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Envy (Wake Up, Shara) - 11
“엔?”
사라가 눈을 뜨면서 내 이름을 불러준 것은 오후가 되어가려는 시간이었다. 대충 11시쯤 되었나.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잡혀있는손에 많이 놀라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또 알았는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심지어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것도 아닌데. 정말, 앞이 안 보이는 거 거짓말이 아닌지, 의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왜’라며 대답해주려다가 조금 놀리고 싶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괜히스레 불안한 표정을 지어가더니 손으로 나에게 뻗어 배를 만졌다. 일던 손을 뻗고 봤는데 배에 닿은 것이다. 조금 간지러웠다. 그녀의 손을 거기서 서서히 올라와 가슴을 스치고 목을 지나 내 얼굴에 다다랐다. 코에 멈추더니 내가 숨을 쉬는지부터 확인하려 들었다. 그래서 숨 쉬던 것도 멈춰버렸다. 그녀의 표정이 더더욱 심각해지는데 꽤나 재미있었다.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해하는지 다시 내 가슴팍을 만져대다가 자신의 귀까지 가져가 대었다. 이러면 더 이상 속일 수가 없었다. 사라는 귀가 밝으니까.
“사라!”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잡았던 손을 뺀 뒤 등을 크게 안아주었다. 그러다 무게에 쏠려 바닥에 누워버렸다. 사라의 표정이 불안감에서 당황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 보고싶었냐!”
겨우 하루뿐이지만 그녀가 없어 외로웠던 나는 드디어 푸른 눈을 뜨고 일어난 그녀를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그런데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사라가 갑자기 날 강하게 밀어버리더니 등을 돌려 앉아버린 것이다. 그 행동은 완전히 삐져버린 어린아이였다.
“사라? 왜 그래? 야.”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지만 손을 뿌리치며 또 등을 돌려버렸다. 이건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삐진 것이었다.
“사라. 장난에 너무 삐진 거 아냐? 나 보고 싶은 거 아니었어?”
고개 한 번 돌려봐 주지 않았다.
“장난을 해도......어떻게 그런 장난을 해?.......난 진짜로......”
“그래, 사라. 미안해.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 안 칠게. 그러니까 삐진거 풀고 나 좀 봐. 응?”
강제로 그녀의 몸을 돌려 안아주었다. 계속 날 밀치려는 귀여운 행동을 했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풀어헤쳐 나오려다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포기했다. 우리는 이 자세로 5분간은 있었고 그제서야 사라도 삐진 것을 풀어주었다.
“어떻게 온거야? 분명히 위험했을 텐데.”
“위험해 봤자지.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쩔어주는 여자야. 대단하지?”
“그냥 나 버리고 가지.”
“나 혼자 부산에 가서 뭐해. 아는 사람도 없는데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고 말지.”
조심히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다시 맞잡은 손.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내 손을 타고 들어와 느껴졌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때였다. 내 여친도 되찾았고 마왕을 자처하던 두 개새끼도 조져버렸고. 아니, 그 썅년은 사라졌지. 가면서 조심은 해야겠네.
“그나저나 사라. 손만 잡고 있었는데 나인건 어떻게 알았어?”
“느낌으로 알 수 있었어,”
“어떤데? 혈기 넘쳐?”
“미지근하면서 상처가 많은 느낌.”
“늙은이로 만들어버리네. 지금까지 말 안했던 건데 네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
“그건 알고 있어.”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놀란 것은 나였다. 전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뭔가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알아? 너 솔직히 앞 보이지?”
“엔은 항상 어린애 같은 면을 보였잖아. 그래서 알고 있었어.”
“시발? 늙은이로 만들었다가 애로 만들어버리네. 욕으로 들을게.”
지금까지 열심히 뛰어다녔던 계단을 올라 1층 로비로 올라왔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처량한 로비를 비추었다. 이제서야 참 별 볼 일 없는 로비인 것이 느껴졌다. 2년 전이라면 붐볐을 테지만 더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
“아, 엔. 말할 게 있어.”
“뭔데?”
“지팡이를 잃어버렸어. 미안해.”
정말 우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사과하는 사라였다. 아예 울상까지 짓는 그녀의 모습을 어떤 남자들이라도 지켜주고 싶은 정도였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에게 내 옆에 떨어져있던, 소중히 주워서 가져온 그녀의 지팡이를 허리에 정성껏 메어주었다.
“엔?”
“다시는 잃어버리지마. 이 세상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최고의 발명품이니까.”
“......고마워, 엔.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사라였다. 눈까지 환해지는 그녀의모습은 정말이지 영원히 지켜주고 싶은 미소였다.
“가자. 이제 차 타고 떠나야지.”
“아, 엔. 석재씨는......어떻게 됬어?”
“그 뺀질이는 원래있던 곳으로 배태워서 쫓아버렸어. 다시는 우릴 건들지 못하도록 일러두었고. 그 망할 놈은 잊어버려.”
“알았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은 마리아의 은총을 받아 태어나고 죽으려 다시 그녀의 곁으로 간다. 사라도 그렇겠지. 아쉽게도 나는 제외였다. 내가 받은 세례명은 최초의 이교도나 다름없는 이름이었으니까.
다리를 내리기 위해 우선 강을 따라 걸어가 보기로 했다. 이곳에 대한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단순하게 생각하며 걸을 생각이었다. 시내가 복잡하더라도 길은 직선적이고 뭣하면 표지판을 따라가면 되니까. 이제 이 좆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리를 내리고 편할 차를 타고서 부산으로 향한다. 아 참, 다시 여기로 한 번은 들려야지. 이렇게 식량이 많은 곳은 보기 힘드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어서 지금부터 걸어간다면 저녁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건물에서 나와 시가지 도보에서 강가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가던 그 때 갑작스럽게 안개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안개는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우리의 주변을 뒤덮어버렸다.
“뭐야? 시발.”
“엔?”
사라의 손을 더욱더 꽉 쥐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녀의 손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드디어 사라와 재회했는데 죽여버릴 신이 계속 때어놓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엿이나 먹으라지. 이런다고 떼어질 우리가 아니었다.
안개는 일반 안개와 달리 조금 초록빛을 띄고 있었고 탁하기보다 오히려 새벽공기처럼 맑은 냄새가 맡아졌다. 그렇다고 썩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그리운 향기도 아니고. 아무튼 이 연기를 절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데다가 옅은 초록빛. 초등학생이 봐도 알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이 연기, 어디서 설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아, 그 공돌이. 그가 설명했던 과거 중 갑작스럽게 연기가 끼었었고 모두 당했다고 했었는데 그게 이건가.
긴장감을 잔뜩 머금고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보이는 시야는 불과 두 걸음 정도 뿐이었고 해는 이미 가려진 뒤였다. 설마 크립톤? 아니면 돌연변이? 판단도 서지 않는다. 그 괴물들이 튀어나왔으면 몸뚱아리만 튀어나왔지, 이런 경우는 없었으니까. 어쩌면 새로운 현상일지도 모르지.
머릿속으로 또다른 얘기가 스쳐 지나갔다. 재혁이가 말했던, 애들이 집단으로 사라졌다던 얘기. 그러면서 이 도시의 이상한 점들이 겹쳐 떠올랐다. 그 어디에도 시체가 없었던 것. 호텔에서도 나올 때 석재의 시체가 있었던가? 없었다. 피웅덩이는 있었는데 그의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내가 왜 그걸 지나쳤을까. 역시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욱더 긴장감이 고조되어 갔다. 머리와 심장이 요동쳤다.
“사라. 당장 여기를.”
사라에게 빠져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막히고 만다. 거대한 눈. 겨울에 내리고 쌓여 산타가 오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런 하얀 눈이 아니라 홍채가 있고 동공이 있는 그런 눈. 눈꺼풀, 눈썹도 없이 동그랗고 거대한 눈이 나의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얀 흰자에 초록색의 눈동자, 그 뒤로는 갈색의 줄기같은 게 뻗어있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충혈까지 일으키며 집중하면서.
“엔?”
사라가 나를 불러보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장 권총을 뽑든 칼을 뽑든가 해야 하는데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좆됐다. 처음 맞이하는 이 상황에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은 움직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해코지하려는 움직임은 없었고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옆에 있는 사라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는지 두 손으로 내 팔을 잡아 흔들어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 눈도 사라를 집중하며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네.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데 사라는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지. 그럼 이 거대한 눈깔의 최면효과의 매체는 시각이라는 소리다. 눈깔도 사라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이상해 했지만 그녀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래서 최면 따위에 걸리지 않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좋아, 한 가지는 알아내었다. 그 다음은? 모르겠다. 눈깔이 아예 딱히 움직임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지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라도 내가 문제없다는 것을 알테고 나도 내가 아직은 몸이 기능을 하고 있구나 한 텐데, 내 간은 너무 컸나보다. 시발, 존나 도움 안되네.
아무리 엔의 몸을 흔들어보아도 그녀는 미동도,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엔,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대답 해줘.”
이번에는 그녀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뺨을 때리는 차가운 공기, 탁한 냄새가 사라지고 맡아지는 맑은 공기, 반갑기보다는 거부감이 들었다. 동시에 엔이 돌이 된 것 마냥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게 무슨 일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아까 그녀가 내 손을 잡던 것처럼.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 손은 절대 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멍한 듯 몸이 깬 것은 주변의 풍경이 바뀌고 나서였다. 거대한 눈깔이 눈부신 빛과 함께 사라지더니 모든게 변한 것이다. 바보같이 눈을 깜빡이며 바라본 풍경, 그것은 2년 전까지 분주히 움직였었던 시내의 도시 한복판이었다. 건물들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신호들의 불빛들이 정신없이 바뀌는 아래로 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이 제 갈 길들을 걸어가고 있었다. 죄다 무표정으로.
그 속에서 어째선지 익숙한 표정의 얼굴들도 중간마다 섞여 있었다. 누구지 하다가 한 여자의 얼굴로 모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갈색의 생머리를 늘어트리고 정장을 입고 있는 여자. 그녀의 이름은 ‘이지윤’이었는데 기업에서 의뢰를 받아 죽여버린 유능했던 비서였다. 사장의 말로는 중요한 문서들을 빼돌려 검찰에 고발하려 했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익숙한 얼굴들의 정체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모두 내가 죽인 사람들이었다. 의뢰를 받거나, 죽이고 싶어서 죽인 사람들.
주변을 둘러본 뒤에는 내 옷차림도 보게 되었다. 허름한 군복에서 피가 튀겨있는 교복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이 교복이 무엇인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일 때,그러니까 아빠새끼가 잡아온 청년을 죽였을 때 입고 있었던 교복이었다. 첫 경험인 만큼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을 아직도 함께하고 있었기에 보자마자 알아채었다.
“엔!”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껴지지 않았던 손에서 갑자기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그렇네. 나는 사라와 함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라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아니었다.
“엔! 대답좀 해줘. 엔, 제발.”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맞았다. 다만, 다른 부분들이 영 좋지 못했다. 푸르던 눈은 사라지고 대신 텅 빈 구멍에서 피만이 흘러내리는 두 눈구멍, 뺨으로는 살이 잘려나가 뼈가 보이고 입은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예쁘던 귀도 한 쪽이 잘려나가 비대칭이 되었고 지금 보니 머리카락도 썩은 쓰레기처럼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내가 입혀주었던 옷은 여기저기가 찢겨져 겉으로 드러난 살에는 여러 구멍들이 생겨 피를 내보이며 썩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도 회색빛이 돌고 있었다.
“야, 사라. 내 목소리 들려?”
“엔! 이제 괜찮은 거야?”
쉴 틈 없이 물어오는 것을 보니 내 말을 제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거북하기보다 아직 익숙치 않았다. 한 번도 사라가 이런 꼴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본 적 조차 없었으니까.
“일이 좀 꼬였어, 사라.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야. 잘 들어.”
“응.”
“아무래도 나, 환각에 걸린 것 같아.”
저 멀리서 엄마도 손을 흔들며 한 손에는 마리아상을 들고 있었다. 빌어 쳐먹을 목사새끼와 함께.
엔이 환각에 걸렸다고 말했을 때 바로 이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가온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었고 그녀에게 최면같은 것을 거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었으니까. 애초에 갑작스럽게 환각에 걸렸다는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어보였다. 보지는 못하지만 나도 크립톤이 무슨 종류들이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 괴물들이 걸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도 이 대낮에. 말이 안 되었다. 이따금씩 엔이 세상이 변했다는 소리들을 궁시렁거리면서 말한 적은 있었지만 크립톤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그녀는 다른 무언가에게 당한 걸지도 모른다.
“사라. 상황을 설명해줄게.”
그녀가 내 손을 다시금 꽉 잡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를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꼭 붙잡았다.
“갑자기 녹색의 안개가 끼더니 그 사이로 거대한 눈깔이 튀어나왔어. 그걸 보자마자 손, 발 다 안 움직였고 지금은 짜자잔! 환각에 걸렸네. 시발.”
“나는 보여?”
“보이긴 하는데 아무리 봐도 성형으로는 도저히 안 될 정도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보이는 건 맞는 듯 했다.
“아무튼 사라. 네가 길안내를 해줘야 할 것 같아. 아니면 이 환각을 풀어주던가.”
“그 눈은 계속 있어?”
“모르겠지만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조심하고 만약에 너도 위험해질 것 같으면 날 버리고 도망가있어.”
“싫어.”
이것만큼은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방금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엔은 모든 위험을 물리치고 맞서며 내게 와주었고 겨우 만난 것이다. 거기에 그녀와 한 약속은 같이 부산을가는 것이었고 나 스스로 그녀와 함께, 어떤 일이든 함께 맞이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싫었다.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거 참 말 안듣네.”
“같이 가야하니까. 길안내라고 했지? 어디로 가면 돼?”
“직진.”
바로 걸어가려다가 멈추었다. 걸을 줄은 알지만 당장 앞에 무엇들이 있는지, 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나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막상 자신있게 말했다가 바로 낭패를 보게 되었다. 손을 앞으로 뻗으며 걸을까? 그러기에는 바닥도 문제였다. 그러다가 내 허리에서 느껴지는 지팡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엔이 만들어준 지팡이, 바보같이 왜 이걸 잊고 있던걸까. 벨트에 끼워진 지팡이를 꺼내 펼쳤다. 길게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고 손에 쥐었다. 끝이 바닥과 닿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건 문제가 아니야.’
순간 석재씨가 해주었던 말이 지나갔다. 비록 싫어진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힘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문제가 아니야.”
입으로 되새겼다.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지금만큼은 문제가 아니라고, ‘엔에게 받은 지팡이가 있으니까’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히려 보지 못했기에 엔처럼 환각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최면의 종류라면 난 볼 수 있는게 없으니까.
“출발할게.”
첫 발을 내딛었다. 지팡이를 내밀고 두드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차가운 공기들이 내 피부로 스쳐갔다. 이제부터는 내가 엔을 지켜야 했다. 지금만큼은 내가 그녀를 구할 차례였다.
환각 속에서 보이는 사라의 뒷모습은 멀쩡했다. 썩어버린 머리카락도 없었고 지금 잡고있는 내 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얀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신에 주변이 문제였다. 지나가기만 하던 익숙한 얼굴들이 꽤나 무서운 표정들로 날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시선이 너무나도 따가웠다. 당장 쏴버릴 수만 있다면 죄다 갈겨버리고 싶었다.
사라의 도움을 받아 걸으며 그 눈깔에 대해 되짚어보았다. 분명 그 눈깔은 아직도 근처에 있을 것이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지. 어쩌면 계속 사라에게 나와 같은 환각을 걸어보려고 노력하고 있거나. 만약 그렇다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사라는 눈과 눈으로 대화하는 것에 있어서 만년 꼴등이니까. 바보한테는 약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사라가 바보라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 눈깔은 직접적으로 우리를 건들려고는 하지 않았고 그게 다행이었다. 죽이던가 쳐먹거나 하려 했다면 내 몸이 멈추었을 때 진작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다. 눈깔만 있다고도 할 수 없었고 당장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이번에는 적에 대해 아는게 적은 것도 아니고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빠르게 이 환각을 벗어나야 했다. 지금만큼은 내가 사라에게 의존해야 했다. 눈깔새끼, 다시 나타나봐라. 총으로 쏴 터트려버릴 거니까.
아직까지는 잘 걸어갈 수 있었다. 지팡이를 두드려 무언가 커다란 것에 부딪히면 피해갔고 내 발로 오를 수 있는 것이면 엔에게 말해주고 함께 올랐다. 덕분에 조금씩 돌아가는 것도 있었지만 틀리지 않았다면 계속 직진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순조롭다고 할 수 있었다.
주로 부딪히는 것은 자동차들이었다. 보이지 않긴 해도 그 정도를 알 수 있었다.어릴 적, 앞이 보이던 적에 수도 없이 봐왔고 만지면 모두 자동차의 형태였으니까.
엔을 위한 일이라 힘을 내고 용기를 내고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두려움을 느꼈다. 석재씨에게 잡혀있을 때와는 다른 두려움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엔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우리 둘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고 걸을 수 있던 것은 ‘사건’이후의 일들과 엔이 옆에 있는 덕분일 것이다.
눈이 문제가 되어 버려질 때마다 혼자서 건물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었고 손으로 만져지는 감각들과 소리들로만 물건들을 분별해가며 생활했었다. 필요한 때는 혼자서 머릿속의 지도를 그리고 걸었으며 최악에는 이 같은 생활을 4일 동안이나 했던 적도 있었다. 잠은 캐비넷 같이 좁지만 숨을 수 있는 곳들에서만 잤었다. 모두 불편한 생활들 뿐이었었다.
처음에 버려졌을 때에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지만 점차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을 굳이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들의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무리였을 거라며. 몇몇은 데리고 다니기 어렵다고 직접 말을 해주었었고 몇몇은 몰래 떠나갔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버려졌을 때보다는 그 때가 배려가 있는 편이었다. 마지막에는 정말로 죽을 뻔했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걷던 중 또 무언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지팡이는 바닥을 제대로 짚고 있었는데 내 머리가 부딪힌 것이다. 지팡이 잘못은 아니었다. 구멍같은 곳에서는 지팡이도 어떻게 하지 못하니까. 잠시 지팡이를 내려놓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마높이에 콘트리트 같은 것이 만져졌고 아래는 텅 빈 공간이었다. ‘굴’이 떠올랐다. 몸을 숙이자 엔도 따라 몸을 숙였다. 다시 한 번 앞으로 손을 뻗자 역시 텅 빈 공간이 있었는데 막혀버린 곳은 아니었다. 정말 짧은 굴이었다. 빛이 끊기지 않고 느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으로 지나갈지 망설여졌다.
“사라. 왜 숙인거야?”
“머리높이로 콘크리트 같은 것이 있어. 숙여서 지나가야 할 것 같아.”
“막힌 건 아니지?”
“응. 아냐.”
“그럼 지나가자.”
그녀의 의견을 들어 지나가기로 했다. 지팡이를 힘겹게 허리벨트에 끼우고 엔에게는 나의 허리벨트를 잡게 했다. 기어가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먼저 한 손을 뻗어 앞을 확인하고 두 걸음을 기었는데 이 행동을 반복했다. 분명히 짧은 길이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이 속도에 엔이 불평불만을 하겠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벨트를 놓으면 안되니까.
짧은 굴을 빠져나온 것 2분 정도를 기어간 뒤였다 다시 환한 빛이 느껴지고 위로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다시 지팡이를 꺼내들고 걸음을 내딛었다. 다시 엔의 손을 잡고 앞으로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었다. 아직까지도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괴물의 습격도 없었고 내 걱정과 달리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한 시름 덜어 냈다고 생각했을 때 엔의 손에 갑자기 강한 힘이 쥐어졌다. 얼마나 세게 잡은 것인지 내 손이 아플 정도였다.
“엔? 갑자기 왜 그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앞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미안, 사라. 좆같은 환각 때문에 그래.”
“환각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거야? 엔, 괜찮아?”
“안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딴 것 때문에 문제지, 괜찮아. 이딴 거보다 더한 일들도 겪어왔어. 그러니까 계속 걸어. 빨리 빠져나가야 해.”
“알았어!”
조금 걸음을 재촉했다. 지팡이를 빠르게 두드리며 조금씩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빠르게 빠져나가야 했다.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던 중 나의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전자음 같은 ‘삐이-’소리였다. 거디가 다가갈수록 그 소리가 커져갔다. 불길한 소리였다. 결코 다가가기 싫은 소리. 동시에 엔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비명이었다.
정말 좆같은 환각이었다. 아까까지는 그냥 지나가기만 했던 사람들 중 익숙한 얼굴 몇 명 들에게 칼이 쥐어지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종류가 다양한데 식칼부터 해서 커터칼, 도끼, 내가 쓰는 쿠크리 나이프와 군용칼, 거기다가 카타나까지. 모두 내가 사용했던 무기들이었다. 단순히 칼만 쥐고 다가오는 것도 아니었다. 무심한 표정만 짓던 것들이 원망섞인 표정으로 바뀌었고 내가 걸어갈수록 가까이 다가왔다.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한 청년이었다. 청년은 식칼을 들고서 내 오른쪽 허리에 쑤셔넣으려 하고 있었다. 어차피 환각이니까 상관없겠지 하고 넘기며 무시했는데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날이 몸을 헤집고 들어오며 교복을 빨갛게 물들이자 눈이 찌푸려질 정도의 아픔이 몰려왔다. 뜨겁기도 했다. 당장 손을 놓고 이 새끼를 밀쳐내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다. 지금 사라가 나의 손을 잡고 빠져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어서 놓는 순간 끝이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이 되면 사라는 나를 찾기 위해 허둥댈 것이고 난 이 환각 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설마, 이 망할 눈깔새끼. 그걸 노리는 건가. 골치 아파졌다. 이걸 다른 말로 풀이하자면 눈 앞에 있는 이 수십개의 칼들을 모두 몸소 맞이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특이한 점은 내가 앞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이들이 다가왔고 중간에 사라가 멈춰 나도 멈추면 또 이들은 멈추었다. 내 걸음과 관련이 있어보였다.
다음으로 찔러 온 것은 정장을 잘 갖춰입은 샐러리맨이었다. 그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있었는데 불안하게 시리 머리위로 들고 있었다. 내려찍으려는 것이다. 시발. 도끼는 하늘 햇빛에 날을 반짝이며 내 오른쪽 어깨를 노렸다. 강하게 내려온 도끼날 살을 파고들면서 어깨에 박혀버렸다. 순간 사라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힘을 잔뜩 실어버렸다.
“엔? 갑자기 왜 그래?”
사라가 눈치채고서 물어왔다. 고개와 몸은 돌리지 않은 채. 아마 내가 한 말 때문인 것 같았다. 나이스, 사라.
“미안, 사라. 좆같은 환각 때문에 그래.”
“환각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거야? 엔, 괜찮아?”
안 좋은 일이라면 안 좋은데 괜히 말해서 불안감을 주기가 싫었다.
“안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딴 것 때문에 문제지, 괜찮아. 이딴 거보다 더한 일들도 겪어왔어. 그러니까 계속 걸어. 빨리 빠져나가야 해.”
“알았어!”
사라는 잔뜩 힘을 준 대답으로 반드시 그러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걸음 속도가 조금빨라졌는데 덕분에 빠른 속도로 날붙이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커터칼이 허벅지를 쑤시고 쿠크리 나이프가 배에 꽂혔다. 군용칼이 왼쪽 허리를 베기까지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떻게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다음이었다. 왠 늙은 남자가 일본에서나 입는 유카타를 입고서 카타나를 위로 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아는 영감탱이였다.
다카가와 준치로’라는 영감이었는데 도쿄에서 야쿠자들을 이끌고 유명세를 타다가 내 손에 뒤져버린 영감탱이였다. 이렇게 보니 썩 달갑지가 않았다. 죽어버려서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
카타나에서는 나도 입 밖으로 비명이 나갔다. 다른 날붙이처럼 그냥 찔러만 오는 게 아니었기에. 처음 카타나를 맞이한 살은 목 왼쪽이었다. 어깨와 목 사이.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으며 내 살을 파고 베어갔다. 대각선으로 들어오는 그 칼날은 가슴을 타고 오른쪽 허리까지 베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아빠새끼 이후 처음으로 큰 비명을 질렀다.
엔이 비명을 지르자마자 나는 당황했지만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이 불길한 소리. 이 소리에 가까워졌을 때 그녀가 아파하며 비명을 질렀다. 분명히 이 소리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지팡이를 쓰면서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제서야 엔이 진정된 듯 조용해지고 꽉 쥐던 손에 힘이 풀려나고 있었다.
“엔! 이제 괜찮아?”
“하.....시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방금 들었던 소리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 소리에 가까이 다가가자 엔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그녀는 잠깐 생각이라도 하는지 잠깐 조용했다가 하나, 의견을 내었다.
“사라. 그 소리들을 피해서 가자.”
“알았어. 노력해볼게.”
노력해본다고는 했지만 직진만 하던 나에게는 문제가 생겼다. 다른 길이 어떻게 되어있는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 길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다시 가로막히고 말았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결국에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대로 난 또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걸까. 그러다 문득 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이긴 보이는데, 성형으론 도저히 안 될 정도야.’
‘직진.’
그녀는 무슨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물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엔. 지금 보고 있는 게 뭔지 전부 알려줄 수 있어?”
“환각을 말하는 거야?”
“응.”
“2년 전 도시속에 내가 있어. 건물들은 멀쩡하고 수많은 사회인들이 걸어다니는 중이야. 해는 쨍쨍하네.”
‘도시’. 그렇구나. 정말, 어쩌면.
“그 도시, 여기야?”
“그런 것 같아. 건물을 모르겠는데 길 모습은 똑같았어. 적어도 그 호텔은.”
“엔, 바로 그거야. 지금 우리가 걸었던 길 말고 다른 곳으로 빠지는 길이 있어?”
“갔던 길, 왔던 길 빼면 바로 오른쪽에 있어. 여기 삼거리네.”
그녀는 환각에서 이 도시를 보고 있은 것이다. 아까 내가 보이고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 당당히 직진이라고 말했던 것도 배경은 다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