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형제가 모이다.
"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네.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배편으로 연락이 와서 바로 온 것입니다요."
문경에 있는 둘째 형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 아버지가 아프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었었다.
둘째 형이 급하게 써 보낸 편지에도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었다.
동항에 있는 큰형에게 다우선을 보내고는 만사 제쳐놓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선 낙동강을 타고 올라가는 한선에 몸을 실어 풍앙까지 움직였고, 급하게 길을 서둘러 갔음에도 9일이 걸렸다.
소식이 전해지는 시일도 있었기에 빠르게 온다고 서둘렀음에도 이미 장례는 끝이 나 있었고, 산에 안장까지 끝난 후였다.
우선은 집안에 모셔진 위패를 보고 절을 하고 곡을 했다.
늘 냉엄하고, 고지식하며 전형적인 양반이었던 아버지를 기억하며 원종도 한참을 울었다.
"병환이 있으시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어찌 돌아가신 것이오?"
둘째 형은 아버지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기에 집에 있던 셋째 어머니인 원홍에게 물었다.
“술을 과하게 드시고, 보통처럼 잠이 드셨는데, 아침에 눈을 뜨시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편하게 돌아가신 것 같았다.
그리고, 셋째 어머니인 원홍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20대 후반인 원홍의 배가 불러 있었다.
유복자(遺腹子)를 가진 것이었다.
유복자이기도 했지만, 서자이니 태어날 아이가 가여웠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물론이고 큰형과 둘째 형도 서얼에 대한 차별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뒤를 봐줘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묘소에 가니 둘째 형이 나무로 엮은 여막(廬幕)을 짓고 그 앞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시묘살이란 것이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처럼 자식이 묘 옆에 움막을 지어 생활하며 생전에 부모에게 못다 한 효도를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는 물론이고 국가 의례서인 국조오례의에도 나오지 않는 예였는데, 그 시초는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었다.
자공은 공자가 죽은 후 그 앞에 여막을 짓고 6년 동안 공자를 추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시묘살이가 만들어졌는데, 유문이라 불리는 공자의 학문이 번영하게 된 것도 자공의 금전 덕이
있었기에 유가에서는 자공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 유학이 고려에 전해지며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여기는 가치인 부모에 대한 효(孝)와 군주에 대한 충(忠)을 동일시하게 되는 문화가 되었고, 문벌귀족이나 사대부들은 그런 충과 효를
보여주고자 시묘살이를 예(禮)로 여기게 되었다.
특히나 성리학의 거두인 정몽주가 부모의 상에 각각 3년씩 시묘살이를 하자. 조선의 사대부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예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단종시절 '복한'이란 벼슬아치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의 시묘살이를 했고, 그 효성이 지극하다고 하여 단종이 효자첩을 내리기도 했었다.
산불이 나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그의 효성이 명나라에도 전해져 명제(帝)의 칭찬이 담긴 국서도 받았고, 세조는 효자비를 내려 북한의 효성을 칭찬했는데, 그 이후로 벼슬아치라면 시묘살이가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훗날 임진왜란이나 동학 봉기 중에도 부모님 상을 당했으니 시묘살이를 해야 한다고 전장을 이탈해 버릴 만큼 교조화되어 버리기도 했는데, 원종이 보기에는 49재 이후로의 시묘살이는 허례허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급하게 동항으로 전령선을 보냈으니 오시고 계실 겁니다. 헌데 형님이 시묘살이를 다 하실 겁니까?"
"그건 형님이 오시면 상의해 보자꾸나.”
큰형이 올 때까지 둘째 형과 시묘살이를 하는데, 3년 상을 치르고 나면 시묘살이한 장손이 죽어난다는 말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2월의 문경은 아직 추웠기에 여막 앞에 군불을 피워 몸을 녹였지만, 밤바람의 차가움은 뼛속을 헤집는 것 같았고,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다.
삼국지의 원소도 강골이었음에도 부모님의 3년 상을 치르고 몸이 나빠졌다고 했는데, 그런 것들이 다 이해가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올리고, 곡을 하며 큰형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
"그게 무슨 말이냐? 입궐하라니? 내가 도성에 놀러 온 것이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급히 배를 타고 한양에 도착해 배를 갈아타려 했는데, 원길이 도성에 들어온 것을 어찌 알았는지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부모님의 상이 급하였기에 그냥 무시하고 배를 타고 떠나버려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 뒷감당이 되지 않아 의관을 정제하고 입궐했다.
“내 그대를 의주 목사로 보낸 이후 변방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일을 잘 알고 있다.”
성종은 제 딴에는 변방에서 세운 공을 치켜세워주고, 벼슬을 내려주어 부모님 영전에 자랑스럽게 그런 것들을 올릴 수 있게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배려를 받는 원길의 입장에서는 이런 포상 자체가 허례허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원길 또한 여진인들과 어울리며 편하게 입고 있던 옷이 아닌, 불편한 관복을 입었으니 정전에 들어와 있는 것부터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방 땅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며 그에게 내려진 벼슬에 깜짝 놀랐다.
“안동(지금의 단동일대)를 관할하는 관찰사를 제수하며, 오골성을 감영으로 하여 일대를 다스려 여진인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거라.”
조선이 개국하고 태종 이방원이 조선 8도로 구획을 정한 이후 처음으로 새로운 도가 생긴 것이었다.
그것도 고구려 시절 영토였던 안동지역을 조선의 땅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물리치며 나라가 만들어질 때 여진족들과의 싸움을 피하고자 행정적으로는 요동반도를 명나라의 땅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진인과 유목민들의 무정부 상태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땅을 명나라가 내전으로 혼란할 때 조선의 땅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9도인 안동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수된 관찰사는 종2품의 관직이자. 그 지역의 행정은 물론이고, 치안을 위한 군권까지 모두 가지는 지방관의 최정점이었다.
하지만, 원길은 크게 기쁘지 않았다.
사실상 여진인들의 땅에 관청을 만들고 조선의 땅으로 만들라는 명령이었기에 그 험난함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나라가 정상화된다면 9도로 안동도를 설치한 문제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이 받아야 했다.
허울뿐인 명예이자 고생의 상징이 될 것이 뻔해 보였기에 기쁘지 않았다.
“상을 치르고 오면 감영에 소속되는 노비와 공장(工匠)들을 준비해 둘 것이니 호조와 병조과 협의하여 지원을 준비하겠네."
한명회가 안동도에 대한 지원을 이야기하며 어깨에 힘을 실어주려고 했으나, 이미 그 실상을 알기에 원길은 시무룩할 수밖에 없었다.
“상을 당해서 그리 기뻐하지 않는군.”
성종은 관찰사를 제수했음에도 기뻐하지 않고 돌아간 원길의 반응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하. 어쩔 수가 없사옵니다. 제수받고 기뻐하면 그것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나올 수도 있으니 크게 기뻐하지 않는 것이지요."
한명회도 원길의 반응이 좋지 않은 게 기분 언짢았지만, 손녀사위의 형이었기에 변명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그런 것이었나? 헌데, 안동도의 설치에 명나라가 크게 반발하지 않겠나?"
"반발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태자 측에 보낸 군사 원조가 있으니 그들도 크게 반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명나라가 정비되는 시간 동안 안동도를 조선의 땅으로 확실히 만든다면 은근슬쩍 그
일대를 우리가 얻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내국구만 믿네. 하하하.”
***
원종이 문경에 도착하고 17일이나 지난 후에 큰형이 도착했는데, 집안에 모셔진 위패에서 곡을 하고, 묘 앞에서도 곡을 했다.
어떻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야기를 하고 삼형제가 묘 앞에 앉았는데, 원길과 원종이 한양으로 올라간 지 8년 만에 삼형제가 모인 것이었다.
그간 만나지 못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하다 원종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안동도의 관찰사를 제수받았다고 들었는데, 시묘살이는 어찌 하실 겁니까?"
"나는 못 하겠다. 둘째 네가 제사를 모시거라."
제사를 모시라는 말은 네가 장손 노릇을 하라는 말이었고, 그 말에는 제사를 위해 장손에게 주는 전답이나 재산을 넘기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형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모시겠습니까?"
“아니 네가 모시거라. 오랜만에 조선에 오니 갑갑하더구나. 관찰사의 벼슬을 준다고 해도 하나도 기쁘지 않더구나.”
의관을 입고, 조정에 입궐해서 만났던 이들과 이야길 하고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원길은 그 자체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분명 조선의 벼슬아치들이 세련되었고, 예를 지켰지만, 그런 모습이 원길의 마음에 거슬렸다.
예의 없고, 방정맞게 이야길 하며 설쳐대는 여진족의 족장들이 더 인간적으로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이는지를 신경 써야 하는 조선 땅이 너무 갑갑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내 기반이 안동이니 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해 갈 수도 없으니 둘째 네가 제사를 물려받거라."
“하지만..."
“막내는 조선 제일 거부라고 불릴 정도이니 문경의 전답이 필요 없을 것이고, 제사를 지내는 네가 물려받는 것이 맞다."
“맞습니다. 형님이 본가를 지켜 주십시오."
원종까지 나서 둘째인 원상이 제사와 재산을 물려받으라 하니 원상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을 지나 여진족의 땅이 근거지인 큰형이나 조선이 좁다고 외국까지 다니는 동생에게 제사를 맡길 수는 없었다.
"네 그럼. 제가 시묘살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형님, 시묘살이도 3년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유가가 아닌 불가의 예를 따른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49재 탈상을 하자는 말이냐?"
“네. 우리가 유문의 학문에 깊은 배움도 없는데, 그 예만 쫓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겉만 따라 하는 것은 하지 않는 이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흠.”
둘째인 원상은 원종의 말에 고민을 했는데, 인근의 안동이나 고울의 양반들은 다들 3년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시묘살이를 하다 네가 병이 날 수도 있으니 나도 불교의 49재에 따르는 것이 맞다고 본다.”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삼형제가 49일 동안 묘 앞을 지켰고, 탈상을 했는데 몇몇 양반들이 예가 없다 뒤에서 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첫째가 종2품의 관찰사에 막내가 정3품 당상관인 병마 절제사였고 둘째도 정7품 박사이니 그 위엄에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덕분에 몸이 약한 양반네들도 전씨 가문의 예를 따라 시묘살이를 49일만 하게 되었는데, 유교적 관습이 심했던 영남에서 오히려 시묘살이가 간소화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
원길은 동항으로 원종은 목포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왜의 복강도(후쿠에섬)에서 들어온 정보가 있었다.
“장안으로 도망쳤던 황제와 만귀비의 군사들이 지금은 북경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 몰아붙이고ㅇ있다고 하는데, 북경의 태자군이 풍전등화의 상황이라고 하옵니다.”
“장안으로 몰려서 말라갈 줄 알았는데, 다시 북경을 빼앗을 만큼 되었다니 놀랍구나. 어떻게 전세가 역전이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느냐?"
"소상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북경을 장악하고 있던 태자군의 장수들이 독살을 당했기에 군을 지휘할 장수가 없어 몰렸다고 하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자장면과 복어 독을 쓴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