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6
엔이 돌아오지 않아 선생님과 둘이서 밤을 보내었다. 명상을 하러 간다며 사라진 엔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걱정이 되었다. 선생님은 내버려두어도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나의 걱정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두영오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여기서 두영오빠를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고 가능하지 않을 일로 여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만나고 말았다. 그 목소리, 내 이름을 불렀던 그의 목소리는 예전과 같았고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같이 다녔었을 때는 안심이 되었지만 지금은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다행히 엔과 싸우던 도중 경찰의 개입으로 싸움이 중단되었지만 그대로 계속 싸웠다면 아무리 엔이라도 크게 다쳤을 것이다. 분명 엔도 강했지만 소리만 분별할 수 없는 내게는 여전히 두영오빠의 목소리가 한층 더 위압적이었다. 만약 지금 나가있는 엔이 그와 다시 마주친다면? 고개를 흔든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괜히 생각했다. 벌써 날 버리고 갔던 그날의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그가 버리고 난 후 괴물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귀를 막으며 떨고 있던 나, 겨우 두 발을 떼며 움직여도 앞이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에 부딪혀서 많이 다쳤었다. 이마를 부딪히거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몇 번은 바로 옆 혹은 앞으로 괴물들, 크립톤들의 울음소리가 지나가기도 했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귀를 위협하는 소리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버려졌다는 슬픔과 겨우 믿겠다고 다짐했던 것에 대한 배신감. 온몸을 덮었었다. 그렇게 헤메고 헤메 그들을 만났던 것이다.
두영오빠는 날 만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에 대해서, 모든 게 섞여 혼란스럽기만 했다. 만약 다시 한번 더 그를 만난다면 난 어떻게 될까.
“사라!”
밝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를 어둠속에서 꺼내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무심코 팔을 뻗었다. 그런 나의 손으로 한 손이 겹쳐들어왔다.
“진료시간 겸 배식시간이야. 옆에 있어줄래?”
“배식이요?”
“4구역 사람들에게 먹을 걸 나누는 거야. 사라것도 있어.”
“엔은?”
“걘 걱정마. 밖에서 뭐라도 주워먹을 거니까.”
“네?”
“가자.”
선생님의 손이 나를 이끌었다.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어제 앉았었던, 나중에 알게 된 1인용 소파에 앉게 되었다. 진료실에 남아있던 소파라고 한다. 그곳에 앉아 오늘도 아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안녕, 성훈아! 오늘도 엄마랑 같이왔네.”
“안녕! 누나!”
성훈이가 온 듯 했다. 벌써부터 가지런히 모아둔 두 손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작고 따뜻한 아이의 손이었다.
“누나, 오늘은 같이 놀러가요. 애들도 전부 있어요!”
“아, 저기, 난......”
역시 남자아이는 활발했다. 그래서 기운차고 좋았다.
“성훈아. 누나는 선생님을 잠시 도와야 해. 진료 끝나고 놀러가자.”
“에에?......”
내 대답에 조금 삐진 듯 했다. 그래서 나중에 같이 놀러가자고 약속을 하며 달래주었다.
“여기요. 3일 동안은 먹을 수 있을거에요. 곧 아델리에서 얻어 올테니까 이걸로 버텨줘요.”
“진욱씨가 나가는 건가요?”
“아니요. 강한 영웅이 나타났어요. 그러니 걱정마세요.”
들려오는 대화소리. 그것뿐이지만 조금의 그림은 그릴 수 있었다. 강한 영웅은 분명 엔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4구역에서 엔이 희망이라고 선생님도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런만큼 그녀에게 미안했다. 결국에는 또 내 고집으로 무엇인지도 모르는 곳에 나가는 것이니까.
“여기 3일치요. 빵이 부족해서 대신 통조림을 하나 더 넣어뒀어요.”
“고마워요.”
선생님은 계속해서 먹을 것들을 나누어주며 아델리에 대해 얘기하거나 격려의 말들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변함없이 부드러웠고 조금 톤이 내려갔다 싶으면 수희같은 아이들이나 아픈 어른들이 방문했었다. 난 옆에서 그런 대화소리들을 듣거나 이따금씩 아이들이 말을 걸어오면 대답해주며 어울려 주었다.
“언니가 마녀언니에요?”
조금 상처. 새로운 여자아이의 목소리. 감기라도 걸린 것인지 조금 낮은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성훈이 친구니?”
날 마녀라고 불렀던 것은 성훈이밖에 없었다. 그래도 첫 만남에서 헤어질 때는 바뀌어있었는데. 어디서부터 전달이 잘 못 된 건지.
“제가 2살 누나에요.”
자신이 누나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숙녀는 성숙한 아이라고 느껴졌다. 성훈이가 9살이니 내 눈앞의 여자아이는 11살이었다.
“머리카락 만져봐도 되요?”
그리고 나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며 물어왔다. 그 정도는 상관없었지만 지금 내 머리카락은 깔끔하지 않은데다가 깨끗하지도 않아서 아이의 손이 더러워질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런 작은 고민을 가지며 생각하던 도중 이미 작은 손이 다가와 나의 작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부드럽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닿자마자 조금 놀란 나였지만 곧 따스히 내 손으로 아이의 손을 덮어주었다. 보이지 않아도 작고 아기자기한 손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별로 예쁘지는 않지?”
“......예뻐요. 언니가 온 곳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다 이래요?”
“아니, 오히려 흔하지 않아.”
“신기하다.”
“아, 어떡하지. 부족하네......”
아직 이름을 알지 못 한 아이와 얘기를 하던 도중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있던 선생님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족하네’라고 말한 것을 보니 나누어 줄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음......우선 제 것을 가져가세요.”
그렇게 고민을 하던 그녀가 문득 생각이 떠오른 말투로 해결책을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 것은.”
“걱정마세요. 따로 구하면 되요. 한끼 정도라면 얻을 수 있는 곳은 꽤 있으니까.”
“정말 죄송하고 감사하네요. 도경아, 가자.”
“응. 언니, 바이바이.”
나와 얘기를 나누었던 아이의 이름은 ‘도경’이었다. 도경이는 작은 발걸음소리로 내게서 멀어져갔고 잘 있으라며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아직도 그 아이가 남기고 간 머리카락 속 손길이 따뜻했다.
“진료도 끝났으니 점심을 먹어볼까. 사라는 뭐 먹을래? 빵은 없지만 죽을 만들어주거나 통조림을 줄 수 있어. 아니면 둘 다 같이?”
“전 괜찮아요.”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서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를 열고 다니며 준비하는 소리들을 울리며 친절히 물어주었다. 나는 그 친절을 공손히 거절하기로 했다. 사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아까의 대화에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다.
“배고플거야.”
“하지만 선생님 것도 부족하시잖아요. 전 엔이 돌아오면 저희 것을 먹을게요.”
“아, 그러고보니 자동차가 있었지. 그러면 거기서 빼내줄까?”
“그렇네요. 같이가요.”
겨우 3일동안만 여기 있었는데 엔과 함께 타고온 자동차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 혼자서 가게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함께 가기로 했다. 부드러웠던 소파에서 일어나 벨트사이에 끼워두었던 지팡이를 꺼내 펼쳤다. 바닥을 여러번 두드리며 기억을 되짚어 문 쪽으로 향해 걸었다.
“거기 입원실인데.”
“네?”
나름 내 기억속의 지도를 믿고 있었는데 보기좋게 틀리고 말았다. 조금 부끄럽기까지 했다. 결국은 선생님이 크게 웃고 어제처럼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기로 했다. 그녀의 손에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들리는 바람소리, 나의 발걸음이 밖으로 나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햇빛이 나의 살로 느껴져 왔고 사람들의 소리들도 섞여서 나의 귀로 들려왔다. 이걸 소리로만이 아닌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들의 얼굴이 궁금했고 선생님의 모습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엔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선생님께 말로 설명은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다를테니까.
자동차는 그리 멀지 않았다. 겨우 몇십 걸음만 걸으면 되는 거리였다. 선생님은 차 앞에서 잠시 나를 세우고 ‘딸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를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잠겼네. 사라, 혹시나 하지만 열쇠있어?”
틀렸다. 열지 못했다. 엔이 문을 잠근 채로 가버린 것이다. 열쇠도 그녀가 들고 있었다.
“열쇠요? 저는 잘......”
“역시 그렇겠지. 어쩔 수 없네.”
열쇠는 나에게 주어도 제대로 열 수가 없을 뿐더러 운전을 할 수도 없는 데다가 중요한 열쇠인만큼 항상 엔이 들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머리로 여러 생각을 하다가 내가 먹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직까지 버틸 수 있는데다가 선생님처럼 진료를 보거나 일을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한 번 굶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좋아, 말씀드리자.
‘덜컥.’
“오랜만에 하다보니까 잘 안되네.”
‘덜컥’거리는 소리. 분명히 자동차의 문을 여는 소리였다. 열쇠가 있지도 않음에도.
“열으신거에요? 어떻게?”
유리를 깨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차의 문을 여는 소리였다.
“옛날에 이런거 전문이었거든.”
“뭐를요?”
“도둑질.”
결국에는 좋지않은 방법으로 열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자동차는 우리 것이었고 선생님은 열쇠가 없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도둑질도 옛날이라고 했으니까. 만약 엔이었다면 유리창을 부수고 차 문을 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음......엔도 바보네.”
“네?”
선생님은 차 문을 열고 나서 갑자기 엔에 대해 혼잣말처럼 언급했다. 엔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잘못이라도 있는 걸까.
“통조림 2개 꺼냈어. 과일 하나랑 죽 하나. 이만 가볼까.”
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엔이 돌아오면 잠궈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했다.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안으로는 돌아와주길 바랬다.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제발 두영오빠와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
다시 선생님의 손이 나를 다정하게 이끌어주었다. 자동차까지 왔던 길을 그래도 되돌아 걸었다. 바람은 점점 잠잠해져 갔고 따듯한 햇빛만이 느껴져왔다. 진료실에 들어와서도 선생님의 도움을 잔뜩 받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저 앉아있으라고만 했고 곧 무언가를 끌고 오는 소리, 여기저기 걸어 서랍같은 것을 열고 꺼내는 소리, 통조림을 따주는 소리들이 들렸다. 전자레인지도 있었던 건지, 가동되는 소리도 들려왔다. 죽을 돌리고 있는 듯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돕고 싶었다.
“다 됐네.”
전자레인지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나의 앞으로 통조림 하나가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죽일 것이다. 손을 앞의 책상에 올려 죽을 찾아 헤맸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드리면서 앞으로, 그리고 옆으로 움직였다.
“아직 안 돼.”
헤매던 중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손을 잡았다. 나도 조금은 놀라서 멈칫했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러주었다.
“이제 막 전자레인지에서 꺼낸거라 많이 뜨거워. 손 데이면 큰일나. 식은 다음에 먹도록 해.”
“죄송해요.”
그랬지 참. 손을 식탁 밑으로 내렸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손을 데일 뻔했다. 당연히 뜨거울텐데 나도 정말 바보였다. 그 동안 통조림이라면 차가운 것만을 먹다보니 전자레인지에 데워졌는데도 뜨거움이란 것을 잊어버렸다. 앞으로 조심해야지. 엔이라면 분명히 크게 소리치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 어디. 오늘도 느긋하게 사라의 얘기를 들어볼까?”
“네? 제 얘기를요?”
“엔과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이제 너에 대한 얘기를 좀 들었으면 해서.”
“아, 그렇네요.”
그녀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엔과 있었던 일이 대부분이고 나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준 것이 없었다. 그럴까. 오늘은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영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와서 ‘사건’ 전까지의 이야기를.
“한국으로 온 건 12살, 한국의 나이로 14살 때였어요. 여기서는 중학교 1학년 때 온거죠.”
“그 때 나이에 왔으면 오자마자 여러모로 불편했겠네.”
“말은 괜찮았어요. 아빠께서 많이 가르쳐주셨고 때때로 한국어로 대화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대신 공부나 문화같은 것에서 어렵기는 했어요.”
“하기야. 여기 공부가 제일 어렵기는 하지. 고향것보다 엄청 어렵지 않았어?”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뒤쳐질 수는 없어서 따라가는 정도로만 공부했어요. 부모님도 많이 응원해주셨고 덕분에 서울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어요. 저로서는 절대 들어가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합격했더라구요.”
“서울대라. 학과는 뭐였어? 역시 영어?”
“국어국문이요. 책을 좋아해서요.”
“영어도 아니고 국어라. 대단하네. 행복한 가정집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아이라. 정말 부러워.”
한숨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죽은 먹기 좋게 식었다며 선생님이 숟가락을 가지고 천천히 한 입씩 떠먹으라고 했다. 손을 올려 천천히 죽을 찾아서 만져보니 따듯하다고만 느껴질 정도로 식어있었고 조금은 늦었을지도 모르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싱겁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죽은 정말로 맛있었다. 선생님도 무언가를 들고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엔과 아닌 사람과 단 둘이서 밥을 먹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의사를 하시게 된 건가요? 또 학교도 궁금해요. 선생님 같은 분이라면 정말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셨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조심히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도 선생님에 대해 궁금했고 특히 의사라면 나보다 더 뛰어나고 좋은 시절을 살았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엔과 친하게 지냈다면 서울에서 살았을 것이고 혹시나 한 번쯤은 마주쳤을 지도 몰랐다.
“학교라......”
그녀는 고민하는 투였다.
“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어. 애초에 다닐 수도 없었지만.”
“어째서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사라, 난 너와 다른 사람이라서 아쉽게도 말해 줄 수 없어. 어쩌면 듣지 않는 게 더 좋을거야. 그래도 알고 싶다면 들려줄 수는 있는데, 듣고 싶어?”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건드리면 안된다며 선생님이 말리고 있었다. 엔과 비슷하게. 엔도 내가 장난으로든 진심으로든 물어보면 알지 않는게 좋다며 매번 거절했었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선생님도 비슷한 분위기의 목소리를 띄우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알고 싶기는 했지만 엔이 떠올라서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괜히 민감한 부분만 건드려버린 것 같네요.”
“아니야. 죄송할 게 뭐있어. 오히려 이상한 의미로 전달이 되버린 것 같네. 그냥 뭐랄까......내 과거가 사라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식밖의 일들이라.”
“그정도 인가요?”
상식밖의 일이라면 어떤 일들일까.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일들인까. 엔도 같을까.
“분위기만 다운되버렸네. 과일통조림 줄까?”
“네. 감사해요.”
이미 죽은 다 비운 뒤였다. 선생님은 그것을 보고 나에게 물은 것이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무언가를 들고오는 소리가 들리고 통조림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아 통조림에 쥐어주었다. 포크도 나의 오른손에 쥐어주시면서 손으로 먹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해주었다. 덕분에 과일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조금 단맛이 빠졌지만 달콤한 복숭아는 정말로 맛있었다.
“사라,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
“네.”
“‘서울의 마녀’에 대해서 알고있어?”
‘서울의 마녀’. 모를리가 없었다. 한국에 살고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영국에 있던 고향친구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최악의 범죄자였다. 내가 20살때부터 시작되었고 조금 잠잠해지나 싶더나 22살에서 23살 무렵에 다시 나타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름을 알리고 서울을 무섭게 만든 사람. 때문에 경찰들이 매일같이 순찰들을 돌았고 유명하다는 형사들까지 나서서 조사까지 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형사들이 역으로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때문인지 한국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적으로 떠올랐던 범죄자였다.
“알고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만나면 어떨 것 같아?”
절대로 그럴 일이 없었으면 하지만 만약에라도 마주친다면 정말로 끔찍할 것이다. 경찰들도 어떻게 하지 못 한 범죄자가 내 앞에 서 있다니. 분명히 죽임을 당할 것이고 반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마녀’가 한창 활동하던 때 집에서 매일 당부연락이 왔었을 정도였고 밤에는 절대 혼자 다니지 않았었다. 항상 친구들과 함께 다녔으며 인적이 드문 거리들 역시 모두 피해다녔다. 집에 있을 때도 현관문과 창문도 빠짐없니 잠그는 것을 습관화 시키기까지 했었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아요. 만난다면......아마 살아남지는 못하겠죠.”
“하하, 역시 그렇겠지.”
‘마녀’가 저지른 범죄는 다양하고 많았는데 내가 가장 기억에 남기고 있는 것은 ‘마녀의 편지’였다. 한 여자는 납치하고 가둔 뒤 눈을 가리고 묶어 그녀의 등에 칼로 글을 남겼던 유명한 사건인데, 등에 새겨질 때의 그 고통을 생각한다면 끔찍할 것이다. 그것도 눈을 뜨고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편지의 내용을 이러했었다. ‘진돗개의 목줄을 잘 관리할 것’. 물론 나같은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경찰들 내에서는 아는 듯한 분위기들이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어떤 한 형사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을 네티즌들이 밝혀내기도 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건너온 한 유명한 형사에게.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벌써 과일통조림도비어지게 되었다. 포크로 안을 몇 번 더 휘저어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식탁옆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죽과 과일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기도 헀지만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따뜻한 죽은 정말로 맛있었다. 엔도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다 먹은 것 같으니까 준비해볼까?”
“준비요?”
“잠깐 일어나봐.”
선생님의 의자가 끌려지는 것과 함께 일어서는 소리를 듣고 나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을 잡으며 무릎이나 다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리고 다가오는 그녀의 발소리와 창문 밖으로 친숙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성훈이와 수희, 도경이의 목소리들도 섞여있었다. 그러고보니 진료시간중에 성훈이에게 놀아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성훈이뿐만이 아닌 여러명이 온 듯 했다.
“카디건은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게.”
“제 옷을요?”
“대신 이거.”
선생님은 나의 카디건을 능숙하게 벗겨내고 어떤 옷소매로 내 두 팔을 넣어주었다. 옷 끝이 허벅지까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춥기라도 할까봐 코트를 입혀준 것일까. 그런것 치고는 옷 자체가 가벼웠고 밖은 그렇게 춥지는 않은 편이었다.
“지금부터 잠깐동안 사라가 의사선생님이 되어줘야겠어.”
“선생님? 잠시만요.”
느닷없이 의사가 되라는 말에 놀랐지만 뭔가를 물어볼 틈도 없었다. 곧바로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진료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바람소리가 들리는 문에 다다랐다. 따뜻한 햇빛과 함께 아이들의 소리가 한 층 더 가까이 들려왔다. 특히 성훈이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누나다!”
남자애다운 큰 목소리.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던 선생님의 손이 놓아지고 나를 이끌어줄 여러 작은 손들이 다가왔다. 나의 두 손을 모두 잡고 모자라서 내 옷자락을 잡는 아이들도 있었다.
“사라, 잘 놀아주고 와!”
“서, 선생님?”
“누나, 저기로 가요!”
“성훈아, 잠시만.”
“얘들아, 다 놀면 꼭 이 누나는 선생님의 진료실까지 데려다줘야 한다. 알겠지?”
“네!”
“에? 선생님?”
여기서도 잠시는 통하지 않았다. 활기차고 발 빠른 아이들이 나를 이끌고 벌써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두 손과 선생님이 입힌 옷자락을 잡고서. 그러면서 나에게 여러가지의 질문들을 쏟아내었는데 얼마나 호기심과 궁금한 게 많은 것인지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성훈이가 애들이 있을거라고 했었는데 정말 많은 아이들이 전부 온 듯 했다.
“누나는 어떻게 여기로 왔어요?”
“언니, 언니 눈은 왜 파래요?”
“저기로 가요! 저기.”
“얘들아, 잠깐만. 한 명씩 물어봐줘.”
조금 쉴 틈을 달라고 말해 보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발걸음들에 묻히고 말았다. 계속해서 쉬지않고질문들이 이어져 들어왔다. 하나를 대답해주면 다시 세개의 질문이 들어왔다. 나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지만 이렇게 상대해보니 괜히 날 키워주셨던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곤란한 나와 떠들썩한 아이들. 그래도 조금, ‘사건’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