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Envy (Wake Up, Shara) - 2
몸을 일으키고 이제는 정말로 이곳을 떠나 저 건너편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렇다, 올라타려고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것말고는 어울리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개 시발이었다. 이제서야 좀 쉬려했더니 어디선가 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하......이번에는 또 뭔데? 진짜 똥개야?!”
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 근원지를 찾다가 저 높이 건물의 옥상에서 네 발의 짐승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게 보였다. 보통 개들보다는 큰 대형견의 체격에 호랑이 마냥 한쪽에 긴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고 앞의 두 발이 근육으로 굵직한 짐승이었다. 저거 똥개 맞아? 아예 처음보는 개였다.
거기다 위협적이게 보이기까지 했는데 머릿속으로 한 단어가 떠올랐다. ‘돌연변이’. 체이스벳에 이어서 이제는 이놈들이었다. 거기다가 한 마리도 아니었다. 건물 여기저기 옥상위로 10마리는 족히 되어보였다. 서울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이야, 똥물이 아니라 지옥불을 한 사발씩 들이키고 오셨네. 마리아님 땀 받아놓은 것도 없는데 이를 어쩐다.”
그저 다리만을 가동시키고 가고 싶었는데 정말 뜻대로 되는게 없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이런 뭐같은 일들이 펼쳐지려는 건지 짜증이 났다. 벌써 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도 다시 쌓여 올라갔다. 심지어는 이 똥개들, 완전히 괴물들이었다. 그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갑자기 뛰어내렸음에도 다리가 부러지기는 커녕 무사히 착지까지 하고서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족히 3층은 되어 보이는 높이였다. 사람이 떨어져도 다리 하나는 부러지는 높이인데 이 놈들은 그딴게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내려왔다. 고생길이 너무 훤했다. 세상이 개판으로 변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개판이었다.
여유없이 빠르게 운전석을 타고 엑셀을 밟았다. 안전벨트는 메지 못 할 정도로 신경쓸 틈이 없었다. 벌써 먼저 뛰어내렸던 한 마리가 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 아까 울음소리가.”
“그래, 사라. 적어도 시추나 포메리안 같은 깜찍한 개는 아니야.”
“늑대야?”
“미안한데 지금은 운전에 집중해야 되니까 나중에.”
‘설명해줄게’를 잇지 못했다. 엑셀을 강하게 밟으며 달리던 차가 갑자기 흔들렸고 하마터면 옆에 있던 가로등에 쳐박힐 뻔했다. 핸들조작을 강하게 한 덕분에 모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사이드미러를 보니 개 한마리가 차를 들이박은 것이었고 얼마나 힘이 강했는지 뒷좌석의 문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사라가 재차 비명을 질렀다.
“지옥에서 똥개새끼가 헬스클럽까지 끊고 다녔나. 도대체 시발 나한테 왜이래?!”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다시 엑셀을 밟아 속도를 내었다. 벗어나야 했다. 안 그랬다가는 차가 뒤집힐 것이다. 한 마리가 들이박아도 이 정도인데 10마리 모두가 들이박으면 아예 뒤집어질 것이다. 계기판의 속력이 시속 70km가 될 때까지 밟았다. 이 이상 속도를 내기에는 도로상황이 넉넉치 않았지만 저런 개들한테서 도망치기에는 충분한 속도였다. 하지만 완전히 착각, 저것들은 일반 똥개가 아니었다.
이제 쯤 멀어졌을 거라며 사이드 미러를 본 순간 충격과 신비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시속 70km가 절대 느린 속도가 아닌데 저 미친개들이 똑같은 속도로 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 중에 몇 마리가 도로가 아닌 옥상들을 가로지르다가 튀어 나와서는 바짝 뒤를 따라오고 있기까지 했다
“내가 그동안 먹은 보신탕도 저만큼 되지 않는데. 사라, 넌 얼마나 먹었어?”
“몰라! 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직도 쫓아오고 있는 거야?”
“내가 먹은게 죄야.”
이 이상 속도를 내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불가능했다. 적당한 곳에 세우고 직접 상대할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저 똥개들에 대해서 아는게 너무도 없어서 자칫 상대하다가 내가 뒤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대로 달리기만 할 수도 없는게 연료가 넉넉치 않았다. 아직 공돌이가 준 연료통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낭비할 수는 없었다.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내 머릿속의 모든 신경들을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뭐야, 저거?”
힘겹게 머리까지 써가며 운전은 하던 나의 앞 저 멀리 누군가가 서 있었다. 등에는 AK를 메고서. 그 뿐만 아니라 지나가려는 앞의 터널, 그 속 천장에 잔뜩 붙어 있는 플라스틱 폭약들이 보였다. 다시 그 누군가를 보자 빨리 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직선터널이자 다리였다. 불과 10m 남짓한 그곳을 향해 엑셀을 더 세게 밟았다. 계기판의 속력이 120km를 올라 점점 쫓아오던 개들과도 조금씩 거리가 벌려졌다.
마치 결승선에 골인하듯 터널을 순식간에 통과했고 바로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 급정지를 시켰다. 이후 차 문을 열고 터널 안으로 들어오는 미친개들의 위치를 확인하며 타이밍을 재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묻어버려!”
남자는 발밑에 있던 스위치를 눌렀고 터널에 붙어있던 폭탄들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좁은 터널이라 안에서 맞이하는 폭발력은 배가 되었고 미친개들이 터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기도 채 저세상으로 보내주었다. 이 광경을 같이 본, 우리를 도운 남자가 불길을 등지고 나를 쳐다보았다.
“니들이야? 다리를 가동시킨게.”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조금 마른 몸매였지만 팔에는 잔근육들이 붙어있었고 총을 잡는 자세며 눈빛으로 그가 오토바이 무리처럼 경험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가로 내 타입도 전혀 아니었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넌 뭐야?”
“다리가 가동되는 걸 보고왔지. 그리고 니들이 매드독들한테 쫓기는 것도 봤고.”
“매드독? 저 보신탕 똥개새끼들? 미친 보신탕은 맞네.”
미친듯이 달려왔으니 꽤 괜찮은 이름이었다.
“뭐, 아무튼 신세 좀 졌어. 이제 제 갈길 가셔.”
“지금 니들이 뭔 짓을 했는지는 알고?”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가 아까까지는 참은 것이었던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할 수 없던 나는 그의 공격적인 말투에 신경질이 곤두서고말았다.
“내가 뭐했는데? 지 멋대로 돕고 나서는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죽고 싶어?”
“다리 가동시켰잖아. 아무런 준비 없이. 덕분에 잠잠해져가던 매드독들이 깨어났고 그 또라이들 마저도 사람이 왔다는 것에 기대감 가득하게 준비하고 있겠지.”
“그래서 그게 내 탓이야? 꼬우면 경고문이라도 미리 붙여놨던가. 다리 하나 가동시켰다고 뭔 시발 사람 다 뒤질 소리하네.”
경고문 붙여놨어도 떼어버린 뒤에 가동시켰을 테지만.
“지금 말 다했냐?”
“말은 다했고 이제 쏠 총알이 남았지. 어디에 박아줄까, 시발아.”
“엔!”
격해져가던 남자와 나. 사라가 조수석에서 내리며 다가와 다그치며 말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만들어준 지팡이를 펼쳐 꺼내 바닥을 이리저리 두드리며 한 팔을 뻗고서 다가왔다. 남자는 사라는 보더니 의문점 가득한 표정이 한가득이었다. 매일 TV에서 들려주는 나레이션처럼 그에게 대충이나마 설명해주었다.
“아주 어여쁜 장님이셔. 참고로 지팡이는 내가 만들었어. 제일 중요한 포인트야. 기억해. 시험에는 안나오는데 내 입에서 존나게 나올거야.”
그는 다가오는 사라가 자신의 앞에서 멈출 때까지 쳐다보았다. 사라의 뻗은 연한 손이 그의 팔에 닿았고 움켜쥐기까지 한다. 그 행동에서 엄청난 짜증이 몰려왔다. 그녀는 움켜쥔 손으로 몇 번 잡았다 놨다 하면서 누구의 팔인지 알아맞추고 있었는데 이것도 짜증났다. 나나 저렇게 만져주지.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고 설명해 드릴게요.”
남자는 사과를 받은 듯 안 받은 듯 멍 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표정에다 대고 해달라고도 하지 않은설명을 시작했다. 그냥 데리고 여기서 빨리 떠나고 싶었지만 그녀가 한 번 시작하면 나도 말릴 수 없었다. 알아서 하라지.
“여기에 온 지 겨우 하루가 되서 다리를 가동시키면 안된다는 걸 몰랐어요. 저흰 그저 다리를 건너고 싶었을 뿐이거든요.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러러면 다리를 꼭 건너야 했어요. 아까 말씀하신 매드독도 보이지는 않지만 처음 접했고. 만약 저희 때문에 큰 폐가 되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눈을 아래로 향하며 예의있게 사과하는 사라. 남자는 그녀의 차분한 설명과 사과를 받더니 우리에게 이해심을 보이며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여기 벗어나자. 조금 있으면 매드독들이 또 몰려올 수도 있으니까.”
또 미친 보신탕들을 상대하기는 싫어서 순순히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원래는 따라가기도 싫었는데 대충 듣자하니 이 남자는 그 미친개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모르고 그는 안다. 이건 무척이나 중요했다. 이 도심에서 얼마나 싸돌아 다닐지도 모르고 그 개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면 결국엔 또 만날 테니까 그 대비를 위함이었다.
사라와 불쾌하지만 남자를 뒷좌석에 태운 차를 몰며 조용히, 그의 은신처가 있다는 곳까지 움직였다. 도착한 건물은 커다란 간판을 내세운 대형마트였다. 그곳에 들어서기 전, 지하주차장이 있어서 들어가 차를 완전히 숨겨놓았고 이후 그의 안내를 받으며 같이 허름한 공간에 들어서게 되었다. 햇빛이 들이 않는 건물이라 벌써 밤이 된 것 같았다.
그가 말한 은신처는 대형마트 깊숙한 곳이었다. 3층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계단을 올라 들어서자 부서진 마네킹들과 널부러진 천조각들 속에서 아직은 멀쩡한 수많은 옷들을 볼 수 있었다. 마트의 명성이 어디 안갔는지 이 정도로 남아있다는 것에 놀랐다. 아예 쇼핑도 가능할 정도다. 사라에게 새로운 옷을 맞춰줄 수도 있고 나도 내 남색 후드 자켓을 여러 벌 장만할 수도. 구경하면서 옷 매장들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 매장을 개조한 그의 은신처가 보였다.
“여기야.”
은신처의 문은 양옆으로 열리는 유리문이었는데 안에서 강철판을 붙여 견고하게 했고 창문이나 작은 틈 같은 곳에는 잡동고철들로 단단히 막은 뒤 고무같은 것을 붙여 방음까지 해 놓은 상태였다. 바깥에 대한 대비는 엄청 신경쓴 티가 났다. 대신 안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빛은 중간에 놓여있는 양초 하나가 전부였고 잠을 자는 것도 침낭이 하나뿐인데다가 구겨지고 찢어진 흔적들이 많았다. 구석에는 자물쇠로 잠긴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성냥을 꺼내 양초에 불을 붙이며 앉았고 우리도 바닥을 발로 한 번 쓸어버린 뒤 편하게 앉았다. 사라는 무릎을 꿇고 앉으며 완전히 숙녀의 티를 내고 있었다. 저거 무릎 안아플려나.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신경질적으로 말한건 미안했다. 내가 매드독들이랑 오토바이 무리들한테 예민해. 어쩔 수 없었다.”
‘당연하지.’라며 말하려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라나 내 옷깃을 잡으며 제지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할 지 아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이야, 주인 다 됐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죄송하고 감사해요. 도와주셨으니까요. 덕분에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완전히 다르네. 당신이랑 옆에 싸가지.”
“엔이 입이 좀 험해서 그래요. 실제로는 좋은 사람이에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칭찬에 기뻐서가 아니라 토가 나오는 거짓에. 아직 사라는 나에 대해 모른다. 아마 자신을 구해줘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난 절대로 좋은 사람이 나이었다. 그녀는 나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앞으로도 알지 않았으면 하는게 내 바램이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불과 몇 일 전에 사라와 이 주제로 싸우기까지 했었다.
“엔? 그게 이름이야?”
“멋지지?”
“반응보니까 스스로 지었네. 진짜 이름은 뭐야?”
“버렸어. 이름인지 시발인지 모르는 그딴 거 필요없거든.”
“아, 제 이름은 사라에요. 사라 리즈. 영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영국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어요.”
“엔, 그리고 사라. 이름이 뭔가 매끄럽네.”
“볼 줄 아네, 새끼.”
과장스럽게 웃어주며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시선은 어째선지 내가 아닌 사라에게 머물러 있었다. 묘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괜찮다면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석재. 김석재.”
석재라고이름을 밝힌 그가 사라에게 악수를 청했다가 도로 거둬들였다. 이 새끼가.
“이제 좀 자기소개들은 정리된 거 같고 다리를 가동시킨 것부터 해서 설명을 좀 들어봐도 되겠냐?”
이제는 내가 대답해줄 차례가 된 것 같아 턱을 괴고 시작하려던 때 사라가 다시 팔을 뻗고는 제지에 나섰다. 이번에는 소름까지 끼쳤다. 어떻게 딱딱 말하려는 순간에 제지를 걸어오는 거지? 사실은 앞이 보이는 게 아닌지 의심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팔을 치워버리고 내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라가 말린 것이다. 주인말 잘 듣는 똥개가 되야지. 그녀는 촛불을 앞에 두고 부드러운 불길처럼 얘기를 시작해나갔다.
“저랑 엔은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데 오늘 가동시킨 다리를 꼭 지나야 했어요. 다른 길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리를 가동시켰더니 오토바이 소리들이 들려왔고나쁜 사람들이 저희를 공격했지만 엔이 모두 쫓아내주었어요. 그 뒤에는 석재씨가 말한 매드독들에게 쫓겼구요.”
“그 깡패들을 상대했다고? 저 한팔 밖에 없는 여자가?”
“나도 한 때 잘나가던 깡패였어. 그런 잡것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아주 고급진 깡패였지. 그 시절에 내 이름만 댔어도 여기저시고 고개 숙였다고. 알아?”
그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딱히 불만을 표하지도 않았다. 이런 것들은 몸소 보여주지 않는 한 믿지 못하는 작자들이어서 그냥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직접 눈앞에다가 보여주는 게 나았다.
“결론은 저 다리를 건너고 싶다는 거지?”
“네.”
“도와줄게.”
“정말인가요?”
그가 조심스럽게 베푸는 호의에 사라가 미끼를 덥석하고 물며 기뻐했다. 사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진심이 담긴 호의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면 그 눈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위에 창고같은게 있는데 거기서 필요한 것 좀 들고오게.”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는 석재였다.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의 손을 꽉 잡았다. 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라에게 던지는 눈빛이며, 호의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난 그에게 무언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것이라 어쩔 줄 몰라서 급히 사라의 손만 잡는 바보같은 나였다.
“엔, 도와줘.”
“나도 한 손뿐이라 어려워. 버클만 좀 잡고 있어봐.”
석재가 창고로 무언가를 가지러 간 사이 사라와 함께 바로 앞에 있던 패션매장들에서 쇼핑을 했다. 돈을 내지 않는 무료쇼핑. 공돌이가 준 원피스는 이미 때가 탔고 그 대형쇼때문에 더러워져 있던지라 이 참에 바꾸기로 결정한 것이다. 꽤 비싸보이고 좋아보이는 원피스였건만. 그의 누나에게는 미안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됐어. 불편한 거 없지?”
“응. 오히려 더 편해졌어.”
마무리로 벨트끈을 적절히 조절해주고 조금 걸어보게 했다. 사라는 지팡이를 펼쳐 앞으로 몇 걸음 내딛어 보았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고쳐야할 점이 보였다. 아직 쇼핑을 끝낼 때가 아니었다. 사라를 데리고 이동한 곳은 다 부서진 신발매장이었다. 운동화부터 구두, 하이힐들이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그 속에서 스니커즈 하나를 찾아내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디자인이었다. 탁한 면이 조금 있었지만 내 옷자락으로 닦아내자 밝은 색이 금방 드러났다.
“신발 벗고 발 들어봐.”
사라가 오른쪽의 부츠를 벗어 발을 내밀어주었다. 공주를 모시는 것처럼 발에 운동화를 신겨주고 끈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신발을 바꾼 이유, 지금까지는 크립톤들만 상대하면 충분했고, 낮이나 밤이나 사라는 그렇게 뛰어다닐 이유가 없어서 튼튼한 신발만을 고집했었지만 여기서는 매드독들이 튀어나오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이제는 사라도 달려야 할 상황이 찾아올 수 있었다. 굽이 있는 부츠로는 쉽사리 달릴 수 없으니까.
“어때?”
“딱 맞아. 편해.”
하얀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카디건, 달리는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핫팬츠와 스니커즈 운동화, 노출된 다리는 춥지 않도록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검은색의 긴 스타킹을 신겨주었다. 세상이 변하면 패션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멋이 아닌 효율과 기능성 위주로.
이제는 내 쇼핑시간이었지만 그렇다 할 것이 없는게 그냥 남색 후드 자켓을 바꾼게 다였다. 남색의 후드자켓에서 남색의 후드자켓으로. 뭐, 변한 것도 없네. 난 이대로가 편했다. 얼룩만 없앤 게 전부네.
쇼핑이 끝나고 돌아오자 마침 석재가 여러가지를 들고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느낌 많이 변했네.”
그가 변한 사라의 옷을 보고 말했다. 확실히 느낌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사라만의 청순함이 사리지고 활동적인 느낌이 강해졌다. 밤거리를 지날 때 여대생들이 자주 보이던 스타일 중 하나였다.
“감사해요.”
“내가 고른 거야. 눈 호강 잘 되지?”
“너도 좀 바꿔보지 그래? 어두칙칙하게만 살지말고.”
“내 집이 그런곳인 걸 어쩌겠어.”
셋이서 은신처로 들어간 뒤 전처럼 촛불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당연히 사라는 내 옆이었다. 우리들 사이로 지도가 펼쳐지며 이곳의 지리가 한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꽤 규모있는 도시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큰 곳이었다. 석재가 상처있는 손가락으로 우리의 위치를 가리켜주었다. 다리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저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맞은편에서도 가동시켜야돼. 그러러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두 가지 길이 있어. 안전한 길로는 산을 통해 멀지만 돌아서 가는 길이야. 아마 이틀 정도는 걸릴거야.”
“밤에는 어쩌려고? 산이면 피할곳도 없잖아.”
“좀 허름하긴 한데 지낼만한 산장이 있어. 조용히만 지낸다면 크립톤에게 눈에 안 띄어.”
“다른 길은요?”
“강을 건너가는 방법인데 그러러면 선착장으로 가야해. 그곳에 노를 저으면 건널 수 있는 배가 있어. 하지만 이건 피하는게 좋아.”
“왜?”
“그 선착장, 오토바이 깡패무리들이 점거하다시피 있는 곳이거든. 그곳에 있으면 아주 가끔씩 지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걔네들 입장에서는 자동 채집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야.”
“피하는게 좋다고 하면서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댄다는 건, 그냥 가지 말라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시발, 그러면 왜 설명한거야?”
“정말 운이 좋으면 지날 수 있거든. 거기다가 오늘 출발하면 하룻밤자도 아침에는 도착할 수 있어.”
“됐어. 그래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됐으니까 준비해! 바로 출발하게.”
“산으로 갈거냐? 하기야, 좀 돌아가기는 해도 싸움은 피할 수 있으니까.”
“뭔 개소리야. 시발, 혼자 상상딸치냐? 배타고 가면 될 거 왜 귀찮게시리 돌아가려고 해?”
“선착장으로 가겠다고? 그 깡패놈들이 있다니까.”
“뭐가 문제야?”
“싸우게 될거라고. 목숨걸고.”
“그럼 문제없네.”
걱정 가득하다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한 방 먹인 느낌. 짜릿하다.
“이미 5년간 쉬지않고 목숨걸면서 살았어. 그런데 겨우 하루 목숨거는데 뭔 대수라고.”
“사라는 생각치 않는거야?”
“전 괜찮아요. 엔을 믿으니까요.”
두 번째 펀치가 그를 가격했다. 그런데 나에게 보이던 표정은 없고 오히려 이해하겠다는 표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두 번째 펀치가 그가 아닌 나에게로 향한 것 같았다. 기분 더럽게. 석재, 이 새끼, 아까부터 나랑 사라에게 대하는 태도와 눈빛이 달랐다. 뭐지?
“알았어. 선착장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겠네. 준비할 게 많겠어.”
“몸뚱아리나 챙겨.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아무리 한 번 이겼다지만 그러다 역으로 당할거야.”
“그 전에 다 조져버리면 그만이야.”
석재는 조금씩 나와의 대화를 포기하려는 자세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관심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사라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물거릴 시간따위, 낭비였다. 우리들은 서둘러 준비했다. 글록을 꺼내 총알을 확인하고 탄창들을 바로바로 장전할 수 있도록 몸 여기저기에 재정비했다. 이번 여행은 짧지만 굵을 것 같았다.
품안에는 글록19를, 허리츰에는 글록17을 끼우고 나이프와 깡패에게서 뺏은 MP5는 끈을 조절해 등에 메었다. 먹은 것은 사라가 책임지기로 했다. 지금이 점심쯤이니까 내일 아침것까지 세끼 분량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2끼를 더 챙겨넣었다. 잘 때 사용할 침낭도 묶어서 사라가 메도록 했다. 나는 싸움을, 그녀가 보급을 담당하는 것이다. 본래라면 내가 어느정도 메고 다니겠지만 상대가 오토바이 쓰는 잡것들에 이동이 빠른 매드독들이라 그쪽에 집중하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오로지 싸움에만 집중한다면 사라까지 지키는 것까지는 무리없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석재와 다툼이 있었다. 그가 말하긴 사라에게 이런것들을 맡겼다가는 가장 먼저 목표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쯤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모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괜찮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래도 그는 계속 안된다고 나와 대립을 한 것이다. 솔직히 다리만 아니었다면 벌써 쏴 죽여버렸을 것이다. 결국에는 사라가 말리며 자신이 들겠다고 해서 종결이 되었지만 뒷맛이 짭잘했다. 역시 쏴버려야 했나.
챙길 것들을 챙기고 나서 우리가 타고온 애마는 더러운 천들로 덮어 숨겨두었다. 그 위에 쓰레기들까지 올려두어서 왠만해서는 이게 차라고 알아채기 힘들 것이다. 원래는 차로 이동을 하려 했지만 석재의 말로는 선착장까지 가는 도로들은 모두 막혀있어서 무리라고 했다. 기가막히게 중요한 길들만 쏙쏙 막혀준 덕분에 걸어야 했다. 우라질.
“출발할까?”
석재가 자신의 등에 배낭하나를 메고 나오며 슬슬 움직여보자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사라에게 다가왔다.
“저희는 준비되었어요.”
“사라. 만약 힘들거나 무리다 싶은게 있으면 꼭 말해. 괜히 혼자 애쓰려 하지 말고.”
“고마워요. 아직은 괜찮아요.”
이쯤에서 그가 사라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 말이 없고 유독 사라에게 붙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가하면 방금처럼 신경까지 써주고 있는데 모르면 바보지. 때문에 화가 났다. 사라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하루이틀이 아닌데 유독 이 새끼는 눈에 거슬렸다. 왜인지는 스스로 알 수 없었다. 짜증이 솟구쳐 석재와 얘기하고 있던 사라의 손을 잡으며 침 뱉듯 툭 말했다.
“출발.”
“어, 어.”
석재가 노려보았지만 무시했다. 노려봐도 뭘 어떻게 할 건데. 주먹이 날아오면 싸우면 되고 총구를 들이밀면 죽여버리면 된다. 뭐가 됐던 내 알바 아니었다.
“저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짜증나서 아무 말 없이 걷던 도중 사라가 석재에게 말을 걸며 물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그녀의 옆으로 석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다정해 보이는 그 모습에 속까지 쓰려왔다. 그래도 참았다. 괜히 별거 아닌 것에 민감해진 것 같았다. 이제는 스스로가 멍청해 보였다.
“뭔데?”
“그 깡패들이라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인가요?”
“안 그래도 설명하려고 했어.”
이 이야기에는 나도 관심을 기울였다. 적에 대한 정보는 많이 있을수록 좋으니까.
“2년 전, ‘사건’이 터지고 반년도 안 가서 이 도시는 무너졌어. 사람들이 전부 떠나버리고 크립톤들이 대신 들어섰고 도시는 그야말로 혼란스러웠어. 그래도 여기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뒷쪽으로 자리잡고 있던 건달이나 깡패들이었어. 걔네들이 모여서 지금의 오토바이 무리를 이룬거야.”
“조금 다르네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그런 사람들은 차같은 걸 많이 타던데 여긴 왜 오토바이죠?”
“매드독들 때문이야.”
“그 이상한 개들 말씀하시는 거죠?”
“응. 걔네들도 처음부터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던 건 아니야. 매드독들이 나타나고 나서 차로는 원활히 다니며 상대할 수 없게 되자 효율적인 수단을 찾았고 오토바이를 택한거지. 효과는 보시다시피 좋았고. 차와는 다르게 이런저런 장애물이 있어도 빠르게 피해갈 수 있어. 그렇게 이룬 깡패들이야.”
지루한 얘기네. 그냥 흔한 얘기었지만 도움은 되었다.
“이상한 개들은 어디서 온 건가요?”
“그러게. 여러가지 추측들이 있는데 밝혀줄 과학자도 없고 소설가도 없으니까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매드독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줬었나?”
“하나도요.”
“가끔씩 싸워도 보고 몰래 지켜본 것 밖에 없긴 하지만 아는 것들만이라도 얘기해줄게. 매드독은 어쩌면 크립톤들보다 위험할 지도 모르는 놈들이야. 속도도 빠르고 기본적인 힘도 세고. 그리고 무엇보다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어.”
“어떤 점이요?”
“지능이 있어. 사람들처럼 높은 건 아닌데 무리로 다니면서 포위같은 전략을 짜거나 어떤 무기가 어떻게 위험한건지도 대강이나마 아는 움직임들이었어. 총같은 걸 보이기만 해도 멈추거나 쉽게 맞추지 못하도록 움직이거든. 크립톤들처럼 정면에서 달려들지는 않더라.”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 똥개들은 2년 만에 병법을 익혀왔네. 지피지기면 백전똥개.”
“그걸 설마 농담이라고 한거야?”
“너 웃으라고 한 거 아냐 병신아. 난 신세한탄도 못하냐? 멍청한 괴물새끼들도 충분히 좆같은데 이제는 머리 좀 쓴다는 수석 개새끼들이 나한테 떡치려고 달려들고 있는 마당이라고. 알겠냐? 니 부랄이 계란프라이가 될 거라고.”
“진짜 입 거치네. 사라는 이런 애랑 어떻게 다닌거냐?”
“입이 거칠기는 해도 좋은 사람이에요.”
“우웩, 시발. 그걸 설마 농담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진심이야.”
“제발, 시부랄. 그냥 재미없는 아재개그라고 해.”
얘기하다가 속 뒤집어지겠네. 그런데 진짜로 뒤집어 질 것 같았다. 걷던 도중 눈 앞에 벽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벽돌로 정성스레 쌓아온린 벽이 아닌 사람 시체로 가득히 올린 벽이었다. 틈에는 폐차들이 젠가마냥 꽂아져 있었다. 심지어는 차안에 핸들을 잡고 있는 시체가 있었는데 머리쪽에 구멍이 뚫려있고 앞유리가 깨진 것을 보니 총에 쳐맞아 죽은 듯 했다. 그래도 내 눈길을 더 끌고 있는건 이 시체의 벽이었다.
“꼭 넘어가야 되는 건가?”
거 참 높이도 쌓았네. 어떤 놈의 작품인지 아주 예술작품을 만들어놓았다.
“다른 길을 찾아볼까? 어차피 시내라 다 이어져있으니까.”
석재가 제안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시내거리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돌아간다면 저 멀리, 우리가 지나온 사거리까지는 가야했다. 이미 걷는 것부터 빡치는데 돌아가라니. 좆까.
“됐어. 얼마 높지도 않은데 넘어가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