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Pride (Good Night, Shara) - 18 [완]
눈을 떳을 때, 내가 있던 곳은 물속이었다. 어디일까. 바다? 강? 아니면 수영장? 모른다. 나의 수면위로 들어오는 빛이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팔을 휘저어 올라가려 해도, 다리를 움직이려 해봐도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힘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이 끝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지, 무서웠다. 어쩌면, 이건 환상이고 난 이미 죽은 걸지도. 무엇하나 없는 이곳에서 난 뭘하고 있는 거지?
시야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눈 한쪽이 빈 게 느껴져 왔다. 단순히 안 보이는 건 아니겠지. 무언가, 엄청 아팠던 게 날 괴롭혔던 것 같은데. 아니, 됐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저 눈을 감고 자고 싶었다. 가라앉는 대로 밑으로 떠밀려 가고 싶었다. 여태까지 많이 버텨왔잖아. 이제 쉴 때가 되었다. 뜨고 있던 눈을 감고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맡겼다. 그러면서 점점 생각도 버려갔다. 이제 조용히 쉴 수 있다. 다시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기를 빌었다.
‘......크립톤화 1%’
정신이 멍하다. 머리는 내가 깨어났음을 알리고 있는데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몸이 무거웠지만 무엇보다도 손이 무거웠다. 반어법 따위가 아니었다. 손이 제일 무거운데 또 이상하게도 제일 따뜻했다.
“사라.”
정신이 멍하면서도, 몸이 무겁고 앞이 보이지가 않으면서도 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빛이 느껴졌고 내 주위로 어수선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시끄럽다. 시끄러운데 욕을 하거나 소리가 질러지지가 않았다. 나의 머리와 입은 오로지 한 이름만을 씹고 있었다.
“사라......”
두 번째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또 다른 일이 일어났다. 손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따듯했던 손이 더 따듯해지는 것이었다. 덕분에 추위는 없었다. 그러면서 엄청 부드러운 감촉이 내 손을 덮어주었다. 무거웠던 몸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완전히 붕 떠오르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편안해지는 정도.
“ㅇ......”
옆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그냥 나 좀 내버려 둬. 그냥 누워있고 싶어.
“엔.”
엔. 내 본명이 아닌 가명이지만 사실상 본명으로 쓰고 있는 이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런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나를 부른 것이다. 신기했다. 그 목소리로 절대 떠질 것 같이 않던 나의 눈이 천천히 떠지고 강한 빛과 함께 조금씩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기뻤다. 베이지색의 머리카락과 초점은 없지만 분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 뒤로는 마리아가 내리는 은총마냥 하얀 빛이 그녀를 비추어주고 있었다.
“엔! 내 목소리 들려?”
“깨어났다며! 사실이야?”
“이봐! 엔!”
사라의 목소리가 반갑던 도중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들이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목소리가 달갑지 않았다. 안그래도 떠진 눈이다시 감길 것 같았다.
“엔은 눈을 떴어요? 말을 안해줘요.”
“걱정하지마. 눈을 떴어. 지금 널 보고있어.”
“이봐! 이게 보여? 말은 나와?”
사라는 태영에게 내가 깨어났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준열은 내 눈앞에다가 손을 펼치고 흔들며 눈동자가 굴러는 가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이 시발, 존나 시끄럽네. 시끌벅적했다. 내가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사라가 있기에 꾹 참고 입을 열고 나의 생존을 알리는 한 마디를 던져주었다.
“시발.”
일어나자마자 사라, 태영, 준열에게서 종합적으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제 각자 다른 말들을 했지만 내가 들으면서 하나하나 스스로 정리해나갔다. 우선은 내가 쓰러지자마자 날 이끌고 이 곳, 시청안의 보건실로 옮겨졌다. 보건소의 의사가 말하길 출혈이 심한 상태였고 몸도 엉망진창이었다고 한다. 보통사람이라면 한참 전에 이미 쓰러졌다고. 추가로 자칫하면 죽을 위험도 있다고 했는데 당장 수혈역시 필요했고 여기에서는 사라가 나섰다고 한다. 준열과 태영은 나와 혈액형이 달랐지만 사라와는 같은 AB형인 덕분에 가능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렇게 눈을 뜰 수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내 혈액형을 알려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고 준열이 그 형사가 남기고 간 자료에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 형사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본명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디선가 여기저기에 내 자료를 뿌리고 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만나면 반드시 죽여버려야지.
나는 내 옷을 달라고 한 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구닥다리같은 환자복을 벗어버리고 평소의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준열은 나의 치료를 도와준 노인에게 다녀온다고 말하며 나간 뒤였다.
“지금 오전이야? 오후야? 하룻밤은 잔 거 같은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태영에게 물었다.
“오전이야. 하루지만 꽤 깊게 잠들었었어. 의사 말로는 3일 정도는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겨우 하루라니.”
“내가 좀 쩔어주잖아.”
“빨리 깨어나서 다행이야.”
“여친이 이렇게 옆에 있어주는데 빨리 깨어나야지. 사라, 나 많이 보고 싶었어?”
“듣고 싶었어. 목소리를.”
“아, 넌 그쪽이겠구나.”
마지막으로 후드자켓의 지퍼를 올리며 말했다.
“내 총 어디 갔어? 시발, 내가 자는 사이에 빼간거야?”
“안그래도 네 성격에 그거부터 찾을 것 같더라. 권총 2개하고 그 큰 나이프 말하는 거지?”
“그래! 내거어딨어? 꼬맹이!”
“엔, 우선 진정해. 넌 환자야.”
사라가 내 손을 잡으며 진정할 것을 말했다. 하지만 진정이 전혀 되지 않았다. 내 무기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게 절대원칙이다. 그 누구도 내 걸 손댈 수 없었다.
“병원침대에서 멀쩡히 일어났는데 뭐가 환자야? 꼬맹이 불러와!”
“같이 왔네.”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준열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는데 같이 왔다는 말에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이었다.
“이걸 찾는겐가?”
그는 나에게 보란 듯이 손에 나이프집과 함께 꽂혀있는 쿠크리나이프, 그리고 자신의 재킷에 꽂아둔 나의 글록17과 19가 보였다. 당장 돌려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처음 보는 노인의 화난 표정에 그 옆에서 ‘어떻게 해야하나.’하고 곤란해 하는 준열이 보였다. 노인의 뒤에서 나에게 총구를 겨누며 당장이라도 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두 남자를 보아하니 쉽사리 보내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뒤에 있던 사라를 등 뒤로 숨겼다.
“원한다면 돌려주지. 다만 자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일깨워줘야겠어!”
“그깟 잔소리 하나 하려고 날 살린거야? 그냥 죽이지 그랬어. 이 노인네, 행동보다 말이 앞서나 보네. 내가 들을 것 같아?”
“닥치게! 지금 자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모습 중 가장 위엄있고 근언해보였다. 단단히 화가 난 듯 했다.
“자네가 통신을 끊는 바람에 우리가 계획했던 작전을 실행하지 못했어. 그 결과로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자네는 우리에게 소중한 자원들도 멋대로 터트려 그것마저도 고갈나게 했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겐가?!”
노인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쏴 죽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듯 눈동자는 충혈이 되었고 피부도 붉그락 했다.
“한 노친네의 자만 가득한 생각으로 몰살당할 뻔한 미래를 막아줬더니, 대접은 커녕 욕만 바가지로 쳐먹이는 걸로도 모자라서 총구를 들이미네? 개 뻔뻔한거 봐라.”
“자네 따위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꼽으면 말 자격인증평가라도 만드시던가. 내가 내 말 씨부리는데 니 새끼가 뭔 상관이야? 존나 지랄이네.”
“후......”
노인은 크게 한 숨을 쉬었다. 일단 말발로 내가 이겼다.
“적어도 말이라도 곱게 했으면 내쫓는 것만으로 끝냈을 텐데.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아직 삽도 안 들었는데 뭔 개소리야. 그리고 내가 파도 당신 무덤을 파고 있겠지. 나이들어서 뒤질 때도 다 됐는데. 여기서 네가 제일 먼저 갈걸.”
“대신 내가 삽을 들어줄 수도 있지. 사람 가는데 순서가 없다는 것을 모르나? 창수, 병호! 당장 저 여자를 묶어서 데려와!”
노인의 말에 두 남자가 서로를 보고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병신 짓을 하고나서 한 명은 나에게 총구를 향한채 움직이지 않았고 나머지 한 명은 로프를 들고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가진 무기가 없으니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병신들. 스스로의 무덤을 판 건 내가 아니라 이들이었다. 굳이 쉬어갈 필요가 있나. 로프를 든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오자마자 고민도 없이 주먹을 쥐고 턱을 갈겨버렸다. 그리고 뒤의 남자가 총을 쏘지 못하도록 내 앞에 방패로 세우고 그에게로 걷어차 던졌다. 그러면서 나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좁은 보건실에서 급속도로 노인을 제치고 뒤에서 총을 겨누던 남자의 바로 앞에 다가갔고 방패가 놓친 총을 낚아채 개머리판으로 무릎을 가격해버렸다. 무릎을 꿇는 남자, 그대로 머리에 발차기를 꽂아주었다. 반동으로 튕겨나간 머리는 벽에 세게 부딪혀 소리를 울렸다.
노인은 뒤늦게 내 권총을 꺼내들었지만 나도 생각해둔 것은 있었다. 근처에 있던 준열을 잡아와 두 번째 방패로 삼았다. 노인은 순간 당황해버렸고 그건 나의 앞에서 죽여달라는 신호였다. 바로 헤집고 들어가 틈을 벌렸다. 준열역시 그에게로 던져버리며 흐트러진 총구를 발로 차 위로 올린 뒤 땅에 떨어진 쿠크리나이프를 뽑아 그의 목에 날을 겨누었다. 죽이지는 않은 채. 사라가 있기도 하고 한 번 더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싶은 게 이유였다.
“삽 줄까? 그냥 스스로 파게.”
“이, 이년이!”
“내가 말했지. 나같은 괴물도 못 길들이면서 자만심 가지지 말라고. 그리고 날 잡으려면 적어도 특공대 한 팀은 데리고 왔어야지.”
“죽일거면 죽여라. 대신 넌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야.”
“그러면 죽이지 뭐. 그것도......재미있겠네!”
목에 들이밀었던 나이프를 위로 들어올렸다. 정확히 머리의 중앙을 꽂아버릴 생각이었다. 피가 튀어나오고 나이프에는 뇌조각이 묻어나올 것이다. 낡아빠진 형광들의 빛에 살기 서린 날이 반짝였다.
“안 돼! 엔!”
그가 원하는 대로 죽이고 아예 이 섹터를 한 번 뒤엎을 생각으로 내리치려던 나이프가 닿기 전, 사라가 크게 소리치며 말렸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보건실을 울릴 정도였다.
“엔. 그만해. 그 분은 괴물이 아니야. 사람이야.”
“흠......”
나를 불러세운 그녀를 보고 다시 노인을 보았다. 사람, 사람이라.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사람이란 대체 뭐지.
“시발.”
나이프를 거두고 그의 자켓 안에 있는 글록19를 뺏고 땅으로 떨어진 글록17을 챙겼다. 중간에 흥이 깨진 것도 그만둔 이유였지만 이런 노인에는 죽여서 뭐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와 사라는 부산으로 가는 길이다. 이 자의 말대로 섹터에서 빠져나가기가 힘들어진 경우 나 혼자는 괜찮지만 사라는? 이런 이유들로 마음을 바꿔 그만두기로 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넌 니 좆대로 살아. 그렇게 자만스럽게 남은 인생 살아가라고. 난 이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라질 테니까. 맞은건 여기 때문에 날려먹은 내 차랑 무기들이랑 쎔쎔. 오케?”
노인은 조용히 화난 채로 바라보기만 했다.
“오케이로 알게. 가자, 사라.”
그에게서 떨어져 태영의 옆에 서 있던 사라를 데리고 급히 보건실 밖으로 나왔다.
“잠깐! 나도 같이 가.”
이제 막 시청의 입구에서 발을 떼려고 할 때 뒤에서 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설마 따라오려고? 우리 이제 거지라서 엄청 걸어야하는데 괜찮겠어?”
“아니, 빚 갚으려고.”
“빚? 차라도 줄거야? 그런거 아니면 안 받아. 훠이! 꺼져.”
“하하, 따라와. 마음에 들거야.”
그는 우리 앞에 서서 정비고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놈을 따라가도 될까하다가 거지가 된 이 상황에서 무엇이든지 필요했기에 우선 따라가 보기로 했다. 차도 없어, 무기도 내 몸 안에 지닌 것이 전부였고, 중요한 식량도 전부 날아가 버렸으니. 혹시 모른다. 엄청난 서프라이즈가 기다릴지는.
가는 길, 내가 태워먹은 폐공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넓직했던 지붕들은 전부 아래로 가라앉았고 유리는 깨져서 가루가 되거나 탄 흔적을 품고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멋드러지게 무너진 것이다. 박쥐놈들의 시체는 치운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삼촌이 사기를 치긴 했어도 지금까지 우리를 태우며 함께 달렸던 차의 뒷부분이 튀어나와 있었다. 언젠가 폐차시켜야지 하면서 벼르다가 이 기회에 큰 스케일로 폐차시켜서 기쁘다가도 갑작스럽게 기분이 상했다.우리가 다시금 거지라는 것을 상기시켜줬기 때문이었다.
폐공장을 지나쳐 더 걸어가 나온 곳은 또 다른 폐공장이었는데 내가 태워먹은 것보다는 작은 건물이었다. 문은 강철셔터로 닫혀있었고 밑에는 두꺼운 자물쇠가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태영은 주머니에서 자연스럽게 열쇠를 하나 꺼내서는 풀어버렸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흔적으로 녹이 슨 부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래도 기름칠을 해둔 것인지 셔터문을 천천히 잘만 올라갔다. 무엇이 있길래 이런 곳으로 온 것인가 하고 궁금했던 내 눈앞에 드러난 것은 파란 천으로 덮인 자동차였다. 천 밑으로 바퀴가 보여서 차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작전이 실패하고 이곳으로 온 뒤 군부대로 달려가 미리 챙겨뒀던 거야.”
태영은 마술이라도 보여주듯 천을 양손으로 잡아 거둬들였다. 그 안으로 회색의 SUV차량이 멋진 자태를 뿜으며 등장했다.
“운행은 안했어도 그 동안 내가 관리하던 거야. 네가 탔던 전투차량처럼 수동이 아닌 오토니까 한 팔로도 쉽게 운전이 가능할거고.”
그가 운전석을 열며 안을 보라고 했다. 차 안은 삼촌이 준 그 똥차와는 비교도 되지 안을 만큼 매끄러운 시트의자가 편안한 승차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앞에 있는 여러 가지의 편의기능들이 자리를 잡으며 위용을 보였다. 난 저 편의기능들이 모두 맘에 들었다. 제대로 된 히터에 CD만 있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플레이어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네비게이션은 없지만 대신 조수석의 서랍에 우리 나라 지도가 꽂혀 있었다.
“뒷좌석에는 비상용으로 넣어두었던 여러 가지 통조림들이 있어. 주로 과일이랑 참치밖에 없지만 양은 많아.”
“충분해. 딱 비타민이랑 단백질이잖아.”
“트렁크에는 남은 경유를 실어줄게. 20L통으로 3개. 부산까지 가는데 충분하고도 남을 양이야. 차에도 이미 풀로 채워져 있어.”
그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하나 꺼내 트렁크를 연 뒤 구석탱이에 있던 연료통을 들고와 실어주었다. 그리고 트렁크를 닫은 뒤 나에게 차의 로고가 새겨진 차키를 주었다. 그의 선물은 정말로 서프라이즈였다.
“두 번째 마지막인사네.”
“공돌이. 차 상태랑 안에 실어놓은 것들 보면 꽤나 애지중지했던 것 같은데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말했잖아. 빚 갚는다고. 넌 여기를 구해줬어.”
“넌 노인편 아니었어?”
“그의 편은 맞아. 하지만 이건 이거고, 그것 그거야. 이번일이 어떤 결과가 있었든 네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난 생각해. 리더의 방안도 괜찮긴 했지만 결국은 언젠가 터져서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거야. 네 말대로 괴물은 길들일 수 없으니까.”
“드디어 내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네.”
“내가 부탁이 있는데, 알지?”
“그래, 알았어. 살아있는 놈 보면 알려줄게. 저 멀리 공돌이 오빠가 살아있다고. 그들이 살아있고 나랑 만나게 된다면 말이야.”
조수석의 문을 열고 사라를 태운 뒤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녀도 의자가 무척이나 부드럽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거기다 오토차량인 만큼 사라는 더 이상 기어를 바꿔줄 필요가 없어졌고 그저 편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한 팔로도 운전이 가능했고 불편했던 클러치가 사라져서 좋았다. 역시 차는 오토가 최고다.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걸자 부드러운 엔진음이 들렸다. 전투차량처럼 개같이 시끄럽지 않은 덕분에 내 귀도 편안했다. 이제 출발해볼까 하던 중 태영이 아직 남은 거라도 있는지 운전석의 창문를 두드렸다.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려주었다.
“이거, 음악CD. 사라가 좋아해서 가져왔어. 마음껏 들어.”
“혹시 그 때 들었던 건가요?”
“맞아.”
“와아, 정말 고마워요. 잘 들을게요. 이제 이런 것도 귀할텐데 저한테 주시다니.”
“기뻐보이니 다행이네. 그리고 깜빡할 뻔했는데 트렁크에 냉각수랑 엔진오일, 브레이크액도 다로 담아서 넣어놨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 기본적인 정비지침서도 뒷좌석에 있으니까 참고하도록 해.”
정말 별의 별거 다 주네. 이러면 나도 따로 보답해야 할 정도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그를 불렀다.
“나도 깜빡한 게 있다.”
“뭔데?”
그가 궁금해 하며 창문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고 조금 불편하지만 오른팔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대로 그의 입에 내 입술을 가져가 진하게 맞춰주었다.
“내 스타일은 아닌데 꽤나 마음에 들었어. 이건 기념선물. 나 비싼 몸인거 알지?”
“내가 매력이 쩔어.”
“웃기고 자빠졌네! 조금 띄워주니까 바로 쳐 기어오르는 거 봐라?”
“안녕히계세요. 태영씨. 짧지만 정말로 고마웠어요.”
“조심히들 가. 무사히 도착하면 연락한번 주고.”
“살아있다면 말이지. 그럼 진짜로......바이.”
이제 다시는 없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 때 사라가 자신이 기어를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었고 오토차량의 편의성에 대해 알려 가르쳐주었다. 사라도 신기한 듯 내 말에 공감을 표해주었다.
“엔, 음악 들어도 될까?”
“기다려. 잠시 멈출 때 틀어줄게.”
입구의 바리게이트를 통과한다고 잠시 멈추었을 때 CD를 넣고 재생시켰다. 그러자 어디서 들어본 듯 한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한여름에 보았던 남색의 하늘이 떠오는 음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색과 어우러지는 목소리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이제 이 섹터를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황폐해진 논과 지루한 산 사이의 도로를 달렸다. 운전을 하다가 잠깐 옆의 사라를 보았는데 음악을 틀어달라고 한 지 불과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엄청 예쁜 모습으로. 그럴 만도 하지. 이런저런 일들이 터지고 계속 끌려 다녔으니. 햇빛에 비춰져 한 층 더 예뻐 보이는 사라를 보며 작게 아직은 이른 인사를 건네주었다.
“잘 자, 사라.”
칠성 - 1장, 교만 [Pride] -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