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불만과 표출.
“전하. 태자군의 황여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창 태감 양방이 이끌던 수호군을 물리쳤고, 패퇴하는 병사들을 쫓아 북경성을 쉽게 점령하였다고 하옵니다."
“허허 환관을 군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결착을 내라고 하다니. 황제에게는 장수가 그렇게 없었다는 말인가?"
“장수는 있으나, 그 장수를 만귀비가 믿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허허. 그럼 황제는 어찌 되었는가?"
“패퇴하던 태감 양방이 죽기로 막아 황제와 대신들이 장안으로 도망갈 시간을 벌었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이제 명의 내전이 끝이 났다고 봐도 될 것 같군.”
“그러하옵니다. 수도를 잃고 쫓겨간 황제들 중에 다시 수도를 탈환하여 승리했던 예는 없었사옵니다."
"흐음. 그렇다면 내전 초기에 황제에게 기병 천 명만을 보낸 것이 참으로 옳은 결정이었던 것 같소이다. 국구(國)께서 조언을 해주신 덕분이오."
"아니옵니다. 모두 전하의 덕이옵지 소신의 조언이야 티끌에 불과하옵니다. 도성에는 전하의 덕이 쌓여 풍년이 들고,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수월하다고 하여 태평성세가 도래하였다는 노래가
있을 정도이옵니다.”
“하하하. 나도 변하여 나가 들었을 때 낯이 다 간지러웠소이다.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일어나 유리걸식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라고 하던데, 조선은 이처럼 태평스러우니, 정말 내 덕이 쌓인 것 같아 기분이 참으로 좋소이다.”
“전하의 덕이 높아 명나라가 전쟁 중인데도 시중의 곡물 가격은 그대로이니 당나라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가는 성세라고 칭송이 자자하옵니다.”
“하하하. 다 나를 잘 보필해준 국구 덕분이오."
성종과 한명회는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칭찬을 하기 바빴다.
"허면, 명나라의 승패가 결정 난 것이나 진배없으니 병장기와 곡식을 보내주는 소극적인 도움보다는 태자군에 군사를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지금 군사를 보낸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국구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지금이라도 보내야 하는 게 맞는 것이오?”
“대세가 판별난 이후에 뒤늦게 군사를 보낸다 하더라도 책을 잡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보내지 않는 것보다 늦게라도 보내야 하옵니다. 더구나, 전쟁 초기에 천 명의 기마병을 황제군에게 보내었기에 그 이상의 병력을 보내야 하옵니다.”
"흐음. 그걸 만회할 만큼 많은 숫자를 보내야 하겠군."
성종은 한명회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의정부 좌참찬인 허종(許琮)을 도원수로 삼아 병력 2만을 명나라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성종이 2만의 군사를 파병하기로 하자, 발등에 물이 떨어진 것은 상단 들이었다.
2만의 병사들이 먹고 입고 할 물자를 상단들이 준비해야 했다.
더구나, 만귀비와 황제가 폐망하기 전에 군사를 보내야 했기에 더 준비가 짧을 수밖에 없었고 서둘러야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좁쌀을 한 섬당 은 반냥에 공출하라니요. 1냥 반은 받아야 하옵니다. 전쟁으로 곡식가격이 올랐는데, 예전 가격으로 공출하시겠다고 하시면 저희 상단은 손해가 엄청나게 날 것이옵니다."
한양을 책임지고 있는 김재원은 무턱대고 값을 깎으려는 호조의 관리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어허, 춘봉 상단은 교환권으로 평소에 이득을 많이 보았지 않은가 그 이득을 내놓는 것으로 생각해야지."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 않사옵니까? 조와 수수 거래만으로 은자 5천 냥 이상의 손해가 나게 되옵니다."
“난 모르겠네. 그런 손해는 호조에 가서 말하게 난 시킨 대로 공출할 뿐이네. 이 표찰을 받게 이게 값이네."
두 눈 뜨고 은자 5천 냥을 손해 본 김재원은 속에서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호조로 뛰어가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왕십리의 함덕 일가에게 사람을 어서 보내어라!”
"뭐라고 전할깝쇼?"
김재원은 말을 하려다 말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호조의 관리들이 왕십리 농장에 들이닥쳐 소와 돼지, 닭을 잡아 육포로 공출하는 걸 조심하라고 전한다 한들 피할 방법이 없었다.
“씨돼지와 씨암탉을 빼돌리라고 전하거라. 그거밖에 할 게 없겠구나. 벽란도에는 시일이 있으니 물자를 최대한 실을 수 있는 만큼 다 실어서 동항으로 옮기도록 전하거라.”
본래 전쟁이 나면 상단들의 물자가 공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상시 이득을 보았으니 나라를 위해 내놓으라는 말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거부한다고 해도 강제로 싼값에 공출해 버리니 답이 없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공출 금액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제대로 된 시세대로 줄지 알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값이 떨어진 같은 물품으로 준다면 시세에 따른 손해를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예상한 상인들은 애초에 가격을 높게 만들어 두던지 하겠지만, 춘봉 상단은 교환권 때문에 가격이 다 공시가 되어 있으니 손해를 줄일 방법도 없었다.
결국, 조정에 이 손해에 대한 의견을 내놓아야 했기에 원종에게 한양으로 돌아와 우리 이익을 챙겨야 한다고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
“허허. 명나라가 내전으로 힘든데도 조선이 태평 성대한 것이 다 전하의 덕이 높아서라고?"
김재원의 편지와 함께 받은 조정의 협조를 바라는 서신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보릿고개를 쉽게 넘기게 된 것도 내가 나이기온 닭털 옷을 만들어 보급했기에 목화를 심었을 받에 콩이나 다른 곡물을 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중국과 대월에서 곡식을 사 왔기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도 곡물 가격이 안정된 것도 내가 왜로 가는 남방 항로를 다 공개해 주고 했기 때문인데, 이 모든 것이 다 성종의 치세라고 하니 괜히 기분이 나빴다.
조선인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끌어 올 수 있는 것을 다 끌어왔는데, 그 끌어온 것들도 날름 가져가며 태평성대와 진충보국(盡忠保國)을 강조하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도성에 있던 물자는 다 공출되었지만, 벽란도에 있던 물자는 동항으로 다 옮겨오고 있다니 안심을 했다.
“지금 동항은 중국과 조선의 중간 지대이고 여진인들의 땅이지만, 동항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태자 쪽에서 이곳까지 자기 땅이라고 한다면 중국에 넘어갈 것이다."
“네. 형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딴 주머니를 차야겠지요."
가까운 대마도나 조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물자 비축을 위한 장소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조정에서 태자군에 2만 명을 보냈다면 여진족장들에게도 그걸 알려줘야 할 것이다. 그럼, 너는 어찌할 것이냐?"
“저는 한양으로 가서 들고 간 물자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달라고 해봐야지요. 그게 안 되면 다른 공납이라도 받아서 손해를 메꾸어야 합니다."
“그럼 내년에나 다시 보자꾸나.”
***
급히 한양으로 돌아와 조정에 들어가니 다시 국구가 된 한명회가 국정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명회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네는 평상시 벌어서 쌓아둔 재물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겐가? 저승 갈 때 싸 들고 갈 것인가?"
“그 재물로 할 일이 많사옵니다."
“그 할 일에 나라를 위한다는 것도 넣게나. 조선 최고의 부자가 겨우 은자 5천 냥의 손해에 민감해하면 쓰나. 통을 크게 좀 가지게."
재산 축재를 어마어마하게 해둔 자신은 내놓지 않으면서 나에게 좀 내놓으라는 것을 보면 애초에 내 재산이 너무 많으니 그걸 빼앗기 위해 작업을 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태자군에 있다는 그 텅신황이란 상인에게 말해서 남방으로 가는 항구를 조선인들이 쓸 수 있게 열어 달라고나 해주게나.”
“네 연락해 보겠습니다."
공출로 입은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오히려 태자군에 부탁해야 하는 일까지 받자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속에 화를 꾹 참고 집으로 왔는데, 손님이 와 있었다.
"응? 왕태감...아니 왕 어르신 아닙니까? 어인 일로...”
찾아온 이는 만귀비의 수족이자 동창의 태감인 왕직이었다.
보는 눈이 없는지 살피고, 집안으로 들여 안방에 앉혔는데, 왕직은 종이로 만들어진 상자를 내밀었다.
“귀비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 그리 불렀는데, 어찌 이리 매정했는가?"
"소신도 귀비님의 요청에 따르고 싶었으나, 조정에서 저를 보내지를 않았사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질까 싶어 가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못 가게 했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래도 아쉽구만.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인가? 섭섭했네."
"죄송합니다. 하온데, 전해 듣기로는 형세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왕 어르신은 여기까지 오셔도 괜찮은 것입니까?"
“자네를 보기 위해 몰래 온 것이네. 이 상자를 열어 보게나."
왕직이 내민 종이상자를 살짝 열어 보자, 어두침침한 촛불임에도 반짝임이 느껴지는 보석들이 상자에 가득 들어 있었다.
진주와 옥으로 만든 팔찌와 목걸이를 비롯해서 금과 은으로 만든 반지와 머리 비늘까지 다양하게 들어 있었다.
"귀비께서 내리신 것이네."
“귀비님의 마음은 제가 담아 두겠사오나, 이것을 제가 받아도 될지요?"
“받겠나. 대신에 그대가 하나 해줄 일이 있네."
"어떤 일인지부터 물어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어려워도 자네에게는 쉬운 일이네."
만귀비의 동창 태감은 어렵고, 나는 쉬운 일이라고 하니 어떤 일인지 쉽게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그 누구도 먹어 본 적이 없는 기묘한 음식을 만들어 주게나."
"요, 요리 말입니까?"
단순히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이런 보석과 보물을 보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물론,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먹어 본 적이 없는 기묘한 음식을 만들어 달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이 시대에 알려지지 않은 현대의 음식을 해주면 되는 것이니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더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요리로 무엇을 하실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식도락의 즐거움을 위해 왕 어르신이 여기까지 오셨다면 무엇인가 다른 일이 있을 것 같사옵니다.”
왕직은 원종의 질문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음식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네. 그리고, 그 음식으로 큰일을 할 것이네."
더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큰일인 독살을 위한 요리를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먹어보지 않았고, 기이해서 꼭 먹어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음식은 그런 목적에 부합했다.
"그런 음식을 알려드릴 수는 있사오나, 조선의 왕이 그 목표인 것입니까?"
“아니네. 조선의 왕이 2만의 군사를 적들에게 보낸다는 것은 들었네. 하지만, 2만 명의 병사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왔겠나."
왕직의 서늘한 눈을 보니, 내 요리로 죽일 사람이 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게 신기한 음식을 알려달라는 것인데, 이런 요청은 요리사라는 직업적 사명감을 떠나 사람이라면 들어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래 역사대로라면 왕자를 못 낳았을 만귀비를 생각하자, 이미 내가 퍼트린 요리들로 인해 역사가 바뀌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려준 요리로 인해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았고,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의 생과 사가 갈린 것이었다.
가깝게는 북해도에서 죽은 대영일 공자가 그랬다.
역사대로라면 요동 반도에서 정체성을 잃고 뒤섞여 사라졌을 발해방이었으나, 나로 인해 북해도의 개척에 나섰었고, 내가 노예로 만든 소 사다쿠니로 인해 발해방의 고위직들은 죽어 버렸었다.
내가 호의로 베푼 은혜에 대영일은 젊은 나이에 요절해 버린 것이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독살에 쓰일 음식을 알려줌으로 인해서 세상이 다시 바뀔 수 있었고, 아니면 그대로 변화 없이 흘러갈 수도 있었다.
결국, 독살을 위한 음식을 배우러 온 이 일도 하늘의 뜻이었다.
“좋습니다.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음식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독을 쓰기에도 좋은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