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Envy (Wake Up, Shara) - 3
경찰서 안에 있던 의자며, 책상이며, 컴퓨터며 어쨋든 무거운 것들을 한가득 모아 문 앞에 쌓아 단단히 막았고 창문들에는 찌그러지거나 부서진 사물함에서 꺼낸 경찰복들과 유치장 안에 있던 담요들로 창문들을 가려 바깥으로부터의 시야를 차단시켰다. 담요들은 먼저 머물렀던 사람들이 놔두고 간 것 같았다. 아니면 어떤 동정심 깊은 형사가 잠잘 때 덮으라고 줬을지도 모르고. 이것저것들을 힘써가며 밀어버리고 가운데 공간을 만들어 자리를 잡았다. 가운데에 램프를 켜고 주위를 밝힌 뒤 각자 자리를 잡았다.
나와 사라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석재가 앉아서 기본적인 총기점검을 했다. 여기저기를 분해하면서 부품들을 하나하나 손보았는데 경험도 있어 보이고 관련 지식도 꽤나 있어보였다. 하기야, 그가 사용하는 총들은 군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총들이었으니 많이 다뤄봤을 것이다. 대충 나이만 봐도 군대도 다녀온 것 같고.
삼촌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구닥다리 옛날 총이나 신형으로 새로운 총을 들여오면 나에게 보여주면서 자랑질을 했었다. 정작 본인은 쓸 일도 없으면서 계속 쳐 들이기나 하고. 거기다가 어디서 모를 쓰레기 총들만 들고와서 딱히 뺏어 쓸 일도 없었었다.
“석재씨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프로그래머를 했었어. 혹시 라는 게임을 알아?”
“대학교 친구가 자주 했었어요. 정말 재미있었다고.”
“그거, 내가 프로그래밍 한거야.”
“정말요? 대단하신 분이었네요!”
사라와 석재는 열심히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지치지도 않는 건가. 거기다 게임같은 시시한 주제로 얘기하는게. 게임을 아예 접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별로 흥미도 없었고 서울에 있던 양아치놈들이 운영하던 게임들도 매한가지였었다. 뭔 돈을 벌 수 있는 게임들이래서 강제로 뺏은 뒤 몇 번 해보았지만 재미라고는 개뿔, 1도 재미없었다. 그 딴 모니터에서 몬스터 죽이는 게 무슨 돈이 되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둘이서 웃음까지 지으며 재미있게 얘기하는 동안 안주거리가 없던 나는 주인 잃고 아우성만 쳐대는 경찰사무소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신문지들이 날아다니고 피가 묻으며 부서진 화이트보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보드 위에는 여러 명의 인물사진들이 붙어있었는데 모두 모르는 얼굴인 것을 보니 팔에다 타투나 그리고서 애들 삥 몇 푼 뜯는 나부랭이들 이었다.
경찰서를 보면서 거북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내가 범죄자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만약 단순히 그런 이유였다면 이미 경찰이 사라져버리고 텅 빈 이 폐건물 따위, 거북할 이유가 없었다. 이 모든 이유는 한 형사때문이었다. 부산에 근무를 하던 젊은 형사였는데 이 빌어먹을 놈이 나에 대한 집착성이 강한 나머지 내가 조금이라도 활동을 했던 곳이라면 모두 들쑤시고 다닌 놈이었다. 심지어는 나라에서 한 가닥 했다는 쓰레기들의 소굴도 들어가 아예 개박살을 내기도 했던 또라이였다. 그 탓에 1년 정도를 맘 편히 활동할 수도 없었고 여기저기를 계속 움직여가며 피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그 새끼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던 크리스마스, 이미 가족하고는 모두 연을 끊었던 때 혼자서 거리를 거닐고 있던 때, 어차피 경찰들은 내 얼굴따위 모르고 엄마나 아빠새끼한테 손 끝도 닿지 않았던 상태라 돌아다닌다 하더라고 걸릴 위험이 적은 때였다. 나이는 20살이었고 겨울용 부츠와 청바지, 처음 입어보는 롱 코트를 걸치고서 산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남산타워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별로 사람을 죽이거나 깽판을 친 것은 없었고 산타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위해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하니 창 밖을 보면서 언제 지나가나, 언제 나에게로 오나 하며 있던 때 내 옆으로 그 형사새끼가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웬 처음보는 남자가 겨울용 패딩대신 검정색의 정장차림을 하고서 갑작스럽게 내 옆에 앉은 것이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었다.
“드디어 만났네요.”
별안간 미친놈을 보는 줄 알았다. 형사란 새끼가 자신이 쫓는 최악의 범죄자를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딴 인삿말이었는데 당연히 미친놈이지.
“너냐? 지금까지 날 쫓아온 진돗개라는 작자가.”
“그 별명은 제가 만든게 아닙니다.”
“됐고, 거 참 더럽게 쫓아오네. 시발, 어떻게 찾았냐?”
그가 나타났다고 당황하지는 앉았다. 질 것 같지 않았고 품 안에도 그를 쉽게 제압할 스턴건과 글록17을 지니고 있었으니 언제라도 죽여버린 뒤에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이곳의 CCTV로는 내 얼굴을 제대로 담지 못하니까.
“산타를 쫓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산타가 선물대신 이 인간을 보내준 듯 했다. 선물 한 번 거하네.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시련을 던져줬으니.
“당신 경찰친구들도 잔뜩 데려왔어?”
“‘엔’씨에 대해서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요.”
“미친새끼. 별의별 웃긴 놈을 다보네. 하하하!”
정말로 웃겨서 웃었다. 무슨 배짱과 정신머리로 나에 대해 알리지 않을 걸까. 당장 나를 잡아 쳐넣고 목을 따든, 태워버리든, 설령 죽이더라도 상관없으니 잡아가기만 해도 경찰 내에서 엄청난 입지를 다졌을텐데. 삼촌도 말했었다. 일개군인이 나를 잡으면 당장 계급특진은 물론이고 포상금에다가 명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 명에스러운 기회를 이 멍청한 경찰이 밖으로 내다 던져버린 것이다.
“크리스마스에는 누구나 산타를 맞이할 수 있으니 조금 시간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두 손 잡고 참회라도 시키게?”
“자수할 시간.”
그는 나에게 자수하라고 권했다. 정말로 미친놈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 지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좆까라고 한다면?”
“내일부터 수많은 경찰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고 뉴스를 통해 인기스타가 되실 겁니다.”
“그럼 나 범죄나 연예인 되는거야? 스케쥴 잡아놨겠지?”
“스케쥴은 얼마든지 잡혀있습니다. 오늘까지는요.”
“그럼 전부 취소해놔.”
그는 나의 대답에 놀라며 눈을 쳐다보았다. 그도 나를 미친년이라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겠지. 아무리 강한 양아치들이라도 어지간한 인맥이 없는 이상 한 번 쯤은 겁쟁이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겁은 커녕 도전장을 받고 그 밑에 새로운 도전장을 써냈으니 놀랄 수밖에.
“오늘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갑자기 그가 눈이 내리를 밖을 보며 말을 돌렸다. 창 밖에는 새하얀 눈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드디어 산타가 지나갈 때가 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그도 내 옆에서 따라와 나란히 섰다.
“이봐, 곧 산타가 올 시간이야. 넌 올 해 한번이라도 운 적이 있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산타가 지나갈 거라는 것에 나도 미쳤나보다. 형사한테 말이나 쳐 걸고있는 걸 보면.
“......있습니다.”
“저런, 안됐네. 선물 못 받을 거 아냐. 난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찌질한 놈.”
경찰이라는 놈이 울었다니. 그것도 그 유명한 경찰이.
“,,,,,,지금까지 저는 여러 범죄자들을 봐왔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더군요. 당신들 같이 최악의 악인들은 모두 순수하더군요. 신기하게도.”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미친놈. 아직 바람구멍도 안 냈는데 병신지껄이를 다하네. 지금 바로 만들어줄까? 구멍으로 병신바이러스 빠져나가게.”
일부러 비꼬면서 그에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형사의 모습을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딘가로 가버린 것이다. 밑에는 명함 한 장이 부자연스럽게 떨어져 있었는데 경찰마크와 함께 이름이 석 자 적혀있었다. ‘이철휘’. 미친형사의 이름이었다. 이 날이 그 형사와의 첫 만남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아무튼 그 형사와의 만남이 있고난 뒤 경찰서를 보기만 해도 거북감이 들었다. 근처에 가기도 싫었고 앞으로도 공기조차 맡기도 싫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결국은 와버렸으니 입 닥치고 속까지 들이밀며 버텨야 했다. 이런 내 심정은 전혀 모른 채 사라와 석재는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게임얘기에서 학교생활 얘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로만 바톤을 주고받다가 사라가 잠시 나에게 옆구리로 넘겨주었다.
“엔은 문과였어? 아니면 이과?”
“문과? 그게 뭔데?”
갑자기 학교얘기에서 문과라던가 이과라던가 이상한 얘기로 넘어가는 바람에 흐름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은 사라와 석재였다. 아니, 사라는 맞지도 않은 시선으로 내 옆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고개를 잡고 똑바로 날 보게 했다.
“왜? 시발, 꼬라만 보지 말고 설명을 하라고! 문과는 뭐, 문 만드는 과야?”
“엔, 놀리는 건 아닌데 혹시 고등학교 안 나왔냐?”
“가지도 않았어! 관심도 없었고. 그런 쓸데없는 곳에 내가 왜 가야하는데? 시발, 우리 엄마도 학교 안 나왔다고.”
“엔, 진정해. 엔만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참 퍽이나 뒤늦게 고맙네.”
앉아있던 사라는 손으로 내 무릎을 이리저리 짚으며 위치를 확인하고 조심히 머리를 눕혔다. 슬슬 잘 시간이 될 것이다. 옆에 있던 침낭을 꺼내 그녀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이후는 자신이 알아서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가 편안토록 자세를 움직였다. 머리는 변함없이 내 무릎을 베게삼아서 기댄 채였다. 평소와 달리 일찍 잠드는 그녀였는데 하기사, 오늘은 쉬지않고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녔으니 충분히 피곤할 만 했다. 벌써 눈꺼풀도 내려가 있었다.
“뺀질이. 너도 잘거면 미리 자지 그래?”
“누구 하나는 깨어있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있잖아. 귀찮게 내일 걷다가 졸립다느니 잠이 온다느니 지껄이면 일주일은 재워버릴 거니까 빨리 꿈이나 꾸라고.”
“왜 혼자서 다려고 해? 번갈아가면서 하면 되잖아.”
“아, 시발 그냥 좀 자라고! 잠 귀한 줄 모르네.”
“너, 배려받는 거, 어색해?”
그는 그 새 잠자고 있는 사라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그녀는 곤히 잠에 떨어져 약한 가슴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받는 배려는 돈이랑 산타, 그리고 사라뿐이야. 됐지? 이 이상 주둥아리 안 잠그고 패턴열면 총으로 비밀패턴 바꿔버릴 줄 알아.”
“2시간 뒤에 깨워.”
“개새끼가?!”
총대신 주먹을 날리려다가 사라가 내 무릎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잠에서 깨면 안 돼지. 내가 움직여버리면 이 평화로운 잠을 깰테니까. 다행인건 석재가 누워서 잠을 청했다는 것이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다. 품안에서 권총을 꺼내 쥐고 램프를 꺼버렸다. 새까만 어둠이 경찰서 사무소를 덮고 밖으로 새어 들어오려는 조그만 달빛이 기를 쓰고 있었다. 그 날도 달빛이 무척이나 밝았었다. 사라는 보지 못했을 테지만.
이런저런 짧은 잡생각들 사이로 ‘쿵’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일같이 이 시간때면 들려오는 소리. 나조차도 언제나 긴장은 시키게 만드는 소리. 크립톤들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머문곳은 1층이었기에 천장에서부터 막아놓은 문들과 창문으로 움직이는 소리들이 실루엣과 함께 지나갔다. 건물 곳곳을 뒤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지능이라고는 크게 없는 놈들이라 막혀있는 곳은 들어오지 않고 대부분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의 본능은 권총을 꽉 쥐고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혹여나 들어오게 된다면 싸워야 하니까. 몇 번 정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다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사른 깨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갔네.”
대신 바로 잠든 줄로만 얼었던 석재가 깨어나 있었다. 그도 나처럼 손에 K1A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나처럼 밤에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나 보다. 완전한 생존 동급생이라는 소리였고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 베테랑노인네보다는 실력쪽으로 믿을 만해보였다.
“이제 교대하자.”
석재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며 말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게 느껴졌던 그 순간이 벌써 2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크립톤들이 그렇게나 오래 있다 갔던가. 새롭네.
“좋아. 대신 넌 1시간 뒤에 날 깨워.”
“그냥 2시간 단위로 하면 되지. 왜 그렇게 혼자 다하려고 해?”
“너, 나 존나 싫잖아.”
침묵으로 대답하는 석재와 나의 사이로 무거운 분위기가 스며들어왔다. 저 새끼가 날 싫어한다, 모르면 바보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공과 사는 구별하시겠다? 멋있네, 농담말고 진심으로.”
박수까지 쳐주며 칭찬해주었다. 그는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인생교육의 첫마디밖에 안 해 주었으니까. 이어서 내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공과 사? 시발, 그런게 어딨어. 맨날 잘난체하는 새끼들만 그렇게 떠들어대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공’따위는 없어. 모두 ‘사’에서 나눠질 뿐이지. 가면을 곁들이고 겉만 뺀지르한 너같은 ‘사’와 모든걸 내던지고 세상의 쓰레기로 전락해서 내 좆대로 돌진하는 나같은 ‘사’.”
“미운 말만 골라서 하네.”
“맞아. 그래서 내가 미운 오리새끼야. 딱 봐도 알잖아. 너네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뿐더러 날지 못해서 땅에만 쳐박혀 산다는거.”
“......자라.”
같은 동급생이지만 가치관과 지내온 환경이 달라 더 이상 이을 수 없는 대화가 끊겼다. 우선은 그의 말대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지만 갑작스러울 수도 있을 그의 행동과 크립톤에 대비해 앝은 잠만을 자리고 했다. 자세가 변한 거라고는 고개를 숙인것이 다였다. 손에는 여전히 권총을 놓지 않았고 눈만 감았다. 달콤한 꿈 따위는 없었다. 나한테는 그런 사치도 무거웠다.
혼자서 밤을 드세우며 경계를 하려했던 계획이 무너지고 번갈아가며 둥지를 지킨 지 3번째 타임. 아침해가 떠올라 오르면서 크립톤들이 좋아하던 커튼들이 치워졌다. 그에 맞춰 미리 나갈 수 있도록 문이나 창문을 막아두었던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 램프를 챙기면서 나이프와 권총을 간단히 확인했다. 완벽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충분히 쓸만 한 상태였다.
“엔?”
열심히 치우는 소리가 조금 시끌벅적했는지 사라가 눈을 뜨고 침낭 밖으로 나와있었다. 그녀의 눈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을 향하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는 나와 반대쪽 방향이었다.
“좋은 아침. 밥 먹자.”
석재는 피곤한지 아직까지 잠에 빠져있었다. 일부러 깨우지 않고 더 자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마 그도 편안히 잠잘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배려는 아니고 조금이나마라도 내 눈을 붙이게 해준 보답이었다.
배낭에서 가져온 과일통조림과 오는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얻어온 감자 2개를 꺼냈다. 사라에게는 통조림2개와 감자 하나를, 나는 감자 하나만을 들고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솔직히 식사라고는 못하겠다. 몇 번 먹으면 사라져버리는 양이니까. 불을 피우고 고기를 먹어본지도 공돌이 이후로 없었다. 사라에게 정체모를 크립톤 고기를 먹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 혼자 쥐새끼를 잡든 사람을 잡아 구워먹든 그런 노릇도 할 수 없었다. 사라하고 있을 때 만큼은 항상 같이 먹고 사람이라는 선에서 지킬 수 있는 행동만을 지향했다. 이는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내가 만들어준 지팡이로 걸음연습을 시켰다. 이번에는 방 하나에서가 아닌 복도를 포함해 다른 곳 안으로도 들어갈 수 있도록. 사라가 혼자서 걷고 내가 옆에서 감독관 겸 경호원처럼 따라 다니는 형식으로 연습을 진행했다. 그녀는 똑똑하니까 별 탈 없이 걸어 다니면서 금방 익힐 것이라고 생각하며 걱정따위 반 정도 비워버린 상태로 가볍게 따라갔는데 똑똑한 것과 걸음은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오늘, 장애인계의 장영실인 내가 그걸 밝혀냈다.
“이 멍청아! 지팡이를 쓰고도 벽에 부딪히면 어쩌다는 거야?”
“미안해, 다시해볼게.”
이걸 연속으로 반복해야 했다. 사라의 반응이 너무도 느린게 문제였다. 지팡이로 길을 짚다가 벽에 부딪히면 바로 좌, 우를 짚어보고 어느 쪽으로든 돌아서 가야했는데 그러기도 전에 계속 걸음을 앞으로 움직이다 벽에 부딪혀버리는 것이다. 미안하다면서 다시 해보겠다고 하면 다시 부딪히고 그럼 나는 욕을 했다.
“멍청아!”
결국은 4번 정도를 부딪히고 나서야 내가 그만두게 했다. 이 이상 더 지켜보았다가는 그녀의 이마만 깨질 것 같았다. 다음에 할 때는 사라의 이마에다가 고무나 쿠션들을 붙이든 해야겠다. 안 그랬다가는 진짜로 이마가 깨져서 울고불고 난리가 날 지도 모른다. 이제 석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출발준비를 해야할 때였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기분 더러운 나비 한마리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엔!”
사라의 갑작스런 다급한 목소리.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
급히 사무실로 돌아와 잠자고 있는 석재를 제치고 창문을 열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오토바이가 맹렬히 다가오고 있었다. 시발, 아침부터 지랄이네. 오토바이 무리인 것이다. 석재를 깨우기 위해 허리츰의 글록17을 꺼내 그의 옆으로 3발을 쏘았다. 큰 총성과 함께 총알이 벽에 박혔다.
“으아! 뭔 일이야?!”
그가 다급히 일어나면서 총을 주워들었다. 이제 맞이할 준비가 끝이 났다.
“일어나라고. 본능적으로.”
석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옆에 있는 탄 흔적을 보더니 나를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며 화를 내었다.
“미쳤어?! 불만 있으면 말로 해!”
“모닝샷, 개새끼야! 깨워줘도 지랄이네. 영원히 재워버릴까.”
“그냥 평범하게 깨우면 되잖아!”
“그래, 다음부터는 귀에다가 속삭이면서 깨워줄 테니까 당장 준비나 해! 폭주족들 오셨다.”
“폭주족? 어디?”
사라를 창문 밑에 앉힌 뒤 바깥을 보았다. 오토바이가 정말 빠르기는 했다. 벌써 앞까지 와서는 총구를 여기로 겨누고 있는 걸 보면. 이 경찰서는 무슨 생각으로 건물을 이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창문의 높이도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아서 깨버리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이나 다름없었다. 병신새끼들. 이따구로 지어놓았네. 석재는 책상 하나를 끼고서 숨어있었다.
“우리 앞에, 니 부랄 간격 거리만큼.”
급히 내밀었던 고개를 숙여 피하자마자 바로 위로 총알세례가 쏟아져 지나갔다. 안에 있던 각종문서들이 흩날리고 다른 유리창들도 깨져 파편들이 날아다니는 사이로 우리의 목숨들이 왔다갔다 했다. 이 세례는 진짜로 우리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사라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고서 떨고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서 평화롭게 총소리로 셈을 하면서 몇 명 정도의 깡패들이 찾아왔는지 세어보았고 대략10명 정도가 총을 쏴재끼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미술실에서 내 보물을 사용하는게 아니었다. 우라질.
“생각이 있어!”
총성들 때문에 잘 들리지 않지만 석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하는 한 마디를 겨우 주워 담았다.
“뭔데? 섹스?!”
“장난치지 말고! 내가 시간을 벌 테니까 넌 사라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그 이후에 싸워!”
“그게 생각이냐?! 니새끼 전기담이지.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말해봐!”
우리 위로 지나가는 총알세례가 멈추자마자 등에 메고있던 MP5를 풀어 사라에게 쥐어주었다. 탄창에 총알 가득한 총이었다. 두 손으로 무엇인지도 모른 채 꽉 쥐고 있는 사라에게 속삭이며 작전을 말해주었다.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지금 들고 있는거 있는 힘껏 위로 던져. 무조건!”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작전을 시작했다.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어제의 싸움처럼 내가 여자라는 것을 이용해 항복의사를 비치며 틈을 만들고 사라가 총을 위로 던져주면 그것을 낚아채 저들에게 퍼붇는 것이다. 물론 그냥 퍼부었다가는 나도 총알에 찢길 테니 한 명이 다가오면 그 놈을 방패로 삼아 모조리 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너무나도 완벽했다.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바로 시작을 알렸다. 두 손을 번쩍 위로 들고 창문에 나 자신을 노출시켰다.
“항복! 항복! 존나게 많네. 겨우 2명 잡겠다고 우르르 몰려오는 거 안 쪽팔리냐!”
헬멧을 쓴 사람을 포함해서 11명의 오토바이 무리가 총을 들고 있었다. 대부분이 MP5를 들고 있었다. 내 항복의사를 본 그들 중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간지나게 헬멧을 벗고 자신의 대머리를 드러내며 조금씩 다가왔다. 딱 봐도 싸움만 하면서 지내온 건달새끼였다.
“네가 내 애들 죽인 년이냐?”
듣자마자 어제 죽였던 그 새끼들이 떠올랐다.
“절대로 곱게 죽지 못 할 거야. 오토바이에 매달려서 갈아버리겠어.”
얘네들은 오토바이를 이용해서 사람들 갈아버리는게 전매특허 인 것 같았다. 벌써 2번이나 들었는데 감동도 재미도 없고 임팩트도 없었다. 크게 와닿지도 않는이 대사에 무슨 반응을 던져주어야 할까.
“그래! 시발롬아! 내가 죽였다. 꼬추라도 크면 묶어두고 딜도로 써볼까 생각은 해봤는데 죄다 작아서 죽여버렸다고. 됐냐? 내 친구도 똑같이 말했어! 존나게 작다고.”
대머리의 표정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내 귀 한쪽을 뜯어먹을 기세였다.
“내 친구도 소개시켜줄까? 사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사라는 있는 힘껏 쥐고 있던 총을 위로 던져 올렸다. 지금 대머리는 나와 거리가 가까워 방패막이로 쓰기에 딱이었고 총만 제대로 낚아채 갈아버리기만 하면 끝나는 상황. 그야말로 낙승인 상황에서 한 가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벌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황당했는지 나도, 앞에 있는 오토바이 무리들도 잠시나마 돌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사라에게 있는 힘껏 던지라고 말하긴 했는데 너무 힘을 주고서 던져버린 나머지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한 번도 쏴보지 못한 총이 바닥에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좆 된 상황이 더 좆되고 말았다. 이 새끼들 자존심도 그렇게 긁어놨는데. 사라를 탓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시킨대로만 했을 뿐이니까. 아, 시발, 좆됐네 진짜.
“하......있잖아. 다시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너네 친구들 꼬추 꽤 큰 것 같았어. 물론......지금은, 죽어버렸지만.”
대머리가 뭔가 더 할 말이 있거든 한 번 씨부려 보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영 보기좋은 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여러번 다른 시뮬레이션들을 돌려보지만 역시 쉬운 방법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던 그 와중에 미술실에 굴러다니고 있는 소화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발을 들어서 아직도 책상 뒤에 숨어있는 석재에게 소화기를 가리켰다. 다행히 내 의도를 잘 파악한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시간을 끄는 것이다.
“알아. 나한테 할 말이 많다는 거.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겠지. 이해해. 근데 그냥 죽이기에는 아깝지 않아? 크립톤들이 여자들을 데려가는 상황에서 나같은 애들이 엄청나게 귀하다는 거 알지? 한 번씩은 떡이라도 쳐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 나 잘해. 거기다가 존나게 좋아하고. 원한다면 너네들이 들고 있던 마약빨고 해 줄 수도 있어. 아, 3P를 넘어서 6P도 가능해. 경험 있거든. 어때? 좀 끌리지 않아?”
일부러 없는 가슴까지 끌어모아 내가 여자임을 과시했다. 그런대도 대머리를 관심 없다며 화난 표정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시발롬들아! 나 가슴 작다! 꼽냐? 근데 시발 가슴 작은게 내 죄야?! 니네도 꼬추 작은거 니네 탓 아니잖아!”
“할 말, 다 한 거겠지?”
대머리의 손에 커다란 도마칼이 쥐어져있었다. 이제 끝장을 보려는 것이다. 조심히 눈을 돌려 석재쪽을 보았다. 그는 무사히 소화기를 들고 안전핀까지 뽑아놓은 상태였다. 여기도 끝을 볼 준비가 끝났다.
“할 말 아직 있지.”
“뭔데?”
“사라도......가슴 작아.”
가슴얘기를 끝으로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던지며 물러났다. 그리고 석재가 곧바로 일어서서 소화기를 이쪽을 향해 넓게 뿌렸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기 직전에 대머리가 놀라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이판사판으로 나도 권총을 뽑아 대머리가 있던 곳에 2발 쏘았다. 맞았을 지는 모르지만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