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천명(天命)
"내가 진출을 끌어내어 쫓아 보낸 것에는 대신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가?"
"네, 그저 단주님을 도성으로 불러들여 충성심을 확인하겠다는 것으로 조정에서 결론이 났습니다."
정전에서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상단 직원이 급하게 배를 타고 와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줬다.
결국, 명나라의 계략이 성공한 것이었다.
내가 물러나고 다른 이가 오는 것으로 해서 북방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고, 내가 병권을 놓지 않고 난을 일으킨다면 조선이 혼란스러워 지나 명나라가 원한 최고의 목적 달성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대신하여 누가 인산성을 맡는다고 하더냐?”
“영산성은 어유소 영안북도 절도사(평안도 절도사)가 맡는다고 하옵니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거정 대감이 같이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응? 서거정 대감이 직접 오고 있다고?"
나를 데려오기 위해 서거정이 나섰다고 하니, 조정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단주님 어찌 하시겠습니까? 듣기로는 절도사 어유소가 병사 500명을 데리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도성에서 온 직원과 함께 동항을 지키고 있던 염호진이 같이 왔는데, 그는 어유소가 데리고 오는 병사들의 수가 많으며,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물론, 원종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한양으로 한번 들어가게 되면 이후로는 내가 마음대로 운신을 하지 못하게 될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종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병력이 보군만 1만이 넘었고, 선원들을 포함한 수군이 3천 명이었다.
원길 형의 여진인들까지도 동원한다면 2만이 넘는 병사들을 동원 가능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바로 한양으로 치고 내려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질 터였다.
내가 그냥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 사람이었다면 역천을 했을 터지만, 회귀를 하여 조선에 온 현대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내가 요리를 하여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고, 그런 바뀐 사람들의 운명으로 인하여 역사도 바뀌긴 했으나, 존재했던 것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런 변화를 지금 시대의 사람이 아닌 내가 해버리게 되면, 조금씩 바뀌어 왔던 것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될 터였다.
그것이 걱정되어 쉽게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거정대감을 만나보고 결정을 하겠다. 우선은 그들이 도착하더라도 성에 들이지 말고, 밖에 천막을 쳐 머물게 하라.”
“네. 미리 준비를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
[명나라의 계략임이 명확하니 과인은 병마 절제사의 결백을 믿고 있다. 허나, 과인과 병마 절제사가 아직 대면해 보지 않았기에 직접 대면하고자 하니 속히 도성으로 오도록 하라.]
서거정이 전한 내용은 듣기에는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쓰여있었다.
단순히 바뀐 왕과 만난 적이 없으니 와서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그런 내용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면을 위해 이곳을 비우게 되면 자연스레 이곳에 있는 병사들과도 연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사신으로 이미 한번 오셨던 대감께서 다시 오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군중(軍中)이다 보니 술을 빼고 음식을 접대하며 서거정에게 넌지시 물었다.
서거정은 나를 보더니 빙긋이 웃더니 절도사 이유소에게 입을 열었다.
“어 절도사 내일부터 바쁠 것인데, 데리고 온 병사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오시오."
어유소는 말을 듣고는 뭔가 망설이는 듯하다 천막 밖으로 나갔다.
“전 절제사, 병사들을 확인하고 오는 어 절도사를 죽이시오."
갑자기 함께 온 어유소를 죽이라고 하니 뭔가 속 내용이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조정에서 절제사를 데려가기 위해 왔으나, 실은 압송을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오. 그러니 그를 죽이시오."
"왜 제게 이리 알려주시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최영 장군은 갑인의 변이 일어나 탐라에 갔던 것을 아주 후회하고 있었소이다.
그리고 왕이 병권을 가진 이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그 나라에는 망조가 든다고 했소이다."
갑인의 변은 바로 제주도에 있었던 '목호의 난'을 말하는 것이었다.
원나라인들인 목호들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기 위해 최영이 제주도로 갔었는데, 그때 최영은 개경에 남은 병력으로 다른 장수들이 모반을 일으킬까 두려워 모든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갔었다.
당시의 공민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누군가가 역적질을 하지 못하게 아예 개경의 모든 병력을 끌고 가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최영이 목호의 난을 평정할 때 술에 취한 공민왕이 자제위(미소년 집단)로 데리고 있던 홍륜에게 죽어 버렸으나 최영의 그런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다.
덕분에 이후 요동 정벌군을 출진 시킬 때 공민왕의 예를 들어 우왕이 최영을 출진하지 못하게 막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위화도 회군이었다.
"병권을 가진 이를 믿지 못해 도성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릴 때 나는 느꼈소이다. 전조인 고려가 망해가던 길을 이 조선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음. 저에게 역천을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역천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저 조선이 고려의 전철을 밟고 있으니 끝이 날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서거정이 이런 이야기를 원종에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태조와 태종을 거치며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만 해도 서거정에게 조선이란 나라는 강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가 참여한 여러 책의 서문에는 조선과 중국이 다르며 한민족의 시초인 단군을 숭상하는 글을 썼었다.
하지만, 성종이 장수를 믿지 못해 친정을 하여 잡혀간 이후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조선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국난이 있을 때마다 영웅이 나타나 나라를 구했듯이 원종이 나타나 안주 평야에서 명나라군을 물리치자 그때만 해도 '그러면 그렇지. 우리 조선이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테지!'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책략에 넘어가 나라를 구한 이의 날개를 꺾어버린다고 하니, 서거정은 옛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영 장군이 저질렀던 실책과 우매한 고려의 왕들이 저질렀던 실책들을 조선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실책들로 고려가 무너졌다는걸 떠올렸고, 결국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조선을 건국했었다.
이런 지나온 역사를 떠올리자 서거정은 지금이 바로 그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태조와 같이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이가 전원종이라 여겼다.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 것이겠소? 지난 선열들의 뛰어난 것을 배우기 위한 것도 있으나, 선조들이 저지른 실책을 새겨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 역사를 배우는 것 아니겠소?"
"그럼, 고려 말기처럼 제가 일어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난 충분하다고 보오. 주위가 상황이 그리고 하늘이 그렇게 하라고 떠밀고 있지 않소?"
"제게 천명(天命)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천명이오."
서거정의 말에 박치산은 물론이고 염호진도 가슴이 벅차올라 주먹을 쥐었다.
“병사들은 돼지국밥을 든든하게 먹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을 돌보고 온 어유소는 천막안의 분위기가 뭔가 달라진 것 같자 멈칫했다.
“어(魚) 절도사 미안하오. 저 자를 잡아라!"
[차앙!] [챙!]
순식간에 호위들이 칼을 뽑았고, 어유소는 놀라 도망치려 했으나 도망을 치지 못했다.
“어 절도사. 대의를 위해 죽어주셔야 할 것 같소!"
“네. 이노옴! 이런 역심을 품었기에 네놈을 잡아가려 했던 것이다! 역적질을 하는 놈들은 씨를 말릴 것이다!"
어유소는 선대부터 무관인 집에 태어나 16살에 내금의에 뽑히고 22살에 무과 장원을 했던 타고난 용장이었으나 한 손으로는 여러 손을 막아낼 수 없는 법이었다.
결국, 호위의 칼에 찔려 죽었고, 그 목을 잘라 내걸게 했다.
그리고 급하게 만든 연단에 원종이 올랐다.
"모두 들어라! 명나라의 책략에 넘어가 조정에서는 나와 이 안산성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명나라에 넘겨주려고 했었다. 명나라와의 화평을 위해 우리를 넘기려고 했던 것이다!”
"음마! 그것이 참말이오?"
“우릴 명나라에 넘기려고 했다고라? 그게 무슨 개 소리여?”
원종은 거짓말을 했다.
중간 간부와 같은 권관은 물론이고 병사들에게 천명(天命)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해봤자 그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너와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냥 죽어줄 것이냐? 아니면, 나와 함께 뒤엎겠느냐?'와 같은 단순 명료한 명분이 권관들이나 병사들에게 더 와 닿는 것이었다.
"우리 목숨을 넘겨주겠다는 말은 개소리지!!"
“명나라 놈들을 죽였다고, 명나라와의 화평이 어려워 우릴 넘겨준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지."
“집에 막내가 태어났는데, 여기서 죽으면 쓰나!"
“나는 우리를 명나라 놈들에게 넘겨주고 평화를 사려고 했던 놈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한양으로 갈 것이다. 우리가 역적질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 역적 역적질이라고?"
"역적질이면 3족을 멸하는거 아니야? 써글."
자기 목숨을 넘겨준다는 말에는 벌떼처럼 병사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역적질이라는 말이 나오니 그 말이 가진 뜻을 알기에 쉽게 큰 소리를 내어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너희들의 두려움을 안다. 하지만, 여기에 그대로 있으면 명나라 놈들에게 죽고, 그냥 순순히 말을 따라 조선으로 돌아가면 역적질을 했다고 또 죽을 것이다."
"에잇 니기미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살려면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뒤엎으면 된다! 나와 함께 조선을 뒤엎지. 뒤엎는 것이 성공을 하게 되면 너희들은 충신이 되어 살 수 있는 것이고, 실패를 하면 모두 다 같이 죽는 것이다."
“저기, 만약에 성공하면 저도 수군이 되어 선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강제로 징집되어 온 자들은 수군과 선원들에게 1년에 은자 10냥을 받는다는 소리에 선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이다. 주위에 있는 수군이나 선원들에게 물어라. 나와 함께 해서 실패한 일이 있느냐고. 나와 함께한 모든 일은 다 성공을 했고, 모두 승리했다. 한양을 뒤엎는다는 이번 일도 당연히 승리를 할
것이다!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춘봉!"
“와아! 단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춘보옹!!"
수군으로 참전한 2천 명이 환호를 보내자, 다른 이들도 분위기에 따라 이길 수 있다며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 니기미, 안주성 앞에서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승을 했으니 이번에도 이길 수 있겠지."
모두가 원종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싸우고 줄곧 승리를 해왔기에 패배에 대한 것 보다는 승리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이틀 후 성을 출발한다! 다들 준비를 하라!”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냐?"
“네. 형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안산성을 형님에게 맡겨두겠습니다."
"여긴 5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니 나머지는 박투르안의 기마대에 합류시키도록 하겠다. 그 자라면 여진 기마병들을 잘 다룰수 있겠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시 이곳으로 올 때는 진짜 왕이 되어 있던지 아니면, 잘린 목만 오겠구나."
"하하하. 전자라면 형님에게 이 땅을 그냥 다 드리겠습니다. 물론, 후자라면 형님도 도망을 쳐야 하는 신세가 될 겁니다."
"그럼 뭐 서역이라도 구경을 하러 한번 가봐야지. 살아서 보자꾸나!"
안산성의 병력을 빼게 되면 명나라의 도발이 걱정되었는데, 원길형과 여진족이 있었기에 마음 놓고 몸을 뺄 수 있었다.
***
"뭐어! 전원종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오고 있다고?"
“위화도에서 술을 따르고는 들불처럼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그놈의 위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