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Pride (Good Night, Shara) - 4
집소개가 끝나고 노인이 오겠다고 한 밤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정비사의 집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게 되었다. 물론 내가 아닌 사라와 정비사, 둘이서만 이었다. 작은 테이블을 끼고서 소파에 모였고 나는 조금씩 쑤셔오는 허리 때문에 혼자 드러누웠다. 이야기꽃의 장식은 커피와 적지만 남아있는 과자였다. 맛을 크게 없고 바삭거리기만 하는 비스킷. 동네 아저씨들이나 입가심용으로 먹으면 어울릴 듯 했다.
“그러고보니 이름을 지금까지 묻지 못했는데 알 수 있을까요?”
사라가 시선을 정비사로부터 조금 빗겨보면서 예의바르게 물었다. 그 시선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고개를 조금 돌려주고 싶었지만 움직이기가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대화하는데 지장이 없는데다가 사라가 다른 남자와 눈을 맞추는 꼴을 보기 싫었다.
“‘김태영’. 멋지지?”
“목소리랑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지랄. ‘김태영’. 정비사의 이름. 그래도 내 이름보다는 훨 배 멋져보였다. 망할 아빠새끼가 내 이름은 왜 그렇게 지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만날 일도 없겠지만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게 불쾌했다. 그리고 뭐가되었건 내 이름이기는 했다.
“당신은 ‘사라’라고 했지? 외국인이야?”
“엄마께서 영국분이시고, 아빠께서 한국분이세요. 성까지 포함하면 사라 리즈. 영국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요.”
“역시 외국이름이 예쁜거 같아.”
동감이었다. 외국의 이름들을 보면 대부분 예쁜 이름들이 널리고 널렸다. 차라리 나도 그쪽에서 가져와서 이름을 지어주던가 하지. 이제와서 그 새끼를 원망해본들 소용없지만 말이다.
“그 쪽은?”
태영이 미팅나온 것 마냥 사라와 대화하던 중 나에게도 물어왔다. 무관심하게 대화를 지켜보던 나의 게슴츠레 눈을 떠주었다. 그러면서 대답은 시큰둥하게.
“엔.”
난 사라처럼 예의바르게 대답해줄 의무따위는 없었다.
“그게 본명이야?”
“본명이 뭐가 필요해? 부르는 데만 지장 없으면 되지. 그러니까 엔이라고 불러.”
아빠와 엄마에게서 독립하고 한 번도 본명을 쓴 적이 없었다. 쪽팔리는 데다가 딱히 이름따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엔’으로 이름을 대신했다. 본명보다도 훨씬 좋았고 부르기도 편하게. 본명이 적힌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은 ‘사건’이 일어나고 몇 일 뒤, 날 습격하려 했던 남자를 죽이고 쓰레기통에 함께 그의 시체와 함께 태워버린 지 오래였다. 덕분에 내 본명을 아는 것은 삼촌과 아빠새끼밖에 없었다. 엄마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예외.
“사라도 몰라?”
“저도 엔의 진짜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신비주의야?”
“왜? 끌려? 계급이 어떻게 돼?”
“마지막이 상병이었어.”
“딱 차이기 좋을 때네. 고백해봐. 바로 차줄게.”
“당신한테 그럴 일은 없어.”
“역시 내 팔이 마이너스라서 그렇지? 하기야, 섹스 할 때도 불편할 테니.”
만약 그가 지금 놀리는 것이냐고 물어온다면 나의 대답은 당당한 ‘예스’였다. 일부러라도 그래야 했다. 그게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은 방식이었고 나름의 기술이었다. ‘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챙길 것만 챙겨가는 방식.
나는 그가 이제 슬슬 화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나와 ‘일상’의 대화를 하면 이 때쯤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준열같은 경우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켰지만 이번에는 조금 넘어버린 것이다. 이제 나를 보며 무슨 욕을 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그의 다음 행동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 팔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거야?”
화는 커녕 오히려 내 팔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존나게 뜬금없네.”
정말로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사라에게 핀잔을 주듯 대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럴게 질문을 한 태영의 눈빛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반쯤 드러누웠던 몸을 일으켜 사라의 옆에 똑바로 앉은 뒤 손으로 눈을 한 번 비볐다. 갑자기 나의 왼 어깨로 무언가 빈 느낌이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한 나머지 자주 잊고 있던 느낌이었다.
“차라리 태어날 때부터 이랬으면 좋았지.”
“그 말은......”
“그래, 그 빌어쳐먹을 ‘사건’새끼가 가져간거지. 지금쯤 소화되서 똥이나 되었을걸?”
오른손으로 빈 어깨를 만지며 그 날을 떠올렸다. 썩 좋지는 않은 기억이기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그 ‘사건’이 있었기에 난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사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상태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아남았던 거야?”
“한 팔이 없다고 해서 총을 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대신 고생 좀 하기는 했었다. 한 팔로만 싸우는 방식에 익숙해지려고.
“사라하고는 어떻게 만난거야? 원래부터 알던 사이는 아닌 것 같고.”
“엔이 절 구해줬어요.”
사라가 나를 바라보며 밝게 대답했다. 오히려 나처럼 두통이라도 몰려오는 듯한 얼굴로 답해야 할 판에 웃는 것이다. 정말 바보였다. 나라면 몰라도 사라에게 있어 그때의 기억들을 전혀 좋은 게 아닐텐데. 오히려 그녀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말투나 행동으로 보면 그럴 것 같지 않은데......꽤나 좋은 사람이잖아.”
태영이 놀라는 톤으로 말했다. ‘좋은 사람’. 나같은 부류의 사람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자 표현이었다. 그런건 사라한테나 쓰는 말이지 나에게 쓴다는 것은 국어사전에서 뜻을 바꿔야 할 정도였다. 그만큼 나 자신도 사람의 부류에서 ‘개새끼’에 속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개새끼’들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지금이니까 더더욱.
“태영씨는 어떻게 여기로 오시게 된 건가요?”
“작전 중에 어쩌다가. 나도 구해졌거든.”
“‘리더’께요?”
“응. 부상도 당했던 상태였는데 운좋게. 그리고 여기에 정착한거야. 이제 1년쯤 되었나.”
1년. 태영은 이 나라의 군부대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군인으로 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이 딱 군대라는 역할이 상실되고 사라진 날이었으니까.
눈을 돌리다가 침실 문 뒤에서 삐죽 튀어나온 군복이 보였다. 계급과 태극기가 붙어있는 부분은 너덜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고 여기저기 찢어지고 색이 바랜 흔적들이 그의 기억을 대신해 남아있었다. 거기다 끝부분마다 액체같은 것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것들이 피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크립톤의 피거나, 어쩌면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자들의 피일 것이다. 나는 후자 쪽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머무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지금까지 정비를 해왔고 가끔은 개조도 해.”
“그럼 그 양반 트럭도 네가 개조했겠네? 보기와 다르게 정성들인 것 같던데.”
“맞아. 리더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구해와야 하니까 더 신경을 써서 개조했어.”
“흠......우리 차는 개조하지마.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야.”
“하고 싶어도 이제는 부품이 없어.”
그가 비스킷을 하나 먹었다. 작은 손짓에 천장의 전구가 흔들렸다. 나도 비스킷을 하나 집어들어 사라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다 그녀가 실수로 내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이것도 늘 있는 일이었다. 아예 손가락까지 집어넣어주며 조금 괴롭혀보았다. 계속 고개를 돌리며 피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아, 늦게 말씀드리지만 저희 차를 수리해주시는데 뭐라도 보답을 해드릴까 해요. 혹시 저희가 보답으로 뭔가 도울만한 일이 있을까요?”
“보답? 필요없는데 주면 고맙지.”
보답. 사라의 쓸데없는 말 때문에 할 일이 늘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완전히 착해빠져서는 나까지 끌여들여서 보답을 하겠다는 소리인데, 그가 무엇이라도 요구할 새라 빠르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먼저 제시를 하는 것이다.
“우리 차를 고쳐주면 너의 생명선을 연장시켜줄게.”
참고로 난 그를 죽일 생각이 없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난 언제 끝날지 모를, 그것도 며칠사이에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그의 생명선을 더 늘려줄 수 있었다. 우선 예상한대로 그가 다시 이상한 눈으로 나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나도 다시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사라의 손을 잡으며 꾹꾹 눌러 담았다.
“날 죽일 생각이라도 했던거야? 장난치고는 심한데.”
“엔!”
사라도 내 쪽을 쳐다보며 그러지 말라고 화를 냈지만 이것만큼이나 좋은 보답이 없다고 난 생각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난 그 욕망을 이루어주려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서 계속 정비따까리 일만하고 있으면 분명 얼마 안가서 넌 죽어. 내 남은 팔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만약 이게 싫다면 매일같이 침대에서 떡치게 해줄 수도 있고.”
“......왜 내가 여기서 죽는다는 거지?”
이래서 평화라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안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베테랑이라며 자신만만한 그 노인이나 그런 작자를 따르는 준열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오늘 그 노인네를 따라서 관광하는 김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답만 들을 수 있다면야 상관없겠지. 넌 상관있어?”
“뭘 물어볼 생각이지?”
태영이 의심의 눈을 품었다.
“여기, 크립톤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게 언제부터였어?”
정곡 아닌 정곡을 찔린 듯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있었다. 동시에 몸도 반응했는지 소파에서 작게나마 소리가 들렸다. 사라도 그 소리를 듣고서 그에게로 고개가 향했다.
크립톤들이 하루이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꽤 있었다. 나도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날들을 맞이했었고 덕분에 푹 잘 수 있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그 하루 이틀이 지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없던 어둠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슬며시 다가와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저녁과 밤이 찾아올 때쯤이면 긴장하고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곳은 그 하루이틀의 흔적은 커녕 아예 크립톤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흔적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하나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이 집뿐만이 아닌 다른 폐건물들에도 불이 켜져 있다는 것. 크립톤들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밤에는 불들을 끄거나 빛이 투과되지 않는 안에서만 불을 켜기 마련인데 이곳은 밖에서 보이든 말든 불들을 당당하게 켜고 있었다. 아까 잠시 밖에 나갔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바리게이트로부터 멀리 위치해 있으니 안 보일 수도 있기는 했지만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남은 하나는 이곳과 그리고 나와 사라가 여기로 오면서 한 번 들렸던 두 번째 섹터였는데 내가 가장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노인이 이끄는섹터의 사람들은 모두가 마치 ‘사건’이 터지기 전의 분위기, 그러니까 평화로웠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섹터들은 함부로 유지할 수 없는 분위기. 크립톤들에게 죽어도 상관없다는 그런 곳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은 두려워하고 있는게 맞았다. 그에 비해 이곳은 전혀 아니었다.
태영은 내가 여기에 들어온 지 하루 채 되지 않았고 말조차도 해주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것에 놀라하는 것 같았다. 그는 피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3달이 지났어.”
“3달이나요?”
예상을 조금 넘어선 기간. 그래서 난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사라는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있으며 그녀도 크립톤에 대해 배워온 사람이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가 되었든 이로써 나의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곳은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위험할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어쩌면 오늘 그 위험이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크립톤들은 사람만 보면 미친듯이 달려온다. 총알이 박히든, 무언가로 쳐 맞든 생명이 붙어있는 한자신들의 음식이나 번식이 가능한 사람이 보이면 말이다. 그래서 섹터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발정난 수컷처럼 달려드는게 기본인데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다는 것은 무언가 있다는 결론밖에 낼 수 없었다.
“차 수리가 끝나면 내 넓은 아량으로 다른 섹터까지 태워다 줄 수도 있어. 손발은 꽁꽁 묶겠지만. 꽤 괜찮은 답례지?”
그는 나의 답례를 듣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서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껏 이렇게까지 해주겠다는 내 제안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멍청하다. 살고싶지 않다는 것일까.
“그럼 걍 여기서 뒤지던가.”
“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죄송해요. 대신 사과드릴게요.”
사라는 그의 의사를 보지 못했고 말로만추측, 판단했다. 내 말을 듣고서 그의 거절의사를 알고 나에게 잔소리를 한 것이겠지. 그녀는 때로 내가 이어가는 대화만으로 상황을 이해하기도 했다. 같은 장애인의 입장으로서 정말 장하다고 느껴졌다. 더럽게 예의가 바른 것만을 뺀다면.
“아무리 여기가 위험해도 안 떠나.”
나의 신경질적이었던 대답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그가 말했다.
“하......”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급박해져도 이따금씩 이렇게 답답한 놈이 몇몇 있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면 내가 취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대화를 포기하는 것. 답답한 놈과 계속 대화를 해봤자 결국 미쳐 돌아가는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난 그와 대화를 포기했다.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대신 사라가 이어나갔다.
“그건.”
“어이, 태영씨. 안에 있나?”
그가 사라의 물음에 답해주려는 찰 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태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태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고 사라는 소리가 들린 문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문을 쳐다보았다. 드러누운 채로. 달려있는 몇 개의 잠금장치들을 해제한 문이 열리고 이 섹터의 리더이자 우리를 끌고온 노인과 준열이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변태 같았다고나 할까. 몸을 훑어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방해했나?”
“아니, 좋은 타이밍. 마침 가슴이 존나게 답답하다 못해 터져 뒤질 뻔했거든.”
“그럼 다행이군.”
노인은 자상한 미소를 보였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마냥구는 것 같아서.
“가볼까. 사라.”
누웠던 소파에서 일어나며 사라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녀도 내 손이 잡혀지자 자리에서 다소곳이 일어났다.
“사라도 가는 거야?”
태영이 중간에 끼어들어오며 물었다. 왜 이렇게 사라한테 엄청난 신경을 써주는 걸까. 짜증나게 시리.
“꼽냐?”
나는 노려보면서까지 제발 신경을 꺼달라는 눈빛을 보내었다. 그게 통한 것일까, 다시 무어라고 말하려던 것 같은 그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노인만은 쳐다보았다. 노인도 무어라고 말하려던 것 같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상관없다고 알렸다. 여담으로 준열이 뭔가 불만이 많은 듯 했다.
“가지.”
“잠깐.”
이제 정말로 나갈려던 때, 다시 한 번 태영이 멈춰 세우게 만들었다. 당장 사람 없었어도 벌써 허리츰의 권총을 꺼내 저 짜증스런 대가리에가다 한 발 쏴 박아 넣었을 것이다. 정말 볼만한 광경일 것이고. 하지만 아쉽게도 사라가 있어서 참아야만 했다.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미친년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우리를 멈춰 세운 태영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옷 한 벌을 들고 나왔다. 하얀색의 기다란 원피스였다. 어깨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깨끗하고 예쁜 원피스. 거기에 추가로 파란색의 목도리와 갈색의 부츠까지. 여기서 나는 잠깐 놀랐다. 저런 몸집에 그런 취향이 있었나 싶었나 순간 생각했다.
“누나 유품인데 적어도 다 뜯기고 더러운 것보다는 나을 거야.”
생각 취소. 괜한 생각이었네.
그가 지적한 것은 사라의 옷 상태였다. 여기로 오기 전 머물렀던 어느 폐가에서 주운 분홍색의 체육복 상의와 벌써 여기저기가 구멍이 나는 바람에 기능을 잃은 상태였고 초록색의 트레이닝복 바지는 발목부분이 눅눅해졌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바꿔신지 않은 운동화는 이제 신기도 어려울 정도로 헤져 있었다. 운동화만큼은 중간에 바꾸자고 했지만 맞는게 없어 계속 미루고 있던 것이었다.
“사라, 옷 갈아입자.”
“옷? 혹시 아까 태영오빠가 더럽다고 말한 게 내 옷이야?”
“뭐? 오빠? 이런 시발.”
그녀가 갑자기 태영을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도 ‘언니’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벌써 정이라도 들었다는 걸까. 짜증이 나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세게 잡고 태영이 건넨 옷들을 낚아채듯 가져가 다용도 방 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다 갈아입으면 나와! 양말은 그대로 신고.”
갈아입으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닫아버리고 고바로 태영에게 따지듯이 다가갔다. 나의 돌발적 행동에 조금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서 소리치듯 말했다.
“너 몇 살이야?! 주민번호 까봐!”
“......23”
“미친, 이런 꼬마새끼한테 오빠? 오빠?! 좆같네!”
태영의 나이 23살. 그에 비해 사라의 나이는 올해로 26살이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3살 연하에게 그딴 호칭을 쓴 것이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연하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사라는 도대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나중에 단단히 교육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각인시켰다.
“아이고! 시발. 이딴 놈한데 사라가 오빠라고 쳐 부르다니! 나도 못들은 소리인데, 아이고......”
“엔, 다 갈아입었어.”
답답함을 참지 못 해 이리저리 소리치고 있던 사이 사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본 그녀의 모습을 말하자면 정말로 예뻤다. 패션잡지에 나오는 모델들 사이에 껴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집요하게 행동할 만도 했다. 의외라는 눈빛으로 사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아리따운 아가씨로군.”
“안보여서 잘 모르겠지만 잘 어울리나요?”
“그렇다마다.”
노인이 친근한 말투를 사용하면서 사라를 칭찬했다. 하얀 원피스에 허리까지 내려오게 멘 목도리, 그리고 클래식한 갈색 부츠. 그런 사라의 모습은 나와 정반대였다. 세상만 이렇지 않았다면 벌써 사라를 데리고 모텔로 들어가 한 침대에 누웠을 것이다.
“엔, 어울려?”
“......가자.”
대답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재빠르게 문 밖으로 나섰다. ‘예쁘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의 입으로 그 단어가 툭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안타깝다고나 할까. 역시 사라는 이런 세상 따위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다. 그래서 ‘예쁘다’라는 말을 목 속으로 도로 집어넣어버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라는 좋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마 내가 부끄러워서 말을 안하는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게 나았다. 밖은 어둠이 깔린 ‘밤’이라는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조용하고 불안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