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Envy (Wake Up, Shara) - 10
석재씨에게 잡혀온 밤.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비내리는 소리. 그걸로 끝이었다. 밤인것을 알 수 있었던 건 많이 차가워진 기온과 빛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빛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엔이 없는 밤,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가 있을 때는 안심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불안함뿐이었다. 특히 나는 더욱 그랬다. 크립톤이 움직일 때, 무슨 소리가 들려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소리밖에 듣지 못했으니까.
몸을 웅크리고 어떻게든 잠에 빠져들어 보려고 발버둥 치던 중 ‘쿵’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서서히 움직이면서 ‘쿵, 쿵’거렸다. 위에서 들리는 소리. 웅크리던 몸을 풀고 그 소리로부터 떨어졌다.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둘 알았는데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뒷걸음 친 이곳에서도 위로 ‘쿵,쿵’ 거리며 소리가 들여왔다. 끝이 아니었다. 다른 천장들에서도 소리들이 들려왔다. 듣기 무서웠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잔뜩 웅크린 채 떨었다. 그래도 소리들은 작은 틈새로 들어와 나를 괴롭혔다.
“제발 오지마.”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이럴 때 그는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말없이 사라지고는 계속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크립톤들만이 계속 ‘쿵,쿵’거리며 움직일 뿐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것들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엔......”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비가 온 뒤 완전히 갠 아침하늘로 햇빛이 내리쬐었다. 이제는 별로 추운 날씨도 아니었다. 아침마저 따뜻했다. 고인 빗물로 간단히 세수를 하고 밤에 벗어던졌던 탱크톱과 청바지, 군복 상의를 입었다. 재혁이한테는 대충 걸칠 수 있는 것만 입히고 맥스와 함께 건물 입구에 던져놓았다.
“누가 리더 할래?”
이제 남은 한 가지의 일. 재혁이 밑에서 개고생했던 여자무리의 뒷처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그녀들을 챙길 의무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이 여자들을 바로 세상밖으로 내보내자니 조금 안타까움이 들었을 뿐이었다.
“제가 할게요.”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손을 들고 나섰다. 손을 들 필요까지는 없은데. 그녀에게 재혁이 똘마니들에게서 주워온 총들과 수십 개의 탄창들, 그리고 입을 옷가지들을 넘겨주었다.
“이름이?”
“‘김수란’이요.”
뭔가 물결같은 이름이었다. 수란에게는 특별히 날이 선 단검도 넘겨주었다.
“이제 네가 여기 짱이야.”
그녀가 받아들며 고맙다며 인사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난 그런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같이 가는 멤버로는 맥스와 두 손 묶인 재혁이였다. 맥스는 나의 경호견이고 재혁이는 건너편 도시의 가이드로서 필요했다. 다른 매드독들은 모두 여기에 남기기로 했다. 배가 모두를 태울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키내놔.”
키를 달라고 해놓고 내가 재혁이의 손을 묶어버린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래서 직접 찾아내서 배의 시동을 걸었다. 오래된 엔진음이 먼지 덩어리들을 내뱉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만 들으면 당장 폭발할 것 같았지만 그런 불행한 일은 있지 않았다. 출발 전 맥스를 제외한 매드독들에게 말했다.
“야! 니네들 대장 이제 나 말고 저기 저 여자 보이지? 이름 ‘김수란’이라고 하니까 말 잘들어라! 나중에 나 돌아왔을 때 말 안듣고 있으면......몰라, 시발! 아무튼 말 잘듣고 있어!”
단체로 모아 ‘컹’하고 짖어주었다. 거 참, 충견들일세. 수란도 처음에는 매드독들을 보며 무서워 했지만 내 말을 따라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들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서 조금 안심해했다.
“맥스. 너도 나중에 나 떠나면 저 여자들 데리고 살고 있어.”
‘컹!’
“지금은 그 썅년 잘 감시하고 있고. 도망가려 하거든 발 하나 뜯어먹어.”
‘컹!’
말 잘듣네. 맥스에게는 재혁이의 감시를 맡기고 나는 운전에 집중했다.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고 장애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밑에 있을지도 모르는 보지 못 한 생물들 때문이었다. 직접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있다는 얘기도 없었지만 박쥐도 그렇고 맥스도 있는 판에 사람잡아먹는 생선같은게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디까지나 만일이긴 하지만 있을 것 같았다.
“재혁아. 건너편 선착장이 좀 먼 것 같다. 얼마나 걸리냐?”
“10분.”
썅년의 말대로 10분쯤 나아가자 작은 선착장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머문 곳처럼 깔끔한 곳은 아니었다. 여기는 지붕이 날아가 있었다. 아마 안에 빗물이 가득할 것이다. 조심히 배를 이리저리 돌리며 근처에 세우고 먼저 뛰어내린 뒤 재혁이와 맥스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흔들리는 강에 있다가 땅을 밟으니 바로 적응이 되지 않아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이상한 감이 있었다.
“김석재, 이 시발놈아! 내가 왔다!”
우선 내가 왔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한 마디 고함을 지르고 나이프를 꺼내 벽에다가 내 이니셜을 새겨넣었다. 날짜는 덤.
선착장에서 올라온 뒤 대열은 내가 제일 앞에 서고 재혁이가 중간, 맥스가 맨 뒤였다. 만약 그녀가 허튼짓을 꾸미거든 맥스가 쉽게 물어버릴 수 있도록 생각한 대열이었다. 재혁이는 날 바보보는 듯한 눈빛으로 비웃었지만 참고 넘어가기로 하다가 역시 짜증이 나서 한 대 갈겼다.
“재혁아. 여기 큰 건물 아무거나 불러봐.”
“백화점 하나, 은행 하나, 군청, 경찰서, 그 외에 보이는 큰 건물들.”
여기를 둘러보나 저기를 둘러보나 죄다 큰 건물들뿐이었다.
“참, 시발, 좆도 도움이 되네. 네비게이션도 그렇게 안 가르쳐주겠다.”
막상 데려왔는데 길 안내부터 엉망이었다. 방법이 없나 하던 중 맥스가 눈에 띄었다. 이 매드독도 우선은 개다. 한 번 믿어보기로 하고 사라의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맥스. 이 냄새를 쫓아. 너도 일단 개니까 이 정도는 쉽겠지?”
맥스가 가까이 와서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돌리다가 폐차가 가득한 도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맥스는 똑똑했다. 이로서 대열을 수정하고 뺀질이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맥스가 맨 앞, 재혁이가 중간이고 내가 맨 뒤였다. 엉덩이를 물어버리는 대신 한 발 쏴버리기 편한 대열이었다.
“그러고보니 재혁아. 어떻게 내 등에다가 상처 입힌거냐? 나는 또 어떻게 찾아냈고.”
이 상처가 생긴건 20살이 된 여름, 얌전히 길가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가 한 순간에 새기고 튄 것이다. 그게 이 썅년일 줄은 몰랐지만.
“널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해? 상상 이상일걸. 그들에게서 조각되어버린 정보들을 모아서 움직일 경로를 예측했고 나머지는 아는 대로야.”
“어이구야. 참 고생했네.”
나에 대해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지간히 높은 사람이거나 뒤졌을 텐데 그녀는 거의 있지도 않는 조각들로 날 찾을 것이다. 그 형사보다도 먼저.
“혹시 내가 그 때 후드 쓰고 있었냐?”
“맞아.”
“그러니까 못 알아봤나 보네. 난 시발 그 전부터 알고있는 줄 알았는데. 뭘 노리고 그런거였어?”
“윗선. 상처만 입혀도 재건의 기회를 준다고 했었어.”
“너네 빡촌?”
“맞아.”
이미 오늘의 악연 이전에 한 번 만났었다니. 감회가 참 새로웠고 짜증이 났다.
“그래서 재건한 게 이거야? 병신새끼. 존나 좆만한 거 재건할 바에야 평생 술이나 쳐먹고 살지.”
“‘사건’이 다 망친거야.”
“운 없는 새끼. 나도 그렇지만.”
없는 왼 팔이 쓰라렸다.
넘어온 도시는 건너편보다 더 처참했다. 건너편은 지붕이라도 있는데 이곳은 지붕들이 날아가있거나 부서져서 내려앉아 있었다. 유리들은 모조리 깨져있고 전쟁이라도 한 듯 여기저기에 핏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이곳에도 매드독들이 있을까.
“여기도 매드독들 있냐?”
“본 적 없어.”
“넘어는 왔었나 보네.”
“먹을 것 때문에 한 번 온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전혀.”
“왜?”
“애들이 집단으로 사라졌으니까.”
그녀의 이어진 말에 의하면 10명씩 세 팀으로 나뉘어 수색하다가 한 팀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한다. 모두 실전경험이 풍부해서 쉽게 당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체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버려진 총들만이 남겨졌다고. 크립톤이나 매드독들의 짓이라면 분명 시체가 남기 마련이다. 둘 다 쳐먹는 습성만 다르지 뼈까지 쳐먹지는 않는데다가 특히 크립톤이라면 파먹다 마는 것들이 많아서 시체가 죽은 자리에 남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녀의 말로는 시체들이 없었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이상한 점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모두 들러붙었지만 폐차, 도로, 건물 외벽, 깨진 유리들에 핏자국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어떤 시체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조심성을 가져야 해야했다.
계속 직진만 하던 맥스가 멈추더니 어딘가를 보면서 굵직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짖었다. 무언가라도 찾은 것일까 하고 보니 도로위에 실 같은 것들이 팽팽하게 늘어서 있었다. 투명한 실이지만 맥스가 발견한 것이다. 그 실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다. 오른쪽으로 거대한 호텔건물이 유리창이 깨진 채 세워져 있었다. 실은 그 건물의 입구로부터 반대편 폐차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끝 쪽에 방울 같은 것이 달려있었다. 무엇에 쓰기 위함일까.
“이 차, 무언가가 부쉈어.”
재혁이가 차의 문과 트렁크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부딪혀서 부서지기 보다 햝키고 힘으로 부순 흔적이 가득했다. 이런 흔적, 잘 아는 것이었다. 크립톤. 이제야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었다. 크립톤이 이 실을 건들면 방울이 울리게 되어있고 그것들이 소리에 반응해방울을 공격토록 한 것이다. 하지만 몸집때문인지 차에 들어갈 수 없어 애꿎은 차만 공격했는데 그걸로도 방울이 미친듯이 울려대니 그 쪽에만 집중되어 크립톤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미끼지만 유용한 것이었다. 특히 이런 건물에서 지낸다면 이런 방법이 제격이었다. 이 도심에는 유리가 있는 건물 찾기가 눈에 꼽을 정도였으니. 맥스가 호텔 건물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찾았다. 씹새끼.”
우리는 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없는 회전문을 지나쳐 들어가자 텅 빈 로비가 우리를 맞이했다. 재혁이는 카운터에 앉히고 맥스에게 감시하라고 말해두었다. 그녀는 마음대로 하라며 축 늘어진 사장자세로 앉았고 맥스는 조금 떨어져 앉아 재혁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녀온다.”
손에 글록17을 쥐고 총알들을 끼운 탄창을 확인한 뒤 계단에 올랐다. 이제 뺀질이 새끼를 족쳐버릴 때였다. 계단에서 환영한다는 바람이 불어왔다. 가자!
“그대로 갔다가는 당할거야!”
막 계단을 타고 오르려던 때 재혁이 소리치며 불러 세웠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되돌아와 카운터에 몸을 기대며 가까이했다. 그냥 잘 들으려고 한 것뿐인데 그녀의 발이 내 얼굴을 가볍게 눌렀다. 맥스가 이를 갈지만 제지시키고 조금 더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당한다고? 왜? 설명해봐.”
“그 남자, 함정같은 걸 만드는 데 능숙해. 방금 실 못봤어?”
그러고보니 처음 만났던 그 날도 함정이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매드독들을 매몰시켰었다. 그 이후로는 함정을 만들거나 하는 것 따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다.
“넌 그녀석이랑 만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내 애들이 당했었어. 모두 부상입은 채로 돌아왔지.”
“함정이 있을 거라는 증거는?”
그는 분명 재혁이의 손에 내가 죽을 것으로 알 터였다. 석재는 여기로 건너왔고 그 과정에서 분명히 이 썅년을 만났을 것이며 당연히 내 정보를 팔았을 테니까. 그런데 무슨 함정을 준비한다는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직접 찾아봐야지.”
“씹년이 지금 날 놀려?!”
“올라가 보던가.”
올라가보기로 했다. 조금 밖에 들여놓지 못했던 사각 형태의 계단을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뺀질이와 사라가 몇 층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20층의 건물이라 하나하나 뒤져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5층까지는 없을 것이다. 석재도, 사라도, 크립톤을 피해야하니까. 그러므로 6층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6층은 평범함 호텔방들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는데, 다만 문짝들이 모조리 뜯어져 있고 안의 침대들과 커튼들도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몇몇개는 먼지뿐만이 아니라 피가 묻었던 흔적도 있었다. 역시나 시체들은 없었다. 크립톤이 뜯어먹은 흔적도. 유리창은 전부 깨져있었다.
방은 15개였다. ‘ㄷ’자 형태의 복도에 순서대로. 우선 가운데부의 방들부터 조심히 조사해나갔다. 계속 문 뒤나 벽 옆에 뺀질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방,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방, 반 부서진 캐리어 안에 옷가지들이 들어있었다. 세 번째 방, 크립톤의 점액이 잔뜩 굳어있는 것을 보이 몇 마리가 여기에 들렸다 간 듯 했다. 이렇게 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뺀질이도, 사라도 있지 않았다. 이어서 7층으로 올라가서 똑같이 하나하나 찾아보았지만 똑같았고 11층까지 모두 그랬다.
“이 시발새끼. 뭔 무당벌레 새끼도 아니고. 재혁이랑 똑같이 꼭대기 페티쉬 있나.”
꼭대기층이 제일 안전하기는 했다. 날아다니는 놈들이 아닌 이상 쉽게 올라갈 놈들이 없을 테니까. 잠시 쉬어가려고 더러운 침대에 앉았지만 곧바로 일어났다.이럴 시간에 사라를 데리고 이동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도 쉴 틈을 주어서는 안됐다. 이제 1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 때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빠르게 확인해보니 바깥과 같은 실이 묶여있었고 계단 사이로 위를 올려다보니 꼭대기까지 이어져있는 실들이 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조심히 뒤로 물러나 나이프를 꺼내 실을 끊어보았다. 그러자 나의 옆에서 커다란 날이 들어왔다. 하필 그게 또 내 위치라 뒤로 내빼면서 피해야 했다. 덕분에 오늘 겨우 진정을 찾았던 허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석재, 이 부랄터진 새끼야!”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고 권총을 꺼내 계단사이로 몸을 내밀고서 보이는 실마다 전부 쏴버렸다. 2발 중 한발은 맞았다. 그런식으로 대강 3층 높이까지의 실들을 제거했다. 만족되지 않아서 어제 긁어모아 새로 보충한 탄창으로 갈아 끼우고 계속해서 실들을 미리 제거해갔다. 또 3층 높이의 실들을 제거했다. 이런식으로 이어서 제거하려다가 잠시 진정성을 찾고 멈추었다. 이 위로 있는 실들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여기서 조준해봤자 보이지 않으니 맞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서 쏴 없애기로 하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오르면서 갖가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실에 얽혀있던 유리조각들, 또 다른 모양의 칼들과 이상한 액체들, 뾰족한 목재, 프라이팬, 어디서 구한 지 모를 가루. 정말 가지가지 모아서 설치한 듯 했다. 그래도 폭탄이 아닌게 어디야.
5층 정도를 오르자 다시 실들이 보였다. 꼭대기의 실들의 모습이 아까보다 더 잘 보였다. 권총을 꺼내 10발을 쏴서 나머지 실들도 제거해버렸다. 그러던 중간에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그 탓에 부서진 돌조각들이 내 머리위로 쏟아졌다. 계단이 아닌 어떤 층의 복도쪽에서 터진 것이었다. 놀라서 잠시 숨었다가 제거한 실들을 따라 올라가보았다. 그리고 17층에서 터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수류탄의 안전핀이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네.
“하, 시발.”
빡쳐서 빠르게 나머지 실들도 제거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권총의 탄을 상당 수 쓰긴 했지만 적어도 폭발과 함께 뒤질 일은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16층부터 뒤이어 조사해나갔다. 실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아서 거칠고 빠르게 나아갔다. 이 층에는 없었다. 다음 층인 17층, 역시 없었고 18층과 19층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은 아니지만 종착역인 20층. 글록을 꽉 쥐고서 서서히 몸을 들였다. 이번에는 실이 보이지 않아서 함정걱정을 크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또 내 실수가 되었다. 너무 실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방법의 함정들을 설치할 것까지는 생각치 않은 것이다. 나의 왼발로 실에 걸린 게 아닌 무언가가 밟혀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을 보니 부서지며 엉망진창인 바닥 속, 네모난 블럭 하나가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엇이 날아올까, 빠르게 뒤로 구른 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무엇도 날아오지 않았다. 불발인가.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조금 식은 느낌으로 일어나 방들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새끼, 페이크도 치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쪽이 함정이었다. 내 앞으로 갑자기 금속 야구배트가 나타나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휘두른 것이다. 손잡이로도 익숙한 손이 보였다. 함정을 겪게 만들고 잔뜩 긴장감을 미리 먹인 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함정을 설치해 괜한 경계심을 만들었다가 잠깐이나마 풀게 한 그 틈으로 공격해오는, 그게 진짜였던 것이다. 배트는 남자가 휘두르는 만큼 상당히 빨랐고 맞으면 머리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잃을 수도 있었다. 시발. 함정 기가막히네. 그래도, 안타깝지만 그가 원하는 그림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가 되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아침임을 알았다. 크립톤이 기승을 부리던 밤, 나는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것들이 계속해서 소리들로 괴롭혀온 게 이유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나를 계속 두려움으로 내몰았고 그 괴물들이 떠난 뒤에서 내 안에 잠시 머물기까지 했었다. 때문에 아직도 졸린 기운이 몸에 남아있었다.
“아침 먹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무언가가 내 앞에 놓여지는 소리가 들렸다. ‘탁’하고 놓인 소리가 2개. 조심이 손을 뻗어 만져보니 통조림과 컵이 있었다.
“어제부터 물을 마시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마셔둬.”
통조림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니 어제와 같은 것이었다. 역시 젖가락이 없어 손으로 먹어야 했다. 그는 나가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이동할 건가요?”
“아니. 아직.”
아직이라는 것을 보니 결정하지 못한 듯 했다. 움직일 수도 있고,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가능하면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아두어야 했다. 컵의 손잡이를 잡고 물을 마셨다. 그의 말대로 어제부터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었고 목도 마른 상태였다.
먹는 것으로는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 착각이었나 보다.
“켁, 무슨.....뭘 넣은거죠?”
물을 마시던 내 목으로 무언가가 함께 들어왔다. 빨리 뱉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목 너머로 삼켜버렸고 가슴을 여러번 쳐보기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별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에요? 별거 아니라니!”
나는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지만 자리를 떠서 문을 열고 나갔을 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또다시 두려움과 불안감이 몸을 덮쳐왔다. 내가 먹은 게 무엇인지 모르니 더더욱 커진 것이다. 침착하려고 해도 계속 떨려왔다.
조금 뒤, 서서히 눈이 감기려 했다. 방금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살았는데 잠시 쏟아져 내리고있는 것이다. 어젯밤이 떠올랐다. 귓가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면 안되었다. 절대로. 자면 안 돼. 내가 자버리면......그렇게 생각하며 버티려고 했지만 멈출 수 없는 졸음에 못 이겨 그대로 잠에 빠져든 나였다.
날아오는 배트를 숙여 피하고 바로 옆에 있던 석환의 머리를 잡아끌어 복도의 벽에 돌깨 듯 쳐박아버렸다. 그가 고통에 차 표정을 찌그러트리는 게 보였다.
“반갑다! 도둑새끼야!”
벽에 박은 머리를 그대로 복도를 내달리다가 끝으로 던져버린 뒤 넘어진 그의 머리를 발로 차버렸다. 지금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쉽게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 상태 그대로 목덜미를 잡아 바로 앞 문열린 2006호실 안으로 던져버렸다.
“보고 싶었어. 잔머리 호구새끼야. 사라 어딨어?!”
그는 비틀거리다가 억지로 중심을 잡고 일어서더니 옆에 떨어져 있던 스탠드 등을 나에게 던졌다. 가볍게 피해버리고 날아오는 주먹도 피한 뒤 그의 손목을 잡아 끌어와 복부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이어서 허리를 걷어차 벽으로 몰고 주먹을 쥐고서 얼굴을 때렸다. 그도 피할 줄은 안다며 몸을 날리면서까지 피했는데 어쩌라고. 구르는 그의 몸을 걷어차 주었다. 그리고 일어서지 못하게 몸 위로 올라타서 주먹으로 계속 얼굴을 가격해주었다.
‘쨍그랑!’
시발. 잘 때리고 있었는데 그의 손이 벗어나 어떤 형광등 같은 걸 잡더니 내 머리를 후려쳤다. 그 틈으로 빠르게 벗어나더니 소파 의자까지 들어서 내게 던지고 있었다. 피할 곳이 없어 손으로 막아보지만 한 팔로만 막아야 했다. 안그래도 아픈 팔로 또 충격이 가해졌다.
“시발새끼가!”
날 깔아뭉개려던 소파를 치워버리고 빠르게 눈을 굴려 그를 찾으려던 때 가슴으로 발하나가 들어왔다. 꽤나 묵직한 힘에 비틀거렸을 정도였다. 잘 생각해보니 내가 불리할 수도 있었다. 어제부터 쉬지않고 싸우면서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이 새끼는 아침까지 푹 쉰건 물론이고 뭐라도 쳐먹었을 것이다. 좆됐네.
넘어지자마자 그는 던졌던 소파를 들고 찍어내리려 했다. 몸을 굴려 피하고 일어선 뒤 다리를 걸어 역으로 넘어트렸다. 우리를 어느새 복도로 다시 나와있었다. 바닥에 있던 배트를 주워 휘두르지만 미꾸라지같이 맞지가 않았다. 달려가면서까지 다가가 발로 짓뭉개려다가 역으로 내 다리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격한 몸싸움을 단번에 끝을 보기 힘들어 보였다.
아픈 등을 부여잡고 병원에 들릴 틈도 없이 그의 발에 내 명치부분을 짓눌러 으깨려고 했다. 피하기보다는 그의 발에 내 발을 맞대고 힘으로 밀어버린 뒤 일어나면서 몸 채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2008호실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위, 주먹을 들고 얼굴을 갈겨버렸다. 그 중간, 그의 한 손이 내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잡아 빙 돌려버렸다. 위아래가 바뀌고 내 얼굴로 주먹이 날아 들어왔다. 몇 대 맞고 나서야 두 다리로 그의 목을 낚아챌 수 있었다. 비트는 것까지는 무리고 간신히 내 위에서 떼어내는 정도였다. 입안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게 느껴졌다.
“꼬추 존나 커서 나 보내버릴 수 있는거 아니면 들이밀지마, 애새끼야!”
누운채로 그의 허벅지를 세게 차버리고 기어가다가 일어나 책상위에 있던 부서진 키보드를 들고 일어나려던 석재의 얼굴로 휘둘렀다. 맞지 않았다. 그가 몸을 숙여 피하면서 내 허리를 감싸 안더니 들었다가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 시발, 진짜 내 허리. 이제는 단순히 비명을 지르는게 아닌 켁켁거렸다. 벌써 몇 번째로 누운건지 알 수도 없었다. 또 그의 주먹이 올라가지만 손을 뻗어 주운 목각을 잡아 머리를 후려 갈겨주었다. 덕분에 생긴 빈틈으로 잡힌 다리 하나를 빼내어 걷어차 떼어냈다. 이제는 몸을 일으켜도 영 신통치 않았다. 허리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사라가 이제 바로 코 앞에 있었다. 나의 사라가! 재혁이까지 족치면서 왔는데 이딴 길거리 싸움에서 질 수는 없었다. 집었던 목각을 들고 떼어냈던 그의 머리를 때렸다.
“사라 어딨어?!”
그리고 누워버린 석재의 머리를 찍어내리려던 그 때 그가 소리쳤다.
“2015호실! 거기에 사라가 있어!”
드디어 그가 불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물은 것도 아니었지만 사라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아마 죽을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겠지. 일단은 목각을 멈추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아니면 죽는다.”
어차피 그곳에 사라가 있어도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살려주기엔 맞은 곳들이 많았고 여기까지 오는데 내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 ‘2015’라고 적힌 방문 앞에 섰다. 문은 잠겨있었다.
“사라! 거기있어? 사라!”
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칠 정도로 귀가 밝은 그녀니까 시끄럽게 외쳐대면 분명 들을 것이다. 그리고 잡음이 섞인 사라의 목소리가 날 부르르 것이 자그맣게 들려왔다. ‘엔’이라고 날 부르는 목소리. 엄청나게 반가웠다. 몇 년 만에 재혁이를 만난 것보다 훨씬 더.
“사라! 들어갈게!”
열쇠는 필요없었다. 권총이 만능열쇠니까. 문고리에 두어발 쏘자 안그래도 녹이 슬고 삐걱거리던 손잡이가 부서졌고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세게 열면서 몸을 옆으로 비켰다. 석재는 그런 나의 모습에 당황하지만 나에게는 역시나였다. 문을 열자마자 단단한 끈에 연결된 무거운 화분 하나가 줄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정확히 내 머리를 겨냥한 화분이었다. 그는 내가 화분에 맞아서 어떻게든 되기를 바란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애초에 2015호실에 있다고 했을 때부터 믿지 않았고 함정도 사라의 목소리가 녹음된, 잡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딴 잡음 하나 없이 맑고 청결한 목소리였다.
급히 일어서려는 그의 두 다리를 겨눠 쏘고 등의 먼지를 털었다. 그가 자신의 두 다리를 부여잡으며 끙끙 앓아대는데 뒷덜미를 잡아서 2015호실 안으로 던져넣었다.
“역시 난 호구로 보이나봐. 팔도 장애고, 머리도 나쁘니까 그렇게 보일만 하긴 해. 나도 인정하는데 여긴 머리 IQ같은 걸 증명하는 곳이 아니야, 병신새끼야. 누가 더 잘 죽이냐를 증명하는 곳이지.”
허리를 걷어차 주었다. 드디어 뺀질이를 족쳐버린다는 생각에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방 안, 가지런히 놓인 의자위에 구닥다리 녹음기 하나가 틀어져 있었다. 아마 내가 사라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있어 구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설치한 함정인 것 같았다. 그런 것 치고는 어설펐다. 모든 게.
“이야, 되게 높다. 여기서 떨어지면 몸이랑 머리 둘 다 터지겠는데.”
구름이 보이는 그런 높이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험할 정도의 높이였다. 석재의 움직이기 어려운 다리를 잡아끌어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깨진 유리 밖으로 상체를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밀면 바로 떨어질 높이. 저 밑에 있는 여러 쓰레기더미들이 석재를 맞이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넌 사라를 위험하게 만들거야, 아니, 죽게 만들거야. 분명히.”
유언남기라고 안했는데 지맘대로 비석에 적을 말을 남기고 있었다. 그 말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라에게서 떠나.”
계속 씨부려댔다. 역시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뺀질이였다.
“네가 뭔데 자꾸 떠나가라야. 상황구별 안 되냐? 지금 니새끼가 인생 떠날 때야. 눈치 없는 새끼야.”
“사라는 널 원하지 않아.”
아, 이건 좀 충격을 받을 뻔했다. 거짓말치고는 당당히 했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었지만 그럴 펜과 종이가 하나도 없었다. 대신 그의 피묻은 귓가에 대답해주었다. 그게 내 최대의 배려였다.
“내가 원해.”
대답을 던지고 늘 내가 잘해왔던 것처럼 부드럽게밀어버렸다. 석재의 몸이 바람을 타고 20층이라는 높이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이 그를 맞이하며 더욱 거세게 짖눌렀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몸이 날고 날다가 저 아래, 아스팔트와 부딪혔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대신 피가 터지며 그림을 그려주었다. 흐르는 강물정도가 아니라 철썩이는 파도였다. 이제 끝났다.
겨우 2박 3일밖에 되지 않았던 그와의 만남이었지만 몇 년은 된 느낌이었다. 그런 기나긴 모험과 만남이 드디어 끝은 맺은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를 찾기위해 방을 나갔다. 우선 찾아보지 못한 20층의 나머지 방들을 둘러보지만 그녀는 없었다. 앞으로 내가 찾아야할 방의 갯수는 얼마나 될까. 중간에 6층 정도를 건너뛰어 올라왔고 찾아보지 못한 층이 5개나 더 있었다. 총 11개의 층을 찾아봐야 했다. 내가 생각해도 힘들 것 같았다. 하나하나 다 뒤적거리며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았다. 이럴때는 개코가 필요했다. 그런고로 우선 1층으로 내려가 맥스를 데려오기로 했다. 그 똘똘한 녀석이라면 분명히 찾아낼 것이다.
끊어진 실들이 난무하는 계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