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Envy (Wake Up, Shara) - 9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총싸움은 그저 상대방의 체력을 얼마나 소모시키냐 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완벽한 나의 패배가 되었다. 아침부터 대머리를 상대하고 매드독들에 이어서 대규모 전투를 한 나와 아무것도 안한 채 총이나 닦고 기다렸던 재혁이. 누가 체력에서 유리한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이 썅년도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있어? 그 때도 이렇게 졌잖아.”
그녀의 볼에 있는 상처를 건드리며 비꼬았다. 그 때도 우리는 이렇게 총알들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에는 도끼와 칼을 들고 싸웠었다. 결과는 나의 승리와 상처만 얻고 도망갔던 재혁이의 패배였었다.
“자신있으니까 널 기다렸고, 이걸 들었겠지!”
“그래? 그럼 이제 뒤져야지!”
바로 나이프를 뽑지 않고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그녀에게 던져버렸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때묻은 의자가 몸 째 돌아가며 재혁이를 노렸다. 크게 상처를 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던진 의자를 발로 차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면서 아직 여유라는 것을 표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의자도 들어 던져버렸다. 또 막힌다. 한 번이라도 맞을 때까지 옆에 있던 의자들을, 없으면 뒤에 있는 의자들을 쉬지않고 계속 던져버렸다.
“칼에는 칼이라고 했으면서.”
“좆까! 미친년아. 너부터 매너없게 쳐 굴었잖아!”
썅년의 어이없는 말에 화답하고 다시 의자를 던지려는데 남은 게 없었다. 이런 시발, 놀라서 당황하는 나의 틈을 썅년이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오고 있었다.
“오지마! 난 사라만 받아.”
의자대신 탁자를 하나 걷어차 넘어트려 길을 방해했다. 나름 의미와 가치가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아니었다. 가뿐히 밟고 넘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재혁이는 뺀질이 같은 놈이 아니지. 나도 이제 나이프를 꺼내들고 이 오랜 원수같은 썅년을 맞이했다. 두 개의 날이 부딪혀 서로를 비추었다.
“나 지금 존나 고민되는게 있어.”
“집어치워.”
“시발! 한 마디 제대로 들어주는게 그렇게나 싫어?”
“팔 자르고 들어줄게.”
“진짜 정 없는 년.”
내가 먼저 힘으로 밀어버리고 발길질을 시작했다. 첫 스탭은 내가 공격, 그녀가 방어였다. 재혁이처럼 정식으로 배운 무술 같은게 있긴 했지만 그런것보다는 오랜 길거리 싸움으로 단련이 되어 있었다. 그 때도 몸싸움은 전혀 밀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자신있게 먼저 발길질을 한 나인데 그게 실수가 되어버렸다. 몇 번 정도 부딪히고 나자 그녀의 손이 내 발목을 잡고 당겨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팔 하나가 없던 나라서 중심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내렸고 바로 내 위로 도끼가 내려오고 있었다. 나이프로 막아서고 허리의 힘을 이용해 누운 채로 피했지만 여전히 발목은 잡힌 상태였다. 그걸 풀기 위해서 나이프를 썅년의 가슴으로 던져버리면서 남은 다리로 발길질을 했다. 그녀가 피하기 위해 내 발목을 놓고 옆으로 움직였고 나도 곧바로 일어났다. 다시 생각해보니 던지지 말걸 그랬다. 지금 내 손에는 아무 무기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나, 내 칼좀 주워와도 되냐?”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도끼가 다가왔다. 그래, 시발. 우리 재혁이가 그딴 걸 허락해 리가 없지. 급히 눈을 굴려 테이블 위에 있던 쇠물컵을 집어들었다. 다행히 컵도단단한 편이라 도끼날이 박혀 들어오긴 했지만 내 목에 꽂히는 건 피할 수 있었다. 그대로 쇠물컵을 쥔 손으로 썅년을 밀쳐버리고 그 옆으로 빠르게 달려가 내가 던졌던 나이프를 주워들었다. 쉬지 않고 들어오는 도끼부림을 나이프로 수차례 막았다. 서로의 날이 매섭게 물려고 들었다.
“나 같으면 그런 여자 버리고 갈길 갔을거야.”
재혁이 중간에 말했다. 사라를 가리키며 말한 것이다.
“그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뭐야? 매번 이득만 생각했던 너라면 벌써 버리고 갔어야 하는거 아닌가?”
“내가 데리고 다니겠다는 데 왜 주변에서 자꾸 지랄들은 지랄들이야.”
“이해가 안돼서.”
도끼가 내 목을 스쳐 지나갔다. 내 나이프도 재혁이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갔다.
“말해줘도 이해 못 할 거잖아. 그냥 이해하지마. 시발.”
“그렇네.”
우리가 지나치는 길마다 테이블들이 넘어지고 의자가 던져지며 유리창들이 깨져나갔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숟가락들과 젓가락들이 서로 부딪히며 울려대고 쓰러지는 정수기의 빈 껍데기가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서로 남을 체력들이 빠져나가기만 할 뿐, 승부의 기미는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좀 뒤져라, 씹년아!”
신경질적으로 나이프를 들어올려 찍어내렸다. 재혁은 몸만 살짝 옆으로 피하며 도끼를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그녀의 차례였다. 나도 몸을 돌리며 피하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조금 있으면 해가 지고 저녁을 넘어 밤이 찾아올 시간이었다. 크립톤들이 움직일 시간. 가능하면 해 떨어기지 전에 뺀질이를 찾아서 족쳐버리고 사라와 밤을 보내려 했는데 전부 이 썅년 때문에 틀어져 버렸다.
틈이 필요했다. 나이프로 찔러버리던, 한 대 세게 쳐버릴 그런 틈. 무언가 이용할 수 있는게 없을까 하던 그 때 바닥에 굴러다니던 가루통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는 짙은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후추가루가 들어있었다. 엄마가 가르쳐주었던 생활의 지혜가 생각났다. 망설임 없이 그 후추통을 잡고 잠시 나이프를 내려놓은 채 재혁이는 자극했다.
“잘 가.”
자극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오고 있었다. 두 눈에는 나를 죽이겠다는 살기만이 보였다. 오히려 잘 되었다. 그녀가 바로 내 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에 쥐고 있던 후추통을 얼굴에 던져버렸다. 안에 있던 가루가 통에서 흩뿌려져 나와 재혁이를 건들였다. 급기야 기침까지 하고 만다. 그런 썅년에게 내가 역으로 달려들었다.
“잘 자.”
나이프의 손잡이로 강하게 그녀의 머리를 쳐버리고 옆구리를 베어준 뒤 턱에는 주먹을, 복부쪽에는 무릎을 꽂아 넣었다. 재혁이는 크게 흔들리며 비틀거렸다. 서비스로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젓가락을 들어 그녀의 왼쪽 눈에 꽂아버렸다. 시원시원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시끄러워서 목을 잡고 복부를 한 번 더 걷어찬 다음에 깨진 식당유리 밖으로 던져버렸다. 젓가락은 뽑혔지만 이미 짖이겨진 그녀의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재혁아! 자라는데 왜 기쓰고 안 자니?”
복도로 넘어가 밖으로 기어가려는 재혁이의 발목을 잡고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끌어당기며 머리가 벽에 부딪히도록 던지며 놀다가 마지막에는 편의점 안으로 쳐박아넣었다. 이미 썅년의 머리에서는 피가 꽤나 흘러내리고 있었다.
편의점 안에는 총알 없는 K2가 진열대 아래서 주인잃은 채 노숙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렸다.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테이프와 커터칼, 가위 등 여러가지 쓸만한 것들이 남아있었다. 먼저 저항의 기미조차 없애려고 머리와 배를 가격해주고 테이프를 뜯어 이 썅년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으려 했다. 그런데 아직도 힘이 남은 건지, 테이프를 든 나에게 반항하듯 자꾸 발을 움직여대었다.
“가만히 좀 있어봐. 묶기 힘들어.”
경고에도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고, 시발년아!”
화가나서 나이프로 허벅지와 발목을 찔러버렸다. 굵은 나이프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면서 가죽바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덕분에 묶기가 편해졌다. 다음으로는 손목을 모아 발로 짖누른 뒤 묶어버리고 혹시를 대비해 어깨와 상처난 허벅지도 테이프로 꼼꼼히 감아주었다. 그리고 아직은 죽이지 않은 채로 옷자락을 잡고 질질 끌어 밖으로 나섰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나를 맞이했다. 내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묻은 피들, 머리카락과 뛰어다니면서 흘렸던 땀들이 씻겨져 내려가는 게 영 시원치는 않았다. ‘사건’이후에 내리는 비는 전혀 깨끗하지 않으니까.
막 다리를 건너자 맥스를 선두로 매드독 수십여 마리가 앉아서 비에 홀딱젖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겁먹은 여자들을 한 데 모아두고서. 모두 제대로 된 옷가지를 걸친 사람이 없었고 여기저기에 상처들이 수두룩했다. 딱 보아도 재혁이가 잡아다 놓고서 촌을 열었던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섹스만 벌이는게 아니라 마약과 고문이 함께하는 섹스.
“맥스, 비온다.”
맥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런곳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애정을 가지고 키웠을 텐데. 이런 충견은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돌아가자.”
맥스는 알겠다는 고갯짓과 한 번 짖어서 능숙하게 매드독들과 여자들을 일으켜 움직이게 했다. 미리 봐둔 장소가 있나보다. 나도 맥스를 따라 움직이지 못하는 재혁이를 질질 끌면서 걸었다. 어차피 이 이상 밖에 돌아다니기도 글렀다. 곧 있으면 크립톤들이 돌아다닐 시간이었고 강도 배로 건너기에는 영 물살이 좋지 않았다. 이곳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그게 정말로 화가 났다. 사라를 만나기 위해서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한다는게. 비는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머리를, 몸을, 마음을 두드리기만 바빴다. 시발것.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몸도 개판이네.
“물 마실래?”
“싫어요.”
“뭐라도 먹어야 해.”
“지금은 싫어요.”
석재씨는 집요하게 뭔가를 먹을 것을 권유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배고프긴 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호의를 계속 거절했고 그게 많이 답답했는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올 때처럼 ‘철그럭’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먹을 것은 두고 간 듯 했다. 짙은 냄새같은 게 맡아지지는 않았지만 손에 만져지고 있었다. 무엇일까. 엔하고 즐겨먹던 통조림? 통조림은 맞는데 무슨 통조림일까. 손으로 들고 가까이서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기가 싫었다. 그저 이렇게 무릎을 안고서 엔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라면 분명히 올 것이다. 분명히......
‘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라면.’
여자의 말이 울렸다. 이렇게 가만히 엔을 기다리기만 하는 게 맞는걸까.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엔은 지금 위험에 처해있는데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는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만 했다.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 생각해도 이기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는데 난 여자의 말처럼 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이기적이지 않고 싶어도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짐덩이’였다. 지금까지도 엔의 보호와 보살핌만 받아왔을 뿐, 내가 도움을 준 적이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고 이는 큰 골칫덩어리였다.
“사라, 울어?”
문을 열고 나간 줄 알았던 석재씨가 돌아온 듯 했다. 그는 내가 울고 있다고 말했다. 눈가를 만져보니 정말로 그랬다. 손으로 여러 번 눈가를 훔쳐도 그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있었다. 엔의 손이 아니라서 더욱 서러웠다.
“석재씨. 당신이 보기에도 제 눈이 골칫덩어리겠죠? 아무것도 보지 못해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짐덩이만 될 뿐이니까.”
어느 새 경멸했던 그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 자신이 부끄럽고 미운 듯 했다. 그 역시 아무말 못 한 채 내가 문제라는 것을 조용히 인정할 줄 알았다. 지금까지 버려진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내 예상과 달리 그는 한 마디, 말해주었다.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맞아. 하지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건 문제가 아니야.”
단순한 생각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는 당연한거라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네 눈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라고만 생각해버리면 정말 문제가 되버려. 하지만 별 것 아닌 거라고,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면 전혀 문제될 게 없어.”
“석재씨는 문제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네가 앞은 보지 못해도 그만큼 다른 곳에 장점들이 있을거라고 생각해. 예를 들면, 모두가 옛날의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잊어가는데 넌 그걸 전혀 잃지 않고 있잖아.”
그는 내가 상냥하다고 얘기해주었다.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으면서. 그런데도 어째선지 위로가 되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베토벤도 자신의 귀가 들리지 않으면서도 문제삼지 않고 계속 자신의 음악을 이어나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처럼 장애를 가졌었지만 문제는 커녕 자신의 재능을 찾고 극복하고서 뛰어오른 사람들도 많았다. 내 눈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가두고 있을 뿐이었다.
“밖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불러.”
석재씨는 위로의 말을 건네준 뒤 발걸음소리를 멀리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나가자마자 앞에 만졌던 통조림을 재차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아서 무릎을 꿇고 여기저기로 손을 뻗어 움직이면서 찾다가 차가운 페트병 같은 것에 팔꿈치가 닿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손으로 잡아서 흔들자 액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뚜껑을 열고 마셔보니 물이었다. 다시 통조림을 찾아보았다. 똑같이 팔을 뻗어 찾다가 차가운 캔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어느샌가 뚜껑이 열려있었다. 그가 열어준 것일까. 들고서 냄새를 맡아보니 복숭아였다. 젓가락이나 포크는 없었기에 손으로 꺼내먹어야 했다. 분명 엔이 있었다면 옆에서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엔.”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위험하게 싸우고 있을까. 그러지 않았기를 바랬다. 아무리 그녀라도 그 여자와 무수히 많은 나쁜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는 벅찰 것이다. 차라리 나를 버리고 안전하게 떠났으면 하는게 내 바램이었다.
“......아냐.”
거짓말이었다. 속으로는 엔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여로모로 복잡한 생각과 마음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난 정말 바보였다. 나의 눈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무력한 나 자신이 문제였다. 밖으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혁이를 개처럼 끌고 매드독들과 함께 들어선 건물은 도서관이었다. 자리잡은 곳은 2층의 일반 도서실이었고 들어오자마자 창문들에 커튼을 쳐버린 뒤 책장들을 밀어버리고 테이블과 의자들을 구석에 치우고 나서 공간을 만들었다. 가운데에는 램프가 없어 대신으로 책들을 가져와 불을 지폈다. 마침 재혁이가 라이터는 가지고 있던 덕분에 쉽게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
지낼 곳을 마련한 뒤에는 재혁이의 눈과 허벅지쪽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넉넉한 양을 아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감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녀는 내가 치료해주는 것에 큰 불안감을 느꼈지만 내 알바가 아니었다. 우선 이 여자를 살려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같이 들어왔던 매드독들은 맥스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밖으로 내보냈다. 함께 밤을 보내기에는 숫자가 많았다. 여자들은 구석에 모여앉아서 재혁이를 노려보는데 그 눈빛이 전혀 곱지 않았고 당장 죽여버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맥스를 세워놓은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 저들이 재혁이를 죽였다간 많이 곤란했다. 대화상대가 없어져 버리니까. 그 누구든 재혁이를 죽이려 들면 맥스의 밥으로 줘버릴 생각이었다.
“병주고 약주는 거야? 그냥 죽여.”
“안 돼. 나 심심해.”
“저 여자들 있잖아.”
“쟤네들이 우리랑 같냐? 병신아. 내가 좀 놀아달라잖아!”
“꺼져.”
“시발년. 말하는 꼬라지 봐라. 더 안 죽여야지. 확 그냥 덮쳐버릴까.”
“더더욱 꺼져줘.”
그녀의 치료를 끝내고 나서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다리를 짧게 만들어 앉았다. 오늘 하루 쉬지 못했던 허리에게 드디어 달콤함 휴식을 주는 것이다. 이제 재혁이와 무슨 즐거운 대화를 하면 좋을까. 머리로 이런저런 주제들을 떠올려보았다.
“이봐.”
그 중간에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먼저 놀랍게도 말을 걸어왔다.
“뭐?”
“넌 어떻게 훈련받아 온거지?”
“뭔 훈련? 섹스? 아니면 거시기 잘 빠는거? 레즈로서 여자 덮치는 것도 잘하기는 하는데.”
“그런 시시한 거 말고.”
“그럼 뭐?!”
“전투.”
“아, 싸움질”
살다살다 군인한테이런 질문도 받아본다. 지금까지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내게 해준 썅년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기쁘게 받아주었다. 머리로 이야기의 순서를 정리해 나갔다.
“일단 기초를 배운건 아빠새끼한테 배웠어.”
“아빠새끼? 아버지를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거야? 불효자네.”
“남이사. 그 새끼는 부모가 아니라 그냥 개시발새끼야. 걔때문에 내가 이렇게 키워지고 지금 네가 이 꼬라지가 된거고. 알아?”
“길상도 한 몫 했겠지?”
“시발! 중간에 끊지말고 좀 들어. 기껏 설명해주고 있는데. 아무한테나 해주던 얘기도 아니란 말이야! 뒤질래? 아니면 화끈하게 덮쳐줘?”
“일단 들어볼게.”
“하여든 지맘대로야. 시발.”
다시 머리로 흐트러진 순서를 정리하고 다시 시작했다.
“아빠새끼한테서 첫 살인을 배우고 나서 계속 사람을 죽였어. 주로 그 새끼가 사람을 잡아오고 내가 죽였지. 여러 방법으로. 칼로도 찔러보고, 총으로도 쏴보고, 독주사를 놔보기도 하고, 두들겨 패서도 죽여봤었어. 살인에 대한 거북감을 없애는 거지.”
실은 처음부터 거북감따위 없었지만.
“그 살인의 끝은 내가 직접 납치해서 죽이는 거였고. 걘 아직도 기억나. 내가 생각했던 유일한 학교 친구였었거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이 모양 이꼬라지가 되었지.”
“두 번째는?”
“두 번째를 길거리 싸움이었어. 아빠새끼가 웬 이상한 깡패새끼들을 데려와서는 나랑 다짜고짜 싸움을 붙였어. 싸움이라고는 1도 몰랐던 나한테! 때문에 맞으면서 스스로를 단련시켰지. 지기는 싫었거든. 그 시발놈이 내가 질때마다 데려온 깡패새끼한테 옷 벗게 했으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마약도 빨고 10명이랑도 해봤었어. 그 때가 17살이었나? 아무튼 그랬어.”
“혹독했군.”
“맞아. 그래서 아빠새끼 뒷통수 후려 갈기고 집을 나왔지. 엄마는 이미 도망쳐서 없었고. 집을 나오고 나서는 배웠던 것들을 써먹으면서 사람 죽이면서 살거나 몸 파는 걸로 모텔들을 돌아다녔고 그런식으로 머물다가 딱 삼촌하고 만나게 된거야. 그 때부터 정식으로 싸움을 배웠고. 총들에 대해서도 배우고 생존방법이나 간단한 치료방법들도. 또 내가 준비만 되면 삼촌이 어디 소속인지 모를 특공대 사람이나 군인들을 데려와서 싸움을 붙였었어. 그 중에는 너 같은 간첩새끼도 있었다. 잘 싸우더라. 내가.”
1번을 제외하고 내가 모두 이겼었다.
“정식으로 무술을 배운 것 치고는 자세가 아니던데.”
“아? 정식으로 싸움을 배웠지, 무술은 안 배웠어. 계속 옆에서 삼촌이 무술을 쓰라고 지랄하긴 했는데 난 그런것보다 내 좆대로 싸우는게 최고였거든. 그래서 무술보다는 오히려 그 무술이란걸 어떻게 대처해서 족쳐버릴까를 많이 연구했었어. 효과 죽이더라.”
“결국은 훈련과 연습만으로 배운거다?”
“아니지. 어떤 호구가 훈련만 시키겠냐. 당연히 실전도 존나게 뛰어봤지. 너라면 알텐데. ‘태안 무장어선 몰살사건’ 몰라? 우리쪽이랑 너네 쪽 둘 다 유명했을 건데.”
“알아. 우리쪽 무장인민들이 3척의 어선으로 건너갔다가 모두 단 한 명에서 몰살되었던 사건. 너희쪽과 우리쪽, 모두 기밀로 처리되었었지.”
“맞아. 그거 나야.”
나름 놀랄만한 큰 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재혁이는 별로라는 표정만을 내비치고 있었다.
“시발, 별로야?”
“그거 하나로 실전을 뛰었다고 하는 건가?”
“더 있어! ‘인천 시체 난도질’이랑 ‘국회의원 이석중 살인사건’, ‘도쿄 야쿠자 몰살사건’. 부족해?”
“크긴 큰데 야쿠자 말고는 임팩트가 없어.”
‘인천 시체 난도질’은 인천을 휘어잡고 있다던 깡패새끼 대가리가 시비를 걸어오길래 죽여서 칼로 수십번 난도질 했던 사건이었고, ‘이석중’은 수많은 경호원을 거느렸던 사람이었는데 삼촌의 의뢰로 쳐들어가 죽였었고, ‘도쿄 야쿠자 몰살사건’은 지난 50년간 이어져 생존해온 대규모 집단이었는데 나랑 시비가붙어서 쳐들어가 씨까지 말렸던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임팩트가 없다니. 이런 미친년을 봤나.
“적어도 ‘서울의 마녀’처럼 ‘이탈리아 파도르노 패밀리 몰살’ 정도는 되야지.”
“뭐?”
순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이탈리아 머시기 사건때문이 아닌 ‘서울의 마녀’라는 별명 때문이었다. 얘가 그 별명을 알고 있다고? 알고 있는 놈이 지금까지 나를 몰랐다고? 아닌가? 이게 내가 놀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거 나야, 병신아.”
‘파도르노 패밀리 몰살’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지만 해외에서는 엄청 이슈가 되었던 건이었다. 각종 세계 언론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몇 달 동안은 다뤘던 구경거리였다. 전문가들이 마녀가 마피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느니, 마녀는 사실 단순한 살인자가 아닌 한국의 인간병기라느니 개소리들이 있었지만 실상은 딱히 뭐 없었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러 이탈리아에 갔는데 그 망할 놈들이 걔를 납치해가서 빡돌아버린 내가 털어버린 놈들이었다. 당시에는 난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규모 좀 큰 마피아집단이구나 싶었는데 지인 만나고 여행하다가 한국에 돌아와서야 정부랑 크게 대치하던 큰 마피아 패밀리였다는 것을 알았었다. ‘서울의 마녀’가 했다는 것은 내가 그 ‘파도르노’라는 새끼의 등에다가 내 표식을 적어놨기 때문이다.
재혁이는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모르는 건가. 난 당연히 그녀가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거짓말 하지마.”
“진짜라니까. 시발, 못 믿냐? ‘강남 양궁판 사건’, ‘홍대 클럽녀 토막 살인’, ‘서울대 류교수 타살’, ‘한국 검찰 폭탄 테러 사건’, 전부 나라니까.”
지금 말한 일들은 모두 그 별명을 달고 움직였던 때의 사건들이었다. 더 많이 있긴 하지만 테러를 포함해 이 4개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것들이었고 묻힌 것들도 몇몇개 있었다. 혹은 멍청한 경찰들이 애꿎은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해 끝났거나.
“그래, 너도 미친년이라는 건 알지만 그 ‘마녀’일리가 없어. 정말 ‘마녀’라면 등에 베인 흉터가.”
“이거?”
썅년이 너무 못 믿길래 군복을 벗고 스포츠브라를 들어 올렸다. 내 등에는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남긴 흉터가 있었다. 아주 예술품으로 남겨놓은 흉터인데 우연인지 고의인지 염소의 뿔 같은 모양이었다. 재혁이가 그 상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때 나도 이상한 걸 느꼈다. 이 흉터는 삼촌과 내 몇 친구를 제외하면 모르는 상처였고 이 썅년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번이 아예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거, 이 상처, 너 시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모를리가. 내가 만든 건데.”
3년간 쫓던 범인이 내 눈앞에 있었다. 대답을 듣자마자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는 썅년의 허리를 걷어 차버리고 목을 잡아 일으켰다.
“시발년, 너였냐? 내가 시발 이 흉터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그대로 뒤로 던져버리고 올라탄 뒤 주먹으로 얼굴을 몇 대 쳐 갈겨버렸다. 그런데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내가 시발, 이것 때문에 삼촌한테 놀림받고! 다 나을 때까지 존나 아파서 눕지도 못하고! 개새끼야!”
몇 대 더 때리고 일으킨 뒤 원래 자리에 앉히듯 던져버렸다. 아직도 분이 삭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진정해보기로 했다. 재혁이가 죽으면 이 밤을 심심하게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사라가 없으니 분노조절장애가 터져 나왔다.
“시발년, 시발년, 개시발년!”
몇 대 더 차버리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이번에는 발이 나가지 않도록 무릎을 끌어안았다. 재혁이는 입으로 피를 뱉으며 앉은 자세로 돌아왔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후......지나간 일이니까 잊자, 잊어.”
“정말......놀랐어. 설마 네가 ‘마녀’일줄은.”
“좆까고 닥쳐. 지금 존나게 빡치니까. 마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지랄이야. 오히려 관심만 존나게 끌렸었는데. 기레기 개새끼들.”
이래서 기자새끼들이 문제였다. 사실 그 별명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었다. 몇 번 저지르고 내가 여자라는 것까지는 밝혀졌을 때 그 놈들의 기자들이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마음에 든다며 아예 표식까지 하면서 다니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 좋다고 나댔었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하필이면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던 재혁이에게 까발려지고 말았다. 계속 화가 났다. 이대로면 머리가 어떻게 돌 것 같아서 얘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풀어보기로 결정했다. 썅년에게 다가가 어깨와 허벅지쪽을 묶어두었던 테이프만 잘라내고 강제로 눕힌 뒤 올라탔다. 내가 다시 몇 대 갈기려는 줄 알고 그녀가 눈을 감았지만 그럴 의도를 전혀 없었다.
“내가 남자말고도 여자도 잘 따먹어.”
그제서야 재혁이는 내 의도를 알아채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윗옷과 아랫옷도 다 벗겨낸 뒤였다. 뒤에서 맥스랑 여자들이 보고 있었지만 신경쓰이지 않았다. 나도 탱크톱을 벗어 던지고 손으로 재혁이의 어깨를 짓눌렀다. 썅년이 싫은 소리를 해대었다.
“존나 사랑해, 시발련아. 힘 쫙 빼라.”
오랜만에 보내는 즐거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