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8 (40/72)



〈 40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8

“4구역팀.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화천의 경기가 끝나자 우리 대기실의 문이 열리더니 캡모자를 쓴 한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이제 내가 준비할 차례가 온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뻐근한 목과 몸을 풀었다. 지겨운 관람이 끝나고 내가 몸소 움직일 차례인 것이다.

“갔다와. 구경하고 있을게.”


“하! 간지나는 내 실력에 쓰러지지나 말아. 자, 빨리 내놔.”

송혜에게 팔을  펴고 손을 내밀었다. 진욱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날 위해서 ‘서프라이즈!’같은 무기를 준비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바로 내주기는 커녕 내 손을 보면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 보지만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보다 답답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기 내놔.”


이러면 이제서라도 알아먹겠거니 했는데 다행히 알아는 먹었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무기? 무슨 무기? 설마 내가 가져올거라고 생각한거야?”


“시발? 준비 안했냐.”

“애초에 없어.”

“진욱은 저번에 받았다고 했었어. 그건 뭐야?!”


“그 때가 마지막이었고 돈 때문에 팔아버렸어. 설마 엔, 네가 쓰던거  들고 온거야?”

......아주 좆 됐다. 진욱의 말만 믿고 기대하면서 왔는데 없댄다. 우리는 그 어떤 무기도 없다는 소리였다. 혹시나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멍하니 눈을 뜨며 다시 한 번 송혜를 지그시 쳐다보았지만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대답이었다.

“넌, 시발, 소풍가서 떡칠건데 남자  데려가냐?”


“혼자서 해도 되지.”

“하, 시발. 진짜로 안 들고 왔어? 아무것도? 혼자서 딸칠 자위도구도?!”

“마실려고 들고온 와인은 있는데.”

송혜가 자신이 들고온 가방에서 와인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보관은  해놓은 것인지 라벨이 깔끔하게 붙어있는 레드와인이었다. 눈을 감고 떠보아도 무기가 아닌 레드와인이었다. 머리를아무리 굴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도 레드와인이었다. 눈을 비비고 돌아가서 사라랑 잠이나 자고 싶어졌다.

“그거, 내놔.”

“정말로 안 들고왔어?”


“내놔!”


그녀의 손에서 와인을 뺏고 의자를 걷어차 버렸다. 따개는 필요없었다. 알아서 기어나올 거니까. 나를 안내하려는 남자가 비웃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새끼도 죽여버릴 것이다.

“다녀와. 와인은 다른 거 준비할게.”


“꺼져! 빨리 돌아가서 남자나 데려와!”

인사를 해주고 짜증이 나서 문을 발로 차 닫아버렸다. 이대로 부서져서  썅년이 못 나오기를 바랬지만 이 썩을놈의 문은 더럽게 튼튼했다. 남자가 나를 데리고 안내를 해주었고 난 어이없는 레드 와인병을 들고서 이 개같은 상황에 대해 욕을 했다. 참 어떤 의미로 서프라이즈는 맞았다. 감동은 1도 없고 색다른 놀라움만 가득한 서프라이즈였다.

“여기서 차례를 기다려 주세요.”

안내받은 곳은 어두컴컴한 출구이자 입구였다. 빛이 들어오는 저 밖으로 박수와 환호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모니터로만 들었던 관중소리를 직접 들어보니 꽤나 큰 울림소리였다. 이제 저것들은 내가 나서는 순간 비웃음으로 바뀔 것이다. 이 꼬라지에 와인병을 든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실수로 아까운 모습을 보였지만 팀원을 챙기는 감동을 선사해준 NRK에게 박수를!”


다시 한 번 박수와 환호소리가 울려퍼졌다. NRK라고 한 것을 보니 막 끝난  했다. 이대로와인을  잔 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송혜를 한 대 때리고 사회자새끼를 죽여버린 뒤 사라와 환상스러운 밤을 보내고 싶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기다리는데 입구로 그림자 뭉텅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남녀 2명이 한 남자를 부축해 들어오고 있었고 나의 뒤로 얼룩진 의사가운을 입은 여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살호에게 당한 모양이다. 슬쩍 상처를 보았는데 허리부분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 많이.  흔적을 남기며 사라져갔다.


“드디어 마지막 순서입니다! 단 1표를 얻고 역대 최악의 등급이 적힌 선수가 있는  4구역의 참가자입니다!”


최소한 박수라도 쳐줄 것 같았는데 기대한 내가 병신이었다. 안에서 들을  있을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대신해서 들려온 것이다. 모두 비웃음이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돌아오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안내를 해준 남자가 무표정하게 입구를 가리켰다. 기대도 안한다는 의미겠지. 하, 지겹다. 그냥 신경 안 쓸란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미친년 대하듯 관심만 주겠지. 그냥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와인병을 들고 저 빛이 눈부시는 경기장으로 향해 걸었다. 그리고 내가 모습을 직접 드러내 주었다.

“엔입니다!”


사회자의 소개, 그리고 관중들의 시선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전광판에는 나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후드자켓에 검은색의 바지. 그리고 들고있는 와인병. 어느 술집에서 막 튀어나온 술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봐도 우습기는 했지만 사회자새끼가 자꾸 깐죽거려서 짜증이 났다.


“이런! 설마  와인병을 들고 혼자서 온 건가요? 아무래도 술에 잔뜩 취하신 상태로 오신  같은데......제가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친절도 하셔라.  안전한 공간너머에서 나오지 않던 사회자가 그 속에서 나와서는 나에게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표정에서 재밌는 것을 건졌다는 웃음이 함께였다. 그가 다가와  옆에 섰다. 전광판에 나란히 보이도록.

“엔씨, 설마 진짜로 술을 먹고 나오신 겁니까? 무기도 없이. 오늘은 만우절이 아닌걸로 알고있습니다만.”

질문, 그리고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었다. 이대로 걷어차 버릴까 헀지만 송혜의 계획도 있고 달성만 하면 내 좆대로 할  있을테니 참기로 헀다.

“그딴 병신같은 질문할거면 꺼져. 니네 엄마가 좆관리 똑바로  가르쳐줬냐?”

“유언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나름  빡쳐보라고 부모님까지 들먹여봤는데 역으로 당해버렸다. 관객들의 비웃음 소리가 더 커지기만 했고 모두 ‘F’를 외치거나 송혜나 불러오라는 말 뿐이었다. 그 사이로 사회자는 유유히  목숨을 지켜줄 공간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살호를 들이겠습니다!”

전광판으로 내가 보고있는 철창이 열렸다. 내 눈으로도 보고 있는 그 철창 속으로 울음소리가 나를 덮쳐왔다. 생생한 발소리,  모니터로만 보았던 살호는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당연히 모니터로 보던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조금 더 커보였고 더 사나워 보였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겨우 몇 번 본것 뿐이지만  괴물놈의 약점을 알 것 같았다. 대놓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눈치 못채는 게 병신이었다. 이것도 아빠새끼가 가르쳐준 관찰법  하나였다. 항상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심을 가지라고.

“엔씨, 준비 되셨나요?”


대답으로 엿을 날려주었다.

“시작!”


사회자의 손이 위로 향하고 큰 신호탄 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살호는 자신의 발톱과 대가리를 들이밀며 빠르게 다가왔다. 고개를 조금 숙이며 턱을 가리고서. 여기서 나는 앞에 보였던 참가자들과 다른 행동을 보였다. 뒤로 빼는 것도, 멍청하게 가만히 있지도 빠르게 다가가지도않았다. 그저 천천히, 살호에게로 걸었다. 이게 얼마나 멍청한 행동으로 보인 것인지 관중석의 모두가 자살하러 간다거나 역시 4구역 답다는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걸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살호의 작은 틈이었다.

달려오는 살호와 다가가는 나. 그 거리가 완전히 좁혀져 마주하는 그 순간 내가 빠르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녀석을 나를 찢으려 앞발을 들었지만   뒤만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순간의 틈에 와인병을 들고 살호 대가리의 오른쪽을 후려쳐주었다. 엄청 세게 휘두른 거라 깔끔했던 와인병은 반으로 깨져나갔고 뾰족한 무기로 변해버렸다. 살호는 맞은 곳의 충격으로 머리가 왼쪽으로 움직였는데 잠깐이었지만 그곳으로 볼 수 있었다. 턱 쪽에 다른 곳들과 달리 유난히 부풀어 붉은색을 띄고 있는 부분을. 그곳을 깨진부분으로 깊숙히 찔러넣어 안을 쑤셔주었다.

‘카아아아악!’


등장할 때나 내지르던 비명소리가 나의 귀를 때렸는데 가까이서 들으니 상당히 컸다. 까마귀새끼들 보다 더욱 짜증나는 소리였다. 그래도 더 들을 일은 없었다. 이게 끝이었으니까.

나에게 턱 밑을 찔린 살호는 조금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그리고는 고요히 잠들었다. 더 이상의 어떠한 움직임도 있지 않았다. 동시에 아까까지 날 비웃던 관중들도, 짜증나게 했던 사회자새끼도 모두 말을 잃고서 병신들처럼 입만 벌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구역장 놈들도 마찬가지. 박수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히려 조용해서 좋았다. 서비스로 와인병을 살호의 시체에다가 던져버리고 사회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입구로 향해 걸었다. 그리고 혼자서 읊조렸다.


“레드와인이 아니라 포도주여야 했는데.”

모두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는 경기장, 내가 입구로 모습을 감추고서야 사회자가 한 마디, 말했다.

“에....엔씨. 생존......”


새끼, 완전히 얼어붙었네. 안으로 들어오니  안내해주었던 남자도 나를 보는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뭔가 두려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원래는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귀찮아서 무시해버리고 송혜가 기다리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그녀가 의사가운에 손을 넣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에게 표를 던진 유일한 사람이  년이 아닐까 했지만 우리는 투표따위를 한 적이 없었다.

“축하해. 등급이 올라갔어.”

“하! 당연해야지. 얼마나 올라갔어?”

“‘F’에서 ‘C’로.”

“시발!”


방금 제대로  무기도 아닌 술병으로 비웃던 놈들에게 엿을 날리는 광경을 보여줬는데 ‘C’? 당장 담당자새끼를 찾아내서 술병으로 패버리고 싶었다. 신경질적으로 쓰러진 의자를 차서 일으키고 자리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반응 어떠냐?”


“웅성거리고들만 있더라. 너에 대한 존재를 제대로 알린  같은데?”

재밌네.


“잠깐 실례할게.”


송혜는 대답을 해주고 바로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옷을 걷어 올렸다. 매끈한 배가 배꼽을 보이며 드러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년이  크게 내 옷들을 들어올리는 것은 치료의 과정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두번이 아니라 지겨울 정도였다. 그녀는 나의 배를 둘러보다가 뒤로 가서 등을 보고 이러서 팔도 봐주었다. 한 팔뿐이라서 남들보다 봐주어야 할 면적이 적었다.


“멀쩡하네. 의사도 필요없는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꺼져.”

“농담이라도 같은 팀원이자 친구한테 너무한 거 아니니?”

“진심이라. 아니면 술이라도 가져오던가.”

“가자. 술마시러.”

송혜가 짐을 챙기며 일어섰다.

“뭐야? 이대로 가도 되는 거야?”


“어차피 다음 경기는 저녁에 시작하니까 시간여유도 있고 이 뒤에는 시시한 사회자의 말뿐이니까. 딱히 상관없어.”

“하! 그럼 당연히 가야지.”

나도 의자를 뒤로하고 일어나 송혜를 따랐다. 엿같은 사회자의 얼굴을 비추던 모니터는 관중들을 비추며 이번 경기에 대한 결과를 집계하고 있었다. 궁금하지도 않아서 무시했다. 송혜의 말대로 사회자의 말만 이어지다가 별 볼일없는 시시한 점수같은 것을 공개하고 참가자들에 대해 몇 마디 떠든 뒤 모두 자리를 뜰 것이니까. 그 중에 돈을  놈들도 있겠지. 만약 나한테 건 놈이 있다면 그 놈은 오늘 떼부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한테 표를 던진  1표가 떠올랐다. 그건 정말로 누굴일까.


뭐, 됐다. 지금은 술이 먼저였다. 시간도 여유가 있고 마침 장소도 나쁘지 않을 ‘SRK’였다. 가능하다면 술도 먹고 거리의 남자를 꾀어내 내 안으로 박아넣게 하고 싶었다. 제대로 즐겨본지 얼마나 되었더라. 아무튼  쉬는 시간동안 크게 놀아보자고 생각했다. 송혜와 함께.





“대단하군.”

섹터가 멀리까지 보이는 빌딩의 최상층이었다. 커다란 모니터에는 오늘 시작된 아델리의 첫번째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나와 섹터장님이 함께 보았다. 원래는 마지막 경기가 아닌 이상 잘 보지 않던 섹터장님이지만이번은 달랐다. 강남의 두영도, 카르디의 케이니를 보기 위함이 아닌 4구역에 머무르고 있는 ‘마녀’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의 말로는 간접적으로나마 악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경기를 지켜보겠다고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것이다.

“자네가 왜  여자에게 표를 던졌는지 알겠어. 내기도 완전히 저버렸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녀’를.”


“난 가지고 싶네만 자네는 어떻지?”

“......죽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오. 그러면?”


“제 밑에 두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 맘대로  수 있으니까요.”


원수라는 존재는 죽여버리면 거기서 끝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보내주기에는 내가 받은 상처와 고통이 너무도 컸다.


“가끔 말이야, 자네를 보면  모순이야. 조용하고 얌전한 게 자네의 겉이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지. 그래서 마음에 들어.”

“예.”

“기회는 나중에 주지. 지금은 아델리에 집중하자고.”

“알겠습니다.”

모니터가 꺼지고 섹터장님이 일어나셨다.그리고는 바로 방을 나서려고 했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오늘 그가 갈 장소는 강남이었다. 순찰을 명목으로 강남의 구역장과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치’의 일환이다. 나는 그 ‘정치’를 지키는 장치였고. 원래라면 진욱과 함께 이 일을 했을 테지만 그는 거부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 그 결과 나는 섹터장님을 지키는 경호원이 되었고 진욱은 4구역의 경비신세가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사이도 틀어져 버렸다. 이럴 때 태영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러다가도 생각을 접었다. 이제  때의 동료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안개 속에서 태영은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나는 지금, 혼자였다.








“캬! 시발. 이거지!”

우리가 들린 곳은 포장마차 형식의 주점이었다. 허름한 간판만이 세워져 몇몇개의 전등으로 불을 밝히는 이곳은 SRK의 만남의 광장 근처였다. 들어오자마자 맥주를 시키고 안주거리로 고라니살과 불에 구워먹는 햄을 주문했다. 찌그러진 프라이팬 위에서 익어가는 고라니살은 풍부한 고기냄새를 풍겼고 기름지게 구워지는 햄은 짠맛이 좋았다. 그러면서 들이키는 술이란 그야말로 천상이었다. 난 오히려 와인과 스테이크를 썰고다니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다. 품격밖에 찾을 줄 모르는 그딴 밥상은 갑갑하지만 했으니까. 그래서 삼촌의 저녁상을 엎어버린 적도 있었다.


“완전히 표정 퍼졌네. 아직 낮인거 알지?”

“그게 뭐? 술에 낮과 밤을 가리는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야. 너는 안 마셔?”

“나라도 안 마셔야지.”

먹지 말라지. 나만 마시면 그만이니까.  구워진 고라니고기를 한 입, 맥주를  모금. 퍽퍽하긴 해도 무척이나 맛있었다. 맨날 배를 채우려는 목적으로만 먹었던 통조림과 곤충을 저리가라였다. 매일매일 이런것만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브라이언! 여기.”


즐겁게 먹고 있는 와중 송혜가 반가운 얼굴로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다. 술기운 그대로 뒤를 보니   보았던 얼굴이 다가왔다.  좆같은 술집에서 만났던 브라이언이라는 남자였다.

“연기도 끝났는데 그 이름은 그만둬.”

그 때와는 달리 동작 하나하나에서 거만함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원래 모습인 듯 했는데  때의 연기가 꽤 훌륭했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걸려들어 이렇게 아델리를 하게 되었다. 맥주를 다시 한 모금, 그가 마주앉은 우리 사이로 의자를 끌고와 앉았다.


“멋있지 않아? 그치, 엔.”

“나도 양키 이름은 질색이야!”


그 누구때문에.

“경기  봤어. 처음 와인병 봤을 때는 진짜로 죽으려는 건 줄 알았는데 엄청난 괴물이었네.”

“너 시발, 얘랑 짜고치는 부부사기단 했을  내 손에 뒤질뻔한 거 알지?”

“예전 직업이 배우라서, 죽을 뻔한 연기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재밌는 형씨네.  잔 줘?”

“줘.”


그는 내가 주는 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유리잔 안에 가득 따라주고 ‘짠’  번 친 뒤 들이켰다.

“배우라면 드라마든 영화든 하나쯤은 찍어봤겠네.”


“해봐야 엑스트라뿐이었어. 누구들처럼 거창한 배우는 아니었거든.”

“하! 그 거창한 애들은 이제  뒤졌으니까 연습해둬.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야. 나한테 성공한 거 보면.”


고기 한 점, 햄 한 조각.


“쌍년. 그런데 웬 남자새끼야?”

“아까 소풍가는데 남자 안데려가냐고 투덜거렸잖아. 네가 경기뛰고 있던 중에 잠깐 대기실로 왔었는데 같이 한잔하자고 했어.”


“술만?”

“네가 원한다면 마음대로 해.”

“크냐?”


송혜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해서 제일 중요한 크기를 물어보았다. 그는 부끄럼 없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는데.


“만져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만 마시기로 하고 저녁에 있을 도깨비잡기 인가 뭔가가 끝나면 한  할 생각이다. 사라한테는 잠깐 운동 좀 하고 온다고 말해두면 되겠지.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진욱씨한테서 ‘도깨비 잡기’에 대한 규칙은 아직 들었지?”


대강 어떤 게임인지만 들었을 뿐, 상세한 규칙 따위는 듣지 못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맥주가 비어서 한 병  주문했다.

“그래.”

별 것 없는 규칙이라 이미 작전은 짜두었다.

“‘거짓말 탐지기’에 대해서도 들었어?”


“그건 또 뭐야?”

“사람측의 유일한 아이템이야. 진행되는 동안 ‘낮’시간에 쓸 수 있는데 투표로  사람을 지목해서 사용하는 거야. 지목된 사람은 그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고 그 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려주는 아이템이지.”

“무조건 대답해야 하냐?”


“응. 아, 대신에 도깨비냐고 직접 묻는  금지야.”


“그럼 별  없네.”


내 작전에 전혀 영향이 없었다. 고기가 부족해서 1인분을 더 시켜두었다. 도깨비라는 경기고 빠르게 끝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좋아. 브라이언!”


고기가 나오던 때, 내가 그를 불렀다.


“경기가 끝나면 NRK로서 가서 카베인가 카보인가 뭐시기파한테 내 이름 대고 방 하나 뜯어놔. 알겠지?”

“내가 왜?”

“크다메!  크면 잘라버릴 거니까. 알겠어?”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새로 나온 맥주를 들고 잔에 가득히 따르고 들이켰다. 이제 2번째 게임을 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지정된 다른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과 엔이 4구역을 구할  있다는 싸움장으로 떠나고 혼자 진료실에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따라가서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지만 엔에게서 단칼에 거절당했고 선생님 역시 따라오지 않는게 좋다고 말했다.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엔이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는 것에는. 그래서 아쉬운 마음이 남았지만 그녀들의 말을 듣기로 했다.

주변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까 창문을 열어서 들어오는 바람 소리와 가끔 지나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전부였다. 아직까지는 해가 떠 있었고 아까 배가 고파서 조심히 통조림을 하나 먹은  생각하면 점심은 지났을 거라고생각했다.

진료실에 있는 동안 마냥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도 기억 속의 지도를 가지고 병원의 이곳저곳들을 돌아다녔다. 엔이 만들어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벽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했지만  번 부딪히고 말았다. 옆에서 그녀가 보고 있었다면 ‘바보’라던가 ‘멍청이’라고 했을 것이다. 2층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나서는 계단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으니 한  한 칸 조심히 발걸음을 내렸다. 한 손을 벽에 짚고  손은 지팡이를 쥐고서 바닥을, 그렇게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며 느릿하게 1층에 도착했다.

1층에서는  조심히 걸었는데 2층과 달리 많이 다녀보지도 않았고 안내를 받은 것도 없어서 기억 속의 지도가 완전하지 않았다. 이참에 그리기로 하면서 탐험을 시작했다. 벽을 따라서 움직이다가 지팡이로 이런저런 곳들을 두드리는 식으로.


‘툭’

“아.”


무언가에 무릎이 걸리고 말았다. 지팡이와 함께 유지하고 있던 몸의 중심이 무너지고 앞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변함을 없을  같았다. 많이 아프겠지 하며 보이지도 않는 눈을 습관처럼 꼭 감아버렸다.


“조심해.”

부딪힐 거라고 가득 생각한 나. 그런 나를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었다.  힘에 나의 머리가 단단한 무언가에 닿여진 것이 느껴졌다. 감사했지만 누군지 알 수 없어 불안감도 함께 몰려왔다.

“고맙습니다만 누구시죠?”

조금 경계했다.

“진욱. 엊그제 기억해?”

“아!”

진욱, 누군지 떠올랐다. 이틀 전, 엔,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돌아와 진료실에서 들었던 남자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눅눅한 느낌이 가득한 목소리지만 말 하나하나에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균형을 잡고 몸을 뒤로 돌려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그가 손을 놓으며 물었다. 그러면서 혹여나 다른 곳에 부딪힐까 걱정해준 것인지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혀주기까지 했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엔의 지팡이를 접어 벨트에 끼워 넣은  대답했다.

“아무도 없고 가만히 있기도 그래서 걸음을 연습하고 있었어요.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음. 걷는 건 좋은거야. 운동도 되고 지금의 너에게는 딱이겠지.”


“그래서 그런지 엔도 여유가 되면  자주 걷게 했어요.”

엔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 아직 해가 떠 있는 오후가 되면 여유가될 때마다 그녀가 걷자고 말하며 함께 걸어주었다. 덕분에 학생시절 때보다는 오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엔하고 선생님은 많이 늦을까요?”

“좀 늦을지도 몰라. 오늘만 경기가 2개니까.”

“그럼 진욱씨는  여기에 오신 건가요? 볼일이라도?”


“아니. 당신을 부탁받아서 말이야. 혹여나 혼자서 걷다가 바보같이 넘어질  있다고 했거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여러번 걷고 지팡이 사용법을 연습하면서도 자주 부딪히는게 나였다. 엔의 말로는 내가 반응이 엄청 느리다고 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평소의 엔이 너무 빨라서 자기눈에 내가 느려보이는 것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최근 들어서 그 말이 맞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몸을 일으키고 내 옆에 있을 진욱씨에게 부탁해 2층의 진료실까지 올라왔다. 엔과 선생님은 늦게 올 거라고 했으니 바깥의 빛이 느껴지지 않고도 시간이 더 지나서야 돌아올 것이다. 솔직한 감정으로 말하자면 외로움이 느껴졌지만 그녀들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간 것이니 기다리는게 맞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당부했다. 내가 앉은 곳은 소파였다. 옆으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엔이랑 송혜가 없는 동안은 계속 옆에 있어줄 거니까 필요한 게 있다면 얘기해. 괜히 또 넘어지지 말고.”


“언제나 넘어지는건 아니에요! 웬만한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넘어지겠다’는 그의 말에 조금 삐져버렸다. 그는 농담으로 한 소리였지만 넘어지는 것에 있어 조금 콤플렉스였던 나는 놀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름대로 많은 거리를 걸었고 연습도 많이 해왔기에 조금 삐지게  것이다. 비록 1층에서 넘어질 뻔 하기는 했지만 그곳은 아직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몰랐기에 그랬을 뿐이었다. 괜시리 지팡이를 만졌다.

“알아. 너도 최악의 조건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생존자니까. 그렇지?”


“네.......뭐.”

최악의 조건은 나의 눈.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라 남들처럼 뭔가를 제대로 수 없는 아이였다. 엔처럼 싸울 수도, 선생님처럼 사람들을 도울 수도 없었다. 내가 그녀들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앞이 보이지 않으면 모두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기죽지는 마.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눈으로도 살아남아 왔잖아.”

“그러기에는 엔이 모두 해결해왔지만요.”


진욱씨가 의자에서 일어났는지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의 방향은 내가 앉아있는 여기였다. 조금 뒤 머리 위로 거친 느낌이 드는 손이 느껴져 왔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짓, 부드러웠다.

“엔, 그 여자는 많이 괴팍하고 기센 여자지만 흔히 볼  없는 엄청난 싸움꾼에 생존자지. 그래도 단 둘이서 이렇게 살아남아온 것도 대단한거야. 그러니까 기죽지마.”

작은 위로. 그것뿐이었지만 이 손과 따듯한 말은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계속 방향을 잃기만 하던 나에게 작은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기쁘면서도 나 자신의눈이 계속 걸려왔다. 인연으로 만났지만 악연이 되었던 석환씨의 말이 떠올랐다.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제다 아니라고 했던. 그건 분명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힘내기로 하자. 눈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엔은 도울 수 있을 거니까.

“사람이 떠오르네요. 엔과 함께 잠깐이지만 머물렀던 첫 섹터에 있던 사람이요. 진욱씨와 같이 절 위로해주었던 분이에요.”


“좋은 사람이네.”


“네. 그러니까......고마워요.”

창문은 내 옆에 있었나 보다. 따뜻한 온기의 햇빛이 내 어깨와  얼굴을 비추어주었다. 밖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알던 봄처럼 꽃이 한 송이라도 피어있을까. 이제 눈을 되찾을  없겠지만 힘내보기로 했다. 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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