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프롤로그 1화
‘최근 연쇄살인마의 엽기살인극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통칭 ’서울의 마녀‘라고 불리는 최악의 범죄자인데요....’
‘오늘 UN의 내부에서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한 UN군이 경계를 강화하고...’
‘불과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또 다른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의 훼손흔적과 살인방법 등을 볼 때 이번에도 ’서울의 마녀‘의 짓으로 보고 있으며...’
‘아프리카 각종 지역에서 정체모를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습니다. 세계 보건당국에서는 바이러스는 채취해 연구 중에 있으며...’
‘오늘밤 정체모를 괴생물체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CCTV에 찍힌 화면을 보시면 처음 보는 괴생명체가 각종 기기를 부수고 사람을 공격했고...’
‘연쇄살인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또 ’서울의 마녀‘의 짓일까요? 경찰은 아직도 쫓는 중일 뿐 수사에 진전이 보이지 않고 이에 국민들이 경찰의 수사능력을 비판중이며...’
‘서울의 CCTV에 찍혔던 괴생물체가아시아를 포함해 유럽권에서도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피해가 일어나 각 국의 군들이...’
‘오늘 오후, 검찰에 방화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마녀‘가 보내었던 협박과 경고장의 내용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지만 부상자들이 늘어나...’
‘괴생물체로 인한 피해가 전 세계구모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 괴생물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경찰과 군부대가 합동수사를 펼치고 있으며...’
‘어젯밤, 괴생물체의 습격으로 부산시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현재 군부대가 진입해 생존자들을 구하고 있으며...’
‘여러분, 밤에 돌아다니지 마십시요. 괴생물체의 활동시간이 밤에 머물러 있어...’
‘현장입니다! 현재 군부대가 진을 치고 괴생물체들과 대치를 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습격을 받은 광주 광역시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으며...’
‘오늘, 서울시에서 정체모를 거대한 괴생명체가 공격해왔습니다. 서울의 반이 붕괴되었으며...’
‘전국 각지에 군부대들이 상주해 괴생물체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척이나 힘들어...’
‘알립니다. 현재 뉴스를 듣고 계신 분들은......치지직.’
“이 빌어먹을 TV!”
눈 앞에서 노이즈만 시끄럽게 울려대는 TV를 발로 차 버렸다. 화면에 금이 가고 그대로 뒤로 엎어지면서 꺼져버린다. TV의 무게에 선도 같이 ‘툭’하고 뽑혀버린다. 그래도 검은색의 굵은 코드선은 끊어지지는 않았다. 손으로 뽑아 가져가려고 했을 때는 뽑히지도 않던 코드였다. 먼지와 함께 아예 박혀버려 쳐 나오지 않던 고물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USB에 담겨있던 영화를 보려고 아까까지 잘 재생하던 TV는 이제 작동하지 않았다. 죽어버린 것이다. 살인범은 나고. 애초에 이런 폐가에 있던 거라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온종일 스트레스로 가득한 나에게는 기대감을 저버린 TV가 개새끼처럼 보였고 덕분에 조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망가져버린 TV를 뒤로하고 소파에 누워버리듯 앉았다. 먼지가 조금 묻어있고 여기저기 터져서 스프링이 튀어나오기까지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전에 머무르던 폐가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집의 소파는 앉을 구석도 없었고 있는 부분마저도 각종 벌레들이 제집처럼 사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소파에 앉을 수 있을 리가 있을까.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지네며 거미며 바퀴벌레들이 내 몸을 타고 기어오를 텐데. 생각만해도 더러웠다.
“엔, 무슨 일이야?”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차근차근 억누르려던 나를 사라가 불렀다. 목소리가 들린 쪽, 이미 부서져있어서 내가 뜯어버린 문의 벽으로 한 손이 더듬더듬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곧 사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손은 벽을 여전히 더듬거리고 다른 한 손은 앞으로 뻗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고개는 내 쪽이 아닌 오로지 앞 쪽만을 보고 있었다.
“신경 끄고 원래 자리로 가서 앉아나 있어. 그러다 또 벽에 머리 쳐박으려고?”
“거기구나.”
내 목소리를 듣더니 앞만 보던 고개가 정확히 내 쪽을 향했다. 하지만 눈이 나를 보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걷는 그녀는 손을 뻗어 다가오다가 한 손이 나의 얼굴에 닿자 여기저기를 만져대었다. 그걸로 내가 앉아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아래로 손을 뻗어 소파를 더듬거렸다. 앉을 곳을 확인하고 나의 바로 옆에 앉는 사라. 고개를 여전히 이쪽으로 향하는데 이제야 눈이 나에게 맞춰졌다. 그녀의 긴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한 번쯤은 내 말을 들을 수는 없어?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위험하게 움직이지 말고 그냥 가만히 쳐 앉아있으란 말이야.”
“괜찮아. 엔이 있으니까.”
“난 네비게이션이 아니야, 사라. 더군다나 시각장애인 전용은 더더욱 아니고. 알겠어?”
“알았어.”
그녀에게 핀잔을 이리저리 늘어놓지만 시무룩해져서 돌아가기는 커녕 그저 바보같이 미소만 지으며 그대로 내 옆에 앉고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그시, 내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까의 큰 소리에 대한 일을 암묵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었다. 옘병지랄.
“후......TV를 걷어찼어.”
“왜?”
“영화 한 편 보려는데 망할 TV새끼가 노이즈만 쳐 내보내줬거든.”
“짜증났어?”
“엄청나게. 그래서 TV를 걷어찼고 지금은 뒤져버렸어. 오케이?”
“그러면 안 돼, 엔. 화를 가라앉혀.”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손으로 때리기만 할게.”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무척이나 귀찮았다. 내가 TV를 발로 걷어차든 짜증을 내든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하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화가 가라앉았다. 알 수 없는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한 사라는 나의 스트레스 억제와 유일한 분노조절 장애를 도와주는 ‘의사’였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내 전용 주치의.
“원래자리로 돌아가.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이미 TV는 내 머리에서 생각을 떠나버렸고 문득 내일 떠나는 것에 대비해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 가도 약속을 잡은 것처럼 만나는 사람이었다. 내일이면 이 망해버린 서울과도 영원히 안녕이었다. 폐가도 마찬가지고. 대략 일주일쯤 머물렀을까. 꽤나 정들고 아늑하기는 했지만 떠나야하는 입장으로써는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언젠가 돌아온다면 그 때 페인트 통이라도 들고 와서 감사의 의미로 새로 칠이라도 해주지 뭐.
“어디가려고?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
사라는 자리에서 내가 일어서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어디를 잡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의 손을 내 허리를 잡고 있었다.
“안보이는 채로 죽기 싫으면 집에서 가만히 있어. 금방 다녀올테니까.”
“알았어.”
조금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농담으로 던진 말도 아닌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사라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침대가 있는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시트와 이불을 구해와 만든 침대 위로 그녀를 앉히고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듯 말했다.
“내가 올 때까지 여기에 가만히 앉아있어. 누군가 와서 문을 두드리든 부수든 대답도 하지마. 그리고 만약에라도 누군가 강제로 들어오거나 이상한 움직임 소리같은게 들린다면 옷장 안으로 들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5걸음정도만 앞으로 움직이면 옷장이야.”
말로만 하면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아 직접 일으켜서 그녀의 손에 옷장의 문고리를 한 번 쥐어주었다. 안은 성인 2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의 옷장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중간에 보면 고리같은게 있어. 그 고리를 오른쪽으로 당기면 밖에서는 절대 열지 못해. 이것도 만져봐.”
옷장의 문고리에서 이번에는 그 고리를 쥐어주었다. 이 폐가에 도착하고 거리에 나뒹굴던 철조각들과 망치를 주워 직접 만든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싸움이 일어날 시 사라를 숨기기 위해 가장 먼저 만들 장치였다. 이런 것에 대해 경험도 없고 더군다나 성한 몸도 아니어서 만드는데 꽤나 고생을 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기도 했었고, 그 때마다 사라가 옆에서 의사역할을 계속 해주었었다.
“이제 알겠으면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마, 알겠어? 이번에도 움직이거나 했다가는 그놈의 다리를 묶어서 데리고 다닐 거니까.”
“또 겁준다.”
그녀는 내 협박을 협박으로 듣지 않고 어린아이 장난으로 생각하듯 들어버린다. 실제로 나도 말만 이렇게 할 뿐 정말로 그렇게 한 적은 있지도 않았고 설령 있다고 해도 욕에서 끝나버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사라에게 당부를 하고 폐가를 나왔다.
흐리기만 한 날씨, 부서진 폐가들과 버려진 차들이 가득한 골목. 유리는 모두 깨져들 있고 아예 폐차를 시켜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들을 자랑하는 차량들도 있었다. 그 차들 사이로 잠 숨겨둔 우리의 이동수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가로등도 넘어져 바닥에 누워있거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오던 좀비들이 휩쓸고 간 것 같은 풍경이기도 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닌가.
폐가의 문을 잠그고 사이사이마다 잡초가 자라난 부서진 도보를 걸었다. 걸으면서도 주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듯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전에는 사람들이 자주 다녔을 도보와 차들이 수도 없이 지나가던 도로, 상점거리, 식당, 백화점, 그리고 내가 자주 다닐 수 밖에 없었던 뒷 골목들. 이 많은 장소들이 이루어져 만들고 있던 도시가 지금은 사람조차 어디에도 없을 정도로 먼지와 ‘사건’으로 인한 잔재들만이 뿌옇게 남아 지금의 서울이 있을 뿐이었다. 그 어느 곳도 제대로 된 곳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여기저기에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캠프나 그런 구역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어느 곳이 어떻게 되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가본 곳도 겨우 2곳 뿐이고 들렸다 하더라고 볼일만 보거나 필요한 것들을 뺏어오는 게 끝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역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뭐가 그리 잘났는지 존나게 떠들어대지만 그런 생각들과 위험도는 항상 정비례했다. 더 이상 세계 어디에도 멀찍이 안전한 곳은 없다. 그저 살아남으면서 죽을 날을 조금씩 뒤로 미룰 뿐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사라도 그러했다.
우린 그런 사이비같은 곳들에 머무는 것을 택하지 않았고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며 폐가들을 오갔다. 하지만 이 역시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었고 계속 여기저기를 걷고 이동해야 했다. 그러던 와중 그나마 안전으로 신뢰가 가는 곳 하나를 찾게 되었고 사라와 함께 여기를 떠나 부산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곳은 정부의 주관하에 일찍이 만들어진 생존기지고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목숨을 지켜줄 군인들과 먹을 식량들으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을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오늘은 그곳으로 가기 위한 출발을 준비하는 날이었고
“손님 왔어요. 손님!”
술집의 간판이 붙어있는 지하상가 앞. 폐가에서 10분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이곳은 나와 주로 거래를 했던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굳게 닫힌 철문과 여기저기 못질로 막혀있는 창문, 가장 인상깊게 들어온 것은 철문으로도 모자라 막는답시고 설치해놓은 셔터였다. 그 셔터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손님 왔다니까! VIP고객님께 이런 대우를 해도 되는 거야? 내가 니새끼들이랑 얼마나 많은 정을 쌓아왔는데!”
손으로 두드리며 시끄럽게 말을 늘여놓자 마지못해 열어주듯 안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셔터가 올라갔다. 그 아래로 순서대로 갈색의 구두와 짙은 남색의 청바지, 검은 색 자켓, 마지막으로 남자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찮은 인상의 얼굴이 그림판처럼 표현해대고 있었다.
“아줌마, 미쳤어? 낮부터 술 쳐먹었어?!”
“그럼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벌써 차 끌고와서 박았겠지. 빨리 열어.”
지금까지 나와 거래를 했던 이 남자는 이 구역에서 정착하고 자신만의 요새같은 아지트를 만들고는 방구석폐인처럼 지내고 있는 인산이었다. 나름 조직이란걸 만들고서. 상황이 이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재물을 챙기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많아졌다고 하는게 맞는 것 같다. 원래 개판으로 돌아갈수록 사람이란게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드러내고 다니니까.
남자가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뒤를 따라 깊숙한 아래로 내려갔다. 높고 작은 계단이 몹시나 불편했다. 거미줄들이 여기저기 끼여있고 조금만 발이 미끄러지면 넘어져 크게 다칠 정도였다.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올라왔지만 지금은 참기로 한다. 혼자 폭발해봐야 여러모로 계획한 일이 틀어질 뿐이니까.
“오늘을 온다는 말 없었잖아? 무슨 볼일이야? 이틀 전에도 그렇게 쓸어갔으면서. 벌써 다 먹은거야?”
“내 여친 식성이 좋아.”
“아무튼, 오늘 물량은 크게 없어. 자리에 앉아 있어.”
남자는 안의 문을 열고 날 한 소파로 안내해주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지시대로 소파에 앉으면서 빠르게 이 안을 둘러보았다. 구조는 내가 봐왔던 그대로였고 오늘은 형광등이 바뀌어 있었다.
사장인 그 남자, 윤석을 포함해 남자 총 4명, 또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부러 살을 노출하고 다니는 듯 한 여자 1명. 남자들의 호주머니나 허리츰으로 무언가 들어있는 듯 볼록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여자의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허리 뒷츰에 쑤셔 넣었던 권총을 소파에 기대면서 확인하고 앉았다.
조금 뒤, 윤석이 품 안에 여러가지를 들고 나왔다.
“자, 오늘은 이게 끝이야.”
그가 들고 나온 것, 각종 통조림에 마실 수 있는 물들이었다. 모두 다른 곳에서 뺏어와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나와 같은 ‘손님’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난 그걸 구매하는 ‘손님’이었고 말이다. 물론 돈으로 거래하는 건 아니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돈이란 건 불을 지필 때 넣는 장작대용이나 다름없으니까. 돈 대신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화폐가 되어버린 값비싼 장신구들이나, 담배, 마약, 생필품, 그리고 ‘사람’이었다. 어찌보면 물물교환 시대로 전락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시시대처럼 말이다.
“얼마를 원해?”
우선 그가 먼저 가격을 제시하도록 물어보았다. 마지막 거래인만큼 신중하게.
“글쎄, 당신의 마지막 팔은 어때?”
그가 내 몸에 온전히 붙어서 지금까지 나를 살려준 오른팔을 보면서 말했다. 내 뒤로 몇몇 남자들이 아까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모두 당구를 치는 척, 무언가를 읽는 척 하지만 모든 신경을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쩌면 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 걸까.
“아니면 당신 집에 있는 그 여자도 괜찮고 말이야.”
“언제부터 사장님 취미가 관음증이셨어요? 노출증인건 알고 있는데. 좆도 좆만한 새끼가.”
아직 집에 있는 사라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지금 내가 아는 이 집의 인물들은 모두 여기에 있었고 설령 내가 모르는 놈이 간다고 해도 그렇게 그녀에게 타일렀으니 잘 숨을 것이다. 사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엄연히 이런 세상에서 같이 살아남아온 어엿한 어른이었다.
“뭘로 지불할래?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이런 곳과는 달리 엄청 안전하고 평생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게. 라디오에서 들은 곳인데 내가 안전하고 쉽게 나는 방법을 알아.”
“정보를 팔겠다는 거야? 라디오라면 우리도 있어.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안전하다니 평생 행복하게 살수 있다느니 그런 곳은 없어, 지금 내가 있는 여기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텐데.”
그의 이런 말에는 동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그곳은 정말로 안전하고 평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책에도 나오고 TV에도 이따금씩 나오는 그곳이었다. 거기다 사람이라면 무조건 한 번은 가는 곳이었다.
“정보 판다는 거 아닌데.”
윤석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과 신경이 모두 나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슬그머니 그의 주머니를 본다. 그리고 몸을 숙이면서 고개를 가까이 들이대며 조심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도 궁금한 것일까, 가까이 다가왔다.
“거기로 갈 수 있는 티켓을 주겠다고. 사이좋은 니 새끼 친구들과 함께.”
그 말을 끝으로 허리 뒷츰에 숨겨두었던 글록을 빠르게 꺼내들었다. 바로 윤석의 대가리에 한 발, 이윽고 3번의 총성이 더 울렸다.
“읍! 읍!”
“그래, 그래, 잠시만.”
내가 먼저 시작한 잠깐의 실랑이가 있고 난 후 윤석이 애지중지하던 바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그의 가방을 열고 나름 정당하게 물물교환을 한 통조림들과 물들을 집어넣었다. 거기다가 내가 준 티켓을 들고 그곳으로 떠나버린 남자들이 각자의 품에 숨겨두고 있던 권총들 중 하나와 탄창들도 쑤셔 넣었다.
속도는 느릿했지만 한 팔, 한 손밖에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 사라가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데려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으니 내가 감당해야할 부분이었다.
“우읍!”
뒤에서 입에 테이프가 붙여진 채 두 손, 두 발이 케이블 타이로 묶인, 윤석이와 함께 지냈던 여자가 나를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보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는 동안 가만히 내버려 두려던 그녀의 발버둥에 잠시 짐을 놔두고 천천히 다가갔다. 허리 뒷츰에는 여전히 글록을 가진 채로. 언제 어디서 험한 꼴이 일어날지 모르니 당연한 준비였다.
그녀의 답답한 마음과 함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떼어주었다. 덕지덕지 붙여두었던 유리테이프가 ‘찍’소리와 함께 떼어졌고 바닥에 버려져다.
“살려주세요! 제발.”
테이프를 떼자마자 그녀가 내뱉은 말, 그리고 내가 이런 상황들을 여러 번 마주할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던 말을 그녀는 눈물과 함께 애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가져보는 희망의 눈빛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이 잠시 떠올랐다. 내 눈앞의 이 여자도 그 명언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잠시동안 일부러 정적을 유지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옛날부터 이런 상황이 오면 꼭 다들 나한테 말하더라. 살려 달라, 잘못했다, 여러 가지. 그런데 난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살려주지 않을 걸 알면서 왜 그러는거야? 내가 무슨 동정이라도 하면서 가만히 보내주기라도 기대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호구로 보이는 건가?”
“그게 아니라.”
“좋아, 그럼 기회를 줄게. 니가 바라는 대로 그 시답잖은 희망을 주겠다고. 내가 널 살려줘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 대신에 잔뜩 기대하고 있는 나에게 들려주는 대답이 ‘짜잔!’하고 광대같은 대답이라면 뒤늦게나마 뒤에 있는 당신 친구들을 따라가게 될 거야. 알겠어?”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잠시 놓아두었던 짐들을 재차 정리한 뒤에 가방을 메었다. 손에는 글록을 쥔 채 그녀의 앞에 쭈구려 앉았다. 총구는 아래로 향하게 하고 시선은 여자의 눈으로 맞추었다. 이런 장소,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남자 여럿 이목을 끌었을 얼굴이었다. 사라와는 달리 무언가를 응시하는 제대로 된 눈동자.
“말해봐.”
여자의 긴장을 풀어주듯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로 물었다. 효과가 영 아니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더 굳어지며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은 강한 듯 했다. 그 두려움, 그 떨림 속에서도 여자는 입을 열고 나의 기대감에 답을 던졌다.
“저,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여자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누가 보아도 거짓고백에다가 그저 살기 위해서 수치심을 무릎쓰고 답한 것이었다. 벌써 그녀의 눈동자가 더 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마냥 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응을 보였냐고 묻는다면 ‘예스’였다. 난 그녀의 대답에 크게 웃어 자빠졌다.
옛날, 블랙코미디 프로그램을 보았던 때처럼 크고 호탕하게 웃었다. 안 웃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녀를 살려줘야 하는 이유가 그녀가 날 좋아하기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을까. 오늘 완전히 처음 만난 사람인데.
내가 쉬지 않고 웃자 분위기라도 맞추려는 듯 그녀도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억지웃음을 내뱉고 있었다. 아첨이라도 하는 것일테지. 너무 웃은 걸까, 조금 배가 아파와서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그녀에게서 총구를 치웠다. 여자가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
“정말 웃겼어. 안그래도 오늘 좀 스트레스가 쌓였었는데 해소가 될 정도야. 하하하!”
“그럼, 전?”
여자는 내가 케이블 타이를 끊고 이만 놓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마 내가 만족한 것처럼 보인 듯 했다. ‘희망’, 그녀의 눈에는 이 단어가 어울렸다. 그래서 다시 들고 있던 총의 총구를 그녀의 다리로 가져가 살에 붙였다. 아직도 웃겨서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분명 사라가 앞이 보였다면 날 미친년으로 보았을 지도 모른다.
“하하! 내가, 하, 광대같은 대답하면 보내버린다고 했지?”
“네?”
여자는 내 말을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내가 그 궁금함을 직접 저 멀리 날려보내주었다. 총성과 함께.
“아, 아아!”
매끈한 살결을 드러내고 있던 여자의 다리에서 새빨간 구멍과 함께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왼다리였다. 여자는 고통에 못 이겨 자신의 다리를 당장에라도 손으로 보살펴주고 싶어 했지만 묶인 케이블타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다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는 조금씩 바닥으로까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내가 레즈비언은 아니지만 이미 여자친구가 있어서 말이야.”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내가 시끄럽다고 했지?”
울부짖으며 애걸구걸하는 여자의 오른다리로 총구를 겨누고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작은 총알이 여자의 오른다리를 상처입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울렸다. 바닥을 적시던 붉은 웅덩이가 조금씩 더 커지고 있었다.
“아, 아니던가. 이번이 처음이던가.”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여자에게 시끄럽다고 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사라한테나 여러 번 말했지. 괜히 총알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어느새 여자가 자기 몸만으로 기어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자국이 길을 남기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우선 정리부터 하고자 싸놓은 짐가방을 메고 글록17을 다시 허리츰에 끼워 넣었다.
아직도 기고있는 여자를 잠시 순서에서 미루고 윤석을 포함해 남자들의 시체들을 한 군데 모아두었다. 작은 산을 쌓듯이. 그러다 영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정렬하듯 쌓으며 그들의 손들을 서로 잡게했다. 지금쯤 사이좋게 천국의 길을 걷고 있을 텐데 손을 잡고가야 더 정겹게 보일 테니까.
그들의 영혼없는 몸덩이들 위로 종이나 옷, 어쨋든 불에 타는 것들을 올리고 윤석의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이런 폐허 속에서 마땅히 묻어줄 곳도 없으니 화장이라도 해주는 게 맞아보였다. 손에 쥔 종이에 불을 붙이고 그대로 윤석을 위한 불의 관에 옮겨 붙였다.
조금씩 불타는 그 속에서 그들의 몸도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장 빠르게 불이 붙은 쪽은 머리카락이었다. 벌써부터 썩은 냄새가 지하방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귀신도 쫓아낼 정도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체화장을 시키고 지하방에서 나서려는 때 문 앞에서 어떻게든 문을 열어보려는 여자가 아주 열심히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끈질기고 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하방에서 나가려 문으로 다다르자 여자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에 그려져 있던 아이라인도 흐려질 정도였다.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가 선물을 주지 않는다고 했어.”
“제발, 제발......제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기어갈 곳도 사라진 그녀는 문에 자신의 몸을 기대고 겨우 앉아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 아이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손과 발이 묶인 채 몸을 떨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아이의 옆으로 남자가 속삭였다.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가 선물을 주지 않아.”
여자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문을 열었다. 환한 바깥의 빛이 들어왔다.
“오른다리는 내 실수였어. 미안. 대신 다시 한 번 기회를 줄게. 생존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말이야.”
“꺄앗!”
계단을 오르면서 더 이상 걷기 힘든 여자의 머리를 잡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높고 작은 이 계단의 불편했고 커다란 짐도 들고 올라가느라 더 불편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의 계단이지만 작은 꼬꼬마 동상을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지상은 뿌연 햇빛과 함께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직은 조금 쌀쌀한 회색뿐인 봄이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아스팔트 도로위로 여자를 내동댕이쳤다. 들기가 무척이나 무거웠으니. 잠시 팔을 풀고 그녀의 귀에 내 목소리가 잘 들리도록 무릎을 꿇고 이어링이 있는 귀에다가 말했다.
“여기서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내가 아는 친구들이 있어. 간단해, 계속 기어가면 돼. 그럼 네가 바라는 대로 살 수 있어. 대신 뭐, 그 새끼들 노리개로 살아가겠지만. 그게 싫으면 여기에 이 상태로 그냥 잠을 자든, 잡생각을 하든 밤까지 누워있어. 그럼 ‘크립톤’들이 와서 널 개처럼 뜯어 먹을 거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여자였다. 구걸이 지친것과 동시에 더 이상 나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늘 만나는 상황이었다.
“왜긴, 너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이야. 이 빌어먹을 세상이.”
그 말을 끝으로 여자를 묶고 있던 케이블 타이를 군용차량에서 주워온 나이프로 끊어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여자의 선택을 기다렸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녀의 선택은 ‘생존’이었다.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알려준 ‘그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서 기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다리에서 흐르던 피는 조금씩 멈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핏길을 남기고 있었다.
만약 밤 이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크립톤’들이 이 자국을 쫓아가 여자를 먹어치울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계속 기어가면 충분히 잠 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니까. 도착해서 여자는 계속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 친구들’의 노리개로.
이제 돌아갈 때가 되어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라가 기다리고 있는 폐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