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11
송혜와 들린 술집은 작았다. 이번에도! 항상 작은 술집들만 들리는게 이제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아직 화천놈들은 도착하지 않았고 우리가 먼저 도착해 어울리지 않는 홍차 한 잔씩을 주문해 마시며 기다렸다. 누가 여자들 사는 도시 아니랄까봐 인테리어도 대부분 아기자기하며 예뻤고 고급스러운 천 같은 것들이 넘쳐났다. 송혜하고는 어울리는데 나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 홍차도 마찬가지.
“야, 여기는 창녀가 아니라 창남이 득실거리냐?”
“가볼래?”
“너랑은 안 가, 쌍년아.”
대화를 하면서도 내 눈은 술집의 문으로 향했다. 첫 번째는 케이니가 모습을 드러낼까였고 두 번째는 화천놈들이 언제오냐해서 쳐다보는 중이었다. 휴대폰이라도 있었다면 전화라도 해서 욕이라도 박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다 마신 홍차를 리필하고 얼음을 띄워서 먹을 때쯤, 드디어 화천놈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거지와 일광이라는 남자, 그리고 다친 곳들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은 미유키. 거지는 나에게 유치장 때의 표정으로 손을 들어 인사해왔고 나도 특별히 살갑게 반겨주었다.
이들은 바로 술을 주문했다. 여기에는 맥주나 소주대신 어디서 구한건지 와인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최소한 싸구려 맛이 나지 않을 것들만 주문했다. 안주는 필요없었다. 와인이라서 많이 마실 생각도 없었다. 거지는 술이 나오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
“의사양반, 말 안해둔거야?”
표정은 웃고 있지만 속에는 화를 품고 있었다. 나를 탓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의 뒤로 손등에 멍이 들고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미유키가 조용히 홍차만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렇게 은밀히 다가갈 줄은 몰랐어. ‘적’으로 의심을 살 만한 행동으로.”
“말은 해놨어야지. 그걸 믿고 미유키를 내보낸 건데.”
“반대로 엔을 만만하게 본 건 아니고?”
둘이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애같기도 하지만 두 구역의 신경전이라 다름없는 상황에서 평범한 기싸움은 아니었다.
확실히 송혜는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만약 미유키가 그녀의 이름을 담지 않았더라면 누구처럼 팔이 부러졌을 수도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반불구로 만들지 않는다고는 안했으니까. 그런데도 송혜는 말을 하지 않은데다가 지금 화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뭐, 그녀의 말도 틀리건 아니다. 동맹이라면 당당히 다가오면 됐을텐데 내가 느끼기에도 거의 적군이나 다름없었다.
이 말싸움은 조금 길게 이어졌지만 송혜의 의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다. 지금은 동맹이지만 그녀가 이 섹터를 먹고나면 화천은 송혜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때 다른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 의사양반은 절대 계획에 미스를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다. 거지는 이러한 송혜의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유키의 상처를 바라보다가 송혜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쓸쓸한 웃음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다음부터는 서로 조심하지.”
주먹이라도 쥐고 한 대 치려나 했지만 그들의 선택을 한발 물러나는 것이었다. 일단은 협력관계로서 섹터장을 끌어내리는 것에 집중하려는 것 같았다. 뒤에 있던 미유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려버렸고 일광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일 경기가 끝나면 4구역으로 와. 마지막 계획을 알려줄 거니까.”
“그러지.”
그리고 대화는 끝이났다. 거지는 두 사람을 이끌고 나가버렸고 이곳에는 나와 송혜만이 남게되었다.
“이제 설명을 해줄게. 화천은.”
“됐어. 대강 알았으니까.”
남은 홍차를 털어먹으면서 일축시켰다. 이미 알만한 건 알아챘으니 귀찮은 설명은 필요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서, 어떻게 날뛰어줄까?”
대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녀가 바라는 나의 행동, 송혜는 광혜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이 떠올라 불쾌했다.
“화천빼고는 모두 죽여버려.”
주문이 접수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서 받은 대답 중 가장 만족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나도 벌써 흥분되기 시작했다. 모두를 쳐죽여버릴 생각에.
모든 볼일이 끝나고 송혜와 함께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사라는 완전히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진욱은 얼굴을 감싸며 무척이나 고뇌하는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사라가 안 좋은 병에라도 걸렸나 하고 당장 송혜에게 진료를 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다행히 건강쪽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암울한 분위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입을 연 사람은 진욱이었다. 단, 사라를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였다. 그녀가 들으면 안 그래도 받은 충격이 더 커질것이라고 한다. 그리고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영이 왔었어.”
바로 권총을 들었다. 탄창 따위 볼 틈 없이 바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 망할 새끼가 왔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라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이다. 죽일 명분은 충분했다. 지금 당장 강남에 쳐들어가서 그 개새끼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엔, 진정해. 얘기를 들어보자.”
저지당했다. 내가 나가려던 문을 송혜가 가로막은 것이다. 하얀색의 가운 끝자락이 내 무릎에 닿고 있었다.
“비켜.”
“너무 뒤만 생각하다가 이 이상으로 사라에게 위협이 올 수도 있어.”
“......시발.”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설득에 찝찝하고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지만 간신히 권총을 넣고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일단 그 진욱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고 이후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뭐가 되었건 죽여버리는 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놈이 날 기습해서 기절시켰고 그 새 사라에게 접근했나봐. 그녀의 말로는 과거 얘기를 했대.”
“과거?”
“버려졌을 때의 얘기. 사라에게 ‘짐’이라고도 말하면서 상처도 줬고.”
지금 당장 나의 분노가 극한을 뚫어버릴 것 같았다. 그 시발놈이 나의 소중한 여자친구에게 ‘짐’이라고 하찮은 단어를 내뱉었다. 자기가 감당 못 해서 버려놓고는 ‘짐’이라고 한 것이다. 순전히 자기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탓하지 않고서 말이다. 더럽게 능력없고 무책임한 새끼.
“이후로 사라는 주눅들어서 계속 저 상태야. 몇 마디 위로는 해줬는데 아무래도 그놈의 말이 더 뇌리에 박힌 것 같아.”
사라는 강한 마음을 지닌 여자였다. 다만 속 어딘가로 자신의 존재로 인해 피해입는 것을 걱정하고 싫어하는 면이 있는데 매번 자기가 앞을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는 둥의 얘기를 꺼낼 정도였다. 그때마다 절대 아니라고 말해줬지만 그런 사실의 앞에서는 약해지는 그녀인데 개새끼가 그 부분을 입에 쳐담은 것이다. 불쑥 떠나게 되더라도 그 새끼만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런데 진욱씨, 너무 쉽게 당했네.”
“두영이 성장한 것도 있고 나도 감각이 많이 무뎌졌나봐.”
이건 나도 예상밖이었다. 날 찍어눌렀을 때의 진욱은 대단한 녀석이었다. 긴장이 줄어든 상태의 나이긴 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나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던 남자다. 그런 진욱이 두영한테, 그것도 기습이라지만 공격받고 기절했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엔, 사라를 먼저 위로해줘. 나보다는 옆에 계속 있어줬던 친구가 위로하는 게 더 좋겠지."
“말 안해도 알아.”
어떻게든 속에 담은, 겉으로 드러났던 화를 참아내면서 사라를 내보냈던 밖, 진료실로 걸어나갔다. 허름한 소파위에 앉은 사라가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을 쳐다보면서 한 손에는 내가 만들어준 지팡이를 꽉 잡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서 유일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선이 올라오며,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사라.”
“......응, 엔.”
“그 개새끼가 씨부린 말, 신경쓰지마. 알았어?”
“.....하지만 난.....엔도 나 때문에.”
“너 때문에 뒤지기라도 했어? 그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난 무슨 부적달고 다니는 외팔귀신이야? 그런건 사양이거든.”
“그래도, 두영오빠의 말이 맞기도 하니까....”
“그 시발놈의 합리?”
사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 사라. 그딴 어려운 단어를 써도 난 무슨 개소리인지 알아먹지 못해. 그리고 혹여나 내가 널 버릴거라는 생각이 남아있거든 집어치워. 넌 내 여자친구야. 알겠어? 뒤져도 같이 뒤질거니까.”
“....그게 아니야.”
사라의 손이 천천히 내 팔을 잡고 내려가더니 유일한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평소의 온기가 사라져있고 알 수 없는 차가움에 나도 놀라고 말았다. 그만큼 그녀가 받은 충격이 엄청 큰 것이다.
“난 엔을 믿어. 버리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나 때문에 엔이 다칠까봐. 아니, 이미 수없이 다쳤겠지. 태영씨가 있던 곳에서도 내 고집 때문에 의식이 없기까지 했었잖아. 그리고 석환씨의 일도, 내가 보지 못 했을 뿐이지 많이 다쳤을 거고.”
서울로부터 여기까지 왔던 그 몇 주 사이에 나는 여러 상처들을 입었다. 어떤 것은 괴물놈들이 긁었고 어떤 것들은 사람새끼들이 만들어준 것들이었다. 당시에 얼얼하기는 했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딱히 큰 상처들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야 알아챘다. 사라는 날 굳게 믿고있다. 자신을 버리지 않을거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자신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 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기뻤다.
“사라, 네 고집대로 해달라고 했어도 매번 그 선택들은 내가 한 거였어. 그리고 무사히 해결들을 해왔잖아? 그러면 된거야. 넌 절대 ‘짐’이 아니야. 너로 혼자만으로 인해서 생긴 일들이 아니라고. 우리 둘에 의해서 생긴 일들이었고 알겠어? 그리고 난 강해. 네 걱정보다 훨씬 더. 그러니까.”
사라가 잡아준 손을 잠시 놓고 앉은 그녀의 키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은 뒤 하나뿐인 팔로 깊이 끌어안았다. 손은 차가웠어도 그녀의 볼과 몸은 따스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아직 그 개새끼로 모든게 차가워진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마음이 조금 놓였고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내 옆에만 있어, 사라.”
“......미안해....엔...고마워.”
사라는 조용히, 내게는 감추려 했지만 작은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힘든 일과 무서운 일들이 있어도 울지 않았던 그녀가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이다. 팔에 힘을 주어 내 가슴팍에서 마음껏 울도록 해주었다. 떨리는 작은 몸이 무척이나 가련했다. 역시 넌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지켜줄 생각이었다. 영원히.
“잘 자, 사라.”
오늘 하루, 눈물과 함께 울어 재끼느라 마음이 피곤한 사라를 먼저 재웠다. 진료실 침대에 눕히고 춥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가 입었던 카디건은 벗겨서 침대의 옆에 걸어두었다. 원래라면 나도 함께 잠을 잤겠지만 오늘부터는 자제하기로 했다. 없어진 긴장감과 괴물 사이를 누비던 생활리듬을 미리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먼저 재우고 옆을 송혜에게 맡긴 뒤 잠시 병원 밖을 걸었다. 나라도 좆같은 머리를 식혀줄 필요가 있었다. 그만큼 여기서 의외의 인물을 만나고 사라와 관련된 일도 여러번 터졌으니 복잡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옘병, 여기에 오는게 아니었나. 송혜를 만난건 좋지만 케이니와 두영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송혜가 만들어냈다는 나무 밑 벤치에 앉았다. 저번에 진욱과 앉았던 벤치였다. 오늘 밤은 혼자서. 몸을 눕다시피 하고 저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달과 떠오른 별들이 혼자라는 것을 더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리에 집중했다. 사라의 옆에서 권총을 들고 크립톤들의 소리에 집중했던 것처럼. 여러가지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직 안 자는 애들 떠드는 소리, 바람소리, 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내게로 당당히 접근해오는 발소리. 고개를 돌리자 내 머리를 망쳐놓은 장본인이, 오랜만에 보는 또 다른 악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케이니’였다.
“오랜만이네.”
옛날보다는 늘어난 한국어의 억양과 말. 개같은 여우년.
“무슨 배짱이냐? 시발아.”
케이니. 삼촌의 밑에서 일할 때 중요한 작전에서 만나 내 뒷통수를 후려갈기고 스위스의 마피아에 팔아버린뒤 팀원들을 죽였던 원수 그 자체의 쌍년. 심지어 재혁이보다도 훨씬 악연일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권총을 들고 총알을 박아버리거나 나이프로 목을 베어버린 뒤 크립톤 새끼들의 밥으로 던져주고 싶었다. 내가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건 이 년이 항상 누군가들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들도 나만을 노린다면 상관없겠지만 진료실도 노리고 있을 지도 몰라 무작정 움직이지는 않았다.
“잠깐, 얼굴만 보러 왔어.”
진짜 한국말 늘었네.
“난 안보고 싶었는데. 가랑이 사이에 칼 꽂아서 조개살 따먹어줄까?”
“팔은 어쩌다가 그런거야?”
“개새끼들 밥으로 던져주고 왔다.”
저딴년한테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물어오는게 나한테는 짜증이 나고 대단히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다.
“......정혁씨의 팔을 단단히 부러트려 놨더라. 덕분에 더 이상 출전시킬 수가 없어졌어.”
빠르게 총을 꺼내서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커다란 총성과 함께 글록의 총알이 여우년의 뺨을 스쳐 지나가며 상처를 내었다.
“한 번만 더 말하면 그 주둥아리 부러트린다.”
마지막 경고였다. 여기서 저 개년의 목소리를 더 들었다가는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녀도 그런 내 성질을 알고 있어서 기분 나쁜 미소를 보이더니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병원쪽에서 다가오는 4명의 발소리들이 멀어져갔다. 역시 여우같은 년이었다. 케이니는 오랜만에 만난 나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빌어먹을 사회자가 여전한 목소리로 경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장소는 처음 여우괴물놈과 싸웠던 곳이었다. 이번 경기는 저번 경기들과 다르게 참가자들 모두가 대기실이 아닌 경기장의 중앙에 팀별로 모였고 그 가운데에는 테이블 하나와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를 가져다 놓았다. 분명히 운게임이라고 했었나.
“이번 경기는 ‘럭키 섹터’! 각 구역들의 운을 테스트하는 단순한 게임!”
규칙은 딱히 없었다. 가운데에 상자를 넣고 등수가 적힌 종이를 뽑으면 되었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순서를 정하고 종이뽑기의 숫자로 순위가 결정됩니다. 그럼 먼저 순서를 정해볼까요?”
우리 바로 옆으로 케이니가 보였다. 어젯밤에 얼굴을 들이밀었던 썅년. 나중에 물어보니 송혜가 자신들쪽으로 몇몇 수상한 사람이 왔었다고 했다. 다행히 광혜가 먼저 알아채서 쫓아내 버렸다고 한다.
“저 여자야? 원수라는 게.”
송혜도 어제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운지 케이니를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표정은 여유스러운 구역장 행새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어.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어.”
“......죽여줄까?”
“내가 죽일거니까 손대지마.”
맞은편에서는 두영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발, 럭키섹터고 나발이고 대충 끝내버리고서 이 자리를 떠나버리고 싶었다. 경기라서 꾹 참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둘 다 죽여버렸을 것이다. 송혜도 있으니 두려울 건 없었으니까. 아무튼 빨리 끝나라.
순서는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나는 인생자체부터가 운이 더럽게 나쁜지라 송혜가 뽑기로 했다. 그 결과 우리의 순서는 3등이 되었다. 나쁘지 않은 숫자였다.
“순서가 정해졌습니다. NRK-강남-4구역-화천-카르디-SRK 순이 되겠습니다. 먼저 NRK!”
‘보물찾기’때 보았던 남자가 나섰다. 1등이라는 것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걸음이 당당했다. 그가 박스 안으로 손을 넣고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좋습니다. 결과는 모두가 종이를 뽑고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강남!”
두영이 걸어나왔다. 그는 무심하게 다가가 무심하게 종이를 꺼냈다.
“4구역!”
우리의 차례, 이것도 송혜가 맡았다. 내가 뽑으면 분명히 꼴찌일 거니까. 송혜가 들고온 종이는 꽤나 빳빳했다.
“화천!”
미유키가 나섰다. 그녀의 손이 박스를 헤집다가 한 장, 종이를 꺼냈다.
“카르디!”
내가 팔을 부러트린 년이 불참한 ‘카르디’에서는 지혜라는 애가 나섰다. 이름이 내가 좋아하는 송혜의 인격이랑 같았다.
“마지막으로 SRK!”
마지막 순서였다. 그래서 딱히 휘젖다가 뽑을 필요도 없었다. 남은 건 한 장뿐이니까. 그렇게 모두가 한 장씩 종이를 뽑게되었다.
“자, 종이를 펼쳐주세요!”
사회자의 말에 모두 자신들의 종이를 펼쳤다. 표정들이 제각각이었다. 먼저 밝혀자면 두영의 강남은 3등, 케이니의 카르디는 4등을 뽑았다.
[해냈어!]
1등은 화천, 우리는......5등이었다.
“야, 너 복권도 안 긁어보고 살았지?”
“......미안, 토토로 백만단위까지도 잃어본 적이 있어서.”
“하, 시발.”
다행히 동맹을 한 구역이 이겨서 영역을 뻇기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송혜에게 운이 걸린 일을 맡기지 않기로 했다. 쌍년, 더럽게 운없네. 나도 토토로 백만단위까지 잃어본 적이 없는데. 송혜는 애교비슷하게 자세를 취하며 넘어가려 했지만 나에게 씨알도 통하지 않았다. 난 사라의 애교가 아니면 받지 않는 철벽녀니까.
마음같아서는 잡쳐버린 기분을 풀기 위해 거하게 마시고 싶었지만 언제 또 두영이 넘어와 소중한 사라에게 해코지할 지 모르기 때문에 길을 세지 않고 바로 돌아왔다. 설마 이 짧은 사이에 다녀간 것은 아닐까 했지만 방금까지 내 앞에 면상을 내밀고 있던 만큼 그런 일은 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 진욱의 보호를 받고있던 사라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놀랄 정도로 차가웠던 손은 하루만에 원래의 온기로 돌아와 있었다. 이 온기를 잃지않아서 좋았다. 그대로 한 번 안아주고 옆에 앉았다.
“오늘은 어땠어? 또 이겼어?”
사라가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만졌다가 얼굴을 만지고 볼에 손을 올려놓은 채 물었다. 나라는 것을 알고서 안심하는 그녀였다.
“대단한 의사선생이 거하게 말아먹었어. 뒤에서 2등.”
“다치지는 않은거지? 그치?”
“그냥 제비뽑기나 하고 왔어. 차라리 니가 뽑았으면 1등이었을지도 몰라.”
적어도 우리보다는 운이 좋겠지.
“나도 제비뽑기는 잘 못해.”
어리광도 잘 부리네. 내 볼을 잡아준 손 그대로 사라의 무릎을 배게삼아 누웠다. 밤을 새면서 예전의 생활리듬을 되찾아 가는 탓에 눈이 감기려 했고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평소의 리듬과는 맞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되찾아가는 과정이었으니 일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리를 쭉 뻗어 송혜의 책상에 발을 올리고 머리를 사라의 무릎에 눕혔다. 조금 불편한 느낌이 있었지만 사라의 무릎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나여서 충분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진욱은 볼일이 끝나 돌아갔고 송혜는 사라와 얘기를 나누었다. 오늘, 운 더럽게 없던 경기에 대한 얘기였다. 별로 들을 게 없는 생선살이었지만 사라는 뭐가 좋은지 흥미진진하게 반응을 해주며 맛있게 물고 있었다. 나름 괜찮은 저녁잠이었다.
푹 빠져들었던 저녁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사라도 피곤했는지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어 곤히 자고 있었다. 밖을 보니 남색의 하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배가 고픈 것을 느끼는 나를 보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펴고 올렸던 다리를 내리며 목을 풀었다. 아, 피곤하다. 그렇더라도 생활리듬을 되찾기 위해서는 필요한 피곤함이었다. 엉덩이를 긁으며 일어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썅년. 밥 안 차려와?”
목소리를 작게, 위엄은 근엄하게 송혜를 불렀다. 이 년이 어디를 나갔나 생각했지만 곧 들려오는 발소리에 겨우 거두어들였다. 문으로 하얀 기운을 입은 송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품에는 저녁거리로 보이는 통조림 몇 개와 어디서 구해왔는지 고기를 들고 있었다.
“‘차려주세요’하고 정중하게 부탁해봐.”
“상 엎는다?”
그녀는 들고있던 통조림 중 골벵이 그림이 들어간 것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나머지들을 두고 고기를 들고서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곧 냄새와 소리가 들려왔다. 진료실 근처에 가스레인지가 있던 방이 있었나? 아무튼 기름진 고기가 모습을 드러내며 나의 식욕을 자극했다. 이제 사라를 깨울 차례였다. 볼을 꼬집으며 깨울까? 아니면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으며 깨울까. 마음같아서는 저 부드러운 입술에 진하게 키스를 해주며 깨우고 싶었다. 이것도 욕망, 잠시 멀리하고 볼을 쓰다듬어주며 깨우기로 했다. 송혜가 중간을 끊어먹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엔. 네 차량 뒷좌석에 있던 식량박스 말인데.”
“이, 도둑년이. 그 새 내 걸 열어봤냐? 내 뚜껑 열리는 것도 보고 싶어?”
내 차 뒷좌석에는 어디선가 주워온 박스로 지금까지 얻은 통조림이나 유통기한이 긴 음식들을 분류해놓은 것이었다. 음식 종류별이 아닌 내 것과 사라의 것으로 분류한 것이다.
“네가 사라를 아낀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당장 너도 먹어야 할 것마저 줄이면서까지는 위험하지 않아? 사라의 박스는 반이나 차 있었는데 네거는 겨우 3개가 굴러다니더라.”
“불만이야? 그리고 돌려서 말하지마. 내가 언제 뱅뱅돌려서 행동하는거 봤어?”
“응. 팽이만큼이나 많이.”
“네 대가리도 그대로 돌려줄까?”
“엔, 네가 사라를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너 자신도 챙기고 다녀. 그녀를 지키려면 너도 건강해야지.”
“내 가랑이는 내가 잘 관리하니까 관심 꺼.”
송혜가 서랍에서 비싸보이는 와인 하나를 꺼냈다. 우리 테이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있는 화이트와인이었다. 저걸로 저년의 대가리를 깨부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뭐? 나한테 왜이리 관심이 많아. 네가 기레기새끼냐?”
“사라에게 미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닥쳐.”
송혜가 저녁을 먹을 때 쓰라며 건네주는 포크를 뺏은뒤 되려 그녀의 눈에 가져갔다. 아무리 친구인 그녀라도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온다면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끝내길 바라며 위협한 것이다. 포크의 드센 날과 송혜의 검은 눈동자 사이의 거리는 1cm채 되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한쪽눈을 잃게 될 거리였다.
“언제까지나 숨길 수 없어, 엔. 결국엔 사라도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진실’은 완전히 덮을 수 없어. 먼지가 쌓인 책과도 같거든. 손으로 조금만 닦아줘도 제목은 드러나게 되있어. 사라가 너의 책장에서 멋대로 들여다보기 전에 네가 먼저 알려주는게 충격이 덜 할거야. 남들에게, 혹은 자신이 알아차리는 것보다는. 네 입으로 말하는 게 최소한 사라를 믿고 있다는 성의를 보여주는 거니까.”
“닥치라고 했어!”
“엔......”
막 화를 내며 포크를 집어던지고 주먹을 쥐며 테이블을 때렸을 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목소리에 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가라앉고 날 돌아보게 만들었다. 막 깨어난 사라가 눈을 비비며 자신의 무릎 한쪽을 만지고 있었다.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서 부른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나의 볼을 만져주었던 온기 가득한 손이 그대로였다. 송혜와 나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나게 되었다. 사라 때문이기도 했고, 사라 덕분이기도 했다.
“밥 먹자, 사라.”
“응......”
여전히 졸린 목소리. 혹시나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까 했지만 계속 졸려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듯 했다. 송혜는 계속해서 나에게 조언이랍시고 말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테이블에 앉은 사라를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통조림의 뚜껑들을 따고 조용히 저녁시간을 가졌다. 주로 고기는 사라에게 먹이고 송혜와 나는 가볍게 와인을 나눠마셨다. 중간에 사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다고 해서 한 잔 따라주고 함께 마셨다. 통조림하고 와인이 정말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걸 따질 세상은 아니었다.
“잠시, 나갔다 온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사라의 걷기운동을 위해 병원 밖으로 나섰다. 이건 겉이고, 속은 송혜가 무어라 더 지껄일까봐였다. 끌고 나온 사라는 밤산책 같다면서 해맑게 좋아하고 있었다. 너무 웃으면 배가 사리진다고 말해주고 지팡이를 쥐어둔 뒤 코스를 그렸다. 평소와 같은 넓은 길보다 좁을 골목길들을 코스로 잡았다. 늘 그랬듯 사라가 걷고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식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나 없이도 많이 걷는 운동을 했다면서 자신있게 가슴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5분도 걷지 않아 벽에 부딪혔다.
“......멍청아.”
사라는 이게 아니라며, 벽이 이상하다고 우겼지만 역시 또 5분이 가지 않아서 부딪혔다. 아무래도 걷기운동이 더욱더 필요할 것 같았다. 이제는 ‘멍청아’라는 소리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또 밤이 찾아왔다.
5번째 경기, 무슨 경기인지도 모르는 채 송혜와 통보받은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곳은 강남에 위치한 폐야구장이었다. 관중석은 만석이었고 우리를 관람하는 이들의 눈빛은 모두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여담으로 나의 등급이 올라갔다. ‘F’로 시작해서 지금은 ‘A’였다. 송혜는 건질만한 장면이 없어서 그대로였고. 딱히 등급따위,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지만 보는 눈들이 달라진 것은 짜증을 덜어주었다. 이제 나를 비난하는 놈들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재성이 말하길 모두가 나와 두영 혹은 나와 케이니의 싸움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어디선가 배팅도 진행되고 있다고 하던데.
폐야구장은 이제 야구장의 기능보다는 그냥 콜로세움이었다. 뻥 뚫린 지붕과 우리를 비추기만 하는 조명들. 이곳의 전광판은 작동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참가자들은 따로 마련된 관중석에서 구경해야 했고 그곳에 두영이랑 케이니가 있는 것을 보니 이번에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망할놈들, 나도 딴 놈이나 내보내고 싶은데 그냥 송혜를 보낼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5번째 경기.”
사회자는 중앙에서, 정확히는 천막으로 가려진 무언가의 위에 서 있었다. 천막 밖으로는 계단까지 삐죽 튀어나와 있었는데 건물 3층 정도의 높이였다. 이 지랄맞은 섹터가 무슨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을까, 조금 궁금하기까지 했다.
“섹터장께서 직접 준비해주신 경기입니다. 바로 ‘벚꽃’입니다!”
벚꽃, 경기이름이 ‘벚꽃’이랜다. 일단 이름만 듣고는 감이 오지 않았다.
“승리조건은 단 하나. 벚꽃을 붉게 물들일 것.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아래에 벚꽃 한 그루가 심어져 있습니다. 그 벚꽃을 붉게만 물들이시면 되는데요, 참고로 이번 경기는 티밍이 가능합니다. 현재 참가하신 분들 원하시는대로 자유롭게 팀을 맺으셔도 되고 아니면 개인으로 행동셔도 무관합니다.”
일단 팀으로는 벌써 답이 나와있었다. 바로 옆에 얼빵하게 서 있는 미유키. 나는 슬그머니 그녀에게로 다가가 옆에 섰다. 반대로 그녀는 슬그머니 내 옆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잡아 내 옆으로 끌었다.
[도망가면 뒤진다.]
협박은 서비스.
“경기의 끝은 참가자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벚꽃을 붉게 물들인 뒤 경기가 끝났다고 말씀하시면 그 즉시 경기는 끝이나게 됩니다. 그럼 바로 천막을 벗기고 경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천막이 벗겨지고 유리로 만들어진 돔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말로 벚꽃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가짜였다. 그래도 퀄리티는 뛰어난지 처음 봤을 때는 진짜 벚꽃인 줄 알았다. 분홍색들의 잎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위, 참가자들 모두의 눈을 사로 잡은 물건이 있었다. 유리돔 천장에 거대한 ‘S’모양의 칼날이 있는 것이다. 그래, 마치 믹서기 마냥. 뿐만 아니라 야구장의 대기실 같은 곳들의 문들이 열리더니 웬 동물새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고라니였지만 중간에는 개나 고양이들도 여럿 섞여있었다. 덕분에 이해되었다. 이 게임이 무엇인지.
[너 동물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