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Envy (Wake Up, Shara) - 12 [완]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나 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내 손을 잡고 이끌던 사라의 손이 사라지고 내 앞에 그토록 찾고 죽여버리고 싶었던 아빠새끼가 내 손을 잡고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색의 정글모자, 동네 아저씨나 입는 바람막이 점퍼에 체육복 바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옷이었다. 당장 그를 보자마자 이를 갈았고 바로 손이 튀어나가 그의 목을 낚아채 바닥으로 쳐박아버렸다. 서있던 그의 옆에는 사라가, 푸른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고 목에는 밧줄이 감긴 채 배에는 칼이 꼽혀 죽어있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인사를 나눌 그럴 틈 없이 내가 먼저 손이 튀어나간 이유였다. 누가봐도 그가 사라를......내 사라를 이 시발새끼가 죽인 것이다. 벗겨지는 정글모로 섬뜩한 미소가 날 비웃고 있었다.
“뒤져! 개새끼야!”
“엔?!”
그가 그 표정 그대로 내 본명이 아닌 내가 만든 이름을 불렀다. 이상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새끼가 사라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사라!
“사라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망할놈아!”
세게 목이 조여왔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있길래 이러는 것일까. 적어도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고 내가 환각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은데 결코 관계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나 싫은 사람일까. 나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엔에게는 그녀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은 빨리 그녀에게 내가 사라라는 것을 알려야 했다.
“엔! 나야. 그만.....해. 나......사라야.”
“닥쳐! 그딴 얼굴로 사라의 이름을 담지마!”
풀어지기는 커녕 더욱 더 세게 조여왔다. 이제는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소리내서 말해야 했다.
“에.....엔. 제발. 이건.....켁...환각이야....엔!”
정말로 숨조차 넘어가기 직전, 엔이 손을 풀어주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환각일 것이다. 그래서 환각이라고 재차 알려주었다.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그녀의 손이 내 몸을 더듬이다가 손은 찾아 다시 꽉 쥐어주었다.
“사라? 괜찮아?!”
나를 불러주고 있었다. 다만 여전히 환각에 걸려있나 보다. 내 손을 찾으려고 몸을 더듬었던 것을 보면. 풀려난 목으로 쉬지 못했던 숨을 빠르게 나르고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정신을 차려갔다. 눕혀지면서 부딪힌 등과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엔을 탓하지 않았고 이 정도 아픈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다. 엔이 그동안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일어선 뒤 놓쳐버린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 잠깐의 문제가 있었지만 여유롭게 쉬어가지는 못했다. 지금 엔은 분명 더욱더 심한 환각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처 괜찮다고 대답해주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만큼 급했던 것이다. 목도 아팠고.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벌써 오래도록 걸은 것 같은데 캄캄한 미로는 출구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불안한 생각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엔이 죽거나 내가 죽어버리는 그런 나쁜 생각. 죽는다 하더라도 내가 엔을 구하고 눈을 감게 된다면 한결 나았다. 아니, 이런 생각은 하면 안되었다. 우리는 같이 부산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나 스스로도 조금씩 지쳐 간다는게 느껴졌다. 아니, 포기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나는 엔에게 보호만 받아왔고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했었다. 이제는 내가 그녀를 지켜야 한다. 같은 생각을 여러번 되풀이하면서 각인시켰다.
다른 여러 생각들이 떠올라도 잊지 않기위해 애썼다. 다리가 아프고 계속 잠이 몰려와도 버텨내었다.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들려오는 비명소리들은 막을 수 없었다. 전자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이상했던 건 그 전자음이 걸음을 멈추었는데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다. 두려움이 또 나를 덮어갔다.
“젠장, 사라.”
사라는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두 번째 비명이었다. 그녀는 내가 첫 번째 비명을 내질렀을 때 이상한 소리가 가까워졌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 소리를 피해가자고 했고 지금까지 잘 피해왔는데 이번에는 사라가 걸음을 멈추었는데도 환각이 바뀌며 나를 죽이려 들었다. 손을 계속 잡으며 놓지 않았지만 당장 손을 놓고 이 빌어먹을 뱀괴물들 내 몸에서 떼어내고 싶었다. 몸은 뱀인데 입을 벌리면 6개로 갈라져 사나운 이빨들을 드러냈다. 영 귀엽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 시발!”
이미 3마리가 정도가 내 팔과 허리, 다리부분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다음이지. 한 마리가 교복 셔츠 속으로 타고 올라와 가슴쪽에서 기어나오더니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오른쪽 눈에 덤벼든 것이다. 그 고통도 그대로 나를 때렸다. 녀석의 이빨이 내 눈을 갉아먹었고 아예 대가리를 내 눈구멍 안쪽에까지 집어넣으려 했다. 갈려버린 눈 때문에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계속 헤집어대는게 진짜로 좆같이 아팠다.
나머지 한 마리는 다리를 타고 올라오더니 팬티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영 좋지않은 생각이 들었는데 적중했고 내 거기를 통해서 몸 안쪽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곧바로 배 안에서 미친듯한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이제는 속까지 헤집고 있는 것이다. 어디쪽에서 이 지랄을 하는지는 뻔했기에 진짜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명을 질러댄 것이다. 그래도 사라의 손만큼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놓는 순간 정말로 끝이니까.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뱀들은 쉴틈없이 나를 갉아먹어갔다.
두려움에서 벗어난 건 엔이 쓰러지려고 할 때였다. 손을 그대로 잡고 있었지만 강한 무게가 나를 끌어당겼다. 나도 있는 힘을 모아 일으켜주었고 그녀도 어떻게 버텨낸 것인지 다시 일어선 듯 했지만 아프다는 신음소리를 끊기지 않고 있었다. 정신차려야 했다. 지금 엔을 환각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줄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 내가 무서워서 가만히 있으면 안되었다. 침착하자. 그리고 나아가자. 애써 겨우 운을 뗄 수 있었다.
“엔, 다른 길이 필요해.”
“그런거......시발! 없고...바로 옆에 골목길....아아악!”
“그곳 말고는 없어?”
“없....어....젠장할!”
그녀도 한계를 달리고 있었다. 조금 고민이 들었다.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그 고민을 접어버리고 골목길로 들어섰다. 우선은 엔이 먼저였다. 지팡이를 쉬지 않고 앞장세워 두드리면서 이제는 뛰어가듯 걸었다. 다행히 골목길이라 그런지 자동차같은 장애물들은 있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길들이 이어질 뿐이었다. 달리고 또 달렸다. 나중에 가서는 지팡이로 벽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확인했다. 벽이 없으면 계속 달렸다. 전자음들이 사라져갔다.
“시발......”
엔은 더 이상 비명도, 거친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조금씩 진정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나도 달리기를 그만두고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파서 쉬는 것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아직 우리는 빠져나가지 못했을 테니까. 달리지는 못해도 억지로 걸었다. 계속해서 걸었다. 지팡이를 내세우면서. 이제 다 왔을까. 곧 빠져나갈 수 있을까.
“사라.”
뒤에서 날 불러주는 엔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너무 뛰었던 것이 문제였는지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대신 서로 잡고있는 손에 힘을 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걷자. 계속 걷는거야. 그런데 어째설까, 조금씩 빛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잘 들리던 귀도 조금씩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내 걸음소리와 지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걸었다. 이제는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앞으로 걸었다. 얼마나 더 가야할까.
이제는 엔에게 길마저 묻지 않으며 걸음이 느려진 그때 희미하지만 물소리가 들려왔다. 강이 떠올랐다. 드디어, 강에 도착한 것이다. 마음이 뛰라고 하지만 다리가 아파서 뛸 수 없었다. 그러니까......걸었다. 뒤에서 엔이 무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지쳐서 들리지 않았다. 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참아줘. 그래도 역시 너무도 지친 걸까. 마지막 지팡이의 울림소리가 들렸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귓가로 엔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손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들려오는 물결소리 속에서 난 잠에 빠졌다.
“사라.”
쉬지않고 달렸다가 걷는 사라를 불렀다. 그녀 덕분에 드디어 빌어먹을 환각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뱀이 덮쳐오던 그 때부터 우리는 계속 달렸다. 달리고 달려 뱀에서 벗어났고 마침내 환각 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도중에 나의 뒤로 짙은 연녹색의 안개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환각이 사라지자마자 날 괴롭혔던 모든 고통들도 사라졌고 탁한 공기 가득한 폐도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발.”
그 안도의 뜻으로 시원하게 욕을 뱉었는데 사라는 계속 걷기만 했다. 이제 벗어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는데 갑자기 쥐고 있는 손에 미약하게나마 힘이 실어져 온 것이다. 그게 대답. 아마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지팡이를 두드리며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사라. 이제 괜찮아. 들려?”
그제서야 그녀는 지팡이질을 멈추고 느려져 가던 걸음도 멈추었다. 내 말을 듣고 멈춘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갑자기 사라가 쓰러지면서 알았다. 그녀의 손에서 지팡이가 떨어지더니 순간적으로 몸이 쓰러지는 것이었다. 맥없이.
“사라!”
급히 그녀의 몸을 받쳐 안고 상태부터 확인해보았다. 감겨있는 눈, 여기저기 흘린 땀과 어디서 긁혔는지 작은 상처들과 쓸린 붉은 피부들이 연달아 드러났다. 한 쪽 스타킹은 거의 찢어져 맨살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리한 것이다. 숨은 쉬는지, 심장은 뛰고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모두 정상이었다. 사라는 지친 나머지 이대로 실신한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저 위에 있는 태양의 위치를 보니 우리는 저 안갯속을 2시간 정도 휘젖고 다녔던 것이다. 그 2시간 동안 사라는 나를 데리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쉬지 않고 걷고, 뛰면서 내가 벗어날 수 있도록 지켜내었다. 정말로 큰 빚을 지고 말았다. 내 예상 밖으로 사라는 정말 대단한 여친이었다. 물결소리가 힘을 다 써버린 그녀를 조금씩 재워주었다.
“고마워, 사라.”
우리가 빠져나온 연녹색의 짙은 안개는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기에 바람을 타고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무엇이 저 안개를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는 들어가기 싫은 곳이었다. 그러고보니 여전히 재혁이의 모습과 흔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저것에게 당한 걸지도. 내 손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었지만 사라와 함께 살아나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사라를 한 팔로 어렵게 등에 업었다. 그러다 팔이 없는 왼쪽으로 기울어 떨어지려고 하길래 입고 있던 군복을 벗어 등 뒤 사라로부터 소매를 끌어와 묶어서 고정시켰다. 덕분에 군복을 찢는다고 고생 좀 했지만 잘 묶여진 것에 만족했다.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이 편안함은 오로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원래라면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푹 쉬게 하고 싶었지만 얼마나 잠에 빠져있을지 모르는 사라를 데리고서 저녁이 다가올 때까지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도시는 새로운 위험이 있기도 하니까. 머무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자장, 자장, 우리~아가~”
걸으면서 둥실둥실을 해주었다. 푹 자라는 의미였다.
강변으로는 작은 물살들이 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썩어버린 강물고기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에는 눈이 여러 개 달렸거나 이상한 지느러미가 달린 물고기들도 여럿 섞여있었다. 저것도 돌연변이였다. ‘사건’이후로도 동물이나 식물들은 많이 살아남았다. 크립톤들도 주 타겟이 사람이지 동물은 아닌 덕분에 살아남아 온 것이다. 그래서 개나 고라니나 고양이 같은 것들을 잡아 구워서 식량으로 삼아왔는데 앞으로는 그것도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저런걸 어떻게 쳐먹으라고.
식물들은 멀쩡히는 살아있었지만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기상이라거나 환경이라거나, 아무튼 여러 요인들로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맑은 공기를 마셔본 적이 벌써 2년하고도 6개월이 전이었다. 북한산 정상에 올랐을 때였지, 아마. 그 때 시체 하나를 묻으러 잠깐 올라간 적이 있었다.
강변을 따라 쭉 걸으니 맞은 편에서 보았던 다리관리센터가 여기서 금이 간 벽과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쪽은 지붕이 날아갔다는 것 정도. 어제 그렇게 비가 세차게 왔는데 기계들이 고장이 나지 않았을까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장비들은 지붕있는 1층에 있어서 마음놓고 보이는 버튼들을 마구잡이로 눌러버렸다. 모니터들에 빛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창문 밖으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다리가 가동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윗대가리가 만든 똥덩어리를 내가 최초로 사용하게 되었다.
“값이 얼마야. 최소 몇백억짜리 다리를 나 혼자 전세냈네. 병신들. 기념으로다가 내 이름이나 새기고 가야지.”
사라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어서 방금 한 말에 대한 눈초리를 받는 일은 없었다. 아무튼, 스프레이가 있었다면 쉽게 새겼겠지만 그런게 없으니 나이프를 들고 일일이 긁어서 새겨야 했다. 그래도 뭐, 내 이름은 직선 3개면 끝인 이름이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관리센터에서 나와 곧바로 다리위에 올랐다. 이제 맞은편으로 건너가서 석재의 은신처까지 간 다음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나면 되었다. 넓고 길게 뻗은 다리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이 다리 때문에 어제 오늘 개고생 한걸 떠올리면 참 건너기 힘든 다리였다. 그런데 더 힘들게 만드는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예상치 않은 인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좆같이 웃으면서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죽었다고 생각한 재혁이가 다리 입구에 떡하니 서 있는 것이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위협적인 식칼 하나를 들고서.
“와, 썅년. 뒤진 줄 알았는데. 저기 저 방사능 안갯속에서.”
“‘시드’를 말하는 거겠지?”
“뭐야, 저게 뭔지 알고 있었냐? 이 시발년, 중고장터 인성봐라.”
그녀의 싸움은 그 선착장에서 끝이 아니었었나 보다. 저걸 이용해서 날 죽이려 들다니. 머리가 좋기보다는 스케일이 큰 잔꾀였다.
“야, 그럼 설명 좀 해봐라. 저거 도대체 뭐야? 살아남긴 했는데 저 망할 ‘시드’라는 것 때문에 진짜로 뒤질 뻔했거든. 이제 설명정도는 괜찮지 않냐?”
“‘시드’는 ‘크레이터’가 만든 식물형 크립톤이야.”
저게 크립톤이었다니. 처음 알았고 정말로 놀랐다. 이제는 돌연변이들로 모자라 크립톤들도 새로운 종이 늘었나 보다. 좀 심각한데. 그나저나 ‘크레이터’는 또 뭐야. 우선은 그녀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거대한 눈으로 최면을 걸고 녹색안개를 통해서 환각을 보여줘. 사람의 기억이나 생각들을 들춰서 말이지. 혹시 중간에 환각 속에서 죽을 뻔하지 않았어?”
“두 번 있었다. 시발, 나라서 버틴거지 다른 놈이었으면 벌써 뒤졌어.”
“그건 ‘시드’의 ‘잎사귀’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 녀석들은 무력해진 사람들과 시체들을 먹는 걸 좋아하거든. ‘잎사귀’가 가까워질수록 사람에게 죽기 일부직전의 고통을 줘버리고 무력하게 만든 다음에 씹어먹지.”
그래서 이 도시에는 시체들이 없었던 것이다. 뺀질이의 시체도 저 ‘시드’란 놈이 쳐 잡순거고. 이제서야 궁금증들이 풀리게 되었다. 썅년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가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특히 사라가. 그녀는 나보다 한 발 그것들에게 앞장서고 있었으니까. 두 번이나 목숨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소원 2개는 들어줘야지.
“그래서 저 안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그 여자가 살릴 줄이야.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고 놀랐어.”
“하! 대단하지? 이런 애가 내 여친이야. 알겠어?”
“마지막으로 할 말 있어?”
그녀는 식칼따위로 날 위협했지만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맥스는 어디갔어?”
“도망갔어. ‘시드’는 매드독들도 죽여버리거든.”
“좋아. 얘기 끝!”
끝을 외치자마자 사라가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완전히 굽혀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재혁이는 무서운 속도로 칼을 내게 향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 싸움의 결말은 너무도 뻔했다. 역전극이라던가 반전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내가 쏜 총알이 재혁이의 배를 맞췄다. 이 한발에 모든 게 끝이났다. 어제처럼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 흔적도 선명했다. 그녀의 옷으로 붉은 자국이 피어올랐다.
‘쿨럭’하면서 피를 토하던 썅년이 앞으로 쓰러졌다. 들고있던 식칼은 날붙이 소리를 울리며 떨어지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앞에 내가 섰다. 재혁이는 웃고 있었다.
“......야, 알고있었지? 너 이렇게 뒤질거라는 거.”
“네가 ‘시드’에게서 살아남을 것부터 내가 진거니까.”
이 새끼. 내가 총을 들고 쏠거라는 걸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칼을 쥐고 내게 덤벼들었고 일부러 피하지도 않았던 거고.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썅년. 계속 정없게 굴다가 마지막에는 정있게 구네.”
“정에 약해지지마.”
“있지도 않았어 시발년아.”
완전히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간 몸 부딪힌 것도 있고 외상값 못 받은 것도 있으니까. 얼마였더라. 이제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엔, 난 네가 정말로 부러워. 저런 괴물 속에서도 너 같은 ‘마녀’를 구해줄 친구가 있다는 게. 질투나 죽겠어.”
“이미 죽어가고 있으면서 별 지랄을 다하네. 그럼 너도 친구 사귀었으면 됐잖아.”
“나라에서도 버려진 간첩따위를 누가 받아주겠어? 간나야.”
“네가 외상값만 안 밀렸어도 난 생각해봤어. 병신, 그러게 돈을 왜 밀려.”
“배 태워줬잖아.”
“이 시발년이, 존나 값싸게 퉁치는 거 봐라. 배 연료값이 무슨 리터당 120만원씩이냐? 바가지도 아니고 장독대로 뜯어 쳐먹네.”
“빨리 끝내.”
재혁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녀였다. 사라가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굽히며 그녀의 머리통에다가 총구를 겨누었다. 피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고 총성이 울렸다.
......좋아, 다 건너뛰고 말하자면 죽이지 않았다. 머리쪽으로 겨누었던 총구도 옆으로 돌려버려서 뛰어나간 총알은 그녀의 머리카락만 자르고 지나갔다. 살며시 눈을 감았던 재혁이가 다시 눈을 떴다. 그 때 나는 총구를 내린 뒤였다.
“왜 안 죽여?”
“사라 앞에서는 죽이지 않아. 최소한 벽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차피 자고 있잖아.”
“시끄러! 약속이라 그런다. 꼬우면 벽 하나 세워 오던가.”
권총을 집어넣고 다리를 건너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재혁이와도 작별을 할 때였다.
“‘서울의 마녀’가 이런 식이어도 되는거야?”
이제 좀 움직이고 싶은데 자꾸 그녀가 불러세웠다. 크게 한숨을 돌리고 뒤로 돌았다.
“내가 어디서나 ‘마녀’인건 아니야. 알갓?”
작별인사를 겸해 툭 던져주었다. 그리고 뒤돌아 이제는 정말로 다리를 건너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두 걸음 째를 걸은 뒤에야 재혁이와의 악연이 끝을 맞이했다. 세 걸음 째, 이 도시와 작별을 했다. 네 걸음 째, 사라가 깨어났다.
다리를 건너고 나서는 별일 있지 않았다. 사라는 깨어나서 이제 자신이 스스로 걷겠다고 어린 고집을 피웠지만 그러지 못하게 했고 차가 있는 곳까지 내가 업고 걸었다. 차는 흠집하나 없이 그대로 있었다. 올려진 쓰레기들을 힘겹게 치우고 조수석에 사라를 앉힌 뒤 시동을 걸자 오랜만에 켜지는 엔진이 기지개를 폈다.
“가자~. 갑세~, 가자.”
차를 몰아 시내를 빠져나오며 다리를 올라탔다. 시원시원한 강 풍경이 제법 볼만했다. 햇빛은 여전히 따가웠고 눈이 부셔서 가리개를 내려 피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을 차로 빠르게 지나티니 이제서야 속이 뚫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사라.”
“응?”
“넌 날 2번이나 구했어.”
“아니야. 난 한 게 없어.”
여전히 겸손한 그녀였다. 지금은 그 겸손을 좀 빼주었으면 했는데.
“그런고로 소원 2개 들어줄게. 말해봐.”
“음......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럼 천천히 생각해.”
“아, 하나는 있어.”
사라는 창 밖을 즐겁게 구경하며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내 옆에 있어줘, 엔.”
“소원을 빌라고 하니까 애교를 부리네.”
엑셀을 밟아 속도를 조금 붙였다. 저 다리 끝, 재혁이가 있던 자리에는 붉은 흔적만 남고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이 어딘가로 기어가든 떠나버렸나 보다. 결국엔 사라 때문에 마무리를 짓지는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되었든 이제 우리를 건들지 않을 거니까.
우리는 어딘가에 또 다다를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2번의 큰일을 겪었고 앞으로도 몇 번은 거 겪을 느낌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때고 이렇게 둘이서 헤쳐나가면 되겠지.
그런데, 벌써부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도시에서 벗어나 차로 달린 지 1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다시 지도를 여러 번 보며 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시발! 지도 좆같이 만들어놨네! 으아아악!”
거기다가 지도가 맞는 게 없었다. 사라는 지도를 볼 수 없었고 나는 지도를 어디서 구해야 할 지 모른다. 둘이서 헤쳐나갈 수가 없었다. 젠장!
물속에서 벗어나 숨을 쉴 수 있던 곳은 하얀 공간이었다. 조그만 침대에 누워있는 나. 모든게 희미했다. 빛이 일렁이고 머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학생, 이게 보이나?”
소리는 뚜렷했다. 남자의 목소리. 내 앞에서 무언가를 흔들고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그저 고개를 흔들며 다른 것들을 보려고 했다. 그래도 보이는 건 하얀색들 뿐이었다.
몸의 감각들은 살아있었다. 발도, 손도, 모두 조금뿐이지만 움직였다. 다만 눈이 조금 이상했다. 한쪽 눈은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른 한쪽은 텅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꿈틀거렸다. 거북한 느낌이었다.
“아직 의식이 희미해. 깨워.”
다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그의 말에 하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들고왔다.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주사기였다. 그 주사기가 내 팔에 꽂히며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갑자기 거북한 느낌만 들던 한쪽 눈에 이상한 게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움직여대기까지 했다. 뭐야 이거......싫어.
흐릿했던 시야도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그저 하얀색이기만 한 줄 알았던 벽에 무언가가 쓰여져 있었다. 글자. 글자와 무늬였다. 그 글자를......머리로 읽어보았다.
‘크레이터’
남자의 가운데 벽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난 내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괴물로 변해버린 내 모습을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