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7
들을 만큼의 설명을 듣고 돌아온 진료실, 그 가운데 송혜가 새 의사가운을 걸치고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날 쳐다보고 있었다. 옆쪽 구석에 있는 옷걸이에 사라의 카디건이 걸려있었다. 창문으로는 바깥의 풍경과 햇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이 어두컴컴한 그림자는 나에게, 햇빛을 등지며 앉아 일부 드리운 그림자는 송혜에게 어울리는 배경이 되어주었다. 이년이나 나나 원래 몸담그고 있던 고향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충분히 설명은 들었어?”
“꽤 맘에 들긴해. 한 가지만 빼면.”
“어떤게? 뭐라도 부족한 게 있어?”
“부족한 게 아니라 너부터 집어치워, 썅년아.”
내가 아는 송혜는 적당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는 여자였다. 시간은 느릴지라도 얻고싶은게 있으면 천천히 공을 들여서라도 얻고 뺏고싶은 것이 있으면 치밀한 계획으로 빼앗았다. 그 중에는 나까지 이용해 먹으려다가 크게 혼난 적도 있었는데 지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았다. 그걸 느낀게 진욱의 설명 중 일부에 있었다. 4구역이 몰락할 때 넘어와서 구역장을 맡은 것. 송혜가 아무 이유없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유리한 것들을 버리고 불리한 쪽을 택한다는 건 ‘적당히’가 아니었다.
등에 메고있던 나이프와 권총을 빼서 옆 탁자위에 던져놓고 송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닥 부드럽지는 않은 등받이 의자가 나를 맞이했다. 옆으로는 방금까지 먹던 것인지 통조림 몇 개가 놓여있었다.
“날 이용해서 뭘 얻어먹을 생각인지 불어. 안 그러면 사라데리고 떠나버릴거니까. 두영새끼랑 케이니는 죽여버리고.”
“글쎄. 바란다고 해도 4구역의 아이들과 약자들을 구하는 거랄까.”
“무면허 살인자가 네 몸 해부하는 꼴 보고싶냐? 제대로 불어라. 시발, 빡치기 전에.”
저 여우같은 미소.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모든 인간들 중 제일 완벽한 거짓미소였다. 표정이 무서운게 아니라 저 안에 무슨 생각들이 있을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삼촌이나 아니면 재혁이같은 애들이면 최소한 무슨 생각들을 가지는지 예측이라도 하겠지만 이 년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송혜와 이런류의 대화를 하게 되면 나라도 항상 긴장을 했다. 물론 이기는 건 나지만 한 방은 맞게 될거니까. 아무튼 이 썅년, 미소부터 무언가 큰 것을 노리고 있는 건 맞았다.
“......이 섹터를 가지고 싶어.”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래, 시발! 이래야 내가 아는 썅년이지! 그래, 그래서 4구역에 내려온거야?”
역시! 괜히 이런 곳에 제 발로 기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조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그 목적이 이 섹터를 먹겠다고 한다. 무슨 계획으로 또 그러는 건지 들어보기로 했다.
“계획은?”
“지금? 아니면 너 오기 전?”
“후자.”
송혜의 두 팔이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가 한숨을 쉬더니 생각을 정리하듯 한숨을 쉬고 원래대로 풀렸다.
“4구역에서 구역장이라는 위치와 함께 의사라는 직업을 이용할 생각이었어. 구역장이 되기 위해서 4구역이 몰락하던 때를 노려 내려왔고 의사는 나만큼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이 섹터 안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위치도 사실상 따 놓은 상이었지. 그렇게 내게 필요한 구역장이라는 위치와 최고의 의사라는 타이틀을 따냈지.”
“왜 하필 4구역이야? 다른 큰 구역들도 많았잖아.”
“이유는 두 가지. 다른 구역들에서 구역장을 하려면 너무 조건이 힘들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나중에.”
“그럼 그 구역장과 의사라는 두 타이틀은 어디다가 써먹을 생각이었던 거냐?”
“‘의사’라는 타이틀은 이 섹터의 총 관리자이자 왕인 ‘태신’이 있는 타워에 이용할 생각이었어. 어제 함께 갔던 그 건물 있지? 거기야. ‘태신’은 그 정치인이 맞아.”
그래서 그렇게 건물이 세련된 것이었구나.
“그 타워에서 ‘태신’의 밑에서 일하는 고위층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안 좋은 병에 걸린 상태야. 그들은 모두 날 원하고 있어. 내가 하겠다고 말만 하면 바로 타워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데 그 점을 이용해서 타워 윗 층으로 올라가게 되면.”
“모조리 죽여버리고 그곳을 먹는다는 거겠지. 맞냐?”
“정답이야.”
“그럼 구역장 타이틀은?”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어. 어울리는 표현을 찾자면 ‘반역’을 함께할 세력을 만드는 거지. 한마음으로.”
“그래서 몰락한 4구역이 또 제격이었나 보네.”
알 것 같았다. 왜 그녀가 4구역이 몰락하던 때 이곳으로 왔으며 이곳을 택했는지. 영웅담같은 것이다. 상황이 최악일 때 내려와 독재자를 처단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다. 거기서 자신의 반역을 함께할 명분으로 현재의 4구역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먹을 것도, 자원도, 제대로된 생활도 못하는 곳의 사람들이라면 함께 할 생각이 대부분일테고. 어차피 잃을 게 없는 곳인만큼 송혜에게 있어 세력으로 만들기에 딱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섹터를 먹으면 뭐하려고?”
“딱히 생각은 없지만 잘 알잖아. 난 얻고싶은게 있으면 어떻게든 얻는거.”
“미친년.”
“하지만 부족한 부분도 있었어. 구역장에 의사에 세력까지 얻었는데 하나, 부족한 게 있었거든.”
그녀의 여우같은 눈빛이 날 향해 있었다.
“바로 ‘아델리’에서 싸워줄 검투사가 없었어. 타워를 하루아침에 점령하려면 ‘태신’이 자신의 경호원들과 밖으로 나가줘야 하는데 그 기회가 6개의 구역들이 모두 참가하는 아델리의 마지막 경기때 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넌 그만큼 강한 검투사가 필요했는데 마침 내가 등장했다 이거네?”
“강력하다 못해 그 경호원들과 태신마저 죽여줄 살인마가 들어와줬지.”
송혜는 이야기를 잠시 끊고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위 서랍장에서 컵을 2개 꺼내고 병에 담겨있는 커피가루를 꺼내었다. 갈색의 가루가 뚜껑이 열리자마자 진한 향기가 진료실 안을 채워나갔다. 그 향기를 잠시 걷어내었다.
“그런데 내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랬냐?”
“그래서 거절 못하게 만들었잖아.”
“그 남자냐?”
“맞아. 브라이언 덕분이지.”
여기에 오자마자 만난 외국이름놈이었다. 그마저도 송혜가 꾸몄단 소리인가.
“그 녀석한테는 내가 잠들었을 때 연락을 취했을 거고.”
“정답. 그대로 식당까지 유인해서 그 깡패들과 싸움을 붙여서 일부러 난장판을 만들겸 NRK한테 복수도 했지. 너한테는 이곳의 룰과 나의 눈물연기로 설득을 가장한 협박을 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마침 좋은 변수가 붙어서 협박까지는 필요가 없었어.”
“사라를 말하는 거겠지. 쌍년아.”
“솔직히 너무 놀랐어 엔. 지금까지 사람을 죽이고만 다니던 네가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모자라 지키기까지 하다니. 거기다가 사라의 말이면 해주기까지 하고. 나 없는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던거야?”
“많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 좆같은 일 존나게 많아. 아쉽게도 섹스는 없어.”
“나랑 할래?”
“꺼져. 넌 나도 버거워 시발아.”
“아무튼 그런 변수들까지 겹치고 겹쳐서 이렇게까지 상황을 만들 수 있었어. 질문있어?”
이 진실에 대한 내 감상평은 첫 번째로 좆같았고 두 번째로 화가 났으며 세 번째로 재미가 있었다. 저번에 이용당한 이후로 절대 당하지 않겠다고 했건만 이미 반이나 이용당해 버렸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나면서 이 쌍년에게도 화가 났지만 이미 방아쇠를 당겨버린 총알이었다.
“만약 내가 지금 ‘아델리’를 뒤로하고 사라랑 둘이서 튀어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했냐?”
“사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잖아.”
“시발년. 바로 꼬집어서 말하네. 이딴년이 내 친구라니.”
짧은 얘기지만 많은 의미와 함께 우리에게는 긴 시간과도 같았던 대화의 끝을 맺었다. 두 커피잔에 담긴 진한 커피가 냄새로 내 코를 찔렀다. 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워넣어 들었다. 천천히 입을 가져가 쓰디쓴 한 모금을 마셨다. 잔잔했던 검은 호수에 일렁임이 생기고 송혜를 가리켰다.
“엔.”
잔을 내려놓자 여우같은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두 눈이 나를 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섹터를 장악하기 위헤서 이곳에 왔고 정말 그것만을 목표로 했어. 하지만 본능은 어쩔수가 없더라. 네가 여기로 오기 전까지 의사를 자처하면서 목표가 하나 더 생겼어. 이 섹터를 점령하고자 하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했었지? 나머지 하나가 이 목표와 같아. 아까 했던 말 중에,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고 했던 말, 그건 진심이야.”
“......알아.”
“‘수희’라는 아이가 있어. 백혈병인데 내 실력이면 완전히는 무리더라도 어느 정도 고쳐볼 수는 있어. 다만 우리 구역에서는 보다시피 장비가 없고 약도 떨어지기 시작한 참이라 손을 써볼 수가 없었지만 네가 ‘아델리’에서이기고 내가 섹터만 점령하면 그 아이를 다가오는 죽음에서 구할 수 있어. 난 그 아이를 구하고 싶어, 엔.”
“그건 네 알아서 해.”
빛이 송혜의 등을 밝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그 후광이 내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만이 드리웠고 검은색의 내 커피는 더욱 더 짙은 검은색이 되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얘보이는 머리카락과 푸른색의 눈. 4구역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여자. 마녀가 데리고 다닌다는 여자였다. 처음에는 같은 부류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 예상 밖이었다. 같지도 않고 비슷하기는 커녕 아예 관련이 없는 그런 여자였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저 순수한 미소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어머니께서도 내게 자주 보여주었던 미소. ‘마녀’는 무슨 생각으로 저 순수한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일까......생각치 않기로 했다. 그저 ‘마녀’의 여자라는 것으로만 알아두기로 했다. 검은색의 캡모자를 눌러쓰고 발걸음을 돌렸다.
“건드릴 생각 마.”
돌린 발걸음 바로 앞, 친숙하지만 이제는 친하다고 할 수 없는 목소리가 나를 막아섰다. 가려진 시야의 모자를 올리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같이 이곳에 왔지만 이제는 완전히 갈라져 버린 진욱이었다. 이렇게 다시 얼굴을 맞이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지만 작은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를 바라보며 빈틈만을 훑었다. 나의 손은 이미 자켓의 안주머니에 향해 있었다.
“......‘마녀’가 시작한 일이야.”
“그래서 너도 시작하게?”
그의 살기가 나의 목 끝까지 닿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시작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그의 목으로 살기를 겨누었다. 그리고 안 주머니에 있던 손을 거두고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진욱은 그런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여전히 나와 서로의 격앙된 감정을 나누면서.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4구역을 떠나갔다.
그냥 투기장, 완전히 콜로세움이었다.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하늘 아래, 축구장 같은 곳을 개조한 경기장, 나름 잘 만든 곳이었다. 경기장을 비추어주는 크나큰 조명들과 고쳐놓은 전광판, 관중을 배려한 지붕, 뭘 감추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에는 커다란 철창들로 막혀있었다. 그래도 세월의 흔적이 남아서 여기저기에 녹들이 묻어있었다.
관중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많고 많은 남녀들이 응원을 하러 온 것인지 다양한 피켓들과 이상한 깃발들을 들고 흔들어대었다. 아직 시작도 전인데 엄청난 함성. 그리고 집중되는 시선들. 두 장면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다른 부대의 자랑거리라는 놈들과 붙었을 때, 두 번째는 내가 저지른 사건들을 지켜보던 사람들과 기자새끼들. 아,하나 더 있다. 아빠새끼가 데려갔었던 어떤 작은 경기장에서의 주먹질. 그 때도 철창밖에 있던 여러 떨거지들이 날 쳐다보았었다. 어린 여자애한테 쌈질해서 이기면 한 번씩 박을 수 있었으니까.
내가 올라갈 경기장은 인공잔디가 치워진 맨 흙바닥이었다. 운동회처럼 하얀 선같은게 그려져 있지도 않았다. 정말 맨 흙바닥이었다. 그 위로,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서서 마이크를 들고 관중들에서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는데 사회자 같은 존재로 보였다. 뾰족한 턱으로 보건데 귀찮고 짜증나는 말들만 지껄일 것 같았다. 부디 내 신경만 건드리지 않았으면 했다. 꺼져있던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고 관중들에서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런게 아직 돌아가는 곳이 있을 줄이야. 이 섹터는 정말 살만해보였다. 그런데.
“야! 최송혜! 여기 왜 이렇게 불편해?”
경기장의 광경들을 모두 화면을 통해 보고있던 나, 그리고 내 불평불만을 들어주고 있는 송혜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이 방은 경기장의 대기실이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자만스러운 한 여자의 안내를 받고 들어온 곳인데 정말로 최악이었다. 소파의자는 커녕 등받이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 2개와 옷을 걸어두는 옷걸이가 전부인방이었다. 그나마 새것처럼 있는 것은 사회자와 경기장을 비추고 있는 모니터가 전부였다.
“대기실도 ‘구역’들이 관리하고 꾸미는데, 우리 사정 알고 있잖아.”
송혜는 자신이 가져온 응급처치 도구함과 검은색의 가방을 내려놓으며 답해주었다. 물건들을 내려놓는 바닥마저 지네나 벌레새끼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짜증이 나서 발로 밟아 죽여버렸다. 참고로 나는 빈 몸으로 왔다. 진욱의 말대로 송혜가 내가 쓸 무기를 알아서 들고왔으리라 믿고 있었고 어떤 무기를 쥐어줄까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애용하던 쿠크리 나이프와 글록은 진료실 테이블 위에 구르고 있을 것이다. 혹여나 잘못해서 사라가 만질까봐 테이프로 붙여두기까지 했다. 덕분에 난 가벼운 몸으로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이런 꼬라지의 방을 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왜 내 이름 옆에 ‘F’라고 써져 있는건데?”
내가 가리킨 것은 의자에 놓여있던 한 종이였다. 내 이름과 함께 몇줄의 설명, 그리고 옆에 큰 글씨로 ‘F’라고 적혀있는 것이었다. 물론 송혜의 것도 있었고 그녀는 ‘C’라고 적혀있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이건 우리의 등급이야. ‘아델리’에서 미리 기본적인 정보로 매기는 건데 어떤 알파벳이 좋은지는 알고 있겠지?”
그것정도는 알고 있었다. 근데 왜 시발, 내가 꼴찌냐는 것이다.
“참고로 이번에 참가한 인원들 모두 ‘C’ 이상이야. ‘D’는 한 명도 없고 너 혼자 ‘F’야.”
“관계자 불러와!”
안되겠다. 당장 이딴 쓰레기같은 등급을 매긴 놈부터 처리를 하고 시작을 해야겠다. 감히 나한테 똥만도 못한 것을 줘버리다니. 모욕을 넘어서서 처참한수준이었다.
“참아, 엔. 넌 처음 나오는데다가 아무 정보도 없고 외팔이라서 ‘F’라고 매긴 걸거야. 경기마다 이기면 올라기니까 화낼 필요 없어.”
“시발.”
종이를뜯어 더러운 바닥에 구겨 던져버렸다. 등받이가 없어 스스로 허리를 펴고 있어야 하는게 불편했다. 마침 송혜도 정리를 마치고서 나의 옆에 앉아 함께 경기장을 비추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사회자가 종이 하나는 들고 관중들에게 마이크로 떠들기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관중들은 사회자의 행동에 많은 기대감을 품으며 시선을 모아 바라보고 있었다. 해맑은 애들같이.
“이번 ‘토너먼트’에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겉치례 인사.
“이렇게 많은 관중들이 와 주셨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죠. 아델리 역사상 4번째로 모든 구역들이 참가해주었으며 역대급의 싸움꾼들이 모였습니다! 최대의 규모! 역대급 인원! 단 한명을 제외하고서 모두가 ‘C’급 이상, 그것도 평균이 A와 B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장면들이 탄생하게 될 지 정말 기대됩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꺼져있던 스포트라이트의 불빛들이 켜지고 사회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다른 관중들의 의자와 달리 고급스러워보이는 의자 5개가 놓여있었다. 남자 4명과 여자 1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로는 험상궂게 생긴 경호원으로 보이는 인원들이 방패가 되어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뿜어내었다. 그 중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찌질했던 구역장 새끼.
“왼쪽부터 소개드리겠습니다. 1구역 강남의 구역장을 맡고 있는 ‘김원식’구역장이십니다.”
전광판으로 웬 노친네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박수갈래가 쏟아지는데 그 정도의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촌 구석 동네에 가서 트랙터나 몰면 어울린 것 같은 사람이었다.
“‘김원식’구역장은 섹터장과 가장 위치가 가까운 사람이야. 머리굴리는 것도 뱀같은 남자지.”
송혜가 추가로 설명을 해 주었다. 잘 됐네. 내 특기중 하나가 뱀을 잡아서 술을 담그는 것이었는데.
“다음은 2구역 화천의 구역장이신 ‘이회문’구역장이십니다.”
이번에는 키가 땅딸만한 남자가 일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나보다도 키가 작아 제대로 만만해보였다. 검은색의 가죽자켓은 꼬마아이가 입은 것 마냥 더럽게 안어울렸다.
“저 사람은 별 볼일 없어보이지만 꽤 거물이야. ‘사건’전에 무기들을 밀수입해서 팔던 사람인데 여러 테러단체들과 연이 많았어.”
“재미없네.”
무기를 밀수입하던가는 내 관심분야가 아니었다. 내가 쓰는 건 항상 한정적이었고 필요할 때면 삼촌이 매번 구해 주다보니 흥미를 가질 이유도 없었다.
“다음으로 3구역 카르디의 구역장이신 ‘유진순’구역장이십니다.”
앞의 두 남정네가 아닌 정장을 빼 입은 중년의 여자가 일어나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가봐도 형식상인 미소였다. 저 5명 중 유일한 여자 구역장이었다.
“저 사람은 딱히 설명해줄게 없어. 어떤 당위원이었다고는 들어는데.”
“야, 근데 너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거 아냐?”
잠깐 잊었는데 송혜 이 썅년도 구역장이었다. 그런데 다른 구역장들과 달리 저자들처럼 고급스런 의자에 앉아 대접을 받기는 커녕 여기서 쓰레기같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나와 같이 먼 산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지금의 난 참가자고 설령 아니더라도 저 곳에 내 자리는 사라진지 오래야. 이유는 알겠지?”
“나라만큼은 아니지만 사회만큼이나 지랄맞은 곳이네. 세상이 지랄나도 본성들은 그대로구만.”
“그게 ‘사회’니까.”
원래는 송혜의 차례지만 더러운 사회의 본질로 생략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 어떤 놈들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1명도 없었다. 이 녀석들의 눈에 4구역은 완전히 버려진 동네이자 보이지 않는 쓰레기장일 뿐인 것이다. 재밌네, 시발. 여튼 바로 다음 5구역의 익숙한 얼굴이 차례를 이어받았다.
“다음으로 5구역 NRK의 구역장이신 ‘장문황’구역장이십니다.”
“이름 한 번 더럽게 구역질나네.”
아주 그냥 생긴것부터 이름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아저씨였다. 지금 여기서 내가 뛰쳐나가 그 때처럼 생지랄을 하면 어떤 반응이 튀어나올지 궁금했다. 5구역장까지 소개되고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시간이 끝나는 6구역장의 마지막 소개가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6구역 NRK의 구역장을 맡고계시는 ‘박재만’구역장이십니다.”
맨 오른쪽에 앉았던 남자가 일어섰다. 덩치가 산만한게 전혀 정치인따위로 보이지 않았고 싸움이나 좀 해본 사람같았다. 따로 경호원도 필요없어 보일 정도였다. 저런 덩치가 구역장이라니. 옆의 송혜는 적어도 머리가 좋은 년인데 저 놈은 머리가 말랑한 부분이 있을지나 궁금해질 정도였다.
“힘은 곧 정치라고 떠벌리는 건달출신 사람이야. 덕분에 NRK가 좀 막장인 곳이 되었지.”
“하! 내 생각대로네.”
저놈의 머리를 단단한 근육덩어리로 정의내렸다. 딱 봐도 저 얼굴에 저 인상이면 100중에 99가 싸움질이나 하는 근육덩어리 놈들이었다. 맞춘것에 대해 기뻐하던 것도 잠시 조금 걱정이 들었다. 설마 지네 참가자들도 근육덩어리들인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내 눈이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육이란게 적당해야 보기좋은 거니까.
식상한 소개시간이 끝나고 조명이 다시 사회자를 비추었다. 마이크를 고쳐잡은 그는 관중들을 지휘하듯 손을 움직여 조용하게 만들고 전광판을 가리켰다. 따라 모니터도 전광판의 화면과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다음은 아델리의 참가자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자들의 선수소개라는 소리에 모니터의 화면을 빤히 바라보면서 집중했다. ‘케이니’. 그 썅년의 이름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카르트’의 ‘케이니’.
“구역순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강남의 참가자들입니다!”
모니터로 3명의 이름이 올랐다. 그 중 가장 거슬리는 이름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썩어들어갔다.
“윤두영, 김원호, 하성주. 의사로는 윤도성 의사가 참가했습니다. 등급은 순서대로 S,A,A입니다.”
소개와 함께 연예인이라도 온 것 마냥 많은 환호성들이 쏟아져내렸다. 그만큼 윤두영 저 개새끼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그런건 다 제쳐두고 저딴놈의 등급이 S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슨 특별한 게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떠올라 바로 송혜에게 물어보았다.
“야, 진욱 그 남자, 등급이 뭐였냐?”
“진욱씨? A였어.”
역시 뭔가 있나 보다. 그 때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거나 하는 그런게. 진욱은 자신의 입으로 두영에게 패배했다면서 내가 이겼던 것도 두영 그 자식이 봐주기라도 한 마냥 말했었다. 조심을 해야 할까, 즐겨야 할까. 역시 그냥 죽여버릴란다.
“다음은 화천의 참가자들입니다. 류재성, 조일광, 카자모토 미유키. 의사로는 더스트 프레드가 참가했습니다. 등급은 A,C,C입니다.”“뭐야? 외국물도 있는거야? 무슨 시발 이태원이네.”
“‘사건’이후에 고향으로 가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외국인들 이었던 거지. 여기서는 흔해. 게다가 너도 사라를 데리고 다니잖아.”
“걘 혼혈이고 한국에서 살았잖아.”
결국은 이태원이네. 그래도 불평이나 지랄을 하지는 않았다. 송혜의 말대로 나도 반 외국인을 데리고 다니는 입장이니까. 다만 화천에서 관심이 가는 인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류재성이라는, 유치장에서 만났던 그 거지였다. 심지어는 등급도 A랜다. 흔한 거지가 아니었다. 저 남자는 살려주기로 했었지.
등급으로만 보았을 때 2구역은 단 2명에게 올인한 느낌이었다. A등급 2명의 이름. 저들 사이에서 ‘미유키’라는 여자는 분명히 짐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그냥따라온 떨이였다.
“다음입니다. 강남과 견줄 수 있는 구역, 카르디의 참가자들입니다. 스테오라 본 케이니, 강지혜, 정혁. 의사로는 박동규의사가 참가했습니다. 등급은 S,A,A입니다.”
“저 양키년 드디어 나왔네. 시발.”
모니터에 떠오른 다음 이름들, 그 중 내 눈을 사로잡은 망할년의 이름이 풀 네임으로 떠올라 있었다. 심지어 내가 아는 그 케이니가 맞다고 알리는 풀 네임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에 안 들어서 당장이라도 모니터에 총알을 쳐 박아 넣고 싶었다.
“아는 여자야?”
“내 뒷통수 후려갈긴 년이지.”
“간 크네.”
“간이 없는거야. 저 양키년은.”
다행히 빠르게 이름이 모니터에서 치워졌다. 다음은 우리의 소개시간이었다. 내 이름이 떠오른 순간 양키년은 두 눈이 뒤집어 터져버릴 것이다. 삼촌밑에 있었을 때 ‘노소위’ 아니면 ‘엔’으로만 불렸는데 저 년한테는 ‘엔’이라고 알려줬었기 때문이다. 기다려라. 내가 그 때의 뒷통수에 이자 존나 붙여서 후려갈겨줄 테니까. 시발년. 이윽고 모니터에 우리의 이름이 오르고 사회자의 비웃음이 모니터를 채워졌다.
“다음은 4구역의 참가자들입니다. 엔, 최송혜. 의사로는 참가자 신분과 함께 구역장을 맡고 있는 ‘최송혜’의사입니다. 등급은 순서대로 F,C입니다. 네, 유일한 ‘F’등급의 참가자가 구역에 걸맞게 등장했습니다. 심지어는 외팔이라고 하는 군요. 모두 격려의 박수를!”
나중에 사회자에게 따로 조의의 박수를 쳐주기로 했다. 이따위의 소개 덕분에 관중들이 하나되어 웃으며 자빠지고 있었다. 중간에는 ‘믿을 건 송혜’라는 말이 섞여있을 정도였다. 씹새끼들, 아무튼 제대로 든게 없는 머가리들은 항상 위에서 매긴 등급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게 문제였다. 자기들 눈으로 본 것도 아니면서.
“화났어?”
“존나게. 저 사회자새끼 외워두고 나중에 이 섹터 먹으면 조용히 나한테 넘겨. 알겠어?”
“아까워라. 그래도 나름 재밌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내가 나중에 더 재밌는 거 보여줄게.”
송혜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사회자는 미래에 내 소유였다. 어떻게 죽여버릴지 나중에 따로 고민해봐야지.
“다음은 5구역 NRK의 참가자들입니다. 양승민, 심수연, 나유한. 의사로는 김아린의사가 참가했습니다. 등급은 순서대로 A,B,C입니다.”
“저기 저 ‘양승민’이라는 남자가 엊그제 사라를 밀쳤던 그 사람이야.”
가장 먼저 죽여버리기로 했다. 여기서 또 의문점, 저 남자의 등급이 ‘A’라는 것이다. 싸움 좆도 못하던 저 놈이 어째서 ‘A’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쨋거나 가장 먼저 죽여버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6구역 SRK의 참가자들입니다. 김유민, 테노 게르니, 김은무. 의사로는 이유진 의사가 참가했습니다. 등급은 순서대로 B,B,B입니다.”
“등급이 시발, BB탄이네. 쟤네들이 제일 못싸우지?”
“맞아. 그러니 딱히 네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거야.”
모니터 속, 선수들의 소개가 끝나고 다시 사회자에게로 향해 얍삽해보이는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짜증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빡치는 얼굴들이 지나갔던 소개시간이 끝났지만 아직 첫 번째 경기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조명은 철창으로 옮겨가 비추고 있었다.
“첫 번째 경기. 생존! 지금부터 각 구역들의 참가자들은 한 마리의 괴물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무기사용제한은 없으므로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싸우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구역들의 힘을 과시하고 자신들에 대해 알리셔도 좋습니다. 먼저 순서공개입니다.”
다시 전광판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이놈의 화면, 한 곳에 좀 두면 안되나. 정신사납게 뭐하는 지랄인지 알 수 없었다. 하루종일 돌리겠네. 욕해버릴까. 시발.
“순서는 사전에 조사한 먼저 보고싶은 팀의 투표수로 결정되었습니다. 5000명의 관중들께서 투표를 도와주셨습니다. 바로 순서공개입니다!”
드럼소리까지 넣어가며 그 순서가 모니터로 떠올랐다. ‘강남-카르디-화천-SRK-NRK-4구역’순이었다. 나보고 마지막에 축포라도 터트릴 하이라이트를 보여달라는 것일까.
“참고로 4구역은 단 1표를 받았습니다.”
충격적인 득표수였다.
“이런 시발! 넌 선거운동 안했냐? 성당 교주가 와서 홍보했어도 저것보다는 많이 받았겠다!”
“내세울게 있어야지.”
“나, 나! 나 있잖아! 나!”
“거봐, 없잖아. 최소한 네가 가슴이라도 컸으면 남자들한테는 표를 받았을텐데.”
내 가슴을 보고 썅년의 가슴을 보았다. 꽤 큰 쪽에 속하는 송혜의 것과 더럽게 작은 내 거. 확 그냥 저걸 평면으로 잘라버려? 그래도 한 가지는 내가 앞서고 있었다. 송혜의 가슴보다 내 가슴이 더 많이 만져졌다는거.
“강남의 참가자들, 입장!”
가슴을 주제로 다투는 사이 모니터가 문이 열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까부터 보았던 철창으로 된 문과 달리 셔터로만 되어있는 문이었다. 바로 위에는 2개의 램프가 있었고 사회자의 손가락에 맞춰 초록색 램프가 불이 들어오면서 셔터가 올라갔다. 엄중한 분위기인마냥 관중들이 조용해지고 조명들도 집중되었다. 광경만 보면 경기라기보다는 아예 서커스였다. 살인이 존재하는 병신같은 서커스.
“운두영, 김원호, 하성주!”
그런 분위기 속으로 발소리가 환청마냥 들려왔다. 그림자 속에서 3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고 그 가운데 두영이 서 있었다.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소리. 그는 시크한 자세라도 취하듯 아무말 없이 뒤에 메고 있던 총을 들며 경기장 가운데로 향했다. 그 사이 사회자는 어디론가 물러가 있었는데 보호소처럼 만들어놓은 작은 유리공간 속에 들어가 있었다. 자기는 살아야한다, 이거겠지.
모니터에 다시 한 번 비추어지는 두영의 무리들을 쳐다보았다. 그를 제외하고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무시하고 오로지 두영만을 보았다. 그는 잘 쓰이지 않는 소총 TAR-21을 들고 있었고 옆의 허벅지로 꽂힌 트렌치나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말끔한 검은색의 가죽자켓과 어두운 청바지. 뭔 폭주족같은 패션이었는데 꽤나 어울렸고 카리스마가 있어보였다. 사라의 뒷통수를 친 개새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