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Gluttony (I Love You, Shara) - 3
다시 다른 느낌의 땅을 밟고 나아가자 어느 순간 가벼운 바람이 나를 건드려왔다. 밖으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제와 달리 사람들의 목소리들도 점차 들려왔다. 그중에서 가장 정겹고 많이 들려온 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장면은 뛰어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그 속에 엔과 나도 조심히 넣어 보았지만 곧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 자신의 옛날 모습을 알기에 쉽게 그려넣을 수 있었지만 엔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했지만 목소리와 미지근한 온기만 느낄 수 있었을 뿐,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습인지 보지 못했다. 볼 수 있었다면, 내 눈이 멀쩡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엔을 그려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와 내가 함께하는 모습을.
“선생님.”
“왜?”
“엔은 어떻게 생겼나요?”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에 있었는지 의자같은 곳에 날 앉혀주었다. 옆으로 선생님도 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너는 한 번도 엔을 볼 수 없었겠네.”
“네.”
“음......일단 예뻐. 당장 거리에 내던져놔도 남자들이 알아서 주워갈 정도로.”
“머리카락은요?”
“매끈한 검은색이지. 설마 엔이 이런 것 하나 안 알려줬어?”
“네. 물어봤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어요. 엔의 과거도 마찬가지로.”
한 번도 답해주지 않았기에 더 이상 묻지도 않았었다. 엔의 목소리로부터 얘기하는 것 자체부터 꺼려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괜히 실례일 것 같아서였다. 자신만의 안 좋은 기억들이 있을 거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면서 지내왔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알고 싶어? 엔의 과거.”
“선생님은 알고 있나요?”
“아마 현재로서는 내가 유일하게 과거를 전부 아는 사람일거야.”
“엔이 말해줬나요?”
“그것도 있고, 나 스스로 조사하다가 알게 된 것도 있고.”
솔직히 말하자면 끌렸다.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옳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엔은 나에게 말하길 싫어하는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는 게. 이런저런 생각들이 쉬지 않고 오갔다.
“알려줄까?”
“......아니요. 역시 아니에요.”
거절하는게 맞아보였다. 엔이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듣더라도, 늦어도 좋으니까 엔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내가 그녀에게 직접 얘기를 해준것처럼. 선생님은 잠깐의 정적을 가지고 다시 말을 했다.
“사라. 잘 생각했어. 엔의 과거는 본인한테 듣는게 아니라면 알지 않는게 좋을거야.”
“역시 뭔가 있는 건가요?”
“있다기보다는 너 자신이 혼란스러워지게 될 거야.”
무슨 소리일까. 내가 혼란스러워 할 것이라는게. 역시 무언가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더 이상 얘기했다가는 선생님께 들려달라고 할 것 같았다. 구석에 남아있을 호기심을 뒤로하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의 산책.
“외국인 누나다!”
막 일어선 그때 한 번 들었던 목소리가 나를 향하며 반겼다. 나의 왼쪽,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들이 가까워지더니 허리쪽으로 작은 누군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어린아이, 성훈의 손이었다.
“안녕, 성훈아.”
“이 언니야?”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주인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똑같이 어린아이라는 것은 알았다. 밑쪽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니 키작은 꼬마들이 모여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닌지, 생각했다. 나는 보답으로 미소를 짓고 반갑게 인사해주었다.
“난 ‘사라’야. 반가워 얘들아.”
“언니는 외국인이에요?”
정확히는 혼혈이었지만 태었난 곳도, 어릴 때 생활한 것도 영국이었으니 외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에너지 넘치는 이 아이들덕분에 다시 의자에 앉아야 했고 조금 긴 시간동안 어울려주게 되었다. 나에게 어디서 왔냐며, 영국은 어떤 곳이냐며 묻는 그 아이들에게 내 기억과 추억들을 되짚으며 하나하나 얘기해주었다. 그러다가 엔에 대해서도 얘기를 조금 꺼내게도 되었다. 선생님도 옆에서 중간마다 부족한 부분의 이야기를 채워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순수한 어린아이들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어느 새 아이들이 떠나갔고 그제서야 의자에서 일어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돌아갈까? 할 일도 있고.”
“좋아요. 엔도 깨워야 하니까요.”
“어제 그렇게 재웠는데도 아직까지 퍼질러 자는 걸 조면 지금까지 꽤나 고생하면서 다녔나 보네.”
“그럴거에요. 저 때문에 여러일들을 겪었을 테니까.”
“돌아가서 들어봐야겠는걸. 어떤 일들을 겪어온건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마치 친구와 하교를 하던 때가 돌아온 것 같았다. 져가는 오후를 보며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걸었던 하굣거리. 언젠가 다시 그런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런 희망이 다시 찾아올까. 나는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언제나 꽃은 피어나니까. 그런 마음을 품으며 돌아가던 도중 갑자기 선생님께서 나를 강하게 안더니 어딘가로 움직이게 했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행동에 무척이나 놀란 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긴 무슨 일이죠?”
그녀의 목소리에 바짝 긴장이 서 있었다. 누군가 온 모양이었다. 조금씩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지고 바람소리만이 남아 우리를 덮쳐왔다. 기분 좋은 바람은 절대 아니었다.
“어제 그 깽판을 쳐 놓고 모를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처음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부드럽지만 독기가 서려있었다.
“그거에 대해서는......할 말이 없어.”
“그냥 싸움수준도 아니고 아예 휩쓸다시피 했던데. 내가 잠시 빠져있던 때 말이야. 벌써 다른 구역들도 4구역에 관심이 쏠려있어. 그건 알아?”
“이건 ‘NRK’와 ‘4구역’만의 문제야. 다른 구역들이 낄 자리는 없어.”
“아니지. 당장 ‘아델리’가 내일 모레인데. 어떻게든 자리를 껴볼만한 건이야.”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지금이라도 우리에게로 넘어와. 그럼 넌 살 수 있어. 얘기에 따라 어제 있었던 일을 잘 무마할 수 있는거 알지?”
목소리가 더 거칠어지고 독기가 세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여기 아이들을 버리고 당신네 구역으로 가서 혼자 살아남으란 말이야? 그렇게는 안 돼. 난 못해.”
“해야 돼. 어차피 ‘아델리’도 참가하지 못하잖아. 더 이상 당신한테는 방법이 없어. 우리가 ‘구역침범’이라고 말하는 즉시 ‘4구역’은 강제로 참가해야 하는데 이번에마저 지면 당신들의 구역은 완전히 쫓겨날텐데. 아니면 혼자서라도 참가할 건가?”
보진 못해도 목소리들만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남자쪽이 그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도. 선생님은 계속해서 막히지 않고 대답을 하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보아도 움직임 대신 떨림만이 느껴져 왔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망없는 이곳을 버려. 이제 당신의 4구역은 끝났어. 선택권이 있지 않아. 솔직히 알고 있잖아? 이제 이곳은 옛날만 하지 않다는 거. 아니면 여기 사람들하고 함께 죽을 생각인가?”
“그게 사람이 할 소리에요?”
남자의 말에 화가나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만큼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서로 도와주지 못할망정 서로를 물어뜯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이해가 안 되었다. 그것도 아이들이 많은 이곳을 상대로. 막말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살인예고나 다름없었다. 아예 대놓고 죽을 거냐고 까지 말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났다. 선생님의 옷자락을 잡고 내가 나섰다.
“왜 도와주지는 못하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아이들이 안 보이세요? 왜, 모두가 위험한 세상에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냐구요.”
뒤에서 선생님의 손이 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쏟아져버린 말이었고 다시 뒤로 숨어버리는 것은 내가 싫었다. 그렇기에 당당히 맞서야 했다.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내 쪽으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묵직한 발걸음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날 위협하는 발소리였다, 그 한 걸음마다 짙은 소리가 나는 삼키려 들었다.
“이 여잔 뭐야?”
“건들생각 마.”
빠르게 선생님의 손이 내 손목을 잡고서 뒤로 물렸다. 순간 보진 못해도 하나,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거리는 총의 소리였다. 남자는 내게 그걸 빠르게 겨누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서 선생님의 손이 날 잡아 뒤로 물린 것이다. 안 돼. 그러면 그녀가 위험해진다.
“어차피 지키지도 못 할 거면서.”
“그런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못하지. 해보던가.”
비웃음 섞인 남자의 목소리, 무언가로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날 잡고 있던 선생님의 손이 풀리고 바닥으로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괴롭혀왔다.
“선생님!”
남자가 그녀를 때린 것이다. 급히 몸을 숙여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남자가 또 막아섰다. 빠르게 바닥을 짚으려 몸을 굽혔는데 차가운 금속의 무언가가 내 머리에 닿은 것이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생님에게 다가가기 위해 손을 뻗어보지만 아예 힘으로 막아서오기까지 했다.
“비켜요. 그만해요!”
대답은 커녕 나에게도 아픔이 몰려왔다. 그가 발로 날 밀쳐버린 것이다. 등과 엉덩이가 바닥을 마주하고 손바닥은 바닥에 쓸려 따끔거렸다. 무릎이 까졌나보다. 많이 따가웠다.
“무슨 짓이야?!”
“알면서 묻지 마.”
“이거, 놔!”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의 귀를 때렸다. 무릎이 아프고 손바닥이 쓸려 아팠지만 바닥을 짚어 일어서며 목소리라 들려온 방향으로 달렸다. 어떻게든 그녀를 잡아보려 이리저리 손을 뻗어 휘두르지만 아무 손도 닿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놓치지 말라며 아무리 나 자신에게 소리를 질러보지만 아무것도, 옷자락조차도 닿아오지 않았다. 아냐, 제발. 제발......
“엔!”
궁지에 몰린 생각과 감정이 그녀의 이름을 부렀다. 최소한 나의 목소리라도 닿길 바라면서.
“넌 뭐야, 시발새끼야!”
힘껏 내지른 나의 목소리가....닿았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송혜랑 사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서 찾으러 나오자마자 뭔 개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면상 처음보는 새끼가 송혜를 강제로 끌고가려 하고 있고 사라는 넘어진 채 엉뚱한 방향으로 손을 뻗고 있었는데 피부가 쓸려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깨어났던 정신머리가, 그 상처를 보자마자 빠르게 깨어났고 화가 치솟았다.
“넌 뭐야, 시발새끼야!”
망설임따위 집어치우고 뒷츰에 꽂아두었던 글록17을 뽑아 송혜를 잡고있던 남자에게 쏴갈겼다. 그도 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올지는 몰랐던 건지 송혜를 놓고 빠르게 옆에 있던 의자를 벽 삼아 숨어들어갔다. 의자를 향해 탄창이 전부 비워질 때까지 쏴대었다.
“당장 뛰쳐나와! 죽여버릴 테니까!”
마지막 탄이 터져나가고 글록은 빈소리만 울렸다. 쉬지않고 쿠크리나이프를 꺼내 달려가며 의자를 발로 걷어차 넘어트렸다. 그가 뒤로 물러났지만 나는 바로 따라가면서 목을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그대로 목을 베어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이 놈은 잡놈이 아닌 듯 했다. 그 손목을 발로 눌러 막고 다른 발로 얼굴을 차려 한 것이다. 고개를 꺾어 피하고 역으로 턱을 걷어차 주었다. 남자가 잠깐 주춤하다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무어라 지껄였다.
“당신인가 보네.”
“당신 좋아하네. 면상도 오늘 처음 마주하는 새끼가! 시발, 넌 뒤졌어!”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담아 돌격했다. 어차피 길거리싸움밖에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유리해서 생각따위는 접어두었고 그의 말따위도 들어줄 가치가 없었다. 바로 팔을 젖혀 마음에 들지 않는 그의 얼굴에 꽂아주려고 했다. 세게 쳐서 말조차도 못하게 하려 했건만, 그가 내 주먹을 피하고는 그대로 팔을 잡아 끌어당기더니 내 배로 무릎을 꽂아넣은 것이다. 내가 자주 사용했던 싸움법이었다. 그래서 대처가 쉬웠다. 그대로 쓰러지지 않도록 이 꽉 물고서 버티며 잡힌 팔을 풀고 어깨 쪽 옷자락을 잡고 옆구리를 똑같이 무릎으로 꽂아 후려갈겨주었다. 갈비뼈쪽을 때려넣어서 그의 자세가 더 크게 흔들렸다. 그대로 허리를 한 대 더 쳐서 고꾸라트리고 나이프를 뽑아 위에서 치켜들었다. 이대로 쳐죽여버릴 생각이었다.
“평소에 허리관리 잘했어야지.”
“안 돼!”
이제 끝을 내려던 찰 나 누군가 나의 손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또 사라인가 하고 봤는데 의외의 인물인 송혜였다. 사라가 말렸다면 그러려니 하고 잔소리라도 하겠는데 송혜가 막아서는 바람에 당황을 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가 틈을 발견하고서 내 가슴팍을 밀친 뒤 저 멀리 도망쳐버렸다.
“야, 야! 시발새끼야! 어딜생까?!”
뒷츰의 권총을 뽑아서 쏴보지만 빈 소리만이 울렸다. 생각해보니 아까 다 쏴버려서 남은 총알이 하나도 있지 않았다. 젠장할! 저 시발놈을 죽여버려야 하는데! 화가나서 중요한 순간을 말아먹은 송혜에게 원망섞인 눈빛을 보냈지만 바로 거둬들여야 했다. 이게 정말 내가 알고있던 그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눈물까지 보이며 울고있던 것이다. 다른 여자애들 마냥.
“너 뭐야? 왜 갑자기 우는 건데? 야.”
“엔!......제발, 제발 그만하란 말이야.....”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울어재끼며 아예 호소까지 하고 있었다. 사라는 저만치서 이 소리를 듣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내가 나쁜년처럼 보였다. 나쁜년이 맞다는게 함정이지만 어쨋든 그렇게 보일 정도였다.
“지금 우리는 강제로 ‘아델리’에 참가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 너 때문에!....다...너 때문이야....엔.”
“그건 또 뭐고 왜 내 탓이야? 뭔 시발, 설명을 해주던가!”
“엔!”
이번에는 사라까지 나를 불러대고 있었다. 두 손 모두 뻗어 내 허리와 어깨를 만지다가 팔을 잡으면서 말이다. 둘이 붙어대니 아무리 나라도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해. 선생님 말을 들어줘.”
“엔......”
그러고는 둘이서 내 몸을 옥죄어왔다. 인생 돌아버리겠네. 남자가 떠났던 곳을 보지만 그림자도, 점 따위도 없이 도망가버리고 골목만이 휑했다. 쫓아가서 죽여버릴까 하다가 사라를 보고 그만두었다. 글록을 집어넣고 조심히 송혜를 일으키며 병원의 진료실로 모셨다. 사라도 내 옷자락을 잡으며 따라 들어왔다. 말할 것 없이 분위기를 잡쳐져있었고 송혜는 애처럼 울기만 바빴다. 나는 조용히 진료실의 이것저것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맞추었다. 송혜는 조금씩 진정을 되찾고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거기다가 무슨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내 손을 잡으며.
“‘아델리’에 나가줘. 우리구역 대표로.”
“......뭔 잡소리야? 앞 다 던지고 뒷구멍부터 꽂으면 내가 알아쳐먹겠냐?”
“‘아델리’에 참가해서 우승해줘.”
“그래, 그렇게 말해야 알아쳐먹지. 근데 싫어. 내가 왜?”“너도 책임이 있으니까!”
책임? 무슨 책임을 말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이 년, 진짜 왜이러는 걸까? 아까도 그 남자정도는 쉽게 죽여버릴 수 있었으면서. 그 새 개과천선이라도 한건가. 그랬다면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겠지만 그럴 여자가 절대로 아니었따. 우선 말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설명해봐. 내 책임이 뭔지.”
“‘아델리’에는 규칙이 있어. 범죄를 저지른 구역은 무조건 ‘아델리’에 참가해야해.”
“원래는 자유참가였나 보네. 그리고 그 범죄에 내 책임이 있다는 거고. 됐고, 그럼 참가 안하면 어떻게 되는데? 밥이라도 굶냐?”
“자동으로 실격처리가 되니까 이곳에서 모두 쫓겨나겠지. 여기에 살고 있던 아이들과 사람들 모두.”
꽤나 묵직한 말이었다. 이건 뭐, 여기에 있는 모두의 목숨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고 그 책임자가 나라는 사람에게로 산 같은 짐으로 올려졌다는 것이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엔!”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 사라가 내 귀에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불렀다. 이건 소음공해수준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귀가 얼얼했다. 옘병, 내가 뭐 틀린 말을 했나.
“사라. 우리는 여기에 동정이나 주러 온 게 아냐. 기름이나 구하러 온건데 망할 통수만 맞은거라고. 부산에 가야한다는 거 잊었어?”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랑 아이들을 모두 버리겠다는 거야?”
이럴때만큼은 기가막히게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하는 사라였다. 앞을 보지 못하고 싸우지도 못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성인인 마냥 올곧아보였고 ‘마녀’인 나조차도 조금은 주춤할 정도였다. 하여간,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온건지 정말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서 묻지도 않고 몇 마디 반박하려고 했는데 내가 잘못 판단했다. 이미 이 대화의 주도권은 사라가 꽉 쥐고 있었다.
“엔. 아이들이 있어. 아직 어린 애들이란 말이야. 정말로 밖으로 쫓겨나게 내버려 둘거야? 그러지마. 우리라도 그러지 말아야해. 그러니까 제발, 이곳을 도와줘.”
“엔......”
송혜의 간절한 눈빛까지 동원되었다. 그냥 어디선가 온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호소했다면 무시했겠지만 상대는 다름아닌 사라와 송혜였다. 무작정 거절을 하며 안된다고 하기에는 사라가 여기에 머무르거나 나를 떠날까봐 엿 같았다. 젠장, 이미 이 대화의 승리자는 정해져있었다. 애초에 내가 그녀를 이겨보겠다고 몇 마디 뱉은 것부터가 진 것이다. 진절머리가 나서 포기했다.
“알았어! 알겠다고! 하면 되잖아!”
그제서야 송혜의 표정이 밝아지고 사라도 안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라질, 여기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대가로 돈이든, 술이든, 섹스든 죄다 뜯어내야지. 안 그러면 나만 엄청 손해보게 되는 것이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 ‘아델리’라는거.”
“가자. 중앙으로.”
송혜는 어제 입었었던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었다. 다른 점은 의사가운을 걸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송혜를 따라 먼 길을 걷게 되었다. 그곳은 이 섹터의 중앙쯤에 세워져 있던 그 높은 건물이었다.
중앙의 건물은 다른 곳들과 차원이 달리했다. 전혀 상처라고는 볼 수 없는 정도의 새 빌딩이었다. 대부분이 유리로 덮여있는 것은 물론 문부터가 회전문에 앞에는 작은 정원까지 있고 입구를 열어놓고 있었다. ‘사건’이후로 이렇게 멀쩡한 건물을 처음 봤다. 서울에 있는 63빌딩도 반 부서져서 지랄났는데.
안은 더 깔끔했다. 매일 청소라도 하는 것처럼. ‘사건’전에 자주 들렸던 5성급 호텔들의 로비마냥 사람이 오갔고 세련된 디자인들의 인테리어들이 한 가득이었다. 이게 빈부격차구나 하고 느꼈다. 도대체 정치인 그 새끼는 무슨 짓들을 해왔기에 이런 건물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확 그냥 뺏어버리고 싶네.
송혜는 다른 곳으로 갈 필요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은행창구같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번호표는 필요없었고 몸만 앉으면 설명을 해준다고 한다. 애초에 우리 말고는 다른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바로 앉을 수 있었다. 의자를 끌어 당당히 앉고 맞은편의 직원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간단하게 말하고 나에게 종이를 한 장과 펜을 건네주었다.
“여기에는 이름을 기재해주시고 그 밑에는 나이, 몸무게, 키를 기재해주세요.”
무슨 놈의 대회길래 이런 걸 적으라는 걸까. 그냥 이름만 알면 충분하지 않나. 거참 일 복잡하게 하네.
“나머지는 따라 적어주시면 됩니다.”
그 뿐이 아니라 다른 칸들도 있었다. 그중 종교를 적으라는 칸도 있었다. 이거 싸움질 아니던가. 왜 종교를 적으라는 건지 1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천주교라고 적었다. 보자, 다음은 뭘까. 학교를 적으랜다. 최종학력까지 적으라는데 이건 또 왜 필요한건데? 일단 내가 다녔던 중학교까지 적어넣었다. 여기서 나랑 마주한 직원의 눈이 이상한 눈초리로 날 보았는데 한 대 쳐버리고 싶었다. 참고 넘어갔다. 이 거대한 빌딩 안에서 내가 또 깽판을 쳤다가는 송혜랑 사라도 이제 잔소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바로 뒤에 서서 보고있는 그녀들을 한 번 보고 다시 종이에 눈을 쳐박았다. 어디까지 적었더라. 구역소속 칸이 있었다. 송혜가 ‘4구역’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적었다. 그런데 이 남자새끼가 또 꼬라보았다. 이번에는 참지 못했지만 이성을 강제로 부여잡으며 소곤소곤 말했다.
“아까부터 왜 자꾸 힐끔힐끔 꼬라보세요? 가슴크기까지 적어드려요?”
깡패같은 말에 조금이라도 당황할 줄 알았는데 이 새끼, 오히려 비웃는 표정을 짓고서 당당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말들을 던져왔다.
“그야, 중졸에다가 ‘4구역’이시니까요. 거기다 정상적인 몸도 아닌 것 같은데.”
이제는 왼쪽의 허전한 어깨까지 건드렸다. 참자, 참아. 천천히 다음칸으로 넘어가는 거다. 보자, 다음칸에는 예명이라고 적혀있었는데 뭔 뜻인지 모르겠다. 예비신부 이름인가. 모르겠으니 넘어갔다.
“뭐야, 이거.”
이번에는 팀원이라고 적힌 칸이 2개 있고 맨 밑에는 ‘의사’칸이 있었다. 나는 질문의 눈초리로 남자직원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같이 출전하는 팀원의 이름을 기재하시면 됩니다. 의사는 당신을 경기도중 치료해줄 사람을 적으면 되구요.”
“꼭 적어야 돼?”
“없으세요?”
또 비웃는 표정. 진짜 시발 한 대 쳐 갈겨버리고 싶었다. 아니, 아예 그냥 권총을 꺼내 한 발 쏴버리고 싶었다. 곧 폭발할 것만 같은데 눈치챘는지 송혜가 다가와서 빈 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첫번째 팀원칸과 의사칸에 내 이름을 적어넣으면 돼. 나머지는 필요없어.”
“어? 어. 오냐.”
그녀의 말을 따라 팀원 칸 하나와 의사칸에 ‘최송혜’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됐다. 완벽하네. 완성된 신청서를 남자에게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글을 적는 건 모두 어렵다. ‘사건’덕분에 이런 글 쓰는 일따위 모두 없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 됐어?”
“그래. 존나게 힘들었어.”
“수고했어. 엔.”
사라가 이리저리 손을 뻗다가 내 손을 찾아 부드럽게 잡아주면서 말했다. 미소가득한 그 표정이 방금까지 쌓였던 나의 화산같은 분노를 식혀나갔다. 생각해보니 난 두 주치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치료해주는 사라와 신체적으로 치료해주는 송혜. 사라도 의사칸에 적어넣을걸 그랬나. 내 정신 치유자로.
“돌아가자고. 그리고 너! 술 사라. 이 빌어먹을 게임에 참가했으니까.”
“그 정도는 할게.”
“좋아! 마시자!”
사라의 손을 잡고 세련된 건물을 나왔다. 이제 부어라마셔라 술 먹는 일만 남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파라다이스였으니까. 다 허름해져 무너져가던 ‘4구역’과 그나마 시골도시같은 수준을 유지하던 ‘NRK’와 달리 ‘강남’이라 불리는 이곳은 그야말로 시내수준이었다. 물론 ‘사건’전 처럼 번지르하던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전전근근하던 모텔이며, 도박장이며 고급술집까지. 내가 원하던 떨거지들의 파라다이스였다. 시간이 된다면 여러곳들을 돌며 나만의 휴식을 즐기고 싶을 정도였다. 남자대신 사라를 옆에 끼고서. 이곳을 떠나기 전에는 한바탕 놀고가야지. 그만큼 돈이 깨지기는 하겠지만 이미 자금줄 한 곳은 확보해뒀으니 여유였다. ‘카파’인가 ‘카베’인가 뭐시기파에서 뜯어내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기대감들을 품으며 막 문에서 두, 세 발자국 떼었던 때 앞에서 걸어오던 잘생긴 한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의심가득한 눈빛이었는데 누가보아도 우리를 제대로 쳐다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 송혜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그녀답지 않게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또 송혜에게 지랄하려고 오는 남자인가. 잔뜩 경계를 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가까워지고 바로 옆을 스치고 조금씩 멀어져 가던 중 그가 우리 중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혹시나’하는 기색이었는데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부른 이름, 너무도 뜻 밖이다 못해 나도 완전히 놀랄 정도였다.
“사라?”
사라. 분명히 그는 사라를 불렀다.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으며 안심하고 길을 걷던 그녀를. 사라도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고 ‘설마’하는 목소리로 난 모르는 남자의 이름을......담아내었다.
“두영.....오빠?”
그녀의 시선이 날 진지하게 쳐다볼 때처럼 그에게로 향했다. 걸음을 멈춘 그 시선은 정확했다.
“역시 너 맞구나?”
난 이때까지만 해도 헤어진 친구나 지인을 만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순탄치 않은 관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손을 감싼 사라의 손이 떨리면서 빠르게 시선을 거둬들일 뿐만 아니라 나의 뒤로 숨으려 했기 때문이다. 송혜도 비슷한 분위기를 띄웠지만 물러서지 않고 내 옆에서 당장이라도 싸울 자세를 잡고 있었다.
“어이, 잘생긴 오빠. 내 와이프 알아?”
“와이프?”
‘두영’이라는 남자는 가로막는 날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송혜를 보더니 ‘피식’하고 헛웃음을 내보였다. 딱 봐도 밑잡아 보고 있었다. 분위기는 조금씩 긴장감 가득하게 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월척수준이었다.
“송혜야. 설마하는데 이번에는 그 여자야? 기어코 자멸하려는 생각인가.”
“신경꺼요.”
그는 가던 걸음을 뒤로 하고 우리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여유로운 걸음걸이. 하지만 바보같은 놈들의 존심세우는 종류의 걸음은 아니었다. 정말로 자신있고 기센 걸음이었다. 이 새끼, 단순히 싸움 좀 해본놈이 아니었다. 그럼 여기서 의문점, 이 남자가 어떻게 사라를 알고있는 걸까. 예전, 그녀가 들려주었던 ‘사건’이후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지만 정확하게 맥이 잡히는 건 있지 않았다. 어느덧 그와 나의 사이 거리가 코앞으로 좁혀져 있었다.
“거기다가 혼자참가하는 것 같은데. 진심이야?”
“갑자기 다가와서는 남의 사정에 왜 지랄이세요. 작업거는거 아니면 꺼져.”
“말 한 번 거치네.”
“입에만 걸레문거 아닌데 한 번 볼래? 시발아.”
“엔, 무시하고 돌아가자. 어서.”
사라가 도중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떨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분명 이새끼가 뭔 짓을 한 것 같은데. 고민이 들었다. 일단 때려눕히고 얘기를 할까, 아니면 한 번만 닥치고 돌아갈까.
“엔, 물러나자.”
송혜의 이어지는 부탁에 후자를 선택했다. 궁금증을 뒤로하고 한 번 물러나기로 했다. 다행히 그는 돌아가는 우리를 보며 단 한 마디 더 이상의 말을 걸어오지 않고 물러나는 조금 지켜보더니 제 갈길을 걸으며 사라져버렸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 돌아가는 길.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물어보았다.
“왜 나 빼고 둘 다 저 새끼를 아는지 설명좀 해주실까.”
“엔. 그게......”
“술집부터 가자. 거기서 얘기해줄게.”
“......좋아.”
아무래도 술 없이는 얘기하기가 어려운 듯 했다. 이해한다. 때로는 술의 힘을 빌려야 꺼낼 수 있는 그런것들이 있으니까. 거기다 나도 술로 풀고싶은 게 엄청 많았다. 사는 건 송혜가 사기로 했으니 마음편히 골라야지. 만약 부족하게 되면 카베뭐시기 애들에게서 바로 뜯어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술집 안으로 들어가기는 했는데 내가 기대한 고급술집은 온데간데 없고 송혜가 선택한 작은 술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메뉴에는 옛날에 마시던 싸구려 술 밖에 없었고 그나마 마실만한 것이 도수낮은 국산 맥주들뿐이었다. 그래, 맥주는 그렇다쳐도 안주는 더더욱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