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12
“수고했어, 엔. 여전하네.”
“여전하긴 시발, 수준낮아서 아무것도 못했다.”
경기의 끝과 승리를 듣자마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겼지만 마냥 좋지는 않았다. 내 후드자켓이 완전히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찢어진 곳도 생겨났을 정도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데 벌써 돌아가시려 했다. 거기다가 상상이하의 경기에도 실망이었다. 나 대신 재혁이가 왔어도 죄다 죽이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광혜로도 충분 했을 것이다.
“반응 쩔어주더냐?”
“모두 입벌리고 아무말도 못하더라. 자랑도 실컷했고.”
“하! 내일은 더 개쩔게 터트려줄게.”
내일이 마지막 경기였다. 동시에 케이니와 두영을 각각 마주할 수도 있는 경기이기도 했다. 이제 목표가 코앞이었다. 케이니와 두영을 죽여버리고 정치인새끼의 모가지를 따는게. 이곳에 벌써 며칠째 머무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기름을 받고 떠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사라가 먹을 것도 얻어서.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자.”
“그 소리는 이미 내 옷을 준비했다는 소리겠지? 내놔.”
“아닌데, 우리 구역까지 돌아가야 해.”
“......그럼 나보고 시발 이 꼴로 돌아가자는 거야? 어?!”
“가릴 건 다 가렸잖아. 그리고 엔이라면 딱히 가리지 않아도 신경쓰지 않았을거고.”
“너부터 벗겨줄게. 이리와, 오라고!”
쌍년의 옷을 죄다 찢어버리기 위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송혜는 또 요리조리 피해버리거나 막아버렸다. 그 때 이년을 버리는 게 맞았나 하고 후회감이 들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시발, 빨리 사라를 끌어안고 잠이나 퍼질러 자고 싶었다. 돌아가서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이나 자버려야지.
“아니면 이거라도 입을래?”
송혜가 어디선가 옷 한 벌을 꺼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어째선지 입고 있었던 란제리였다. 역시 저 썅년이 입혔던 것이구나.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나이프를 휘둘렀다. 진심으로. 최소한 머리카락들을 잘라 빡빡머리로 만들 생각이었다.
“너 시발 그거 그냥 나 입히고 따먹으려는 거잖아!”
“맞아.”
휘두르던 나이프를 도로 집어넣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맞지도 않을 거 그냥 포기했다. 오히려 여기서 잘못 체력을 빼다가 나중에 송혜한테 덮쳐질 위험이 있었다. 아마 이 년도 그걸 노리고서 일부러 자극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대는 송혜, 빌어먹을 내 친구였다.
다행히 돌아가는 길에 새 후드자켓을 장만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남색계열을 아니었지만 짙은 회색의 것을 하나 장만할 수 있었다. 재빠르게 갈아입자 송혜가 실망한 눈빛을 보였는데 제대로 엿을 먹여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중간과정을 거치며 돌아온 진료실, 사라가 내 목소리를 듣고서 아빠를 기다리는 딸내미처럼 맞이해주었다. 그래, 내가 이걸 기다렸지. 인사를 받아주고 입원실의 침대로 데려가 무릎을 빌렸다. 그 덕분에 피로가 풀리면서 잠이 빠르게 쏟아졌다. 역시 여친의 무릎이 최고였다. 그대로 몸을 맡기며 잠깐의 잠을 청했다.
주위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모두 괴물의 울음소리들뿐이었다. 그 어떤곳으로 도망쳐도 소리들은 날 쫓아왔다. 보이지 않은 채로, 소리에서 멀어지게만 뛰어다니며 움직였지만 가는 곳마다 부딪히고, 넘어지고, 쓸려서 상처들을 입었다. 아팠다. 그렇지만 아프다고 멈춰서면 크립톤들이 다가와서 나를 헤칠 것이다. 그게 무서워서, 싫어서, 아픈것들을 참으며 계속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두영오빠......”
옆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바닥을 울렸다. 돌따위가 아니었다.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지금까지 날 두렵게 했던 그 울음소리를 크게 내는 크립톤이었다. 날 쫓아온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옆까지.
앞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린 곳과 반대쪽으로 달렸다. 아까부터 쓸린 상처들이, 부딪혀서 까진 상처들이 계속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운동화를 신었지만 발이 아파왔다.
‘크르르.’
도망가던 반대쪽, 나의 바로 앞에서 목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까워지는 소리. 두꺼운 발자국들이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겨우 하는 것이라고는 뒷걸음질이 전부였다. 겁먹은 아이처럼.
“앗!”
그마저도 발이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난 죽는다. 그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일어서서 도망치는 것도 더 이상 무리였다. 난 앞을 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 앞에 있는 괴물조차 보지 못하는데 어디로 도망을 칠 수 있을까. 어쩌면 ‘사건’이 나타나 내 눈을 빼앗은 시점부터 이 상황이 원래 내가 겪어야 할 마지막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타난 사람들 덕분에 미뤄졌을 뿐이었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니까. 마냥 따라다니기 밖에 못하는 ‘짐’뿐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믿어보자고 했던 오빠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계속해서 버려지면서 사람들을 믿지 않게되었던 나였고, 그걸 알면서도 만났던 두영오빠에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라는 생각보다 ‘배신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체념한 듯이 있는 내게로 뜨거운 숨결이 다가왔다. 처음 느껴보는 크립톤의 숨결이었다. 앞과 뒤, 모두였다. 주위로 다른 크립톤들도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다. 괴물들이 모두 날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아......”
미끄러운 무언가가 나의 머리카락을 햝고 허리를 감았다. 나와 함께했던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다. 이 괴물들은 여자를 무작정 헤치지 않도 어딘가로 끌고 간다고. 나도 그렇게 되는 걸까. 끌려가서 어떻게 죽게 될지도 모르는 채로 끝나겠지. 무섭다. 너무 무서웠다. 죽기 싫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난 그저 ‘사건’이 나타났던 날 친구들과 새해를 맞이해 거리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던 중간에 ‘사건’이 나타난 것이다.나의 행복했던 ‘일상’을 뒤집어 버리면서.
어차피 보이지 않는데도 눈을 꼭 감았다. 새해를 같이 보내고 잠시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겨온 허리의 무언가가 날 들어올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할 것 같은 숨결들. 오히려 이 때만큼은 앞을 보지 못해서 잘된 것 같기도 했다. 보지 못하며 모르는 새 죽을 거니까. 도망갈 길이 모두 사라져 체념해버린 나, 그 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나를 휘감았던 것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립톤들도 각자들의 울음소리를 내다가 비명소리를 내었고 저 멀리 급히 떠나가는 발소리들이 거칠게 들여왔다. 그게 끝나고 잠시 뒤,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와 내 앞에서 말했다.
“끌고가.”
갑자기 잡아채지는 어깨와 두 팔, 누군가들이 날 잡고서 강제로 일으키고 걷게했다. 처음에는 구해지는 것일 줄 알고 안심했다. 괴물들에게서 벗어나 죽을 위기를 넘기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엔을 만나기 전까지.
“사라......”
“아.”
눈을 뜨자 밝은 햇빛이 느껴졌다. 나의 무릎으로 누군가가 누워있었다. 손을 들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엔, 그리고는 나에게 무릎을 내달라고 말하면서 그대로 잠들었고 나도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모르는 새 잠들어버린 것이다. 아직까지 손에는 엔의 미지근한 손이 느껴져 왔다. 어림풋이 들었던 목소리는 엔의 잠꼬대였던 것이다.
선생님은 없는지 밖으로 아무런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엔의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녀는 조금 뒤척이다가 나의 배에 얼굴을 묻어왔다. 조심히 엔의 몸을 다른 손으로 찾아 헤맸다. 허리쯤에 올려진건지 잘록한 게 만져졌다. 많이 피곤하다는 것이 느껴져 왔다. 숨을 쉬면 작게 올라오고 숨을 내쉬면 작게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 그런 엔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어떤 경기들이 펼쳐졌는지는 모르지만 두영오빠와 여러 번 마주했을 것이다.
“항상 고마워, 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를 가둔 채 지옥을 겪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나를 엔이 일으켜주었다. 그래서 그녀를 굳게 믿고있었다. 엔은 날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 인해 엔이 잘못되거나 다칠까봐 때로 걱정되었다. 어쩔 때는 내가 엔에게서 떠나야 그녀가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엔이 자주 위로를 해주었던 덕분에 불안을 많이 떨쳐낼 수 있었다.
항상 고집은 내가 부린게 맞았다. 하지만 선택은 매번 우리 둘이 함께했다며, 내 고집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옆에서 떠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쉬어, 엔.”
나는 그 말을 꼭 지키기로 다짐했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기로. 엔과 항상 같이있고 싶었다. 그게 나의 단순한 바램이었다.
“엔?......”
“가만히 있어. 넌 잠시 동안 내 인형이야.”
악몽을 꿨다. 아주 좆같은 악몽이었다. 거기다 개판꿈이기도 했다. 내가 갑자기 공중에 매달려 있었고 아래에서는 사라가 송혜에게 덮쳐져 레즈 섹스를 찍고 있었다. 감독은 브라이언. 그러면서 행위가 끝나고 나서는 사라가 나에게 이혼서류를 던졌고 송혜랑 재혼을 하더니 어디서 데려왔는지 개똥같은 남자새끼가 사회를 보기까지. 나는 계속 묶여있었는데 옷이 상황이 바뀔 때마다 옷도 계속 바뀌었다. 교복이었다가, 드레스였다가, 정장이었다가, 그냥 뒤죽박죽이었다. 지루한 사회멘트, 또 어째선지 크립톤 새끼들이 앉아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꿈 진짜 개판이네. 아무튼 이런 꿈이었다.
“엔, 손이 점점 올라오고 있어.”
“가슴 만져도 돼?”
“그건 좀 참아줘.”
“그럼 배 만질래.”
모가 안되면 도로 해야지. 사라의 옷 안에 넣었던 손을 배로 가져가 쓸어내리고 여기저기 살들을 젤리처럼 만졌다. 딱딱해서 느낌이 뭣같은 내 배와 달리 사라의 배는 고양이 발바닥 마냥 누르면 말랑거렸고 매끄러웠다. 당장 배만해도 이정도인데 가슴은 어떨까. 머릿속의 욕망이 커져갔다. 그냥 허락받지 말고 만져버릴까? 아니, 사라가 싫어하는 행동은 자제하도록 하자. 그래도 만지고 싶었다. 시발, 어쩌지.
“거긴 간지러워.”
중간에 배꼽이 있길래 만졌다. 사라는 많이 간지러워 하면서도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나에 대한 신뢰의 증거였다. 대신 자신의 몸을 조금씩 움찔거리면서 참는 그녀. 너무 귀여웠다. 이제는 덮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이었다. 이성과 욕망의 대결 규모가 점점 커져갔다. 손은 여전히 배꼽을 건들고 살들을 만졌다. 등은 어떨까? 옷 위지만 볼을 대고 비벼보았다. 역시 옷 때문에 별로다. 그러다 목이 보이길래 입술을 가볍게 올리고 냄새를 맡았다. 또 사라가 움찔거렸다. 너무 귀여워. 나는 이런 와이프를 둔 행복한 여자였다.
“진짜 가슴만지면 안 돼?”
“안돼.”
와이프라도 가슴은 안된다고 한다. 그래, 지금은 참자. 그래도 배를 만지는 거랑 가볍게 키스하는 걸 허락해줬으니 언젠가 가슴도 허락해줄 것이다. 그 때 마구 만지자.
“뭐해?”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썅년이 들어와 먹칠을 했다. 그녀는 우리를 보면서 흥미있는 눈을 보였고 나는 잔뜩 경계하면서 내쫓으려 했다. 저 년은 해로운 년이었다.
“꺼져. 내거야.”
“안 뺏어. 그러니까 표정 좀 풀겠어?”
“짖어버린다?”
개처럼 이빨을 보였다. 사라에게 손만대도 족쳐버린다는 경고였다. 팔로 사라를 꽉 끌어안았다.
“선생님은 오늘도 바쁘시네요.”
“미쳐날뛴 친구 덕분에 일이 너무 잘풀려서 말이야. 영역도 얻고 먹을 것도 생겼고 이제 좀 숨이 트이고 있어.”
“와아! 정말 잘됐네요.”
“고마워. 그래서 사라랑 오붓하게 거리를 좀 거닐려고 했는데 엔이 물 것 같아서 그러자고 못할것 같네.”
“알면 꺼져.”
“엔, 그러지마.”
생각해보면 내가 미친년이었다. 지금까지 사라를 송혜랑 단 둘이 있는 상황을 몇 번 만들었었는데 이런 잠재적 욕망덩어리같은 레즈년한테 맡긴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조심해야 했다. 사라가 토끼라면 저 썅년은 곰이니까. 지금까지 안 덮쳐진 게 다행이었다. 사라의 첫 레즈경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것이어야만 했다.
“아! 셋이서 둘러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겠네. 상관없지?”
사라가 의견을 내고 송혜가 물었다. 음......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 사라의 배를 더 만지작거렸다.
“대신 사라는 내 거야.”
“안 건드려.”
내가 따라간다는 조건에 허락했다. 송혜는 의사가운을 그대로 걸치고 나는 입고있던 후드차림, 사라는 카디건을 입혀주고 셋이서 밖으로 나섰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셋이서 나가본 게 첫 날 빼고는 없었다. 항상 송혜랑 경기장들로 이동하거나 시간이 조금 날 때마다 사라만을 데리고 걸음 운동을 갔던게 전부였다. 거기다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라 걸으며 정신을 깨게 할 겸 밖으로 산책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단, 옆에 있는 썅년만 없었다면 더욱 완벽했을 것이다.
“저번에는 여기가 구역선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저 먼 곳을 가리키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내가 따낸 영역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4구역의 크기는 이제 NRK와 비슷했다. 처음보다 4배는 넘게 커진것이다. 내 성과에 스스로 성취감과 잠깐의 나르시즘을 느꼈다.
“하얀언니!”
썅년의 설명을 들으며 걷고 있는데 웬 꼬마가 다가와서는 사라에게 안겼다. 뿐만 아니라 꽤 많은 아이들이 뒤따라와서는 연예인이라도 본 것 마냥 사라를 둘러싸는데 나도 자연스럽게 갇히고 말았다. 애들의 무리에. 모두 허리까지의 키밖에 안되는 꼬마들이었다. 그중 가장 사라에게 들이대고 있던 건 남자아이였다.
“하얀누나.”
“안녕, 성훈아.”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사라가 손을 뻗어 이리저리 찾다가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부모와 아이의 모습이었다. 거 참, 어린애들한테도 인기 겁나 많네. 사라만 휘말리면 모를까 나까지 휘말려서는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미꾸라지 같은 송혜는 벌써 빠져나가서는 이 꼬마들의 부모로 보이는 여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니, 어디가요?”
“잠깐 산책하고 있었어.”
“옆에 있는 언니는 친구에요?”
“응, 맞아. 친구야.”
“이 언니, 팔이 없어.”
“누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거에요?”
어째선지 애들의 관심이 사라에게서 나의 팔로 넘어와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축 늘어진 왼쪽의 후드소매. 가만히 두었으면 좋겠는데 맨 처음 사라를 불렀던 여자아이가 호기심으로 한 번 잡아보았고 이어서 다른 애들도 다가와 소매를 만져댔다. 아, 역시 애들은 귀찮았다. 싫다기보다는 귀찮은 것이다. 갑자기 왼쪽 어깨에 힘이 실리면서 순간 허리가 꺾였다. 뭔 놈의 힘들이 이렇게 세?
“야, 소매 잡아당기지마.”
“왜 팔이 없어요? 안 불편해요?”
“이 누나 등에 상처도 있어!”
“야, 야!”
이제는 내 후드자켓을 들어 올리더니 등의 흉터까지 엿보고 있었다.
“어떤 꼬마야?! 나와!”
몸을 돌리며 어떤 꼬마인지 잡아채서 혼내려는데 이 꼬마놈이 똑같이 따라서 도는 바람에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거기다 잽싸기까지 해서 손을 움직여도 잡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사라에게 눈짓으로, 아, 얘는 안보이지. 거기다가 이미 여자애들이랑 눈을 맞추며 재밌게 떠들고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이 애들을 상대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안녕, 수희야. 오랜만이네.”
“오랜만이에요.”
저 웃는 미소를 보니 엄청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난 죽을 맛이었다.
“소매에팔 집어넣지마! 그만 끌어당겨!”
“이 누나 총있어!”
소매랑 내 등을 신경쓰는 사이 다른 꼬마가 내 허리츰의 권총을 빼들었다. 이래서 귀찮다는 것이다. 애들한테는 긴장감이 세워지지가 않아서 뭘 할지 예측 자체가 안되었다. 우선은 권총을 뺏는 게 먼저였다. 항상적이 나타나는 것을 전제로 움직이기 때문에 안전모드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엄청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남자애라서.
“이거 진짜에요?”
“그거 진짜니까 내려놔. 안 그러면, 등 좀 그만 후벼!”
당장 뺏어야 하는데 내 등으로 들어온 꼬마랑 소매에 팔을 넣은 꼬마 때문에 쉽게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 새 내 후드주머니에 손을 넣는 꼬마들도 있었다. 돌아버리겠네. 한 명도 아니고 대여섯명이 날 둘러싸니 뭘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속에서 겨우 한 명을 떼어내고 권총을 뺏어서 혹시 몰라 안전모드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겨우 빠져나와 부서진 계단에 앉아 숨을 골랐다. 잠깐 둘러싸였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사라는 도대체 이런 애들하고 어떻게 놀아주고 있는 걸까.
“언니는 이름이 뭐에요?”
젠장, 끝이 아니었구나. 빈 소매에 손을 집어넣던 꼬마였다. 머리카락이 새집이 된 것을 보니 씻지 못한 것 같았다. 손으로 꼬인것들을 풀어주면서 필 수 있는 만큼 펴주고 답해주었다.
“엔.”
“사라언니처럼 외국인이에요?”
“토종 한국인이야.”
“그런데 이름이 왜 그래요?”
“원래 이름이 별로라서 내가 바꿨어.”
“그래도 되요?”
“내 이름인데 내 맘이다. 안 될게 뭐있어.”
“와! 나도 바꿔야지.”
이름얘기를 했을 뿐인데 이렇게 좋아할 수 있나. 아니, 상대는 꼬마다. 한창 그럴 나이다. 어렸을 적의 나와는 다르게 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꼬마. 이게 보통이었다. 난 유니크였고. 아, 힘들다.
“음?”
이제야 숨 좀 돌리겠구나 싶었던 때, 누군가 여기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왔다. 결코 좋은 시선이 아니었다. 평소의 긴장감을 되찾길 잘한 것 같다. 어디지. 시끄러운 꼬마들의 소리를 노이즈처럼 무시해버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사이, 창문, 옥상의 틈과 어두운 골목, 나라면 숨을만한 곳들과 내 고향이나 다름없는 뒷골목까지. 주의깊게 둘러보고서 한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었다. 내 시선이 다가오자 숨어버리는 어두운 그림자. 건물 사이의 비좁은 골목이었다. 케이니나 두영은 아니었다. 아예 다른 놈이었다. 그리고 내 감이 위험한 놈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앞에 있던 꼬마를 사라에게 보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송혜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또다른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야, 최송혜.”
“무슨 일이야?”
꼬마의 부모들하고 얘기를 하고있던 그녀에게 말했다.
“잠시 사라 좀 맡아라.”
“......알겠어.”
그녀는 내 눈을 보자마자 평소의 능글 맞는 얼굴이 아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였으니까. 뭐하는 놈일까. 왜 여기를 쳐다본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골목으로 향했다. 가능하면 총 쏘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사라가 있었으니까.
고향같은 어두운 골목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겨우 그 한걸음, 평범했던 공기들이 무게를 가지고 나를 누르려 든 것이다. 어쩌라고 식으로 무시하며 더욱 깊숙히 들어갔다. 분명히 근처에 있었다. 어디서 튀어나올까, 어떻게 덮쳐올까. 총을 들어 가슴쪽에 두고 주위를 둘러보며 모든 곳을 세밀히 보았다. 쓰레기통, 작은 틈, 창문, 부서지 문, 나의 위. 아직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생각이 없어보였다. 계속 걸어 도착한 곳, 골목의 사거리, 그제서야 내가 찾던 공기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색의 가죽재킷에 캡모자를 눌러쓴 놈이었다. 옷은 두영하고 비슷한데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이 새끼, 진짜로 위험하다. 케이니나 두영보다 더.
“넌 뭐야? 왜 멀리서 꼬라봤냐. 아동성애자는 아니지?”
“......‘서울의 마녀’”
바로 권총을 겨누었다.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거기다가 나를 ‘서울의 마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극히 적었고 그렇기 때문에 날 ‘마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나 얼굴들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목소리가 날 ‘마녀’라고 불렀다. 모든 날을 세우고 저 놈의 눈빛이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뭐하는 새끼야?’라고 물어봐 줄까, 아니면 바로 심장을 파줄까?”
대답대신 그가 빠르게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앞으로 던졌다. 그 행동에 바로 방아쇠를 당기려 했는데 무언가에 걸리면서 당겨지지가 않았다. 그 때 아까 내가 애들이 권총을 뺏어가는 바람에 안전모드로 바꿔놓은 것이 떠올랐다. 젠장!
그림자가 공중으로 던진 것은 연막탄이었다.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공중에서 터져 이 근처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시야가 가려졌다. 빨리 권총의 안전모드를 해제한 뒤 집어넣고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연막을 뿌렸다는 것은 두가지 중 하나, 근접전으로 덤벼오겠다거나 도망치겠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녀석을 도망치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나를 ‘마녀’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져 왔으니까. 적어도 나한테 원한이 있는 놈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소리에 집중했다. 연기소리도 노이즈로 생각해 무시하면서 그 외에 들리는 모든 소리에 집중했다. 그런 나에게로 뒤에서 조금씩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름 기척을 숨기면서 오려고 했나본데 아깝게 되었다. 나는 소리에 민감하도록 고문과 훈련을 받아온 년이었으니까.
“찾았다, 쥐새끼야!”
뒤를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그러면서 파고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을 대비해 발 한 쪽을 뒤로 빼두었다. 어느정도 선빵은 치겠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나이프를 멈춰야 했다. 나의 뒤로 다가온 것은 그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아닌 아까 내 옷을 들추고 흉터를 보이게 했던 남자꼬마였다. 날카로운 날이 꼬마의 머리 옆에서 겨우 멈추었다. 조금, 아주 조금만 더 깊게 휘둘렀다면 이 꼬마는 죽었을 것이다.
“누, 누나?”
“너 왜 여기에 있어?!”
난 이 꼬마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설마 따라온건가. 충분히 그럴만도 했다. 애들은 호기심이 많고 종잡을 수 없으니까. 역시 어린놈들은 죄다 귀찮았다.
‘덜컹.’
아까까지 그림자와 마주했던 곳에서 쓰레기통 같은게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다시 뒤로 돌았지만 다가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경기가 끝날 때 다시 보지. 마녀.”
“이 새끼가!”
“여자는 잘 관리하도록 해. 그녀에게까지 손을 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멀어져가는 발소리. 튄 건가. 아니, 이 녀석을 방금 여자를 잘 관리하라고 했다. 설마.
“사라!”
꼬마의 손을 강제로 잡아 이끌며 급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나름 빨리 뛰어가려 해도 이 꼬마의 보폭이 작아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한 빨리, 사라에게로 향했다. 왜 이 놈만이 왔다고 생각한 거지? 송혜가 곁에 있겠지만 걱정은 한가득이었다. 위험하다, 그 생각뿐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골목을 빠져나와 빛을 보았을 때.
“성훈아!”
한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와 꼬마를 안았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사라는 여전히 애들과 대화를 하면서 놀고 있었고 송혜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꼬마를 여자에게 넘기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의 앞에 섰다.
“사라.”
“엔?”
내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는 그녀. 나를 올려다보는 초점없는 눈동자. 무슨 일 있냐는 표정. 송혜는 옆에서 사라를 따라 나를 보더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 주었다. 그녀는 바로 여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에게서 애들을 떼어내 주었다. 나는 사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꼬마들이 내 거친 행동을 보고서 무서움을 느꼈는지 떨어졌지만 이렇게라도 초등학교 놀이는 끝내야만 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돌아가자. 여긴 위험해.”
“그게 무슨.”
“너 아니면 내가 노려지고 있어. 빨리 돌아가야 해.”
“애들은 무사하는 거지?”
“그렇다니까. 지금은 나만 노리고 온 거니까 이런 꼬마애들을 건들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어서.”
“......응.”
도대체 뭐하는 새끼였을까? 나를 보던 그 눈빛, 분명 죽이려는 눈빛이었다. 시발, 여기저기에서 원수 진게 한두개가 아니다 보니까 전혀 감 잡히는 놈이 없었다. 아니면 누군가 보냈을 지도 모르지. 아무튼 여기는 위험했다. 사라의 손을 잡고 계속 주위를 경계하면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마침 진욱도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내 표정이 좀 험악했는지 그도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어왔다. 모두 진료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상한 놈을 만났어.”
“이상한 놈?”
“어떤 꼬추새끼인데 가죽재킷에 캡모자를 깊게 썼어. 갑자기 나타나서는 날 죽일 눈빛을 보이더라고.”
“남자라......무슨 말은 없었고?”
진욱의 질문에 하마터면 솔직하게 말할 뻔했다. 지금 나의 옆에는 사라가 있었다. 그래서 나를 가리키고 입모양으로 ‘서울의 마녀’라고 알리며 눈치껏 주워먹기를 바랬다. 다행히 진욱과 송혜 둘 다 나의 말을 알아주고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건우야, 그 녀석은.”
“그 경호원이 왜 여기에.”
둘 다 아는 인물이었나 보다. 요새 나만 따돌림 받는 느낌이 들었는데 왜 시발 나만 모르는게 많은걸까. 내가 병신인건가. 머리를 긁적이고 설명을 이어달라고 했는데 진욱이 사라를 보면서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만 쳐다봐라, 내 여친 닳는다.
“사라, 잠시만 나랑 나가 있자.”
“저는 들으면 안되는건가요? 엔이 위험하다면 저도 알아야겠어요.”
“그렇다는데?”
사라의 눈을 보았다. 앞은 보지 못하면서 다양한 눈빛을 보이는 그녀의 눈이 강한 의지를 가득히 담고 있었다. 그냥 내쫓았다가는 계속 신경쓰면서 물어올 것이다. 뻔한 이야기였다. 진욱에게 눈치껏 대답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모두에게 책커버를 넘겨 그 놈이 누구인지,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건우는 원래 나랑 같은 군인이었어. ‘사건’이 나타나고 다른 동료들이랑 크립톤하고 전쟁을 치뤘지. 그러던 도중 부대가 몰살당하고 운좋게 살아남았던 우리는 부랑자 생활을 하다가 작년, 이곳에 도착했지. 우리 둘 모두 4구역에 정착했어. 그 때까지는 사이가 좋았지만 4구역이 몰락하면서 서로 갈라지고 말았어. 섹터장이 우리에게 자신의 경호로 들어오라고 권유해왔는데 당시에 막 송혜가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지. 난 남는다고 했고 그 녀석은 섹터장에게 가자고 했어. 가망없는 곳을 버리라고.”
“그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 진욱씨.”
“그 때 당신은 바빴고 건우는 이미 4구역을 떠나있던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거참 눈물 떡치는 소리네. 딱 봐도 넌 그 놈의 의리때문에 남은거고 그 시건방진 놈은 더 꼴리는 곳으로 간거구만.”
“그래, 맞아.”
진욱이 쓸쓸하게 웃어보였다. 무슨 남자들의 깨진 금단의 우정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 나의 관람평을 별점하나였다. 그 놈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왜 나와 사라를 노리냐는 것이다. 안 그러면 그 건우라는 새끼를 잡아 족친 다음에야 들어야 했다.
“그래서, 날 노리는 이유가 뭔데? 모르는 채로 얻어맞으면 더럽게 찝찝할 것 같거든.”
“그 녀석,군대오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자신이 보는 앞에서 한 살인자에게. 아무래도 널 그 살인자로 착각한 것 같아.”
나이스, 진욱. 내 눈치를 제대로 받아주었다. 옆에 있던 송혜는 그제서야 납득했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낯 쳐다보았고 사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내쪽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내가 애 앞에서 부부를 죽인 적이 있던가? 아니, 적어도 그건 없었다. 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목격자를 절대로 남기지 않았다. 설마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걸까.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마녀’로 활동한 게 꼭 20살 때 만은 아니었으니까. 미숙했던 17살, 그 때의 실수일지도 모르지. 작작 죽였어야 했나.
“엔을 살인자라고 착각하다니. 어째서.”
“그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