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5
주먹을 날리면 막힌다. 다리를 이용해 머리를 노려도, 어깨, 허리, 명치, 허벅지, 그 어떤 곳을 노려도 죄다 막히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간단하게! 내 눈앞의 삼촌은 계속 방어만 해대면서 나의 체력을 쉬지 않고 갉아먹고 있었다. 단 한 대라도 들어가면 되는데 그게 어려웠다. 도대체 얼마나 쌈박질만 했으면 이 정도 수준인 걸까.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연병장과 우리를 지켜보는 몇몇 대원들이 흥미있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야, 노소위. 그렇게 몸만 쓰면 지칠거야.”
“시발! 이거나 쳐먹어!”
놀리길래 화나서 왼손으로 모래를 한 줌 잡아 그의 눈에 뿌리고 오른손으로는 대검을 뽑아 찔러넣었다. 그의 눈을 향해. 솔직히 난 상처라도 생길 줄 알았는데 개뿔, 삼촌은 뻗은 나의 오른팔을 잡아 끌더니 발로 내 왼쪽 뒷 종아리와 앞 허벅지를 차례로 가격해 무릎을 꿇렸다. 그게 얼마나 빠르면 내가 반응조차 하지 못 할 정도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왼쪽 관자놀이에 발을 가져다 대었다. 때리지는 않고 툭 닿는 정도만으로. 누가 보아도 한 수 물러나며 봐주는 광경이었다.
“그만할까?”
“좆까!”
그만하자는 말에 발끈해 꿇은 상태에서 왼주먹을 쥐고 일어서며 턱을 갈겨버리려고 했다. 발악과도 같은 장면에 구경꾼들이 웃었다. 적어도 턱대가리를 건들기라도 했다면 싹 닥치게 했을텐데 우스꽝스럽게도 삼촌은 살짝만 움직여 피하고 일어서려는 나를 그대로 끌어올려 무릎으로 배를 때리고 들어올린 뒤 연병장의 바닥에 꽂아버렸다. 망할 잡돌들 때문에 등이 욱씬거렸다. 주위의 웃음소리들은 커져만 갔다.
“모두 입 다물어. 노소위니까 이 정도야. 너희들 중 이 녀석처럼 포기않고 나한테 대들던 놈 있었나?”
그웃음소리들을 삼촌이 닥치게 해주었다. 고맙기도 하면서 한 대 쳐버리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워 더 이상 움직일 힘이 부족했지만 말이다. 구경꾼놈들이 차차 물러갈 때 쯤 삼촌의 개개인 훈련이 끝이 났다. 결국 난 수차례 다가가기는 했지만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삼촌도 슬슬 다른 업무가 있다면서 물러갔을 때 난 혼자 스스로와 삼촌에게 화가 나서 입었던 불편한 군복을 생활관 바닥에 내팽개치고 바로 샤워장으로 가서 머리를 식혔다. 따뜻한 물은 필요 없고 오로지 차가운 물만으로 씻으면서 1시간 정도를 보냈다. 나의 주위에는 행정업무를 보던 여군들이 지네들끼리 떠들어댔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내 개인옷으로 갈아입고 누워버렸다. 참고로 내 생활관에서는 나만 여자였다. 총 10명의 구성원이었는데 이대로 한 팀이었고 나 빼고는 모두 꼬추달린 남자란 소리다. 처음 삼촌을 따라갈 때 난 특별대우를 받을 것이라고는 했지만 시발, 특별대우가 삼촌새끼가 직접 관리한다는 건줄은 몰랐지!
아무튼, 그의 말로는 지금 내가 속해있는 팀은 실전을 뛰는 최정예 뭐시기라고 했고 나는 이름없은 용병개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들처럼 관물대에 이름은 쏙 빠진 채 ‘노소위’라고만 적혀있었고 개목걸이도 지급되지 않았다. 인원편성도 여기서는 10명이지만 위에서는 9명으로만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날 건드는 새끼들도, 지랄하는 놈들도 없어서 생활하는 데는 딱히 지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남들처럼 시간표같은 걸 지킬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행하는 훈련들 따위, 아빠새끼가 했던 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었다. 오죽했으면 중위, 대위란 놈들이 나보다 못 한 놈들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오고 둘쨋날부터 얘네들 중 자존심 센 5명정도가 내가 너무 개긴다면서 찾아왔지만 전부 두드려 패주었다. 그 이후로 건드는 놈들이 없었다.
누운 지 또 1시간 쯤 지나서 생활관이 어수선해지는 것이 들렸다. 거 참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짜증나서 눈을 뜨고 왜 이렇게 시끄럽나 하고 문 쪽을 보았는데 삼촌이 그 새 또 찾아와 있는 것이었다. 머리에는 별 2개가 박힌 베레모까지 쓰고서. 저 또 계급자랑. 난 저 별이 무척이나 싫었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들어와서는 나한테 다가왔다.
“뭐야? 할 말 있어?”
아, 또 한 가지. 나는 항상 삼촌한테 반말을 까는데 군대란 곳에서 계급이 좀 높은 사람한테 나처럼 행동했다가는 바로 하극상이니 뭐니로 감옥간다고 했다. 근데 이 인간은 내 삼촌이었고 내 성격상 그럴 수가없었다. 특이 이 안에 팀이란 놈들 앞에서는 더더욱. 만약 얘네들이 나처럼 삼촌에게 말했다면 바로 교도소행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난 예외였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세를 갖춰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삼촌-조카가 아니라서 말이야. 아까 연병장은 뭐, 내 개인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이곳은 다른 애들도 있고 해서 그런 태도면 조금 곤란해.”
“그러세요? 그럼 여긴 뭔 볼일이 있어서 오셨습니까? 별아저씨.”
베레모의 별을 보며 비꼬아주었다. 이 살벌한 대화에 주위의 다른 팀원들이 얼어붙은 것 마냥 아주 표정들이 굳어져갔다.
“하......내일 노소위는 나와 아침부터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개인 교육이다.”
“뭐? 미쳤어? 내일 주말이잖아! 내가 왜 시발!”
“너니까.”
젠장, 역시 이딴곳으로 오는게 아니었나. 그냥 몸이나 팔고 살걸, 괜히 삼촌을 따라온 병신 꼴이 되었다. 짜증이 솟구쳐서 관물대를 한 대 쳐 찌그러트렸다. 이미 삼촌은 나가버렸으니까 상관이 없었지만 분위기가 더 싸늘해져 있었다.
“으아아아! 시발!”
다시 누워버렸다. 화나서 옷도 벗어 던진 채 속옷바람으로 잠에 들었다. 주변에 누가 있건 말건 지금의 난 열을 식혀야 했다. 그렇게 오늘이 지나고 다음 날, 원래는 쉬어야 했을 주말아침에 차를 타고서 삼촌을 따라 어딘가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있는 것이라고는 나무와 흙뿐인 폐가 한 곳으로 차를 끌고갔다. 그와 난 군복들 대신 늘 입던 옷들을 입었는데 난 남색의 후드자켓을 입었다. 솔직히 군복은 너무 불편했다.
“너한테는 부족한 게 있어.”
“하! 예의교실이라도 차리게? 포기해. 내 빌어먹을 성격은 다 아빠새끼 유전이니까.”
“형은 너처럼 행동 안 해.”
“그래? 그 새끼도 젊었을 때는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러면 할어버지나 엄마 유전인가 보지 뭐.”
“잡담은 빠르게 끝내고 넘어갈게. 넌 싸움에 있어서 센스, 힘을 포함해서 대부분을 우수하게 갖추고 있어. 형이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아주 좆같은 방법으로 말이지.”
“그런데 너한테는 딱 하나 없는 게 있어.”
삼촌이 주변에 있던 돌바닥에 앉으며 괜한 힘든 소리를 내었다. 그의 베이지색 바지가 꾸깃해지며 아저씨다운 품새가 드러났다. 군복입을 때는 이런 모습 한 번도 안 보여주면서.
“뭐가 없는데? 가슴? 하기야, 작긴 하지.”
“기술이 없어. 무술 같은거 말이야.”
“가르쳐줘야 있지.”
그의 말이 옳다. 아빠새끼는 지금까지 나를 데리고 여러가지의 방법과 고문들로 모든 싸움에 있어 필요한 대부분을 우수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딱 하나, 무술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가끔씩 억지로 붙여놓은 상대방에게 몸을 대주고 몇 개 가르침 받거나 눈으로 훔쳐내기는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았고 제대로 쓸 만한 것도 몇 없었다. 그걸 알고서 삼촌이 내게 말한 것이다. 가르쳐주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해볼까. 지금부터 매일 아침마다 넌 내 기술을 훔쳐갈거야.”
그가 일어서며 두 주먹을 꽉 쥐고 기본적인 자세를 취했다. 꾸깃했던 바지는 빳빳하게 펴져 멋스러움을 뿜어냈다. 나도 두 어깨를 풀고 싸움에 임했다.
“후회하지 말라고, 늙다리!”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어제 당했던 상처들 따위는 진즉에 나았다. 오늘은 꼭 한 대라도 후려 갈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두드려 맞고 패배했다.
해가 쨍쨍했다. 중천은 이미 넘어간 오후 시간대, 나는 밤을 세우고 아침 시간까지 활용해 몸을 움직이면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장소는 딱히 말하지 않고 사라졌지만 4구역에서 가장 크다는 사거리에 있으니 못 찾는다는 바보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모든 곳을 뒤져서 끌고서라도 나올 생각이었다.
“왔네.”
다행히도 그런 몸 고생할 일은 없었다. 진욱이 약속대로 나와주었기 때문이다. 어제와 똑같은 차림의 그였다. 머릿속으로 당했던 굴욕이 지나갔다.
“바로 트레이닝 시작해볼까?”
“필요없어, 그딴거.”
그는 자기가 선생님이라도 되는 마냥 곧바로 무언가를 가르치려 했지만 내가 먼저 친절히 거절해주었다. 그 탓일까, 그가 조금 당황해하며 무슨 소리인지 설명해달라는 얼굴빛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잠시 눈을 감고 밤새 생각하고 움직였던 동작들과 찝찝하지만 삼촌이 가르쳤던 것들을 떠올렸다. 이럴 때 써먹을 줄이야. 그리고 모든 생각과 시뮬레이션이 끝났을 때 눈을 뜨고 망설임없이 그에게 달려가 주먹을 내질렀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그는 안색 변화 없이 피하며 말했다. 어제부터 이미 느끼고 있던 것이지만 그는 싸움에 무척이나 능했고 익숙했다. 아마 ‘아델리’탓이거나 크립톤때문에 변한 세상탓이 클 것이다. 아니면 원래부터 근육질에 싸움이 몸에 베여있었던가. 진욱이 바로 반격을 하려 주먹을 쥐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평소처럼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의 말대로 나에게는 팔 하나가 없어 몸싸움을 하게 되면 다리가 많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만큼 동작이 커지게 되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밤새 움직이면서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하고 어느쪽으로 뻗으면 어떻게 되는지 연구를 하고 연습을 했다. 그 결과를 지금 보이는 것이다.
원래라면 이대로 얼굴을 노리거나 허리, 허벅지를 가격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들어올린 다리를 굽히고 나머지 다리와 하나뿐인 팔로 중심을 맞추었다. 그도 이런 자세는 처음 보는지 당황한 기색이 서려있었다.
“원 킥, 투 머치.”
그리고는 주먹으로 잽을 날리듯 다리를 뻗고 되돌리며 그의 머리, 가슴, 어깨쪽들을 빠르게 가격했다. 그러다가도 막힐 것 같으면 뒤로 빼거나 옆으로 움직이며 그를 중심축으로 삼아 요리조리 움직이며 주먹과 발이 오갔다. 큰 동작들은 전부 버리고 작은 동작들로만 그를 공략해갔다.
“선물 줄까? 크리스마스 선~물. 산타대리인이 주는 거야!”
“아직 크리스마스는 멀어서 말이지.”
어쩔줄 몰라 막으며 내 동작을 유심히 보던 그가 주먹을 쥐고 강제로 틈을 벌리며 들어왔다. 가까이 붙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단히 자세를 유지한 채 옆으로 피해주었다. 그리고 들고있던 다리를 뻗어 크게 공격했다. 동시에 빠르게. 힘을 실은 발이 그의 목을 노렸고 눈치챘는지 빠르게 숙이는 진욱이었지만 나도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위로 향한 발의 방향을 꺾어 아래로, 중력의 힘까지 이용해 찍어버렸다. 그의 등으로 내 발이 찍혀 들어갔다. 그가 주춤하면서 쓰러지려고까지 했다.
“네가 말한 그거 하나, 채워왔다. 이제 만족하냐?”
“......그래, 그래서 밤새 움직였던 거네.”
“이 새끼, 변태냐? 다 보고 있었네. 관음증 환자는 이제 질색인데. 기분 더러워.”
“어디 벤치같은 곳에라도 앉자. 얘기할게 많아.”
속이 좀 시원했다. 굴욕을 줬던 놈에게 굴욕을 잔뜩 안겨주었으니까. 진욱은 내가 때린 허리를 짚으며 일어나 두드리고는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 ‘아델리’에 대해 알려주려는 거겠지. 이겼기도 했겠다, 여기서는 조용히 따라가주기로 했다. 4구역의 크나큰 사거리, 송혜의 병원이 있는 남쪽과 반대 방향인 북쪽, ‘SRK’였나? 하여튼 그쪽 방향이었다.
겨우 3일째지만 4구역의 몰골은 아무리 보아도 해골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지나가면서 몇몇건물들로 얼굴을 내미는 어린 애들과 진욱을 보며 인사하는 여자들, 사람이라고는 이게 전부인 듯 했고 정말로 그랬다. 재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4구역은 처음에는 쨍쨍했지만 두영과 케이니가 들어온 이후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가 망했다고. 그렇다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금 이곳의 구역장인 송혜는 적당히라는 것을 아는 인물이었기에 욕심이 과했다는 과거의 4구역과는 이미지가 맞지 않았다. 이 틈에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야. 송혜가 쭉 여기 구역장이었어?”
“아니.”
빙고, 내가 아는 송혜는 역시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송혜는 3번째고 앞에 2명이 더 있었어.”
“그 둘 중 한 명이 이렇게 쳐 말아먹은 거야? 아니면 둘 다인가.”
“두 번째 구역장이 몰아세웠지. 모두가 그만두자고 할 때 계속 ‘아델리’에 욕심을 냈으니까.”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걷는 동안 볼 것도 없어보이고 조금이지만 흥미가 생겼다.
“첫번째 구역장 때는 우리가 계속 승리했어. 그 무섭다는 지금의 강남과 카르디, NRK까지 대부분 우리의 영역일 정도로. 이미 부족함이 없었고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였어. 그래서 그 쯤 그만두려던 때 우리의 의견들이 갈린거야. 거기서 내부싸움이 일어났고 두 번째 구역장이 자리를 잡았어. 그 뒤로 쉬지않고 아델리에 출전했고 더 많은 승리들을 거머쥐었어. 혜택도 많았지.”
“그러던 중에 강남에는 두영이, 카르디에는 케이니가 등장했나 보네.”
“송혜가 가르쳐줬어?”
“아니, 잠깐이지만 나랑 같은 신세였던 거지가 알려줬어. 그래서 그 뒤로는?”
“그 뒤로는 연속된 우리의 패배였어. 두영과 케이니를 필두로 강남과 카르디가 빠르게 성장했고 SRK와 NRK가 동맹을 맺으면서 우리를 몰아넣었어. 그 와중에도 4구역은 아델리에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보다 못한 우리들이 끌어내렸어. 그 선두에는 지금의 구역장인 송혜가 나섰지.”
“그 썅년, 송혜는 언제부터 여기있던거야?”
“처음부터. 하지만 4구역사람은 아니었어. 원래는 강남에서 활동하던 의사였지. 그러던 중간에, 정확히는 4구역이 몰락하던 때 여기로 넘어왔지.”
굳이 몰락하던 때 넘아왔다. 이 년, 무슨 생각인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과는 관련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2년, ‘사건’으로부터 우리의 섹터가 구역들로 자리를 매김하고 생활하고 있어. 원래는 이곳도 이정도로 폐허수준은 아니었어. 최소한 잠은 편히 잘 수 있는 곳이었지.”
“그래보이네. 아주 국밥그릇까지 말아드셨구만.”
‘사건’전의 누구들처럼.
“이제 ‘아델리’로 얘기를 넘겨볼까.”
걸으며 대화하는 사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나무 한 그루가 피어져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후 내가 아는 나무들이라고는 모두 죽어가는 것들이라 가지부터 잎들까지 전부 썩어가던 것들뿐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푸른빛이 가득 맺어져 있는 초록빛의 나무였다. 이질감이 들 정도로. 가짜겠지하며 다가가 만져보았는데 이것은 진짜 나무였다. 죽어가는 흔적도 있지 않았다.
“이게 뭐야? 나무는 점점 죽어가는 것들 뿐인텐데. 여기에는 멀쩡한게 있던거야?”
“4구역의 자랑거리야. 송혜가 살린 나무지.”
“송혜가?”
그 년, 의사일뿐만 아니라 식물학자까지 했었나.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아는 송혜는 의사노릇만 했지, 이런 식물학까지 겸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나 몰래 숨기고 있던걸까. 그것도 내 정보통을 피해가면서.
“우선 앉아.”
진욱은 나무 바로 밑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무슨 소풍이라도 온 마냥. 벤치는 생각외로 말끔했다. 부서진 금이 몇몇있기는 했지만 엊그제 걷어찼던 것보다는 훨씬. 그가 먼저 앉고 내가 옆에 앉았다. 나무의 그늘이 우리를 덮어주었다. 여러번 보아도 신기했다. 이젠 영영 보지 못할 색을 본 것이니까. 이걸 송혜가 살리다니. 그녀는 여기서 무슨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아델리가 여러 경기들로 진행된다는 건 알고있어?”
“5개의 게임을 즐기고 마지막에 맞짱뜨는 건 알고있어.”
우리의 앞으로 애들 몇 명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뒤로 여자들도 따라왔는데 각자의 손에 작은 바가지나 비닐봉투, 그릇들을 들고 있었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병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배급같은 거였다.
“첫 번째로는 ‘살호’라는 괴물과 싸우게 될 거야. 여우괴물인데 많이 난폭해. 신고식같은 개념이라 여기서는 어떤 무기들을 사용해도 상관없어.”
“‘여기서는’이라는 걸 보니 다른 게임들은 제한이 있나보지?”
“예리하네.”
우선 첫 번째가 뭔지도 모르는 난폭한 괴물새끼와 싸움이라니. 시작부터 눈요깃거리가 충분해보였다.
“그 ‘살호’라는 놈, 존나 커?”
“다 큰 호랑이정도이기는 해.”
“존나 크네.”
“등수를 가리지 않으니까 마음편히 싸워도 돼.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을거야.”
덧붙여서 무기는 송혜가 챙겨줄거라고 했다.
“두 번째 경기는 도깨비 잡기라는 게임이야. 혹시 ‘마피아’게임을 알아?”
“마피아놈들을 족쳐는 봤지. 게임은 몰라.”
진욱은 태연하게 말하는 나를 외국인들의 ‘what?’이라고 말하는 표정을 지었다. 또 뭐가 문제인건데. 마피아 모르나.
“각 구역마다 1명씩, 최대 6명으로 진행을 하는 경기인데 랜덤으로 도깨비가 선택돼. 도깨비가 아닌 사람들은 도깨비를 찾아내어 제압하는게 승리, 반대로 도깨비는 가상으로 흐르는 7일의 밤낮동안 살아남아 제압당하지 않고 아닌 사람들을 제압해버리면 승리야.”
“간단하네.”
“나름 머리를 써야해. 1대5인 만큼 1로서 승리하는 사람은 큰 점수가 들어가.”
“뭐야? 점수제였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강 이해되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런거라면 자신있었다. 그게 나의 주특기이기도 했으니까.
“세 번째는 보물찾기야. 말 그대로 건물 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면 돼. 뭘 찾아야 할지는 시작 전에 알려줄 거야.”
“찾으면 내가 가져도 되냐?”
“문제될 건 없지. 많이 찾을수록 승리고 약탈도 가능해. 단, 살인은 불가야.”
“존나 재미없네.”
“참고로 중간마다 ‘살호’가 있을거야. 몇 마리가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럼 내가 불리하지 않나. 다른 쪽들은 전부 팀이잖아.”
“이것도 1명씩 출전이야.”
“오케이. 그럼 인정.”
“무기는 권총까지만.”
뭔 놈의 무기제한이 이렇게 많은 건지. 그냥 좀 단순하게 진행하면 안 되는 것일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는 하지만 이것도 적당히 해야 따르던가 하지. 물론 내가 써봐야 어차피 권총까지라서 제한이 아니기도 하지만그런 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압박감은 달랐다. 거기다 살인이 금지되었으니 약탈이 까다로울 것이다. 이건 따로 뭔가를 준비해 가야 했다. 아, 머리 아파라......
“누나는 어떻게 여기로 왔어요?”
“언니! 언니 눈은 왜 파래요?”
“저기로 가요! 저기!”
“얘들아, 모두 잠깐만. 한 명씩 말해줘.”
이제 네 번째 경기에 대해 들으려던 때 우리의 앞으로 아이들과 곤란해가는 목소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카디건을 벗고 어째선지 의사가운을 걸치고 있는 사라였다. 애들이 그녀의 손이나 가운자락을 잡으면서 어딘가로 끌고가며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라는 꽤나 당황스러움과 곤란함이 섞인 표정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다가가서 괴롭히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로 왜 끌려가고 있는 것일까. 송혜가 따라 붙은 것도 아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상대는 사라다. 그냥 애들하고 놀아주다가 저렇게 된 것이겠지.
“사라도 데려갈거야?”
옆에서 같이 구경하고 있던 진욱이 갑작스럽게 물어왔다.
“어디를?”
“아델리 관람석으로.”
아, 그 소리였구나.
“아니. 안 데려갈거야.”
고민없는 대답이었다. 누가, 언제 물어보아도 똑같을 대답. 그럴수 밖에 없었다. 사라는 내가 사는 곳에 손만 담궈도 시들어버릴 꽃이니까. 지금도 이 경계는 확실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보니까 너도 송혜한테서 나에 대해 뭔가 들을게 있어?”
“‘서울의 마녀’라는 것 정도만.”
“시발, 썅년이 주인허락도 없이 여기저기 다 소문내고 다니네.”
아직 사라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믿기 어려웠어.”
그의 시선이 나를 보며 말했다. 위에서 잔잔하던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물같은 그늘이 나를 어려번 덮쳤다가 놓으려 눈을 따갑게 했다.
“왜? 생각보다 존나게 이뻐서?”
“그 ‘마녀’가 누군가를 지키고 있다는게.”
재혁이와 같은 말이었다. 사라를 지킨다. 지금 나에게서 최우선순위의 목표이자 목숨을 주든 심장을 도려내든 해서라도 행할 나의 신념이었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 인생의 크나큰 조각이었다. 동시에 내가 책임질 여자친구이자 와이프였고.
“내가 말하면 이상할 수도 있는데.”
“말해봐.”
“아무리 정신나간 괴물이라도 지키고 싶은 거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야. 나한테는 사라가 그런 존재고.”
“.....그래.”
사라의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모습에 가려지는 하얀가운 끝자락. 조금 웃겼다.
“이어서 설명해봐.”
잠깐 쉬는 시간 같은 얘기를 끝내고 다시 내 세상으로 돌아와 본론을 이어갔다. 세 번째 경기까지 설명했으니 다음은 네 번째 경기에 대한 얘기였다.
“네 번째는 정말 단순해. ‘럭키섹터’라는 경기인데 사실상 게임이야. 제비뽑기를 통해서 1등부터 6등까지 가려. 전적으로 운에 맡기는 게임이지.”
“존나 어이없네. 앞에서는 사람 목숨 오락가락 하는 것들이었는데 웬 갑자기 운 싸움? 거 참, 취향이 독특하다, 야.”
“그러니 바로 다섯 번째 게임에 설명을 할게.”
“해봐.”
“랜덤이야.”
“......장난하냐?”
정말로 어이가 없었고 기가 차는 설명이었다. 이어서 설명을 하랬더니 옘병, 몰라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정말이야. 매번 5번째 경기는 달랐어. 어디서 어떤 경기를 하게될 지는 당일이 되어야지만 알 수 있어. 오로지 그 인간 마음대로니까.”
“그 정치인 출신이라는 떨거지?”
송혜에게 한 번 들었었다. 이 섹터는 어떤 정치인 출신인 인간이 관리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아델리’에 대해 들으면서 뭐하는 속물인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부류의 속물들은 모두 별볼일 없는 놈들이 대다수였다.
“경기는 매번 다르지만 공통점들은 있어.”
“뭔데?”
“모두 보는 이들의 재밌는 오락거리로 전락했다는 거지.”
“그야말로 날 위한 경기인 것 같네. 정체까면 주가도 더 오를거 아냐.”
“그렇겠지. 넌 ‘서울의 마녀’니까.”
계속 ‘마녀’에 관해서 나오긴 하는데 이 별명이 나도 잘은 모르지만 주가가 엄청 높다고 했다. ‘사건’ 이전에 내쪽의 세계에서는 모르는 이들이 잘 없으며 사칭을 하고 다니는 가짜들도 있었다고 할 정도라고 했는데 왜 별명 하나가지고 그랬는지 참.
“마지막은.”
“뭔지 알고 있어. 이미 들었어,”
“송혜한테서?”
“그 거지한테서.”
나무의 흔들림이 멈추고 잠시 햇빛이 가려지며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그 속에서 나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밖에서도 자유롭기는 했지만 여건같은게 충분하지 않았는데 이곳은 모든게 보장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영 그 개새끼와 오랜 악연 중 하나인 케이니를 이 기회에 둘 다 죽여버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설명을 듣고 누가 머무르는지, 그리고 점차 내가 원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드러나자 조금씩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래도 부산으로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는 했지만 아델리에 나가 싸우는 건 사라, 송혜 둘 다 원하는 일이었고 그런만큼 거절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엔?”
옆의 진욱이 진지한 눈빛으로 날 경계하고 있었다. 왜그러나 하고 나 자신을 보니 주먹을 꽉 쥔 채 ‘마녀’ 때처럼 미소짓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야 보았다. 애초에 난 미친년이 맞았고 주위로부터 그런 소리들을 들어와서 이상할 건 없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뻐근한 목을 풀고 나머지 준비를 위해 진료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을 내딛기 전 지금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진욱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내가 아델리는 하는 동안 사라 좀 부탁한다.”
“그래. 나하고 있는게 훨 낫겠네. 지금 네 상태를 보니까.”
“이게 내 원래모습이야.”
구름이 걷히며 조금씩 사라져가는 그늘 속, 천천히 헌 운동화를 신은 발을 내딛었다. 아델리가, 내 과거의 시간과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