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Pride (Good Night, Shara) - 2
의도치 않은 사라의 대답으로 도움을 받게 된 우리는 이들의 트럭 화물칸에 탑승해 이동하게 되었다. 화물칸은 여기저기 정성들여 개조를 해놓았는데 처음 탈 때만 해도 완전한 수송차량으로 보일 정도였다. 앉기 좋게 의자들이 붙어있었고 중간마자 소총이나 라이플을 기대어 놓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지금 뒤에서 쓸려오는 삼촌의 고물딱지하고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였다. 삼촌 개새끼.
“그 팔은 원래 그런거야?”
화물칸에 타서야 만난 마지막 남자, ‘민재’가 물어왔다. 준열과 친구라고 밝힌 그는 꽤나 밝고 친근감이 있는 남자였는데 어디를 가도 제일 먼저 죽을 것 같은 녀석이었다. 거기다 이런 판국에 계속 웃기까지 하고 있으니. 물론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 할 수는 없다고 배웠지만 내게는 그래보였다. 그런 그가 당당히도 팔에 대해 물어온 것이다. 허전한 내 왼쪽을 보면서.
“차라리 그랬다면 더 좋지.”
“‘사건’때문이야?”
“맞아.”
“그럼 그 옆의 아가씨, 그러니까......”
“사라에요.”
“아! 그래, 사라. 미안해. 내가 이름을 잘 못 외워서. 아무튼 사라도 그 ‘사건’때문인거야?”
“......네.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이 새끼, 민감한 것만 묻는 걸 보니까 사회생활 못해봤나 보다. 나도 사라에게 잘 언급하지도 않는 것을 민재는 과감히 묻고 있었다. 나와 달리 사라는 여려서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일 텐데 말이다. 그래도 덕분에 다시금 사라와나의 공통점을 되새길 수 있었다. 우리를 잇는 하나의 공통점, ‘사건’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
“그럼 정말 대단한 거 아니야? 서울에서, 그것도 둘이서 살아왔다는 거잖아.”
“야. 시끄러.”
이러저리 들떠있는 민재를 준열이 제지했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이유는 안 봐도 나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심기가 불편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이런 심기싸움 속에서 민재는 멈추지 않고 호기심에 메마른 아이처럼 우리에게 이런저런 질문공세를 던지고 있었다. 결국 준열도 제지를 그만 둘 정도였다. 세상 편한 놈이라고 느껴졌다.
“엔? 본명이 엔이야?”
“그럴 리가. 본명은 따로 있지만 ‘엔’이라고 불러.”
이번 화제는 나의 이름이었다.
“뭔가 멋진 것 같아. 안 그래? 준열아.”
“유치해.”
“내 본명이 더 유치해서 ‘엔’을 쓰고 있는데 이 정도면 멋진거지. 얼마나 부르기 편하고 좋아.”
“당신 이름 따위는 내 알바 아니야.”
“그럼 알지마, 개새끼야.”
“후......”
일부러 아니꼽게 대답했는데도 그는 한숨만 쉬면서 먼 배경을 바라보았다. 이쯤이면 진짜로 주먹을 날릴 정도는 되는데 인내심이 대단했다. 나도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먼 산을 쳐다보았다.
나와 준열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즐겁고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누가 사내놈들 아니랄까봐 사라에게 유독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예쁘기도 했으니까. 사라의 베이지색 머리카락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예쁜 것은 눈동자였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푸른 눈동자.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인데 사라는 혼혈아였다. 그럼에도 동양의 모습을 많이 가지면서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서양의 것을 띄고 있었다.
“어이! 문 좀 열어줘!”
트럭은 철창으로 된 커다란 문 앞에 멈춰섰다. 이리저리 대화하고 구경하는 사이 도착한 것이다. 몸을 일으켜 그들의 섹터를 둘러보았다. 도심과 떨어져 평지에 세워진 원형태의 벽과 지금 우리가 통과하는 철창문. 문과 벽에는 크립톤을 견제하고자 여기저기에 날카로운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있었다.
조금 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스팔트 도로가 끊기고 잘 정리된 흙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 길 양 옆으로 수많은 천막과 수많은 폐가, 판자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속에 있던 많은 눈동자들이 우리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중간에는 아이들도 여럿 섞여있었다.
“여기야? 당신들의 섹터가?”
“여기도 우리 섹터이기는 하지만 다른 구역이야. 이곳은 두 번째 섹터랄까.”
민재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정리된 흙길과 중간중간에 서 있는 총잡이들에 감시가 가능한 망루까지. 방어하기 위해 세운 벽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오르지 못하도록 대비가 되어있었고 심지어 전기까지 돌아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곳곳에 전봇대들이 서 있는게 장식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게 두 번째 섹터라고?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섹터였다.
“여기로는 왜 온거지?”
“순찰중이니까.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여기를 들려. 사람들이 잘 지내는지, 부족한게 있는지 확인차 오는 거야.”
잠시 차가 멈추었다. 그리고 조수석에서 노인이 내리더니 대표로 보이는 누군가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힘내라는 듯 어깨를 한번 토닥여주고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불과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이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조금씩, 저 노인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당신네들 섹터를 어디야? 멀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5분 정도.”
다시 출발하는 트럭, 출구로 보이는 문. 또 다른 철창문이 우리를 맞이한 것이다. 노인이 손짓으로 문을 열어달라는 신호를 보내자 그에 맞춰 서 있던 두 명의 경비원이 빠르게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꽤나 인기 있는 것 같네. 니네 아버지.”
준열을 보지 않으며 말을 던졌다. 그는 관심없다는 듯 힐끗 보다가 천천히 한 사람의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크립톤전문가’야.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가 없을 만큼 수많은 크립톤들과 싸우셨어. 그리고 동시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구해왔고 지금의 섹터를 만드신 분이야.”
“......전문가라. 꽤나 장담하는 기세인데?”
“우리 아버지는 ‘베테랑’이야. 덕분에 지금까지 크립톤들을 막을 수 있었고 평화를 찾을 수 있었어. 아버지도 이제부터는 평화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
“평화, 평화라......하하.”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웃음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난 정말로 웃겼다. ‘평화’라는 단어를 얼마만에 듣는 건지.
“비웃지마.”
“하하, 미안해. 평화라, 좋지. 너의 아버지가 크립톤에 대해서 베테랑이라고 했지? 그런데 ‘평화’에 대해서는 베테랑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함부로 입 열지마.”
“야, 꼬맹이.”
나는 그를 꼬맹이라고 불렀다. 그 만큼 이들이 어리석어 보였기 때문이다.
“‘평화’의 사촌이 뭔지 알아? 전쟁이야.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사촌지간이지.”
“화나게 하지마.”
“마음대로 생각해. 원래 너희 같은 어린애들은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거니까.”
“엔, 그만해.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다시 한 번 준열이 나에게 주먹이라도 날릴 표정을 지을 때쯤 사라가 말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정정해주고 싶었다. 나는 싸우는 게 아니라 인생경험을 토대로 뭣도 모르는 이 꼬맹이한테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도착했다. 준비해라.”
노인이 창문을 열고 뒤를 보며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제는 무너져버린 작은 도심이었다. 벽은 아까보다 좀 더 단단해 보였다. 콘크리트와 철들을 쌓아 막고 겉에 도로의 표지판들을 빈틈없이 꼼꼼히 붙이고 있었다. 그 사이들에는 뾰족하게 깎은 나무창이나 날붙이들이 매섭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함부로 오르지 말라는 듯. 문도 단순한 철창이 나이었다. 벽과 같이 튼튼하게 메꾼 문이었다. 그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서는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좀 늦으셨네요.”
목소리에는 졸린 감이 묻어있었다. 경비원 치고는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순찰도중에 아가씨 두 명을 모셔온다고 늦었네.”
“생존자인가요?”
“맞아. 꽤 오랜만의 생존자지.”
“다행이네요. 들어가세요.”
“수고하게.”
트럭이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 눈은 열심히 섹터의 안을 관찰했다. 서울만큼 고층 빌딩이 있거나 한 곳은 아니었지만 빌라와 아파트 몇 채 정도는 갖추고 있었고 여기저기 아스팔트 도로가 뻗쳐있는 곳이었다. 여기저기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굴러다니고는 있었지만 흔한 거니까 딱히 눈이 가지는 않았다. 삐죽 튀어나와 있는 철근들은 앙상한 뼈같기도 했다.
폐건물들은 모두 이용하고 있는 듯 했다. 창문 여기저기로 얼굴을 내밀거나 빛이 들어오는게 보였다. 여기도 전봇대들이 장식이 아닌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는 희귀한 섹터였다. 그것도 두 곳이나.
섹터 안은 도심을 전부 이용하고 있는지 꽤나 넓은 곳이었다. 이때까지 봐왔던 섹터들보다 4~5배는 넓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큰 섹터도 기껏해야 동네 하나정도의 규모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트럭이 완전히 멈추었다. 우리가 멈춘 곳은 특별한 기관으로 보이는 한 건물이었다. 문 앞에는 시청이라고 밖에 적히지 않은 팻말이 부서진 채 붙여져 있었다. 금이 많이 가기는 했지만 다른 폐건물들에 비해서는 멀쩡한 건물이었다. 내릴 때도 누군가에게 보란 듯이 사라의 손을 잡고 내렸다. 뒤따라 내린 재열과 창수는 이만 가보겠다며 사라졌고 민재도 떠나갔다. 트럭운전사도 우리의 차량을 정비사에게 맡겨놓겠다며 사라져버렸다. 위치는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한다. 정비사가 있다는 것에 이곳은 섹터보다는 작은 나라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는 내가 머무르면서 업무를 보는 곳이네. 잠시 안으로 들어가지.”
노인은 우리의 의사는 묻지 않은 채 바로 안쪽으로 들이려 했다. 귀찮았지만 또 지랄하면 사라가 안된다면서 도와준 분들의 말을 우선 듣자고 할 게 뻔했기에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우리 차량이 어디에 갔는지를 들으려면 순순히 따라가보는 것이 좋아보였다. 그래도 중간에 지겹거나 짜증이 나면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건물 안에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노인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생활을 하는 사람들같지는 않았고 무슨 일이라도 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회사원들 같이.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했다. 소리가 아니라 분위기가.
노인이 안내한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중간에 민재는 떨어져 다른 방 쪽으로 향했고 나와 사라, 준열과 노인이 한 방에 있게 되었다. 방 안은 침대 하나와 옷장을 빼고는 사실 사무실이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아, 존나 보기 싫네.
“커피? 원한다면 홍차도 있네.”
“난 술 아니면 안 받아. 사라나 줘.”
“홍차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표정에 미소를 건 노인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스틱으로 된 홍차가루가 종이컵 안으로 쏟아진다. 그러는 사이 우리를 가가자 소파 하나씩을 차지하며 앉았다. 따뜻한 홍차가 사라의 앞에 놓여지고 내가 대신 조심히 홍차가 담진 종이컵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한 입, 사라는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에 얼굴이 환해져 있었다. 그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정말, 극과 극이네.”
대화의 시작으로 준열이 먼저 말을 꺼내며 우리를 평가했다.
“나도 내가 꽤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얼굴이 없나, 팔이 없지.”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 쪽 태도를 보고 말하는 거지.”
“요즘은 태도도 스타일인거 몰라?”
“쉬지않고 내 신경을 건드는데, 그러다가 후회하는 수가 있어.”
“자, 자, 그만들 하지. 여기까지 와서도 싸울건가?”
“그래, 엔. 싸우지마.”
보다 못 한 노인과 듣다 못 한 사라가 함께 말려왔다. 사라는 아예 내 손을 잡아버리기까지 했다. 총이고 뭐고 못 쥐도록. 나와 준열은 서로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먼저 질문해도 되겠지? 노인.”
귀찮은 배려로 늙은이가 아닌 노인으로 불러주었다.
“그러게.”
“우리 차는 어디로 끌고 간거야?”
“당연히 우리 섹터의 정비고지.”
“그 정비사라는 놈, 믿을 만해?”
“군차량일수록 더욱 믿을 만하네. 군부대 출신이니까”
“뭐야, 군인이야?”
아, 시발. 군인은 정말 질색이었다. 안 좋은 추억도 있고 한 창 싸돌아 다닐 때 경찰다음으로 날 위협했던 놈들이었다. 거기다가 생각도 꽉 막혀버린 놈들.
“정비실력도 좋지만 전기기술이 관련된 거라면 우리섹터의 정비사만한 사람이 없지. 나중에 위치를 알려줄테니 찾아가보게나.”
자체로 소개팅을 열라는 건데 정말 끔찍했다. 그래도 그 놈이 우리 차를 맡고 있다니까 결국에는 갈 수 밖에 없기는 했다.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겠나?”
“네, 괜찮아요.”
또 사라가 가로채갔지만 기분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편안함은 느꼈다.
“자네들, 여기에 머무를 생각 없나?”
노인의 질문은 직설적이면서 자신의 본심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나름 매력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섹터는 잘 없다. 전기가 들어오고 크면서도 사회구조를 제대로 이루고 있는 곳. 누군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일테지. 아마 우리가 아닌 다른 생존자들이라면 얼싸구나하고 바로 물었을 것이다. 사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죄송해요.”
달랐다. 질문을 듣자마자 내가 말을 가로채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럴 필요 없이 사라가 먼저 끊어버렸다. 그녀라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의지가 담긴 대답을 한 것이다. 나는 감동했다.
“허어......그렇군......다른 이유라도 있나?”
“저희는 부산으로 가고 있어요.”
“부산? 그 먼 곳을 말인가?”
“네. 저희는 그곳에 있는 생존기지로 가는 중이에요. 엔이 저를 데리고 꼭 같이 도착하자고 약속한 곳이에요.”
노인은 그 말을 듣더니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비웃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감 가득한, 어쨋든 기분 나쁜 미소였다.
“그곳보다는 여기가 더 안전하네. 장담하지. 그래도 머무를 생각이 없나?”
“죄송해요. 저희는 가야돼요.”
“차가 고쳐질 때까지 다시 생각해봐도 된다네.”
그는 우리의 완고한 의사를 듣고도 자신의 섹터에 머무르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꼭 남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속에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사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단호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좋아.”
그녀의 말을 끊고 내가 끼어들었다. 노인의 시선이 사라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졌고 준열도 뭔가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다시 생각해볼게. 대신 오늘 밤 당신들의 섹터를 구경시켜줘. 그걸 보고 판단하겠어.”
“안 그러해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통했군.”
“궁금했거든. 당신의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지랑 ‘베테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야 좋네. 잘 생각했어.”
그는 기분좋게 내 말을 받아들였다. 다만 준열은 날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 대해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아마 준열은 나 역시 부산으로 가야한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치며 시비라도 걸 것으로 예상한 듯 했다. 어떻게 보면 그가 맞았다. 나는 이곳에 사라와 머무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대답을 한 것은 더 이상의 대화를 끊기 위한 것과 동시에 조금 켕기는 것이 있어서였다. 사라는 저런 고집세고 자신의 말만 밀어붙이는 상대와는 쉽사리 대화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끊어서 더 이상의 사라가 불필요한 대화를 이어가지 않도록 한 것이고 켕기는 것은 이곳의 안전이었다. 분명 이 섹터를 견고해보였고 나름 잘 갖추어진 곳이다. 그건 맞는데 너무 켕기는 것이 있어서 의심이 갔다.
“준열아. 이 분들을 정비고로 안내해주겠나?”
“그런 호의는 됐어. 길만 알려주면 둘이서 손잡고 가도록 할게. 이 안도 둘러볼 겸 말이야.”
“그럼 약도를 주겠네.”
노인은 자신의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직접 그린 듯한 약도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공책 종이에 그린 약도였는데 여기저기 특정건물들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 중 ‘정비고/태영씨’라고 적힌 곳 이 보였다. 사거리 2개 정도를 지나면 정비고였다.
“오늘밤에 바로 안내해주도록 하지. 저녁을 먹고 나서 찾아가도록 하겠네.”
“우리가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는 알고?”
“이미 정비사에세 자리를 내달라도 말해두었네.”
“지금까지 지나쳤던 섹터들 중에 서비스는 끝내주네. 이런식으로 생존자들을 끌여들였나 보지?”
“엔, 그만해. 나 정말 화낼거야.”
사라가 오랜만에 협박을 했다. 협박이라기보다는 경고인데 정말 귀여웠다.
“......칫. 쨋든 우린 이만 가볼게. 그쪽씨는 표정관리하고. 존나 무섭게시리.”
준열이의 표정은 이미 한계였다. 거기다 사라도 조금은 화난 상태인지라 그만 말을 끊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사라를 끌고 조심히 계단을 내려가 이 건물에서 나오자 몇몇이 걸어다니는 도로위에 서게 되었다. 해는 아직 떠 있었지만 점점 지고 있었고 그림자들이 도시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이제 약도를 보며 정비고로 찾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사라가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아 멈춰 세웠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에 왼쪽 옷소매가 흔들렸다. 허전한 나의 왼쪽이었다.
“꼭 그런 태도를 보여야했어?”
화난 것 같은게 아니라 화났네. 자신은 보지 못하겠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말투는 화난 기색이 담겨있기보다는 타이르는 쪽에 더 가까웠다.
“뭐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들이야. 조금은 예의를 갖춰야지.”
예의, 태어나서 내가 듣는 단어들 중 가장 생소한 단어였다.
“사라, 그러니까 네가 안된다는 거야.”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괜히 예의를 갖추고 시답잖은 ‘정’같은 거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그랬다간 차가 다 고쳐지더라도 못 떠날지도 몰라. 우린 부산으로 가는게 목적이잖아. 안 그래?”
“그건 맞아. 그래도 엔의 태도는 너무 아니었어.”
“아니. 이게 맞는 거야. 지금 세상을 옛날 보듯이 하지마. 그 때는 그 예의라는게 중요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그 예의 때문에 우리가 뒤질 수도 있어.”
그녀는 차가운 내 말에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졌거나 아니면 나와의 대화를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나란 사람은 예전부터 그랬고 사라와 나는 살아온 세계 자체가 다르니까. 제아무리 그녀라도 결국 날 비난하거나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무리들 중 하나였다. 물론, 다른 부분은 있었다. 그 부분때문에 나는 사라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다시 정비고로 향해 걸으려고 했다. 하루빨리 차의 상태를 확인하고 언제 떠날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한결 마음이 놓일 테니까. 그러나 다시 한 번 사라의 두 손이 나의 손을 꽉 잡아세웠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 안심할 수 있게.”
그리고 다시 한 마디, 이런 사라의 말은 내 생각중 하나를 취소시키게 만들었다. 바로 그녀를 그 사람들의 무리 중 하나로 생각했던 것. 역시 사라는 무언가 달랐다. 뭐, 크게 와닿거나 그런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었다.
“그럼 정비사한테는 그 최소한을 지켜볼게. 이제 움직이자고.”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녀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꽉 쥐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움직였다. 지도에 표시된 정비고는 2번 출구라고 적힌 곳과 가까이 있었다. 1번 출구는 도심의 북쪽이었고 2번 출구는 도심 동쪽의 가장 끝이었다. 마지막인 3번 출구는 남쪽으로 도심의 끝부분이었다. 뭐 이리 출구가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