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Envy (Wake Up, Shara) - 8
“엔!”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던 쪽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이름을 불러보지만 평소라면 대충이라도 대답을 해줬을 엔이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내가 믿을 수있는 것은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들 속에서 날 가장 안심시켜줄 수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빠르게 지팡이를 꺼내면서 손을 뻗었다. 이대로 몸을 숙여 엔을 찾을 생각이었다. 이때만큼은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앞이 보였으면 했다. 그런데, 잘못을 하려는 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누군가의 손이 내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잡히자마자 엔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 세게 잡아채지 않을 뿐더러 느낌부터가 달랐다. 엔의 손은 상처 때문인지 조금 거칠면서도 고양이 발바닥처럼 부드러움이 섞여있었고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손이었다. 그에반해 지금 날 잡은 손을 거칠다 못해 까칠하고 땀이라도 났는지 축축했다.
“석재씨! 도와줘요. 당신 누구야?”
“진정해, 사라.”
어떻게든 몸부림을 치며 아직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를 불렀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몸부림을 멈추었다. 지금 날 잡은 손은 석재씨의 손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그가 이런식으로 내 손목을 붙잡은 걸까. 궁금하기보다는 당황스러웠고 무서웠다.
“사라. 나랑 가자. 엔이랑 있으면 너만 위험해. 이대로 가면 넌 부산에 닿지도 못할거야. 차라리 내가 도와줄게.”
“설마......엔을 어떻게 한 건가요?!”
“기절만 시켰어.”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그가 나에게 엔은 위험하다고 말한 순간부터 불안했는데 그게 현실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무엇보다 정말 화난 것은 배신이었다.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했었고 짧지만 난 정말, 그에게서 느껴졌던 부드러움과 상냥했던 말과 행동들에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믿음에 배신을 하고서 엔을 기절시키고는 날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놔요.”
“사라.”
“놔줘요! 싫으니까 놔달라구요!”
“왜?!”
어떻게든 그의 손을 뿌리쳐 보려고 했지만 내 힘으로 그러지도 못했거니와 되려 큰 호통이 덮쳐왔다. 그 목소리에는 화났다는 걸 담고 있었다. 해코지라도 당할 것 같아서 몸이 굳어버리고 목소리마저 저 너머로 잠겨버렸다. 나는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기다 보이지 않아서, 어떤 행동들이 날아 들어올지 몰라서 더 무서웠다.
“도대체 왜 난 안되는데! 왜 저런 위험한 여자를 따라 다니는 건데? 나도 잘 대해줬잖아. 내가 저 미친년보다 모자란 게 뭔데? 왜 쟤만 그렇게 따르려는 건데? 왜?!”
이제는 그의 속에 누르면서 담고 있었던 듯한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석재씨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내가 엔만을 따르고, 엔만을 믿냐며 화를 내면서 말했을 때 그에게서 한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한 질투였다.
“내가 쟤보다 없는게 뭐야? 뭐가 부족해? 말을 해봐. 그럼 고쳐보거나 변해볼게. 그러니까.”
“석재씨가 설령 엔보다 뛰어나도, 고쳐본들, 변해본들, 전 그래도 엔과 함께 갈거에요. 말씀드렸잖아요. 저희는 저희만의 우정이 있다고.”
그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이 슬슬 아파올 때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틈에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뒤로 물러서다가 발밑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손에 쥐었던 지팡이를 놓쳐버리고 손이 까칠한 무언가에 부딪혀서 아파왔다. 피가 나는 것 같았다. 손으로 만져 확인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시간과 힘을 엔을 찾는데 집념했다. 어떻게든 닿기 위해서, 아픈 손을 참고 일어나 땅바닥을 이리저리 만졌다. 딱딱한 바닥이 만져지고 울퉁불퉁한 돌들이 만져지고 이상한 물건은 것도 만져졌는데 끈적거렸다.
“엔! 대답해! 엔!”
내 목소리를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들어주길 바라면서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던 그녀의 성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여행 차 구경꾼마냥 지나가는 바람소리들만이 들렸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찾아주지 않고 지나가기 바빴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게, 이럴 때마다 원망스러웠다. 급기야 나 자신이 못나서, 그게 슬퍼서 볼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엔을 찾고 싶었다. 간절히. 그러던 중 강한 힘이 내 몸을 들어올렸다. 이제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놔요! 빨리 놔요! 엔!”
“소리 지르지 않는게 좋을 거야. 아직 매드독들이 근처에 있을 거니까. 저대로 엔이 먹히는 꼴을 보고싶은 건 아니겠지?”
그랬다. 엔은 방금까지 매드독들을 상대했고 석재씨의 말대로 아직 근처에 있을 것이다.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 엔의 대답을 애써 잡고 싶었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가 매드독에게 죽는 것은 싫었다. 결국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어린아이처럼, 정작 필요할 때는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도 못하는 짐일 뿐이었다.
나 자신이 무력하고, 무엇보다 석재씨 때문에 두려워서 눈물이 났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보이지 않으니 모르는 채로 끌려가야 했다. 그래서 더 두려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엔.”
나지막하게, 힘이 빠지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석재씨에게 꼼짝 못하며 들쳐진지 오래, 쉬지 않고 걷던 그가 드디어 멈춰섰다. 바람이 강하고 물 흐르는 소리가 가까운 곳이었다. 강 근처, 라고 생각했다. 그는 왜 이곳으로 온 것일까. 그리고 이곳에는 무엇들이 있는 걸일까. 가능한 모든 소리들을 들어 알아내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내가 아는 소리라도 들려오면 좋았을 텐데.
“‘리재혁’이 누구야?”
석재씨가 누군가에게 묻고 있었다. 이 도시에 나, 엔, 석재씨를 제외하고 있을 사람, 리재혁과 그 위험한 사람의 부하라는 나쁜 사람들. 설마 그들에게 온 걸까. 벗어나야 했다. 내 허리를 잡고 있는 석재씨의 손을 붙잡고 떼어내려고 시도해 보았다. 역시 내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엔처럼 힘이 강하지 않아서.
“나야.”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느낌의 목소리. 의외였던 것은 ‘리재혁’이라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이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계속 남자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여자였다.
“간 크네. 제발로 걸어오고.”
“거래하러 왔어. 우리한테 배 하나를 줘. 건너편으로 갈 생각이다.”
“돌았구나?”
여자의 말이 끝나기 무겁게 총을 쥐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모두 석재씨와 나에게 겨누고 있었다.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아서 석재씨에게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 번 몸부림을 쳤다. 가능한 있는 힘들을 쏟아 부어 빠져나가려 하던 중 석재씨가 나를 들쳐메던 손을 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다 주었다. 발과 엉덩이가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다. 곧바로 손을 짚고 일어나 여자가 들렸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저 여자는 뭐야?”
“엔이라는 여자의 보물.”
“......정말로 돌았구나? 단단히 미친놈이었네.”
석재씨와 여자가 나를 두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런 대화를 신경쓸 여유와 용기가 없었다. 주변으로 쉬지 않고 들리는 물소리.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가고 있던 중 알 수 없는 무언가와 부딪힌 것이다. 처음에는 거대해서 벽인 줄 알았지만 손으로 만지고 나서야 키가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급히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틀고 움직였지만 가까워지기만 하는 물소리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엔의 보물. 취향 독특해졌네. 저런 장애인여자나 데리고 다니고 있다니.”
조금씩 다가오는 뾰족한 걸음소리, 차가운 손 하나가 내 턱을 잡고서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럼 이 여자를 줄테니 너한테는 배를 달라, 이거야?”
“아니.”
“그러면?”
“엔의 정보. 지금 어디 있는지 위치하고 상태에 대해서.”
“정말 생각없구나?”
여자의 손이 내 턱에서 옷 뒷자락으로 옮겨갔다. 석재씨 정도의 강한 힘이 날 억지로 끌어당기더니 나무바닥 같은 곳으로 던져졌다. 엉덩이가 아팠지만 더 이상 나를 잡고 일으켜주던 엔을 없었다. 대신 두려움 가득한 소리들만이 이어서 들려올 뿐이었다.
“엔, 그 여자는 단신으로도 마피아소굴은 물론이고 소말리아의 해적 본거지, IS본진까지도 거리낌 없이 쳐들어갈 여자야. 자기 물건에 대해서, 특히애정 가득한 걸 뺏겼다면 목숨은 개나 줘버리고서는 국가 규모의 단체도 상대하는 미친 여자지. 네가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이곳으로 오게 되있어.”
“당신은 지금의 엔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어.”
“필요없어. 그녀라면 옛이나 지금이나 정신나간건 똑같은 테니까.”
“약점인데도?”
“안돼요!”
석재씨가 말하려는 게 무엇일지 짐작이 되었다. 지금 그는 엔을 파는 것으로 모자라 생명까지 내어주려는 것이었다. 왜,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그의 입이라도 막아보려는 심정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들이 내 팔과 어깨를 짓누르며 역으로 막아섰다. 얼마나 세게 누르던지, 아프기까지 했다. 이래서는 입을 막을 수 없어 설득이라도 해보려 했다.
“절대로 안돼요! 정말로 엔을 죽이려는 생각이세요? 석재씨도 사람이잖아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엔, 엔. 불쌍한 우리 엔.”
차가운 손이 다시 느껴졌다. 이번에는 턱도, 뒷덜미도 아닌 머리카락이었다. 어깨도, 팔도 아픈데 여자의 손이 머리카락까지 잡아버리면서 아픔은 더해갔다. 벗어나고 싶어도 그럴 힘이 나에게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하지만 괜한 말을 했다고는 생각치 않았다. 석재씨의 말을 끓어버리는 것은 성공했으니까.
“살아있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런 뇌까지 단순한 장애인여자랑 다닐 줄이야.”
여자가 말할 때마다 내뱉는 숨 하나하나가 닿아왔다. 그녀의 말에는 비웃음과 함께 가시가 돋아있었다.
“아니면 이런 여자라서 데리고 다니는 건가. 알 수가 없네. 나라면 벌써 팔아치웠을 텐데.”
여자가 잡던 내 머리카락을 던지듯 놓아버리고 소리와 함께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날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던 큰 손들도 나에게서 떨어졌다. 마음은 바로 일어나서 달리고 있었지만 몸은 그러지 못했다. 두려운 것도 한 몫이긴 했지만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캄캄한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 두 다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강을 건너게 해줄게. 다 필요없는 거래였지만 엔이 여기에 제 발로 오게는 했으니까.”
“......그래.”
여자는 무슨 기복에서인지 나와 석재씨를 건너게 해준다고 말했다. 강을 건너게 되면 다시 엔과 만날 수 없다. 정말로 엔이라면 여기로 올 것이고 그러면 많이 위험해질 것이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키려는 석재씨의 손, 역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있는 힘껏, 여자의 발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렸다. 이대로면 엔이 위험하니까, 뭐라도 하고 싶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소리만큼은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여자의 몸을 밀쳐 물 속으로 빠트릴 생각이었다. 물소리가 엄청 가까우니까 가능할 거라고 믿었지만 뜻대로 하기에는 내가 너무나 무력했다.
“너도 돌았구나?”
밀쳐버리기도 전, 지금까지 맞아본 적 없는 충격이 배로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그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무엇에 맞은건지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그 만큼 아프다 못해 죽을 것만 같았다.
“곱게 보내줄 때 그냥 가. 보지도 못하는 마당에 듣지도 못하게 해줄까? 왜 뭘 하지도 못하면서 뭘 하려고 해? 아무것도 안하면 곱게 지나갈 텐데.”
“아...무것도......안하면 엔이 위험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다. 너무도 유명한 말이라서 내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그 정신은 좋은데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아무것도 안해도 이렇게 되고, 뭘 해도 이렇게 되는 거라면 그냥 닥치고 가만히 있는게 좋아. 특히 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라면. 알겠지? 이번에도 일어서서 이따위로 대들면 엔의 보물이건 애완견이건 가만히 두지는 않을 테니까.”
여자의 발소리와 함께 수많은 발소리들이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무력함에 울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 것은 엔의 목소리와 손이 아닌 석재씨였다. 조금 뒤, 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지 않고 날던 나비가 힘없이 떨어져 강에 떠내려갔다.
“야, 매너없는 년아! 칼빵에는 칼, 권총빵에는 권총 몰라? 니년만 그런거 쓰냐?!”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쌍년의 불공평하고 매너없는 행동에 대해 항의했다. 나는 손과 팔이 하나뿐이라 거치대가 없는 한 쓸 수 있는 무리라고는 권총뿐인데 저 썅년은 화력이 좋은 총을 멀쩡한 두 팔, 두 손으로 쏴갈기고 있었다. 똑같이 팔 하나를 잘라줘야 이해를 해주려나.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돈도 떼먹고, 외상도 떼먹고 간 것도 모자라 내 간도 떼어쳐먹으려 하고 있었다.
불만사항을 외치고 재혁이가 내려오는 것에 맞춰 몇 발 쏘려고 했다. 썅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총을 쏘기는 커녕 미친듯이 옆으로 달리며 피해야 했다. 항의에 대한 대답으로 망원경 대가리가 날아왔는데 그 밑에 플라스틱 폭탄이 붙어서 함께 날아오는 것이었다. 동전 안 넣길 잘했네.
2층에는 올라오기 전 보았던 안내도처럼 직원실들이 가득이었고 넓은 로비에는 ‘ㄴ’자의 창문을 따라 햇빛이 들어오는 빈 공간에는 굵은 기둥 하나와 여러 개의 단체의자들, 그리고 높은 사람들이 발표할 때나 쓰는 계단식 강단이 작게나마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중 엄청나게 굵은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내 어깨의 4배 크기의 사각형 기둥은 피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발끝까지 기둥 뒤로 숨자마자 망원경 머리가 ‘펑’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일찍 피한 덕분에 무사히 피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만 벌써 몇 번째 폭발소리를 듣는 걸지 셀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렇게 남이 쏜 것을 들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폭발이 끝나고 바로 누군가가 열심히 뛰어내려오는 ‘또각또각’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는 뻔하지. 기둥에서 빼꼼 내밀어 썅년이 열심히 유리창들이 깨져나간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글록을 겨누고 쏘고 싶었지만 그 년이 더 빨랐다. 내가 조금 내민 고개를 보자마자 아직도 들고 있던 AK를 내게 갈겨버렸다. 하마터면 얼굴이 갈릴 뻔했다.
“재혁아! 아까 틱틱소리 다 들렸다. 넌 뒤졌어!”
총알세례가 날아오면서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갈 때 총알이 없어 빈 소리가 나는 것을 겨우 캐치해낼 수 있었다. 이게 왜 승리냐면 두 팔이 있어도 장전을 해야한다. 그 빈틈으로 내가 먼저 겨누고 있으면 선점을 얻어낼 수 있었고 그 첫 점수에 썅년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려다가 다시 기둥 뒤로 숨어야 했다. 재혁이가 새로운 총을 두 손에 쥐고서 내가 생각했던 짓거리를 먼저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얼굴이 날아갈 뻔했다. ‘모신나강’은 싼 값에 사람을 사냥하기 좋은 총이니까. 그나저나 쟤는 이런 판국에 저런 것들을 어디서 구했대니?
“옛날 총이라도 소총은 소총인거 몰라?!”
“권총보다 탄수가 훨씬 적잖아. 너무 배가 부른 거 아냐?”
“배고파 뒤지겠다 씹년아! 밖에 있는 우리 맥스는 존나 배부르게 쳐먹는 중인데, 시발.”
맥스는 지금쯤 여러 뷔페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재혁이 모신나강을 들고 있다면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거리만 좁혀진다면 한 발 한 발 노리쇠를 당겨야 하는 볼트액션 총이라 권총과 근접전이 주인 내가 유리했다. 이제 그 좁힐 방법을 찾던 도중 손 바로 옆으로 먼지가 쌓인 채 세워져 있는 소화기가 잡혔다. 바로 잡아채고 두 다리로 고정시킨 뒤 안전핀을 뽑았다. 이대로 던져서 연막대용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재혁아! 나도 선물!”
한 팔에 가득 힘을 싣고 던져버렸다. 썅년의 솜씨라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실력이었다. 나는 그런 재혁이에게 기대를 걸었다. 뭣하면 내 몸도 걸 수 있었다. 그만큼 진짜로 썅년의 사격실력은 훌륭하다. 그런데 이 년이 내 배팅을 알았는지 갑작스러운 물체가 날아왔음에도 총은 커녕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툭 튀어나오면 당황해서 쏴 맞추는데 쌍년이 한 발도 쏘지 않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배신감이 엄청나게 몰려왔다. 오죽하면 내 멋대로의 신회에 죄없는 저 년이 욕을 한 사발 쳐먹을 정도였다.
“시발년아! 허구한 날 총만 쏴대는 년이 그거하나 못 맞추냐?! 이 정도는 눈감고도 맞춰야 할 거 아냐! 시발! 그래 나 몸 걸었었다. 다 너 가져라! 간나년, 퉤퉤!”
“맞춰줘?”
내 욕에 속이라도 상했는지 갑자기 썅년이 방아쇠를 당겨 쏘았다. 2발이 날아왔는데 기둥면마다 있던 소화기들 중 2개를 맞춰 터트린 것이다. 하얗고 자욱한 연기가 내 시야를 가둬버렸다.
“엄마야! 시발!”
나는 갑작스러운 소화기폭발과 총소리에 사라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진짜 사라였다면 뒤에 욕을 붙이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잘 되었다. 이대로 뛰쳐나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보다 재혁이가 더 빨랐다. 유리가 밟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뽑았고 기둥 뒤에 있던 내게 던졌는데, 그게 내 바로 옆으로 굴러왔다. 작고 동그란 수류탄이었다. 욕할 틈도 없이 기둥을 따라 왼쪽으로 꺽어 들어갔다. 기둥의 다른 면에 숨어버렸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수류탄이 터졌고 바로 옆에 있는거나 다름없는 나에게 굉음을 울렸다. 그나마 오른손으로 수류탄 쪽의 귀라도 막은 덕분에 고막이 터져나간다던가 청력을 잃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인생살면서 많이 들었던 소리중 하나긴 했지만 여전히 큰 소리였다.
수류탄이 터지면서 순간적으로 강한 폭발과 힘 때문이었는지 소화기의 연기가 한 순간 짙어졌다가 조금씩 연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그 사이로 재혁이가 또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있던 곳에서 문으로 나와 바로 옆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회가 온 것 같았다. 내 기억이 확실하겠지만 썅년이 들어간 직원실과 아까까지 모신나강을 들고서 날 괴롭혔던 방이 중간에 문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기다 연하기는 해도 여전히 시야를 비좁게 하는데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저 년은 아직 날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옆구리를 노리고자 기둥에서 튀어나와 빠르게 걸어 썅년이 처음 들어갔던 유리깨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재혁이는 아직까지도 내가 기둥에 있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착각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진입하려다 다시 기둥으로 빠르게 돌아와야 했다.
“썅년아! 네가 무슨 시발 우리 삼촌이냐?”
“나도 군인이었어. 문제 있어?”
“그것도 그렇네. 시발! 하여간 군인이 문제야.”
그녀가 모신나강을 들고 모습을 보이면 총구를 쳐내고 빠르게 글록으로 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걸 무심하게 무너트리며 샷건을 들고서는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다행히 먼저 봐서 다행이지 얼굴만이 아니라 상체가 날아갈 뻔했다.
기둥 뒤로 다시 몸을 숨기자 썅년은 내 쪽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한 발, 산탄총의 불길을 내뿜었다. 강력한 샷건의 탄알이 내 옆에 있던 의자들을 반토막 내버리고 내가 숨은 굵은 기둥까지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소리도 시원시원 한 것이 기둥을 나무베듯 무너트릴 기세였다. 그 전에 총알이 바닥나서 멈췄지만.
이제는 함부로 고개를 내밀수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 소리를 기다리던 그 때 재혁이의 쥐새끼마냥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는 게 아닌 멀어지는 소리였다. 다시 유리가 깨진 방으로 향하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감이 들어서 고개만 빼꼼 내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의 반 정도를 기둥 밖으로 내빼었다. 드디어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뒤늦게 들어온 기회, 놓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너무 재빨랐다. 역시 어중이떠중이들하고는 다른 년이었다.
그녀가 몸을 숨겨 들어가자마자 나도 기둥 뒤로 숨었다. AK, 플라스틱 폭탄, 모신나강, 수류탄, 샷건. 이것들에 이어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또 수류탄 일수도 있어서 미리 피할 수 있도록 기둥 모서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무기가 튀어나올까. 눈을 감고 소리에라도 집중했다.
‘드드드득’하며 무언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으로 무기 하나가 빠르게 떠올랐다. 석궁. 탄력있고 연속적으로 당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무기는 내가 아는 한 석궁뿐이었다. 방탄복도 뚫어버리는 강력한 무기였다. 오히려 석궁이라서 다행이었다. 한 방은 강력하겠지만 장전이 엄청 오래걸릴 뿐더러 첫 발만 피하면 장땡이니까. 이제 문제는 그 첫발을 어떻게 쏘게 하느냐였다. 방금처럼 갑작스럽게 물건을 던져봐야 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모습을 비추지 않는 한.
머리를 굴리며 방법을 찾던 그 때 바로 옆에 있는 거울에 눈길이 쏠렸다. 기둥에 붙어있던 거울이었는데 액자가 부서지고 여러 조각들로 깨진 거울이었다. 그나마 큼지막한 부분이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 거울을 손으로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몸을 내달릴 준비를 했다. 기회는 한 번이었다.
“재혁아. 까꿍!”
들고있던 거울로 내 모습이 제대로 비치도록 비스듬히 던져버렸다. 여기서 재혁이의 탁월한 솜씨가 튀어나왔다.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 거기에 정확히 내 남은 팔을 맞추는 것이었다. 정말로 남은 팔마저 잘라버리려고 했나보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맞춘 것은 깨져버린 거울판이었다. 검은색의 화살은 거울을 깨부수고 벽에 깊숙이 박혔다. 우리사이에 생겨버린 빈틈을 놓치지 않고 드디어 내가 걸음을 나섰다. 글록으로 썅년이 있는 위치에 총알을 쏘며 고개를 아예 내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재혁이도 고개를 조금이라도 내미는 순간 내 총알에 티켓 하나를 끊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덕분에나는 무사히 계단까지 도착했다. 싸움판을 좀 바꿀 생각이었다. 폭탄의 흔적으로 반 부서져버린 계단을 뛰어내려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 나의 바로 뒤로 신경질적인 화살이 하나 더 날아와 애꿎은 벽에 박혔다. 좋았어! 이번 작전도 완벽했어! 사라만 있었어도 마음껏 자랑했을 텐데.
내려오자마자 약도에서 보았던 편의점 하나와 옆으로 넓은 식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선택한 곳은 식당이었다. 1층은 2층이나 3층과 달리 주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왕이면 넓고 의자나 식탁같이 이용할 수 있는 게 많은 곳이 좋았다. 식당의 안을 달려 맨 끝에 위치하고 있는 창문 쪽 식탁을 모두 엎어버린 뒤 몸을 숨겼다. 조금 뒤 나를 따라 내려오는 발소리에 미리 계단 쪽으로 총구를 내보이고 기다렸다. 그런데 생각치 못한 슬라이딩으로 편의점의 유리문을 깨고 들어가는 재혁이었다. 가슴을 맞추도록 겨누고 기다렸것만. 이제껏 제대로 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시 몸을 숨기고 탄창을 확인해보니 12발의 탄환이 남아있었다.
“야! 재혁아!”
협상을 하기위해 잠시 썅년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부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말로 대답을 해주면 뭐가 그렇게 덧나는 건지 끝나지 않은 총알세례가 쏟아지는 것이다. 그 소리에 곧바로 몸을 엎드려 맞지 않도록 피했지만 깨져 날아오는 유리조각들과 그 사이로 들어오는 거센비, 부서지는 탁자조각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여유롭게 샤워도 못해서 찝찝했는데 저 년 덕분에 더 찝찝해지는 샤워를 하게 되었다. 다른 테이블들을 엎어가면서 주방 안으로 옮겨 몸을 숨겼다.
“왜?”
거 참 대답도 빨리 해주네.
“시발년아! 양심이 있으면 북쪽새끼가 남쪽 총을 쏘면 안되지!”
“너도 우리거 사용했었잖아.”
“너네 거냐?! 러시아거지! 원산지 구라치지마. 사기꾼새끼야.”
“사용하긴 했네.”
다시 한 번 총알세례가 날아왔다. 하여튼 미운짓만 골라서 하는 양심없는 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있다면 지금 쏟아졌던 총알세례가 마지막이라는 것이었다. 저 멀리,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경쾌한 ‘틱틱’소리가 1층을 울렸다. 바로 식탁 옆으로 빠져나와 글록으로 썅년이 들어간 편의점에 갈겨버렸다.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게 떨어졌는지 재혁이도 자신이 애용하는 FNP를 들고 맞대응을 해왔다. 내 것보다 좋은 ‘벨기에’제였다. 우리는 각자 식당과 편의점을 끼고서 탄창속의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주고받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의미 없는 싸움이었다. 피하고 쏘고는 몇 번 반복해도 서로 상처입지 않았고 아까운 총알과 체력소모만을 주고받았다. 급히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더 이상의 탄창을 남아있지 않았다. 다 써버린 것이다. 재혁이는 어떨까. 그녀는 벌써 도끼를 꺼내드는 행동으로 나와 같은 상황임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