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누가 왕인가?
서거정은 명나라로 가기 위해 북상하던 중 요하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안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원종을 만났다.
"저 안산성을 받아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물산이 모이는 요양은 안동도 관찰사인 제 형이 점령을 하였으나, 요양은 사방이 열린 곳이라 방어하기가 좋지 않은 곳입니다. 이 요동 땅을 조선이 가져가기 위해서는 요하를 경계로
삼고, 이 안산성을 방어거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방어거점으로 쓰기 좋은 땅이라면 명나라에서도 내놓지 않으려고 할 터인데.”
“그래서 명의 관료와 직접 만나는 서거정 대감의 기지(奇智)가 필요한 것입니다."
서거정은 원종의 말을 듣고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관념으로는 지금 가장 중대한 일이 성종을 무사히 돌려받는 일이었다.
그 외의 일은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머릿속은 성종을 어떻게 무사히 돌려받느냐에 다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병마 절제사인 원종은 성종에 대한 걱정이나 우려 없이 그저 안산성이 중요하니 성을 받아오라고 요청을 하고 있었다.
주군인 성종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원종이 제대로 된 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에 과연 충(忠)이 있는지도 의심이 되었다.
충의 없는 이가 지금 병권까지 쥐고 있으니 괜히 걱정이 더 되는 것 같았다.
“이번 협상에 여러 조건이 있다면 안산성을 받는 조건도 말은 해보도록 하겠소.”
서거정은 사신으로 북상하며 안주성과 압록강은 물론이고 동항에도 들렸었다.
파발로 들었던 전황 기록보다 직접 본 사람들에게 듣는 것이 더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각 지역을 둘러보고 하다 보니 이 북방이 가진 힘을 그동안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동반도에는 전라도의 옥토에 버금가는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고, 큰불이 나며 피해를 보았다는 동항은 이미 복구가 되어 여러 보급선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춘봉 상단을 통한 물자의 보급 또한 안정적이라 능히 일국을 유지할 만 기반이 될 만했다.
그런 안동도와 12,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전원종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가 마음을 달리 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난을 일으킨다면 명나라가 일으킨 난보다도 더 큰 일이 될 터였다.
‘그러고 보니 부원군인 한명회의 외손녀 사위이니 그의 힘이 곧 한명회의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새로운 왕을 세우는 문제로 한명회와 척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외손녀 사위가 이렇게 힘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종의 일과 한명회와 전원종의 일로 고민만 많아진 서거정이었다.
그런 서거정을 만나기 위해 동창의 우두머리인 태감 진충이 황제의 명을 가지고 안산성에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원종은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력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고, 성종의 석방과 전쟁을 끝내는 회의가 안산성 밖 천막에서 시작되었다.
***
“몇 해전 졸(卒)한 예종의 적자 제안대군을 조선의 왕으로 봉한다."
동창의 태감인 진충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서거정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회의 전에 황제의 칙명이 있다는 말에 칙서를 먼저 전할 수 있게 예를 차려준 것이 후회되었다.
"본래 조선의 왕위는 예종을 이어 제안대군이 돼야 했었다. 해서 본 황제는 본래 왕이었어야 할 제안대군을 왕으로 삼는다. 왕호는 충안왕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주상전하는 어찌 되는 것이오?"
“아국에 있는 후왕(後王뒤쳐진 왕 부족한 왕이란 뜻)또한 본인의 덕이 부족해 다른 왕이 조선에 있어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그게 말이 되는 것이오?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 되다니.”
서거정의 화난 음성에 태감 진충은 비릿하게 웃어줬다.
그러곤, 새로운 칙서를 들어 읽었다.
“그리고, 후왕이 왕이 되며 그의 형이었던 월산대군 또한 억울함이 있기에 그 또한 조선의 왕으로 삼는다. 왕호는 충산왕이다."
"이게 어찌...”
"말도 안 되오!"
서거정은 물론이고 조선의 관리들이 난리를 치는데도, 진출은 다시 다른 칙서를 들고 읽었다.
“후왕은 나태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국정을 운영할 자질이 부족한 바 적자인 고릉대군을 왕으로 삼는다. 왕호는 충릉왕이다."
뻔뻔하게 웃으며 칙서를 건네주는 태감 진출을 보고 서거정은 치를 떨었다.
명나라에서 이러한 칙서를 내려 왕을 여러 명 책봉한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조공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라고 해도 명나라에서 마음대로 이럴 수는 없는 법이오!"
“왜 이럴 수 없다는 말이오?”
"책봉은 먼저 조선이 청해서 명이 인정을 해주는 것뿐이지 직접 왕을 정해서 주는 법이 아니외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렇게 했던 전례가 있는데, 어찌 그게 안 된다는 말이오?"
서거정은 왕을 직접 정해주는 전례가 있었다는 진충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그건 원나라 때의 일이지 않소? 명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소."
"하하하. 웃기오. 오래전 5호 16국의 일들도 전례로 여기면서 어찌 원나라 대의 일은 전례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오?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되지 않소?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그 전례에 따라
왕을 정해주신 것이오.”
서거정은 얼마 남지 않은 이빨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만들어지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로는 조선이 왕과 세자를 정하면 명나라에 조공을 보내 인정을 받는 책봉을 받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며 정통성을 위해 책봉을 받았던 일들이 이렇게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감 진출의 전례가 있었다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몽골이 제국이 되어가던 시절,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이 만주 땅을 봉토로 받아 세력을 키웠는데, 그런 옷치긴 왕가가 남쪽으로 더 내려 오지 못하게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웠었다.
그런 왕들을 세워 옷치긴 왕가가 남쪽으로 내려올 수 없게 막은 것이었다.
이때 나온 것이 심양왕 혹은 심왕인데, 고려조의 충선왕이 고려왕이자 심왕으로서 두 개의 왕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지금의 명나라는 원나라 때의 전례를 들고 와 세 명의 왕을 조선에 세운 것이었다.
몇백 년이 지난 옛날의 전례였지만, 분명 중원의 황제가 고려의 왕을 지명했던 것이 맞았기에 서거정으로서는 전례와 명분으로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 주상전하는 어찌 되는 것이오? 전하를 보내주지 않겠다는 말이오?"
"후왕이 연경에서의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하여 조선으로 가지 않으시려 하시네. 억지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느글느글하게 이야길 하는 진충의 얼굴이 보기 싫어 자리를 일어나려 했으나, 손해만 보고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동창의 우두머리 태감이 온 이유가 이것뿐이라면 이만 끝을 냅시다. 내일부터 다시 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하게 될 것이오."
이제 슬슬 전쟁을 끝내는 이야길 하려 했던 진충은 그제야 일의 순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충은 조선의 왕을 몇 명이나 책봉해 주면 혼란스러울 테니 자연스레 싸움이 끝이 나고 병사들을 뒤로 물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대로 공격을 하겠다고 하니 그제야 일의 순서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먼저 병력이 물러나는 것을 논의해야 했다는 실책을 깨닫자 진충의 얼굴이 붉어졌다.
“기다리시오. 안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것은 요하를 경계로 조선과 명의 영토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오?"
"그렇소이다. 예로부터 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그런 강과 인접한 안산성을 우리는 점령해야 할 것 같소이다."
“크홈, 그렇다면, 그 이후로는 어찌할 생각이오?"
서거정은 얼굴이 벌게진 진충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명나라에서 왜 세 명의 왕을 세우고 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명나라가 원하는 것은 조선에 혼란을 줘서 싸움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조선이 계속 싸움을 걸게 되면 곤란한 것은 명나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전하를 구하기 위해 출병을 하였소이다. 안산성을 점령한 이후로도 서진을 계속할 것이오."
"그,그렇소?"
“금주를 지나 영원성까지 가서 산해관을 위협해 주상 전하를 되찾을 것이오."
산해관까지 언급을 해버리자 이제는 급한 것이 진충이었다.
싸움을 멈추게 하고 혼란을 일으키라고 보내었는데,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큰일이 난 것이었다.
“흠. 그럼 잠시만 더 멈춰주실 수 있겠소? 소생이 다시 한번 후왕께 조선으로 돌아가실 건지를 물어보겠소이다.”
진충은 당장 큰일 난 것을 해결해 보고자 거짓을 이야기했다.
“그대가 주상전하께 제대로 물어보았는지 어찌 확인할 수 있겠소?"
“사람을 붙여주시오. 그러면 그가 보는 앞에서 직접 여쭈어보고,
후왕께서 돌아가시겠다고 하면 돌려 보내드리겠소.”
언뜻 들으면 진짜 성종이 연경의 생활을 만족해해서 가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그 누가 포로생활을 좋다고 하겠는가?
그저 어떻게든 싸움을 멈추게 해서 시간을 벌려는 수작일 뿐이었다.
“사람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사람이야 죽으면 그만 아니겠소? 그런 것보다 안산성을 넘겨주시오.
우리가 요하를 경계로 해서 그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진군하지 않고 머물도록 하겠소."
태감 진충은 안산성에서 방어를 한다고 해도 심양과 대련항의 병력이 오게 되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조선군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이왕 빼앗길 성이라면 그 성을 주고 진군을 막는 시간을 버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여러 왕을 책봉하여 혼란을 주고 전쟁을 멈추게 하라는 만귀비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 될 터였다.
"좋소이다. 안산성을 넘겨드리겠소, 요하를 경계로 해서 잠시간의 휴전을 합시다."
서거정은 여러 왕이 생겨 혼란스러워질 조선을 지켜낼 방어선을 구했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본진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전원종은 이러한 일을 다 예상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주상전하를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명나라를 막을 수 있는 안산성을 꼭 원했던 것이었다.
주상전하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했었고, 충성심이 부족한 이에게 병력을 맡겨도 되는지 고민했었는데, 그 고민이 기우였다.
병마 절제사가 여길 지키는 한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문제는 조선이었다.
그들이 책봉한 충안왕, 충산왕, 충름왕 세 명의 왕이 어찌 나올지가 걱정이었다.
예종의 적자였던 충안왕과 주상전하의 적자인 충름왕은 나이가 어려서 그들의 외가만 조심하면 되겠지만, 충산왕은 성종보다 나이 많은 형이었으니, 그가 나서게 되면 막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군. 명분상이기는 하지만, 어린 충릉왕의 외가가 한명회이니 어찌 보면 가장 유력한 왕이 충릉왕이구나.'
그리고, 한명회에게는 상계를 잡고 있는 춘봉 상단과 북방 병력을 가지고 있는 전원종이 있었으니 일견하기에도
충릉왕이 가장 유력했다.
조선을 떠나올 때만 해도 서거정은 그런 한명회와 척졌지만, 명나라의 진충을 만나보니, 한명회와 협력을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맞는 판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 내가 줏대 없는 이가 되었구나."
조선의 혼란을 최소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명회에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서거정은 왕을 책봉한다는 칙서들을 들고 조선으로 돌아갔고, 원종은 서거정의 활약으로 병사 손실 없이 안산성을 가질 수 있었다.
“요하 강의 하구에 있는 '영구'라는 작은 고을이 있다. 거기에 보급품을 싣고 내릴 수 있는 항을 만들어라."
“서쪽으로 진군을 위한 준비이옵니까? 그러면 임시로 만드오리까?”
박치산이 어떤 방식으로 항을 만들어야 할지를 물었다.
“서거정 대감에게 이야길 듣고 보니, 더는 서쪽으로 진군이 힘들 것 같구나. 아마도, 안산성과 영구항, 그리고 심양을 방어해야 할 것 같으니 방어할 때 물자를 받기 쉬운 항구로 만들거라."
***
"그게 정말이냐?"
동창 태감 진충은 연경으로 돌아가는데, 함께 왔던 어린 태감이 하는 말에 귀가 돌아갔다.
"네. 어선방에 같이 있던 소철 태감이 조선군에 있었사온데, 그 덕에 조선군에 들어가 소철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그럼 소철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소철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춘봉 상단의 고위직과 군관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시 그 들었던 말을 똑똑히 해 보거라."
“조선에 여러 왕이 세워 졌지만, 전조의 후예인 상단주님이 더 왕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어린 태감은 분명 똑똑하게 들었다고 전조라는 말을 썼다고 했다.
“전조(前朝)라고 하면 고려이니, 그의 성이 왕씨라는 것인데... 전조의 후손이라."
“태감나리. 그러고 보니, 연경에 온 조선인들에게 들은 기억이 납니다. 조선에 사는 옥씨, 전씨, 국씨의 경우에는 왕씨 한자에 획을 더해 성씨를 바꾼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씨들의 조선이 되어 왕씨들을 모두 죽였기에 성을 바꾸었다고 들었습니다.”
동창 태감 진충은 무릎을 쳤다.
조선의 혼란을 위해 한 명의 왕이 더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