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역적?
“이 칙서는 받을 수 없으니 들고 돌아가시오."
원종은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몇만 명의 명나라 병사들을 죽였었기에 사실 이미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아가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지엄한 황제 폐하의 칙명을 거역하겠다는 말인가?"
“내 황제가 아닌 다른 나라의 황제가 주는 이런 서신이 무엇이기에 그걸 따라야 한다는 말이오?”
"감히! 무엄하다! 어찌 대명천자의 칙명을 거역해!"
“내 나라의 황제가 아닌 이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소이다. 이제 할 말은 다 한 거 같으니 돌아가시오."
우방이었던 명나라가 이제는 적국이었으니 사신을 끌고 나간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뭣들 하느냐 저 부랄 없는 놈을 내쫓아라!”
“뭐, 뭬야! 부 부랄이 없다고! 감히 네놈이!!"
신체적인 약점을 들먹이며 강하게 나오자 진충은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화가 났었지만, 어쩔 수 없이 천막에서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강을 건너 꺼져라. 다시 이런 개짓거리를 하면 바로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연경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협박과 같은 말을 하곤 원종이 돌아서자 진충은 칼을 빼 들고 공격이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곤, 조선말을 아는 이들을 동원해 안산성에 있는 이들에게 들리게 크게 외치게 했다.
[대명처자께서 안산성의 성주 왕원종에게 조상의 왕위를 잇게 만드셨다! 심양과 개경의 왕으로 왕원종을 책봉하셨다! 조상의 성씨를 숨기지 말고, 자랑스럽게 드러내어라!]
요하를 건너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 종들을 시켜 떠들게 했는데, 그러한 소란 덕에 안산성과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에게 말이 퍼졌다.
“왕원종? 그게 누구야?"
"안산성의 성주라고 했잖여. 전원종 병마 절제사의 이름이여."
"성이 다르잖여."
"그게 조선 초에 있었던 왕씨들을 죽였다는 말 들어 봤으?”
“들어는 봤지. 그 왕씨들을 배에 태워 물에 빠트려 죽였다는 그거 맞지?"
“그려. 그거 맞어. 그때 왕씨들이 죽지 않으려고 왕씨 한자 성에 획을 추가해서 옥씨나 전씨, 국씨로 성씨를 바꿔 버렸다니께."
“그럼, 저 말이 진짜가 맞는가벼, 전조의 후손이었다니.”
"어쩐지 귀티가 나더라니, 씨가 본래부터 다른 씨였구먼."
"그러게.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찌 되는 거여?"
"모르지. 역. 아니다. 나도 모르겠다."
말을 하려던 병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을 그쳤지만, 알게 모르게 병사들 사이로 말이 퍼지며 '역적질'이라는 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병마 절제사 양반이 왕이 되는 게 이득 아녀?"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인가? 입조심하게."
"난 수군 출신이라 괜찮여. 여차하면 저기 멀리 바다를 건너가 도망쳐 버리면 되니까. 내가 보기에는 저 중국 놈들이 정해준 도성의 왕 보다는 왕 절제사가 더 나은 거 같은데, 아닌가?"
한 명이 대 놓고 떠들어 버리자 다른 이들도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긴. 중국 황제가 시켜서 왕이 된 것 보다는 조선 상계를 휘어 잡고, 명나라 놈들을 때려잡은 왕 절제사가 더 좋은 왕이지비.”
병사들은 핏줄을 잘 타고났다는 이유로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 왕이 된 도성의 충안왕 보다 상단을 만들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왕원종이 더 왕다운 왕이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여론의 움직임에는 수군 출신 병사들이 있었는데, 섬 출신으로 핍박만 받던 자신들을 사람답게 살게 해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런 말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
"어찌하실 겁니까?"
호위대를 맡은 박치산은 고민 중인 전원종에게 물었다.
“명나라에서 태감 진충이 다시 왔다는 것을 도성에 알렸기에 그가 다시 온 이유를 통보하여야 하는데 어찌 하실 겁니까?"
태감 진충이 와서 원종을 심양과 개경의 왕으로 책봉했다는 것을 알리게 되면 난리가 날것이 뻔했다.
겨우 제안대군을 왕으로 세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데, 이제는 전조의 후손에게 왕을 책봉했으니 당장 잡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전조의 후손인 원종이 지금 조선에서 가장 많은 병사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이 책봉 사실을 알리지 않고 숨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모반을 위해 숨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외통수에 걸려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의 군사를 패퇴시키고, 요하를 경계로 병사들을 데리고 있으니 명나라에서는 단주님이 가장 눈엣가시 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왕 씨라는 성씨였다고 전조의 후손으로 만들어 책략을 건 것입니다. 그러니 조정에서도 이것이 책략이라는 것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렇겠지. 부원군이나 서거정 대감이 아둔한 것이 아니니. 하지만, 이 명나라의 책략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다고 해도, 괜히 마음이 쓰이게 될 것이네. 그렇게 되면 여길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고 도성으로 돌아오라고 하겠지."
박치산은 도성으로 돌아간 이후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원종의 뒷말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목숨은 잃지 않겠지만, 집안에 감금되다시피 살게 될 터였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가 한둘이었는가.
그 이후의 일을 박치산도 알기에 원종에게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저 뒤를 지켜줄 뿐이었다.
***
“안동도 관찰사이신 형님이 오셨습니다!"
아직 조정에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요양을 지키고 있던 형이 왔다.
"다들 물러가거라. 아우와 긴히 할 말이 있다."
박치산을 비롯한 호위대까지 모두 나가버리자 원길은 의자를 끌고 와 앉아서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고려 왕씨의 후손이라니. 내 처음 듣고는 이게 무슨 망언인가 싶었다. 어디서 이런 말이 시작 된 것이고, 심양과 개경의 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이냐?"
“벌써 거기까지 말이 퍼진 것입니까?"
“동생이 왕이 되었다고 이미 만주벌판에 다 퍼지고 있다."
“흠. 소문은 발도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봅니다."
원종이 진충에게 책봉 받은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도 알아서 보고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책봉 사실을 파발마로 알리기로 결정했다.
“헌데, 그 말이 다 진짜이냐? 돌아가신 아버지께 무슨 말을 들은 것이 있느냐? 그러면 우리 족보는 다 무엇이냐?"
원길은 원나라에서 공주가 고려의 왕에게 시집으며 같이 온 원나라의 장수가 집안의 시조라고 알고 있었는데, 본인이 전조의 후예라는 왕씨라는 소리를 듣고는 진짜 비밀이 있는 건가 싶었다.
“형님. 소문이 진짜인들 어떻고, 가짜인들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나서서 아니다 라고 이야길 해도 사람들은 그걸 안 믿을 것입니다."
"뭐? 아하하하. 하긴 그렇구나. 그렇다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아니라고 해봤자 변하는 게 없겠구나.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고사를 이렇게 내 몸으로 느끼게 되는 구나.”
이미 소문이 여기저기로 퍼졌다면 진짜 왕씨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가짜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진짜가 된 것이었다.
“나는 여진인들에게 조상이 원나라의 몽골인이라고 이야길 하고 그래서 이런 초원의 삶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이야길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구나. 참으로 웃기는 구나."
"형님은 그냥 말타고 놀러다니고 맛있는걸 먹고 하는걸 그냥 즐기시는 것이지요."
“그렇지. 한량이 내 천직 아니겠느냐. 그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심양 인근에 부족의 땅을 가지고 있던 여진족 족장들은 심양왕이 생겼다는 소리에 어찌할지를 모르고 있더구나. 심양을 봉지로 삼는다면 미리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다.”
"우선은 조선에 책봉 받은 사실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후 조정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결정하겠습니다."
“흐음.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들부터 몸을 피하게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다들 목포로 가서 있게 했으니 왜국이나 대만, 북해도로 옮겨가 있으라고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심양 근처의 부족들에게는 땅을 뺏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파발이 오면 그때 다시 오마.”
***
"허허. 이게 무슨.”
한명회는 안산성에서 온 파발의 내용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내용을 대신들도 보자 대부분이 명나라에서 병사를 들고 있는 전원을 모함하게 만들어 내쫓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옥씨와 전씨들중 일부가 전조의 후예들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오. 그것을 명나라에서 알았기에 우리 조선을 혼란에 빠트리고자 이런 책략을 펼친 것이오. 그러니 이러한 명나라의 칙서를
우리는 인정하지 않아야 하오."
한명회가 나서서 책략에 넘어가지 말자고 말을 했지만, 이런 책략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알고 있더라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신승선이었다.
“전하. 태종께서 봉군제(封君制)를 폐하고 돈녕부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이겠사옵니까?"
제안대군이었던 충안왕은 왕좌에 앉아있기는 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본래, 태조께서는 종친들이 벼슬을 하며 같이 국정을 운영하길 원하셨사옵니다. 허나, 종친들 간의 문제가 많아 태종께서는 봉군제를 폐하시고, 종친들의 정치 참여를 막으셨사옵니다. 그 이유는 힘을 가진 종친이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사옵니다."
“그럼, 다른 종친이 또 있다는 말이오?"
엉뚱한 소리를 하는 충안왕의 말에 신승선은 한숨을 겨우 참고 말을 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돈녕부는 촌수가 먼 종친과 부마와 외척들을 관리하는 곳이옵니다. 왜 태종께서 이렇게 관리를 하셨겠습니까? 바로 힘을 가진 종친이 나오지 못 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지금 전원종, 아니 왕원종은 전조의 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군권까지 들고
있으니 돈녕부 부사인 소신이 보기에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옵니다."
“그렇다면 부사께서는 명나라의 책략에 넘어가겠다는 것이오?”
“부원군 대감 넘어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가진 병권을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명나라에서 두려워하는 장수를 책략에 넘어가 전장의 장수를 바꾸자는 말 아니오.”
"다들 들었지 안 사 옵니까? 요하라는 강을 경계로 안산성을 잡고 있으면 명나라를 막아내기 쉽다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런 천혜의 장벽으로 방어가 가능하다면, 다른 장수가 그 자리에 있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명나라의 병사들도 물러 갔으니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니지 않소이까?"
“맞사옵니다. 더불어, 전원종은 후왕(성종)때 벼슬을 받은 이로 아직 전하를 알현하지 않은 이옵니다. 그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궁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이옵니다."
"맞사옵니다. 그가 두말 않고, 도성으로 온다면 잔치를 베풀어 위무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니 안산성을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옵니다."
한명회는 신승선과 거기에 찬동하는 몇몇 대신들의 행태에 속이 답답했다.
"그게 꼭 그래야 하는가? 과인이 좋아하는 꿀 호떡을 만든 것이 전원종이지 않은가."
“맞습니다. 전하. 꿀 호떡을 처음 만들어내었던 원조의 손맛으로 굽는 호떡을 드시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하하. 그래. 나는 그 꿀 호떡이 먹고 싶다. 전원종을 어서 부르도록 하라.”
한명회는 그래도 나이가 있다고 제안 대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이리 멍청할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정릉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병마 절제사를 도성으로 데려오기 위해 소신이 가겠사옵니다.”
"오! 서거정 대감이 직접 나서주신다니 참으로 마음이 든든하외다!"
신승선은 한명회와 더불어 정전의 양축을 맡은 서거정이 직접 나서주겠다고 하자 두 팔 벌려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