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15
다른팀과 공동으로 작전이 있던 때였다. 특이하게도 캐나다놈들과 함께하는 작전이었는데 뭔 변태놈 한 명을 죽이라는 삼촌의 지시였다. 그것도 이 서양놈들과 함께.나를 포함해 우리쪽은 6명을, 캐나다는 여자소령 한 명을 포함해 7명 정도가 최첨단같은 장비를 들고 나타났다. 첫 인상은 보자마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가워요. 케이니에요. 그쪽이 저희와 함께할 친구들인가 보죠?」
인사랍시고 내 선배지만 팀장자격에서 박탈된 대위 한 명에게 악수를 건네고 있었다.바보같은 년, 팀장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저는 대원일 뿐이고 이 분이 팀장입니다.」
선배가 그 여자의 오류를 바로 잡아주었다. 그녀는 악수를 내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눈알이 위 아래로 구르는 것을 보니 날 훑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대신 설명해보면 난 계급을 가렸고 평소 군복이 아닌 검은색의 특수복장을 입었으며 검은색의 장발에 삼촌이 애용하던 것 중 하나인 MP5와 글록을 지니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움직임을 좀 더 빠르게 하기 위해 방탄복을 제외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벗어버리고 가벼운 캡모자만을 쓰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18살.
「상당히 어려보이시네요.」
“뭐라는 거야. 한국어 못 해?”
거기다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서양여자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 작전만 끝나면 더 볼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분명 길상씨가 최고의 부대원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이래서야 무사히 작전이나 마칠 수 있을 지 걱정이네요. 어려보일 뿐더러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사람을 팀장으로 임명해서 보내다니. 한국군은 이런 바보들 밖에 없는건가요?」
이번에도 또 뭐라고 길게 늘어놓기까지 했다. 물론 알아먹을 수는 없었다. 짧게 말했으면 별말 아니라고 생각하며 넘겼겠지만 꽤나 긴 말에 표정까지 기분 나쁘게 웃는 것이 영 이쁜 말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옆에 있던 선배에게 눈짓으로 통역을 부탁했다.
“우리를 못 믿겠데.”
와, 긴말을 그냥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내가 부탁한 것은 전체통역이었지만 선배의 통역에 대강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작전에서 상대팀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실력에 대한 의심이었다. 나는 주로 의심을 받는 입장이었으니 익숙했지만 아직 겨뤄본 것도, 무언가를 해본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면전에다가 대고 말하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앉았던 상자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메고있던 총들을 내려놓았다. 덤으로 입고 있던 방탄조끼와 최소한의 안전장비들도 벗어던졌다. 선배와 밑의 애들은 이런 내 행동을 알고서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뻐근한 목을 풀고 다리를 풀었다.
“선배, 한 마디만 해줘.”
“뭘?”
“영어는 몰라도 몸으로 하는 대화는 잘 안다고!”
곧바로 뛰쳐나가듯 일어서면서 주먹을 쥐고 그녀의 턱 아래를 향했다. 느리다거나 약하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녀에게 막히고 마는데 당연한 결과였다. 만약 이딴 주먹에 맞아서 쉽게 넉다운이 되었다면 군복을 벗어야 마땅하고 그 만큼 실력 또한 쓰레기라는 증거가 될 테니까. 아무튼 그녀도 내 주먹을 막자마자 반격을 가해왔다. 가볍게 잽들을 날리며 공격해오는 것이다. 몇 번 스쳐 지나가는 아슬아슬한 그림이 펼쳐지다가 단 한순간의 빈틈을 보고 다리를 들어올려 한 번에 그녀의 두 팔을 걷어내고 한 바퀴 돌아서 왼다리로 머리를 노리는 척 허리를 노렸다. 그런데도 만만치 않았다. 똑같이 몸을 돌리더니 허벅지와 무릎으로 걷어낸 것이다.
“시발년이!”
「악수 한 번 더럽네.」
허리에메었던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도 자신의 허벅지츰에 있던 무기를 꺼내드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들이 아닌 마체테였다. 어디서 저런 이상한 것을 주워온 것일까. 호기심도 잠시, 벌써 내 손이 그녀의 목과 가슴, 어깨쪽을 노리며 빠르게 찔러갔다. 그에 맞추어 케이니는 마체테로 부딪히며 옆으로 흘리거나 반격들을 시도해 왔다. 그리고 노려오는 검을 쥔 내 손목, 정확히는 오른 손목이었기에 대검을 왼손으로 던지고 오른손을 뒤쪽으로 숨겼다.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노렸다. 이번에도 그녀는 몸을 돌리며 피한다. 이러기를반복.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쪽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번 피하고 애꿎은 주먹이나 발길질에 맞은 상자들을 부서지거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캡모자는 이미 벗겨진 지 오래였다.
「이름이 뭐야? 알고 싶네.」
서로의 검이 마주하면서 힘싸움을 겨루던 중 그녀가 말했다. 영어로.
“영어 모른다니까!”
강하게 힘으로 더욱 밀어붙였다. 조금씩 그녀가 밀리기 시작했다. 힘싸움은 내가 조금 더 위였다. 그런데 이걸 노렸다는 듯 그녀의 마체테가 옆으로 빠져나가며 날 통째로 흘린 것이다. 안그래도 몸의 힘들을 쏟아붇고 있던 나여서 자연스레 앞쪽으로 자빠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겼다는 미소가 슬쩍 보였다. 크나큰 빈틈이 보인 것이니까 당연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나도 그녀가 이렇게 흘려보내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넘어지면서 몸을 완전히 돌려 들고있던 대검을 그녀의 얼굴쪽으로 던졌다. 그제서야 미소를 거두고 옆으로 피하는데 이미 늦었다. 던져진 대검이 천장에 꽂히고 내 몸은 등이 바닥에 닿자마자 반동을 이용해 백 덤블링으로 일어나 빠르게 달려들었다. 케이니의 허리를 감싸 안아 몸째로 넘어트렸고 주먹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가득 강한 힘을 싣고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
“......이제 믿어. 삼촌 먹칠은 나도 귀찮아지니까.”
그녀의 얼굴과 내 주먹의 거리는 불과 1cm. 여기서 끝냈다.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일단은 이번 작전에서 함께할 여자였고 이 정도면 쓸만한 팀원이었다. 올라탔던 몸을 비켜주고 내가 앉았던 상자 위에 도로 올라 앉았다. 그녀도 몸을 털고 일어나 있었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내게 다가와서는 잔뜩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다시 청해왔다.
「케이니.」
이름을 말하는 데 이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손을 뻗어서 그 악수를 받아주었다.
“노XX.”
하지만 이 때 눈치챘어야 했다. 이 여우년이 내 뒤에 칼을 꽂을 거라는 걸.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개판. 말 그대로 상황이 개판이었다. 나를 포함해 총 6명이었던 팀원 중 4명이 어이없게 죽어버리고 나와 선배만이 살아남아 비가 오는 갑판 위 컨테이너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은 상황도 아닌 것이 선배도 어깨에 총을 맞아서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일단 급한대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는 했는데 거세게 내리는 비 때문에 위험한 것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나에게 있는 무기라고는 글록이 전부였다. 피하는데 사용할 연막탄도, 섬광탄도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상대는 정예로 보이는 군인 7명, 거기다 케이니까지 껴 있었다. 안다. 이렇게 상황이 개판일 수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는거. 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케이니팀과 신뢰를 트고 개시된 시간에 맞추어 우리가 잡아야 할 변태가 있다는 배에 올라 끝에 다다른 순간에 뒷통수를 맞은 것이다. 변태가 있는 방의 문을 터트리고 진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의 팀이 우리팀을 총으로 갈겨버린 것이다. 행동이 빠른 나와 선배는 어찌 피했지만 남은 팀원들은 몸에 총알들이 박혀 즉사해버렸고 선배마저도 온전히 피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 속에서 나 혼자 대치를 하고 피하다가 배 끝인 여기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시발!
“정신차려 선배. 아직 뒤진거 아니니까.”
계속 정신이 꺼지려는 그의 의식을 깨워주면서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가망없는거 알잖아.”
“저 썅년만 죽여버리면 돼. 집가서 와이프랑 섹스 안할거야?”
“나 여자친구도 없다.”
“인생 뭐 살았어?”
비가 더더욱 거세지고 배도 심하게 흔들렸다. 이러다가는 배도 엎어질 것 같았다. 급한대로 삼촌에게 구조요청을 해놓기는 했지만 날씨가 이래서는 되려 구조팀이 죽어버릴 것이다. 버틴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
「항복해. 최소한 목숨은 살려줄 테니까.」
혼잡한 상황, 거센비를 가르고 여우같은 목소리가 나의 귀를 찔렀다. 그런데 영어라서 알아먹지는 못하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을 수 있었다.
“엿먹어, 시발!”
목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2발 쏴버렸다. 총알이 철 부분에 맞아 튕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비가 너무 거세서 들리는 게 없었다. 이대로라면 녀석들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들을 돌려보지만 다친 선배까지 끌고간다는 전제하에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쟤네들도 특수부대다. 여기까지 나를 몰아세운 것과 아름다운 뒷통수를 제대로 친 것을 보면 잡놈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조금,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선배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버리거나 인질로 삼아 협박해올 것이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너라도 가.”
내 썩어가는 표정을 본 것인지 선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닥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이 너무나도 정곡이라 입을 곱씹기만 했다. 내 마음이야 그러고 싶긴 하지. 그런데 그러기에는 이미 그와 지낸 세월이 꽤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혹은 2번 만난 사이라면 고민없이 버렸을 것이다. 내 목숨이 먼저니까. 어떻게 해야 나도 살고 선배를 살릴까.
“선배, 나 믿지?”
“널 믿느니 꽃뱀하고 다닐래.”
“나보다 이쁠 것 같아?”
“아니. 그건 아니겠지만 어쩌면 마음씨는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난 선배가 졸라게 싫어.”
글록을 들고 총구를 겨누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위험에 처해야 했다. 그럼 그 위험에서 그나마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는게 나았다.
“먼저 가 있어.”
방아쇠를 당겼고 글록의 총성이 거센 비소리에 묻히여 우리 사이를 갈랐다.
들고있던 글록으로 선배쪽을 겨누기는 했지만 정작 쏜 곳은 애먼 바닥이었다. 그곳을 여러발 쏘았다. 거센 비를 가른 총알은 애꿎은 바닥만 때렸고 튕겨나갈 뿐이었다. 그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설명할 여유따위 없었다. 이어서 재빠르게 대검을 꺼내 내 왼쪽 어깨를 쑤셔 삼촌이 심어놓은 작은 장치를 하나 꺼내고 피를 흘리게 한 뒤 대충 응급처치를 했다.
“들고있어. 삼촌이 심어놓은 위치추적기능이 있으니까 금방 올 거야.”
“어깨에다 위치추적기? 사령관님이 심어놓은거야?”
“됐고, 들고있기나 해.”
“넌 어쩌려고?”
“저 썅년이랑 놀다가 와야지. 적어도 선배보다는 내가 살아남는 실력이 더 쩔어주잖아. 거기다 선배 와이프 없다메. 인생 다 안 산 인간이 여기서 죽어서 묻히면 개불쌍하니까 다 해본 내가 대신 뛰어들 거야.”
“미쳤어?”
“꼬우면 팀장했던가.”
선배는 힘든 어깨를 움직이며 손으로 내 조끼자락을 잡았다. 그가 지금 뭘 바라면서 이러는지 알고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내 방법도 정상적인 것은 둘째치고 솔직히 좋은 방법이 아니긴 했지만 둘 다 살 수 있는 그 적은 확률이라도 있으니 한결 나은 쪽이었다. 선배가 잡은 조끼를 벗어버리고 컨테이너 끝에 몸을 붙였다. MP5의 탄창을 장전하고 자세를 잡았다. 여전한 거센 비가 모두를 덮은 어둠 속, 뒤에서 잔소리를 해대는 선배를 뒤로하고 갑판 위를 달렸다.
「저기 있다!」
「남자는?」
「아까 총소리가 들렸어. 죽이고 자기 혼자 튀는거야.」
「잡아!」
영어로 무어라 소리들이 들려왔다. 역시 알 수 없지만 모두 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보건데 제대로 먹힌 듯 했다. 내가 생각한 작전은 이러했다. 아까의 총소리와 내 왼쪽의 어깨에서 위치추적기를 뺄 겸 상처를 내서 같은 팀원끼리 싸우고 죽인 것으로 위장한 뒤 혼자 도망치려는 척 뛰어든다. 이게 먹힐만한 게 내쪽이나 저쪽이나 특수부대 중에서도 오로지 임무만을 위해 만들어진 쪽이였고 경우가 특수한 만큼 임무와 생존을 위해서라면 민간인이나 팀원을 쉽게 죽일 수 있는 부대였다. 즉, 이미 내가 선배를 죽이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나를 쫓아오게 만들 생각이었다.
‘탕!’
열심히 직선으로 달리던 와중 커다란 총소리와 함께 총알 하나가 내 다리 옆을 스쳤다. 별 것 아닌 상처지만 나를 넘어트리기에는 충분했다. 안그래도 비가 와서 미끄러운 갑판이었던지라 더욱 더 넘어지기 쉬운 상황이었다. 무릎이 부딪히고 망할 놈의 왼쪽 어깨부터 닿고 말았다. 일부러 쑤신 상처가 부딪혀 고통이 더했다.
“아야야, 시발. 진짜 좆같네!”
엎어진 몸을 돌려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오른손에 잡고 있던 MP5를 놓고 상처난 왼어깨를 만져보았다. 손을 적시는 피가 한가득이었다. 하여간 이놈의 배가 문제였다. 얼굴과 몸을 적시는 거센 빗속으로 여러명의 발소리들이 들려오며 나를 둘러싸왔다. 각자의 무기를 들고 나를 겨누는 총구들이 6개. 고개만을 돌리며 둘러보았는데 케이니만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선배에게로 간 건가. 젠장.
「동료까지 죽이고 도망치려 했나본데, 꼴사납지 않아? 이렇게 실패해버리면.」
다행히 아니었다. 나의 위쪽으로 여우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내리던 하늘을 가린 그녀의 얼굴이 나를 보면서 비웃고 있었다. 이것으로 케이니를 포함해 이놈들의 모든 시선을 내게로 끄는데 성공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삼촌이 와서 선배를 구해낼 것이다. 나는 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딘가로 해외여행을 할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삼촌의 구조만을 기다려야 했다. 아니면 틈을 보고 도망쳐야겠지.
「이 여자,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아니.」
적군 대원 중 한명이 케이니에게 뭐라고 말했다. 영어로.
「데려가. 꽤 비싸기 팔릴 것 같으니까.」
「그러고보니 크로노프씨가 경호원으로 쓸만한 개를 원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라면 비싸게 쳐주지 않을까요?」
「그렇네, 좋아. 날뛰지 않게 묶어. 날뛰면 기절시키고.」
「네.」
“시발! 나도 좀 알아먹자, 개새끼들아!”
쌍놈들이 계속 영어로 지껄이는데 나만 알아먹을 수 없는게 왕따가 된 것 같아서 바로 앞 놈에게 일어서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여기까지가 갑판 위의 기억, 둔탁한 고통과 함께 날뛰던 내 정신이 꺼져버렸다.
이후의 이야기는 좆같은 여행이 조금 있었다. 우선 나는 두 손과 두 발이 꽁꽁 묶여 눈가리개와 입마개까지 당한 채로 강제이동 당했다. 몸이 가볍지만 무언가 천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중간에 내 옷을 바꿔버린 것 같았다. 케이니의 스타일링 능력이 괜찮기를 빌었다. 아무튼 이렇게 묶여가면서 주변이 영어들로 지껄이는, 흔들리는 배같은 것에 탄 것을 보니 해외 어딘가로 가는 건 맞았다.
“음! 웁!”
탈출을 해야했다. 묶인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몸을 동원해 써보았지만 단순한 케이블타이로 묶은 게 아니었다. 젠장할! 선배는 조심히 나갔으려나. 그러길 빈다. 내가 지금 이런 꼴까지 당하고 있는데 삼촌이 구하지 못했거나 중간에 죽어버렸다면 화날테니까.
묶여서 어딘가로 움직이는 동안은 그렇게 심심하지 않았다. 중간마다 영어로 다가오는 대원 몇몇들이 다가와 내 몸을 만지거나 햝았고 그중에는 자신의 것을 내 안에 넣어 즐기다 가는 놈들도 있었다. 딱히 저항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런놈들이 저항한다고 그만둘 놈도 아니었고 하루이틀 당해본 게 아니라서 익숙했다. 그냥 빨리 싸게 하고 떠나보내는 게 나았다. 대신 찝찝해지는 것은 좀 씻고 싶었다. 자꾸 안에다가 싸지를 때마다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끈적함이 기분 나빴고 냄새까지 이제는 역하게 나서 별로였다. 지네들도 좀 닦고 쓰면 될 것을, 남 똥묻힌 데다가 지들 똥까지 직접 묻히고 싶을까. 아니, 비유가 좀 안 맞나.
나를 거친 놈들은 공통점 하나가 있었다. 모두 가랑이에 넣기만 하고 내 입은 건들지 않았다. 재갈을 풀고 박아넣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건 칭찬해주자. 탁월한 선택이다. 만약 입마개를 풀고 거시기를 집어넣었다면 벌써 물어뜯었을 것이다. 맛은 별로겠지만 엿은 먹일 수 있으니까. 평생 자식얼굴 못 보도록.
「일어나!」
그런식으로 센 날짜가 1주일 쯤 지났을 때 어떤놈이 잠자던 나를 강제로 일으켰다. 여전히 모두 묶인 상태였지만 한 가지 서비스를 챙겨주었다. 나에게 물을 뿌리고수건으로 닦아주는 것이었다. 케이니도 있을까 하며 귀를 기울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커녕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말리는 헤어드라이기의 소리가 귀를 덮었다. 그리고 다시 이동을 했고 내가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벗겨.」
케이니! 드디어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내 눈을 빼앗아갔던 가리개가 벗겨졌다. 금방 시야가 돌아오지는 못했다. 일주일 만에 보는 빛에 눈이 너무 부셨다. 1분쯤이 지나서야 겨우 볼 수 있는 정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의 앞에는 여우년의 표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웁!”
나의 입으로는 바로 쌍욕들이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뱉을 수는 없었다. 입마개는 아직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목과발목은 단단히 족쇄로 묶여있고 옷은 어느 틈에 벗겼는지 알몸이었다.
{그동안 정신 좀 죽일 생각으로 가둬놓고 애들한테 강간하라고 한 건데, 너무 멀쩡하네.}
썅년은 또 내가 알아먹지 못하는 언어로 길게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알아먹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묶여있지만 않았다면 바로 달려들어 죽여버렸을 텐데.
{그래서 나도 선물을 준비했어. 너 같은 미친사람한테는 잘 어울릴 거야.}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개목걸이 같은 것을 내게 채웠다. 똥개나 애완동물에게 쓰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단단한 철에다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전자식 같은 것이었다. 전혀 헐렁하지 않고 조일 정도로 내 목에 맞는 것이었다. 무슨 속셈으로 내게 이딴 것을 채우는 것일까. 애초에 이건 또 뭐하는 물건인건데.
「그녀를 풀어줘.」
여기까지 날 데려온 남자가 케이니의 명령에 묶고 있던 손목과 발목의 족쇄들을 풀어주었다. 입마개까지 풀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바로 내 양옆의 남자들을 제압했다. 무슨 생각으로 풀어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고마웠다.
“아임 파인 땡규, 개자식들아!”
뒤의 남자를 팔꿈치로 가격하고 바로 옆의 남자는 다른 손으로 목을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뒤 몇 번 밟아주었다. 이제 겨우 미쳐 날뛰는 나에게로 들어온 다음 타깃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는 케이니였다. 무기따위 필요없이 주먹에 힘을 가득 싣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넌 뒤졌어!”
{앉아}
그녀의 한 마디, 그 말에 나는 너무나도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달려들던 몸이 고꾸라지고 주먹을 쥐었던 두 손을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던 침이 게걸스럽게 흘러나오고 몸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케이니가 채운 목걸이, 그곳에서 갑작스러운 전기가, 그것도 강하게 흘러나와서는 목을 조여온 것이다. 너무 아파서 당장 손으로 벗겨 보려고 했지만 푸는 장치조차도 있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도 겨우일 정도의 전류였다.
“이, 컥! 시발!”
{앉아.}
아까보다 더 강한 전류가 흘러나왔다. 이미 침은 흐를대로 흘러 바닥을 적셨고 경련도 더해졌다. 당장 목걸이를 떼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이거, 진짜로 뒤질 정도였다. 전류가 멈춘 건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을 때였고 전류탓에 마비된 몸은 제 기능을 잃어 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대단히 마음에 드는군.}
{음성으로 반응합니다. 크로노프씨의 목소리도 등록해두었습니다. 시험해보시겠습니까?}
{글쎄.}
전류가 멈추고 겨우 상체를 움직일 때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 잘 아는 눈빛이었다. 사람을 쳐다보기보다는 그저 하찮은 동물새끼를 보는 눈이었다. 아빠새끼가 사람을 죽일 때나 보이던 것이었다. 검은색의 정장에 비싸보이는 목도리와 모자로 치장을 한 그는 운동도 좀 했는지 몸이 다부져 보였다. 그의 구둣발이 내 가슴을 밟더니 그대로 짓눌렀다. 힘없는 두 손으로 떼어내려고 발목을 쥐고서 밀어 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장바지에 구김만이 생길 뿐이었다.
{경호원으로는 쓸만한가?}
{보증합니다. 절 1대1로 때려눕혔으니까요.}
{자네를? 그렇다면 쓸만 하겠군. 좋아, 값을 더 줄테니 내 아들놈의 목소리도 등록해주게.}
{선물인가요?}
{이제 부릴때가 되었지.}
구둣발이 치워지고 나에게 맞아서 쓰러졌던 남자 둘이 나를 일으켰다. 다시 채워지는 족쇄들과 입마게. 다시 눈이 가려졌다. 그리고 귓가를 후벼파는 한 목소리.
{앉아.}
목으로 또 엄청난 전류가 흘렀다.
나는 팔렸다. 비록 영어나 다른 언어로 오갔던 대화라 알아먹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당한 일, 본것들로 합해서 생각해보면 난 분명히 팔렸다. 그리고 내가 오게 된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역시 영화에서나 보던 커다란 서양식의 저택, 안에는 수많은 메이드나 하인놈들이 있고 커다란 정원에 수많은 슈퍼카들과 검은색의 정장들을 입고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그런 이미지 가득한 저택. 그곳 안에 내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내 말을 알아먹겠나?}
날 구입한 남자가 무어라 말을 날렸다. 알아먹지 못해서 모른다는 의사만 표했다. 원래라면 짜증과 이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에 엿을 날렸겠지만 나도 멍청하지는 않았다. 목에 채워진 이 망할 목걸이 때문에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그리고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내가 말을 모른다는 것을 확인 하고는 막 다가온 집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먼저 말을 가르쳐. 긴 의사소통까지는 필요없고 짧고 명령만 알아먹을 수 있으면 돼.}
{알겠습니다.}
아마 말을 가르치라는 소리일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고 나는 다음날부터 방 하나를 제공받은 뒤 언어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한국어가 가능한 교사를 통해 가르쳐주었다. 나도 그를 통해서 이곳의 여러가지 정보들을 얻었는데 첫 째, 내가 있는 곳은 스위스였다. 참 멀리도 온 것이다. 거기다 어딘지도 모르는 산속의 저택, 위치파악이 어려웠다.
둘 째, 이 저택의 주인은 ‘크로노프’라는 남자로 스위스에서 제일가는 마피아 집단이라고 한다. 자식으로는 이제 고등학생이 된 아들 하나와 중학생 나이정도의 딸 하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학교를 다니는 상태였다. 물론 학교에 돈을 줘서 입막음을 한 상태고 애초에 대들 경찰이나 군인이 없어서 들켜도 무방하다고 한다. 특이점으로는 아들놈이 마피아라는 집단에 어울리지 않게 착하다고 한다. 물론 믿지 않았다.
셋 째, 난 그 아들놈의 경호원 겸 메이드로 둘 예정이라고 한다. 언어수업이 끝나면 무기숙달과 그 외의 잡다한 업무를 메우게 될 거라고 말했다. 망했네. 난 전혀 손재주도 없고 청소와는 거리가 먼데. 추가로 운전도 가르친다고 한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면 그 착하다는 아들놈과 대면 할 것이고 그 전까지는 내가 지내는 방 밖으로 일체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야말로 감금. 그래도 밥은 넣어줬고 샤워실이나 편의시설의 질은 높았다. 밖을 나가지 못한다는 것만 뺀다면 나름 지낼만은 했다. 심심하면 넣어준 한국어로 된 책을 읽기도 했다.
제대로 알지도 모르는 장소, 집과는 반대편에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 난 이곳으로 팔려와 강제로 일을 하게 되었다.
“시발. 내 인생.”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는 모든게 정리된 상황이었다. 내가 경호원과 섹터장을 죽였을 때 마침 송혜쪽도 윗선들을 정리하고 나온 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2구역을 내세워서 경기장에 모여있던 관중들에게 섹터장이 바뀌었음을 선포, 그리고 구역권을 해제하는 동시에 자신이 새로운 섹터장이 되었음을 송혜가 알렸다. 동시에 아델리도 폐지.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벌써 카르디의 한 여자가 덤벼들어 왔지만 본보기로 처벌을 내려서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기존의 섹터장과 경호원의 시신은 따로 수습할 생각이 없었으나 진욱의 부탁으로 건우의 시신만큼은 따로 보관하고 추후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진욱이 그렇게 하고 싶다니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
송혜의 병원은 아직 옮기지 않았다. 원래는 태신의 빌딩을 점거하고 바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아직은 4구역의 사람들이 더 급한 쪽이었고 바로 쓸 수도 있는게 아니라서 준비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 4구역에서 병원을 운영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더 푹신하고 좋은 침대가 아닌 입원실의 그 낡은 침대에 누워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엄청 지루하게!
“야! 최송혜!”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최소한 사라라도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개뿔이고 만나게조차 해주지 않았다. 이 썅년이 나 없는 사이에 사라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확인도 할 수 없으니 개같았다. 왜냐, 나는 묶여있었으니까. 다른 짓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두 다리와 한팔을 따로 묶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목이랑 허리까지 벨트로 침대에 꽉 묶어둔 상태였다. 난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악해보지만 도저히 탈출 방법이 없었다.
“시발련아! 풀어라. 안 풀면 입에다가 약이란 약은 다 쑤셔 쳐넣는 수가 있다. 풀어!”
난동을 피워도 대답조차 해주지 않았다. 다른 병원이었으면 진정하라고 진정제라도 놓으러 올 텐데 이놈의 송혜는 전혀 올 생각이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드디어 썅년이 얼굴을 드러내 주었다.
“안녕, 엔. 푹 잤어?”
“널 반쯤 죽여야 푹 잘 것 같은데. 사라 어딨어? 어딨냐고?!”
“엔, 회복이 먼저인거 알지?”
“좆 까. 이미 상처도 다 아물었거든? 풀어라. 개년아!”
“안돼.”
그리고는 내 허락도 없이 몸에 손대면서 몇몇 상처를 보더니 다시 나가버렸다. 저 시발년이. 그래서 더 난동을 피우다가도 점점 지쳐서 그것마저도 포기했다. 더이상 움직였다가는 내가 먼저 잠들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면서 대충 생각들을 했다.
일단 하루가 지났다고 한다. 내 상처들을 얕은게 하나도 없었고 만신창이라고 했다. 송혜가. 급소들을 피했긴 하지만 피를 많이 흘렸고 뼈에 금이 간 곳들도 많았으며 장기쪽으로도 내상을 입은 게 몇몇 발견되었다고 한다. 나 자신은 그것들이 익숙해서 그런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송혜는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서 아픈갑다 싶었다. 어쨋든 죽지만 않으면 장땡이지.
사라는 따로 검사를 했지만 다행히 상처도 베인 정도가 끝이라서 별일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길 갑자기 건우가 쳐들어와서는 일광과 미유키를 순식간에 눕히고 자신을 데려갔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경호원놈이 나에 대해서 말한게 있냐고 물어봤는데 딱히 없었다는 것에 안심을 했다. 뭐, 내가 ‘서울의 마녀’라는 것을 말했다면 이미 사라가 찾아와서 이것저것 캐물었겠지. 여러모로 해피엔딩이라는 소리다.
이제부터 나는 회복이 되는대로 사라와 함께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다음은또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산으로 간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고 송혜에게서도 몫을 제대로 받을 생각이었다. 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아, 그리고 살호는 단 한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죽여서 매장시켰다고 한다. 남은 한 마리는 송혜가 연구를 통해서 크립톤에 관한 어떤 변형을 시켰는지, 그리고 ‘크레이터’의 흔적을 찾는데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섹터를 장악하고서 다른 목표를 잡았다고. 더불어 식물연구도 이어서 할거라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나 자신을 덮고 있는데 또 문이 열렸다. 나는 송혜인줄 알고 바로 물어뜯어 보려다가 다른 인물이 들어와서 잠시 이빨을 거둬들였다. 그는 진욱이었다.
“잘 쉬고있어?”
“묶여있는데 퍽이나 잘 쉬겠네. 사라 어딨어?”
“송혜가 답해주지 말라고 해서.”
“시발, 그 썅년, 이거 풀기만 해봐라. 때려버릴거야.”
진욱은 쓴웃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