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4번째 왕.
“요하를 경계로 삼아 전쟁을 멈추기로 했다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시간을 끌 수 있게 되었구나."
만귀비는 산해관 너머가 임시로나마 안정이 되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지부진한 남방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마마 헌데, 묘한 소리를 들었사옵니다."
“묘한 소리?"
“네, 마마. 안산성을 점거한 전원종의 성씨가 본래 왕씨이며 전조(前朝)의 후손이라는 묘한 소리를 들었사옵니다.”
진충은 함께 갔던 어린 태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만들었고, 만귀비는 물론이고 승상인 태감 왕직도 흥미롭게 들었다.
“해서 조선의 왕으로 3명을 책봉했으니 심양왕으로 전원종 아니 왕원종을 추가로 책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호라, 심왕으로 전조의 후손을 세운다라.
그거 좋구나, 지금 북방의 병력을 쥐고 있는 것이 전원종이니 그를 왕으로 책봉하기만 해도 이득이 많겠구나."
“맞습니다. 마마. 기발한 책략이옵니다. 진충의 말에 따라 왕원종을 심왕으로 책봉하면, 자연스레 전조였던 고려와 조선의 싸움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그게 안 된다고 하더라도, 북방에서 능력을
과시한 왕원종을 고립시킬 수 있는 방법이니 당장 그를 심왕에 봉하소서.”
"오호호. 그거 재미있겠구나. 병권을 가진 이가 전조의 후예이자 새로운 왕이라고 한다면 서로 척지게 될 터이지. 왕원종을 심왕이자 개경의 왕으로 봉하라. 누가 진정한 조선의 왕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정하겠지."
연경에 도착하여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진출은 다시 안산성으로 칙서를 들고 움직였다.
그리고, 서거정이 칙서 3개를 들고 도착한 한양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미친! 서 대감은 도대체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 것이오? 이런 것들을 받아오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오? 명에서 일방적으로 칙서를 내린 것인데, 어찌 이게 서거정 대감의 잘못이오?"
“칙서를 받았을 때 따를 수 없다고 말도 안 된다고 따져 물어 이걸 돌려보냈어야 했다는 말이오!"
"그게 말이 되오? 주상전하를 모셔와야 하는데, 칙서를 거부하다니”
“그럼, 주상전하를 모셔오긴 왔소? 제대로 한 것은 없고, 오히려 이런 책봉 칙서를 들고 왔으니 서대감의 실책이라는 말이오!"
정전이 대신들의 고성으로 가득 차자 주인 없는 왕좌를 보고 있던 한명회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깟 왕좌가 탐이 나서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가 우스웠고, 다시 위화도 회군으로 왕좌를 빼앗길까 친정하여 이 사단을 만들어낸 성도 우스웠다.
그리고, 별거 없는 저 왕좌를 위해 정적들을 죽였던 자신의 과거가 우스웠다.
압구정 정자에 누워 한강을 바라보며 소일거리로 노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들 그만들 하시오. 힘들지 않소이까?"
한명회의 힘 빠진 말이 정전을 울리지는 않았으나 서로 눈치를 보다 점점 정전이 조용해졌다.
“이렇게 싸운다 한들 해결책이 나지 않소. 명나라에서 전례를 들어 3명의 왕을 책봉한 이유는 우리를 혼란하게 할 목적이오. 조정이 혼란하게 되면 서진을 하는 조선군을 멈춰 세울 수 있으니
그것을 노린 것이오. 그들의 노림수에 당해서 되겠소?"
“그러면 국통을 어찌 하실 것입니까?"
"휴우 나도 모르겠소. 혈법에 따라 본래라면 전하의 적자인 정릉대군이 대통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 또한 혈법에 따라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소.
그렇게 서로 주장하게 되면 명나라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오. 그러다 보니 나는 모르겠소.”
책봉 전에는 양녀로 귀비를 들여 국구(왕의 장인)로서 정릉대군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했던 한명회였다.
허나, 명나라가 세 명의 왕을 책봉하자 그 왕(王)이란 글자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허무감이 들었다.
남이 정해주는 왕의 자리에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하는 염세적인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럼, 직접 다녀온 서거정 대감은 어떻게 생각하오?"
대신들이 한명회에 이어 서거정에게 물어본 이유가 있었다.
사신으로 다녀오기 전에는 한명회의 반대파로 2왕자인 산정군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나섰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2왕자인 산정군은 왕위와 멀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었기에 서거정이 이제 누굴 지지하는지가 중요했던 것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이다. 책봉을 받으신 세 분 모두 나름의 적통으로 권한이 있으신 분들이라 사실 누가 왕이 되어도 될 분들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겠소이다."
서거정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등을 편찬할 때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기자가 수봉 봉토를 수여받음)한 이래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를 지나 오랫동안 한반도에 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과 또 그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글로 남기며 한민족에 대한 주장을 계속했었다.
세외 민족에 따라 황제가 바뀌고, 전란이 끊이지 않는 중국과는 달리 한 민족으로 내려온 조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도로 만들어진 사서, 지리지, 문학서 등에서는 전반적으로 조선의 독자성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웠으며 중국과 다르다는 자부심을 내비쳤었다.
하지만, 직접 진충을 만나고 원나라 때의 전례로 인해 나라의 왕조차 마음대로 못 정한다는 것에 큰 상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거정 또한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누가 왕이 되든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고, 모르겠다고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던 대신들은 한명회에 이어 서거정까지 3명의 왕 중에 누굴 따를지 모르겠다고 하니, 누구도 앞에 나서지를 못했다.
"그럼, 혹시 대왕대비마마(인수대비 성종의 모친)의 의중은 어떠한지 아시는 분 있으시오?"
조정의 세를 양분하고 있는 한명회와 서거정이 모르겠다고 하니 옥새를 들고 간 인수대비의 의향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마마께서는 월산대군, 아니 충산왕 전하를 지지하지 않으시겠소?"
"하긴, 제안군이나 정릉군은 아직 어리니 월산대군이 대통을 이어가는 것이 맞을 것 같군요."
“그럼 누가 마마께 가서 그리해도 좋을지 한번 물어봐 주시겠소?"
서거정의 말에 몇몇이 인수대비에게 찾아가 아뢰고 의향을 물었다.
“정(婷 월산대군의 이름)을 세운다면 다른 아이들은 어찌 할 것인가?"
“그것이 두 분은 아직 연치가 어리시기에 군으로 봉하여 그대로 사시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불가에 출가를..."
왕이지만, 중으로 출가시켜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대신들의 말에 인수대비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출가시켜 중으로 만들겠다고 하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두 대군에 대한 다른 방도를 알아 오라, 그리고, 정(婷)을 입궐시키고 백관을 정전으로 부르도록 하라.”
어린 왕자들을 어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지만, 월산대군이 성종의 형이기에 나이가 있는 월산대군을 보위에 올리는 것에 인수대비도 찬성을 했다.
그렇게 명나라가 농간을 부린 계락이 월산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며 끝이 나는 듯했다.
***
"크.큰일이옵니다!”
대신들이 정전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내시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왜 이리 경거망동이냐?"
"그.그것이 월산대군께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뭬야?"
"그게 무슨."
“월산대군께선 동생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으시다며 강원도의 절로 가셨습니다."
평상시의 왕위계승이었다면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제후로 남았던 중국 주나라의 태백(泰伯)·중옹(仲雍) 형제에 버금간다고 칭송을 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혼란한 시기에는
국정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러면, 어느 대군을..."
몇몇 신료들이 한명회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꺼내었는데, 한명회는 서거정을 보았다.
서거정은 발을 빼며 한명회에게 선택을 하게 했다.
누가 되든 한명회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한 것이었다.
"제안 대군을 모셔오도록 하라."
"네에?"
자신이 양녀로 들인 귀비의 아들인 정릉군을 왕으로 내세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예종의 적자인 제안 대군을 왕으로 세운다고 하니 다들 놀랐다.
하지만, 서거정은 한명회가 내린 이 판단을 알 것 같았다.
지금처럼 왕좌로 인해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정통성이 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정릉군의 경우에는 그 모친이 남국의 귀비였으니 정통성에 아마 흠집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본래 왕위계승 서열에서 주상보다 높았던 제안 대군을 한명회가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안대군은 벌써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으니 원자를 생산하기에도 괜찮은 나이였다.
더해서 약간 모자란다는 말까지 있으니 제안 대군을 선택한 한명회의 선택이 옳은 판단 같았다.
그렇게 충안왕이란 왕이 조선의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
"단주님. 도성에서 제안 대군을 옹립했다고 하옵니다. 명에서 내린 충안왕이란 왕호를 그대로 쓴다고 합니다.”
배를 통해 전달된 서찰을 받아 보니, 월산대군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고, 한명회가 제안대군을 선택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쓰여 있었다.
“다행이구나. 서로 왕을 세우겠다고 이전투구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정리가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야."
혹시나 조선이 왕권 문제로 시끄러울 때 명나라가 다시 도발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빠르게 조선의 왕권이 정리가 되었으니 이제는 명나라에 잡혀간 성종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터였다.
"그리고, 남경 상인 텅신황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오! 그는 어찌 지내고 있다고 하던가? 폐태자는 사천으로 들어갔다고 하던데, 어찌 되고 있다는가?"
“직접 서찰은 받지 못하였으나 황제 측인 황보정 장군이 경덕진에 주둔하는 바람에 청화백자의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해서 우리 측에 청화백자의 수출을 요청해 왔습니다."
“도자기를 팔아달라고 했다고? 허허. 경덕진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군. 헌데 우리는 생산 여력이 있는가?"
“네. 남해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여력이 없으나 사옹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품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사옹원에서 나오는 것을 구해서 팔아주게. 그리고, 남부가 어찌 돌아가는지 정보를 달라고 하고."
“네. 폐 태자가 사천으로 들어가며 그 공략이 어렵고, 강남 곳곳으로 흩어진 태자파를 처리하지 못해 아직도 강남 전체에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혼란한 때일수록 곡식은 비싸지지만, 그 외의 기술이나 사람의 가치는 낮아지게 된다. 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자나 쇠를 다루는 자, 화약을 다루는 자를 최대한 영입하도록 지시하거라.”
“네.”
상단과 안산성 주위의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경계를 서던 병사가 뛰어 들어왔다.
“명나라에서 전령이 왔는데, 이틀 후 칙사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칙사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느냐?"
“네. 그것은 모르오나. 전에 왔었던 동창의 태감 진충이 다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충이?"
서거정과의 이야기로 진충이 다시 올 만한 일이 있었던가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진충이 다시 올 일은 없었다.
변방을 어지럽히기 위해 오는 것일 수도 있어, 여차하면 진충을 죽일 수 있게 병사들을 성밖에 따로 배치를 해서 진충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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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할 이유가 없었지만, 성 밖에 천막을 치고 진충을 맞이했는데, 칙서가 있다고 했다.
조정에 전달할 관료도 없다고 했으나, 나에게 칙서가 왔다며 칙서를 받길 원했다.
“... 북방의 안정을 위해 다시 심양왕과 개경의 왕을 다시 책봉하니, 충정왕이라 왕호를 내린다. 선대의 성씨를 원복하여 조상의 뒤를 이어 대통을 이을 것을 명하노라."
뭔가 잘했지 하며 웃음기 만연한 진충의 얼굴도 충격이었지만, 어떻게 내가 왕씨를 사칭했다는 이야기가 명나라 조정까지 들어간 것인지가 놀라웠다.
발해방인가? 아님 오키나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발해방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었고, 오키나와에서도 선원들이 있는 데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누구나 다 아는 비밀 같은 이야기로 퍼진 듯했다.
그 이야길 주워들은 명나라에서는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 나를 심양과 개경의 왕으로 책봉하는 것이었다.
“이 칙서는 받을 수 없소이다."
이걸 받게 되면 명나라의 계략에 걸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