 구미호, 건우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면서 자신의 마지막 남은 꼬리를 들었다. 아까까지 꼬리 끝에만 붙어있던 불이 이제는 자신마저 태울 것처럼 몸까지 번지며 달려들어 왔다. 상당히 뜨거울 텐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위협적인 꼬리의 끝은 나 하나만을 노리며 살기를 드러냈다.
“거참 좆같네.”
그 살기속에서 나이프를 들고 걸음을 앞으로, 그리고 베어내었다. 나이프로 정확히 그의 마지막 남은 꼬리를 베었다. 건우는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고 나에 대한 시선을 거둬들였다. 아까까지 살기가 담겼던 꼬리는 그의 옆에서 잘린 채 타들어갔고 괴물의 몸 역시 불이 옮겨 붙으면서 자신 스스로를 화장시켜갔다. 정말로 끝난 것이다. 이 망할 경호원과의, 내가 만들어낸 피해자와의 악연이.
“욱.”
조금 이상하다.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아.”
뒤늦게야 발견하고 말았다. 나의 허리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 보니 구미호의 앞발에 피가 묻은 손톱이 보였다. 이런, 방심하고 말았다. 그 이전에 지친 것들이 상당히 쌓인 탓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이 정도는 가볍게 피할 수 있는데 정통으로 맞아버리기나 하고, 내가 바보같았다. 나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그때만큼의 실력이 온전히 나오지 않았다. 시발. 다시 하늘을 보면서 눕게 되었다. 누군가가 내게로 달려오는 발소리들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관심없었다. 그저 지금은 사라가 보고플 뿐이었다.
“사라......”
“실험은 어떤가?”
“반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갇히고 여러 가지 실험들을 받으면서 조금씩 나의 감각들이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 이상의 감각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 증거로 지금 벽 너머의 소리임에도 작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난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었으니까. 변해버린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옷같은 것으로 절대 숨길 수 없는 피부와 근육, 비어버린 오른쪽의 눈에서 튀어나온 끔찍한 살들이 뒤덮고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싸우고 위협을 해왔던 크립톤의 살들이었다.
형태는 매번 달라졌다. 매일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감각을 보내느냐에 따라서 커다란 손톱이 되었다가 커다란 날로 변하기도 했다. 한 번 이렇게 형태들이 잡히면 원래의 팔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아직 이것들을 조종한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웠다.
“꽤 볼만하군.”
하얀 실험실의 벽, 그 위에 단단한 유리가 막고있는 너머로 체형이 큰 연구원이 날 내려다보았다.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언제는 그를 없애버리겠다고 저 유리를 부숴보려고 온갖 행동들을 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그래서분하게 여기에만 앉아있어야 했다.
“전투는?”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이번에는 내 주위에 있는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총을 들고, 검은색의 옷과 방어구같은 것들을 입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반토막이 나거나 여기저기가 잘려나갔다. 하얗던 바닥도 덕분에 붉은색으로 덮이게 되었다. 그 수 명위로는 나의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모두 내가 죽인 사람들이었다.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모두가 들어와 내게 총을 쏘았다. 아픈건 당연했지만 사람일때와 달리 죽지는 않았다. 총알들이 상처입히거나 뚫고간 자리들에는 빠르게 새 살들이 자라나 메꾸었다. 그게 심장에 맞았음에도. 하지만 이들이 쏘는 총에 난 죽을거라는 생각에 두려운 나머지 본능적으로 변해버린 오른팔을 휘둘렀고 결과는 이러했다. 저 연구원이 그토록 원하던 ‘병기’가 된 것이다.
“반뿐이라도 완벽해. 이거면 그 망할놈도 누를 수 있겠지.”
이 자들은 나를 이용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 그 때가 오면 우선적으로 날 여기서 내보낼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다. 나와 함께했던, 그리고 보살펴주었던 언니오빠들을 죽이고 웃었던 그 여자, 그녀는 찾아낼 것이다. 처음에는 나 자신도 무서웠지만 이제는 괴물이 된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여자는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계속 관리해.”
연구원이 창문에서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너머로. 이곳에 나같은 사람들이 더 있을까. 그렇다면 모두 구해주고 싶었다. 우선은 여길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자. 그게 먼저였다. 나는 가운데에 있는 병동같은 침대에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요즘에는 잠을 자도 꿈을 잘 꾸지 못했다. 그저 검은 공간에서의 시간들만이 지나갔다. 오늘도 그럴까? 눈을 감았다. 어둠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다시 묶이게 되었다. 그것도 침대에. 괴물이 된 건우와의 싸움 직후 나는 다시 쓰러졌고 마침 옮기기가 끝난 송혜의 새 병원에 눕게 되었다. 낡아빠졌던 침대들과 노후화된 장비들이 있던 진료실과 달리 이제는 깔끔해진 것들만이 있는 진짜 병원에. 그것도 1인실. 묶이지만 않았다면 정말 병원에서 쉬는 느낌이 들었을 테지만 송혜가 허락하지 않았다.
“야! 최송혜!”
그리고 뼈 빠지게 불러 재껴도 대답은 커녕 노크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또 사라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진짜, 시발, 이거 풀기만 해봐. 당장 그 썅년부터 패버릴 것이다. 다른건 그렇다 치더라도 감히 내 여자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해? 지가 무슨 권리를 들고 있다고. 시발. 시발!
“야! 밥이라도 줘! 밥달라고. 밥!”
나중에는 배가 고파서 소리쳤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낸 의미는 사라것은 잘 챙겨주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물론 내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사라의 것을 빵빵한 풀코스로. 내 여친이니까. 나중에 물어봐서 찬밥이라던가 통조림을 먹였다고 하면 밥그릇을 들고가서 대가리를 깨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런 나의 외침을 듣고 썅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주었다. 문이 열리고 그 뒤로 송혜가 또 차트같을 것을 들고서 다가왔다.
“통조림이라도 줄까?”
“바퀴벌레만 아니면 돼. 사라는 풀코스로 차려주고. 알겠어? 셰프.”
“난 의사야.”
“동시에 간호사지. 알았으면 빨리 들고 와!”
“예이.”
귀찮다는 손짓과 함께 잠깐 나간 그녀는 내 요구대로 바퀴벌레는 아닌 과일 통조림 하나를 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내 몸을 잔뜩 구속하고 있던 벨트들을 풀어주고서 포크와 함께 내게 주었다. 받자마자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통조림 속의 과일들을 넘겼고 좆도 기다리지 않던 의사와의 면담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었지만 나도 지금 내 상태가 썩 좋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기에 닥치고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엔, 네 상태말인데.”
“빨리 말해. 요약해서.”
“진지하게 들어.”
갑작스레 그녀의 눈빛이 변해있었다. 그것도 인격이 바뀌어 가면서까지. 송혜가 아닌 지혜였다. 내 몸상태가 굳이 지혜를 꺼내가면서 설명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건가? 좋지 않은 건 알겠지만 그정도는 아니라고,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상처란거, 그냥 냅두면 낫는 것을.
“앞으로 싸움은 전부 피해. 허리에 있던 상처, 결코 가볍지 않은 데다가 내부 장기가 더 손상됐어.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부분들이 너무 많아.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거야.”
“얼마나?”
“최소 3개월.”
“미쳤냐?”
3개월 동안 싸움을 피하고 다니라니. 지금 세상에 널린 게 목숨건 싸움들뿐인데. 그 지랄을 하지 않고서는 사라를 지킬수도 없었다. 엿이나 먹으라지.
“내 추천은 그 기간동안 여기에 머무는 거야. 섹터장이 된 나니까 얼마든지 캐어해줄 수 있어.”
“거절하면?”
“강제로라도 여기에 머물게 할 거야.”
“꺼져.”
누구 맘대로 날 이딴곳에 가두겠다고 하는 건지. 난 바쁜 몸이었다. 하루빨리 사라를 데리고 부산으로 가야했다.
“엔, 농담이 아니야. 정말로 한 번 더 이런 꼴을 당한다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그럴 일 없어.”
더 이상의 잔소리들을 멀리하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옆에 내 옷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길래 바로 갈아입었다. 빨래도 해 놓은건지 썩은 냄새는 다 빠져있었다. 아무튼 지혜가 계속 옆에서 차트를 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싸움 때문에 뒤져? 하! 그럴 거면 진작에 뒤졌어. 이런 상처들, 수도 없이 겪어왔고 수도 없이 참아왔고, 셀 수도 없이 회복시켰어. 아직 몇 번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다음 싸움부터 상처만 안 입으면 장땡이지.내가 말했지 않았나?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뒤질 생각 없다고.”
“엔. 네 실력은 나도 잘 알아.”
“알면 그만해.”
지혜에서 다시 송혜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따라 빠르게 인격들을 바꾸고 있는 그녀였다. 무엇 때문에? 나야 모르지.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고 일어섰다. 역시, 몸일부분이 지친정도가 아니라 움직일 때마다 아파왔다. 특히 허리쪽이. 그래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여서 다행이었다. 가장 중요한 허리를 다쳤다면 정말로 여기에 머물게 되었을지도.
“야, 썅년. 계속 걱정하는 표정 지으니까 말해줄게. 난 사라랑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뒤질 생각이 없어. 나 알아서 잘 하니까 제발 그 쓸데없는 걱정, 집어치워.”
“......역시 들을 생각이 없구나.”
결국에는 피식하고 웃는 송혜였다. 분위기는 정말 진지했지만 옛날부터 우리는 그랬다. 그 때도 그녀는 내가 심하게 다쳐서 오면 방금처럼 싸움을 피하라거나 자신의 집에 머물다 가라고 했지만 그 때마다 좆까라 하면서 다시 뛰쳐나갔고 잘 살아갔다. 걱정은 걱정일 뿐이지, 그게 미래를 결정하는 건 아니니까. 이제 이 시답잖은 얘기를 끝내기로 했다. 송혜는 더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스스로 삼키며 관두었다. 내가 듣지 않을 거라는 거, 가장 잘 아는 그녀니까.
“사라는 어딨어?”
“여기, 같은 병원에 있어. 안그래도 널 보고 싶다면서 울고불고 난리였어.”
“사라! 내가 갈게!”
병원 안에 크게 소리쳤다. 어디 있는지를 몰라도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송혜는 바로 안내해주었다. 내가 있던 곳은 3층의 병실, 사라는 1층의 따로 마련되어있던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문을 박차며 들어갔다. 지나오면서 4구역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전부 이 병원에 있었지만 내 안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사라 뿐이었다.
“사라!”
“엔?”
안으로 들어가자 숙소용 침대에 사라가 걸쳐앉아 있었다. 피부와 머리카락은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 좀 씻었는지 말끔해져 있었다. 바로 다가가 크게 껴안았다. 팔이 하나뿐이었지만 안아주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면서 나의 살들을 그녀의 온기 가득한 살들과 맞대었다.
“우리 자기.”
“엔! 다 나은거야? 이제는 정말로 괜찮은 거지? 정말, 걱정했잖아.”
“걱정 좀 넣어둬. 난 절대로 널 두고 떠나지 않는다니까. 애야?”
“그래도......의사선생님도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니까, 정말로 큰일 난 줄 알았단 말이야.”
저 썅년, 사라한테 좋게 설명 안했나 보네. 나중에 술병으로 가져다가 한 대 쳐주기로 했다.
“없어. 그런거 없다고. 그러니까 안심해. 부산 가야지.”
“......응!”
사라와의 재회. 장소가 영 달갑지는 않았지만 뭐 그래도 둘 모두 무사한 것이 좋은 거겠지. 드디어 이 섹터에서의 일들을 끝맺을 수 있었다. 더 이상,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케이니를 죽였고 두영도 족쳤으며 정치인을 죽였고 건우도 완전히 마무리 지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짧은 기간동안 많은 일들이 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시 지쳐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사라를 더 꽉 껴안고 냄새를 맡았다. 다시 못 맡았으면 괴로워서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많이 다쳤다고 들었어. 지금 이거 다 상처인거지?”
사라의 손 하나가 내 옷 안으로 들어와서 허리를 만졌다. 그곳에는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은 어제의 상처가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손으로 붕대 위를 쓸어주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씩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사라의 손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오히려 나야말로 감사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안 괜찮았으면 내가 여기까지 와서 하고싶은 말을 못했겠지.”
“무슨 말?”
“가슴 만져도 돼?”
이 타이밍에 욕망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런 감동의 재회에서 이딴 질문을 해야겠냐고 묻겠지만 난 해야겠다. 나한테는 인생의 판가름이 걸린 정도니까. 그래봤자 대답은 안된다는 것이겠지만 프로포즈도 여러번 해봐야 아는 것이다. 언젠가는 허락해주겠지.
“한 번은 괜찮을지도.”
이제 막 두 다리로 일어서려던 때 사라의 ‘예스’가 떨어졌다. 처음에는 하도 내 성욕이 커서 미친 소리가 들리나 했는데 제대로 들은 프로포즈의 성공이었다. 대답을 해준 그녀는 이불을 가슴 위까지 올린 채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짧게나마 볼이 빨개지기까지. 귀엽다. 너무 귀엽다. 바로 만지고 싶었다. 그래도 이런 건 시작이 중요했다. 부드럽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뻗으며 그녀의 가슴 위로 손을 향했다.
“......엔?”
그러다 손끝이 멈췄다. 싫어진 거냐고 묻지 않았으면 한다. 만지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추었다. 뭐랄까, 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위자체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때가 아니랄까. 갑자기 이 생각은 왜 떠오른 것일까. 내가 드디어 미쳐서 그런가. 항상 미쳐있기는 했다만.
“됐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지고 싶고 덮치고 싶고 부드럽게 해야한다는 걸 아는데 내가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잊지 말자. 내 몸에는 아빠새끼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망할새끼를 죽이지 않는 한 그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술만 된다면 그 피들만 뽑아 저 너머에 버리고 싶지만 기술따위, 전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무튼, 그 탓에 난 섹스쪽으로 들어가면 거칠어진다. 부끄러워 하는 연인들처럼이 아닌 오직 욕망만을 채우려는 미친 성욕자들처럼. 한번으로 족하지 않아서 여러번 하고 때로는 다른 플레이를 하기도 한다. 여러명이서 하거나 약이나 기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그 중에서 주로 가하기도, 당하기도 하는 쪽이었다. 생일기념이라며 뻑갔던 그 날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미루어 사라를 한 번이라도 건드리는 순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은 그녀가 나의 거침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가슴을 향했던 손은 대신 머리로 옮겨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가슴을 만지려던 부드러움으로.
“저기, 이상한 소리이기는 한데.”
“뭔데?”
“엔은 동성애자야?”
찬물이 끼얹어졌다. 거참, 동성애자라니. 처음으로 사라에게 둔탁한 한 대를 맞은 것 같았다. 머리에 경고음이 뜰 정도였다.
“사라, 단언컨대 그건 아니야.”
“그런데 왜 내 가슴에집착해?”
“널 사랑하니까. 여친.”
“......난 여자야, 엔. 무슨 차이야?”“존나 다르잖아. 사라.”
이 귀여운 나의 여자친구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안타까워라. 그래도 언젠가는 나의 큰 마음이 전해지기를 빌었다. 지금 당장은 무리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크나큰 진전이 있었다. 무려 내 프로포즈를 받아줬으니까.
“언제 떠날거야?”
“해지기 전에 바로.”
더이상 오늘은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여기에서 보내버리고 말았다. 옆에서 의사가운을 걸친 송혜가 두 팔을 끼고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곧 헤어질 것임을 알렸다.
“야, 우리 조금 있으면 출발할 거야. 매너가 있다면 나 자는 사이에 기름은 가득 채워놨겠지? 이제와서 없다는니 그딴 소리하면 엎어버린다.”
“준비는 모두 되긴 했는데......”
썅년이 무언가를 감추듯 말끝을 흐렸다. 저번 2구역 애들을 숨겼던 것처럼 내게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우리가 떠난다고 하자마자 튀어나온 말이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명심하자. 이 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좋은 대가리를 굴려서 얻는 여자였다. 케이니, 두영, 건우때와 다른 제대로 된 긴장감이 날 찾아왔다.
“엔.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때? 여기에는 먹을 것도 있고 충분한 술도 있어. 거기다 난 이제 섹터장이라서 최고로 좋은 방은 물론이고 너가 원하는 것들도 가져다 줄 수 있어. 상처도 회복할 겸.”
이제쯤이면 그녀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역시 또 정치놀음이었다.
“야, 네가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진욱은 장식이냐?”
“효과가 다르지.”
“그건 니년 사정이니까 꺼져. 거기다 난 잘 살겠지만 사라가 지낼만한 환경을 아니란거, 너도 잘 알잖아. 사라는 우리와 달라. 순수한 사람이라고.”
“그렇긴한데......”
느껴져왔다. 분위기가 급하게 변했음을. 재빨리 사라를 일으켜 내 뒤로 물리고 글록을 들었다. 총구의 끝은 내 친구인 동시에 위험한 썅년인 송혜에게로 향해 있었다.
“엔, 무슨 일이야?”
“가만히 있어, 사라. 절대로 움직이지마.”
뒤에서, 보이지 않아서 불안해하는 사라에게 당부하고 모든 경계와 긴장감을 총구에 담았다. 그 어디에도 시선을 비껴두지 않았다. 상대는 송혜였다. 아니, 그녀는.
“엔, 날 널 보낼 생각이 없어.”
광혜였다. 그녀가 튀어나온 것이다. 저 느끼한 표정과 끈적거리는 말투. 이미 그녀의 손에는 수술할 때나 사용하는 작은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끝에는 뭘 쳐 바르기라도 했는지 형광등에 얉은 빛이 반짝였다. 약물에도 능한 송혜인만큼 독일 수도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몸이 마비된다는 그런것만 아니길 빌었다. 정말이지, 설마 했는데 최종보스가 따로 있었네. 이미 내가 여기에 온 시점부터 이걸 계획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어줘. 목줄은 안 채울테니까. 응?”
“미친년. 목줄 채워도 물어뜯으면 그만이거든! 그 전에 너, 나한테 이길수는 있냐? 자신감이 풍만한 가슴만하네.”
“보험을 들어놨어. 그치, 사라?”
“네? 그게 무슨.”
썅년이 갑자기 사라를 불렀다. ‘도대체 왜지?’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뭔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예상은 너무나도 적중해서 정신이 삥 돌 뻔했다.
“사라. 여기에 와서 맨 처음에 먹었던 약 기억해? 그거 사실 독약이야. 이제 3일만 지나면 목숨이 위험하게 될 거야. 지금은 잠복기니까.”
“......네?”
“이 미친년이!”
권총을 들었는데 대가리에 구멍을 내거나 목에담배 구멍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사라가 독을 먹은 상태고 그렇다는 건 해독은 이 썅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죽이면 사라도 3일 뒤에 죽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오고야 만 것이다. 그래도 얼마 안되는 친구년이라고 방심하고 만 결과였다. 쳐죽일년.
“당장 해독해. 어서!”
“내가 왜? 네가 저 멀리 떠나려는데 이렇게라도 붙들어야 하지 않겠어? 엔, 넌 내 친구고 내거야. 싸움으로는 못 이기니까 지금까지 오랫동안 끌면서 카드를 준비했어. 놀랐어?”
“최송혜!”
“엔, 너의 패배야. 넌 정말 강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남발했어. 단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날 믿은게 큰 실수야. 정말 변했구나, 엔. 그때와 너무나도 달라졌어.”
“니 목표는 여기 정치질이잖아. 죽으면 다 말짱 도루묵일텐데. 아니면 나도 협박하나 해볼까? 당장 사라한테 해독제를 주지 않으면 여기에 있던 꼬맹.”
나도 협박으로 받아치려다가 이것마저도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완전히 함정 카드였다. 사라가. 내 협박은 저 썅년이 아끼는 꼬맹이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내용인데 사라가 마음에 들어할까? 절대 아니다. 다 큰 성인놈을 죽이겠다고 말하면 큰 탈이 없겠지만 나이 어린 꼬맹이들은 달랐다. 옘병할.
“계속 말해봐, 엔. 끝까지.”
송혜는 내 끝말을 지적하며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 상황마저도 유도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완전히 당하고 만 것이다. 진짜로 나의 패배로 보일 정도였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악의 방법이었다.
“시발년. 어디서부터 소꿉놀이였냐?”
“네가 온 처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