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또 다른 북방. (2)
"저기가 강어귀 마을입니다."
해안선을 타고 내려오자 두 번째 마을이 보였는데, 마을 이름처럼 바다로 흘러드는 강어귀에 붙어 있는 마을이었다.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이 물길을 만들어 흐르다 보니 큰 배를 접안하기 힘든 곳이었는데, 상륙에 두 배 이상의 시간이 허비될 수밖에 없었다.
“상륙이 늦어 이미 근방에 있던 아이누족들은 도망을 치고 없습니다. 어찌할까요?”
“수확되어 있는 식량은 다 배에 싣도록 하고, 아직 수확되지 않은 것은 그냥 두도록 하게.”
도망친 아이누족들을 고통스럽게 하려면 수확 전 곡식들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몰랐기에 최대한 여유를 두고 싶었다.
세 번째 마을인 갈대 마을은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았을 때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 도망친 것 같았다.
"여긴 아직 수확이 반도 안 되었는데 어찌합니까?"
“경계병을 세우고, 쟁여두기 쉬운 것만 빠른 수확을 하도록 하지."
“단주. 수확을 위해 시간을 보내면 놈들이 다 도망을 칠지도 모릅니다.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고 선장. 우리가 강어귀 마을에서 놓친 아이누족이 벌써 사방으로 퍼진지 오래네. 우리가 그들을 급히 쫓아 움직인다 하여도 먼저 도망을 쳤을 것이네.”
“하지만, 시간을 줄수록 아이누족과 소 사다쿠니가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놈들이 준비하기 전에 공격해야 합니다.”
“고 선장. 싸움은 급하다고 빨리하면 할수록 실기할 수 있는 법이네. 그리고, 곧 눈 내리는 겨울이네. 놈들이 싸움 준비를 한다고 수확을 게을리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이야."
원종은 고형만의 어깨들 두들겨 마음을 다듬게 했다.
“그리고, 이 곡식들은 발해방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힘들여 경작한 것이 아닌가, 이걸 어찌 그냥 버릴 수 있겠나. 자네들을 위해 죽은 이들이 남겨준 곡식이라는 말일세."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남겨준 곡식이라는 말에 고형만도 더는 서두르라고 말하지 않고, 수확을 도왔다.
***
“그러니깐, 산처럼 큰 배 15척이 왔다는 말이냐?"
소 사다쿠니는 큰 배에 놀라 도망친 아이누인들에게 정보를 듣고 있었다.
“맞소. 그 크기가 정말 산과 같았소. 거기서 수백 명의 사람이 내리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소이다."
강어귀 마을에서 도망친 아이누족들은 양 사방으로 달아나며 큰 배가 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소 사다쿠니는 배에 태극 문양의 깃발이 달려 있었다는 말에 발해방이 아닌 조선의 춘봉상단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 사다쿠니가 고심하는데, 훔쿠시 부족은 앞으로 어찌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분명 발해방 사람들이 입는 옷이었소."
“그렇다면 발해방 놈들이 복수하기 위해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인데, 우리는 어찌해야 하지?"
"어찌하긴 싸워야지. 이 오목마을에서 싸워야지. 두 마을에서 도망쳐온 부족들도 받아들여 전사 수를 늘리면 이길 수 있을 거요."
발해방 사람들이 세운 네 번째 마을인 오목마을은 마을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는데, 이미 기존에 있던 아이누 부락 옆에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해방의 혈사가 있었던 마을이기도 했다.
오목마을의 훔쿠시 부족은 발해방 사람들을 죽이며 얻었던 재화가 상당했기에 다시 배를 털어 더
부유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과 싸운다면 무조건 질 것이오."
싸움을 위해 기세를 올리고 있던 훔쿠시 부족에게 소 사다쿠니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 큰 배는 보통 배가 아니오. 불을 뿜어내는 화포라는 무기가 있고, 내 고향에서 겪어 본 놈들이 타고 있다면 무조건 지게 되어 있소."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에겐 300명이 넘는 전사가 있고, 다른 부족들이 합류하면 500명이 넘는 전사가 생길 것이다."
훔쿠시 부족의 부족장인 빠이로는 소 사다쿠니의 말에 화가 났다.
싸워 보지도 않고 진다고 하니 저주를 받은 기분이었다.
“나도 빠이로 족장처럼 이길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소. 실제 거의 다 이겨가기도 했었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고향에서 쫓겨나 이곳에 있소."
"그럼 그때 이야기한 조선의 그놈들이라는 말이오?"
“맞소이다. 그 조선의 상단 놈들이오. 내 가신단을 패배시키고, 내 땅을 빼앗아간 놈들이오.
훔쿠시 부족과 빠이로 족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오. 나도 수많은 부하들과 전사가 있었지만 놈들에게 패해서 노예가 되었소.”
그제야 훔쿠시 부족원들은 조선의 상단이라는 놈들이 보통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소 사다쿠니와 그 노예들은 뛰어난 전사였다.
칼도 잘 쓰고 규율도 있어 자신들의 부족 전사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전사들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런 전사들이 많았음에도 패배하여 노예로 팔렸다고 하니 조선 상단이란 놈들의 강함이 그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럼, 어찌하면 되는 것이오? 도망을 쳐야 하는 것이오?”
"도망을 친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소이다. 싸우는 것이 맞소.”
“싸우면 진다고 그대가 이야기하지 않았소?”
“싸우더라도 지지 않는 싸움을 해야 하오. 정보를 들어보니 해몰이 마을의 이태랑기 부족은 딸을 바치고 목숨을 부지했다고 들었소."
“큰 부족 밑으로 들어가는 생존을 택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건 싸우는 것이 아니오.”
“우리도 똑같이 하면 되는 거요. 조선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해서 적들을 안심시키고, 그때처럼 연회를 열어 놈들을 죽이면 되오."
"흥! 또 비겁하게 싸우라는 말이군."
"그럼, 비겁하지 않게 싸워서 다 죽을 것이오? 비겁하든 비겁하지 않는 싸워서 이기는 쪽이 승자요. 어떻게 하시겠소?"
훔쿠시 부족은 다시 비겁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 서로 투덜거리며 의견을 조율했고, 강어귀 마을과 갈대마을에서 도망쳐온 아이누족들을 합병하면서 싸울 방도를 찾았다.
그리고 결국, 소 사다쿠니의 말처럼 비겁하더라도 쉽게 이기는 것이 옳다고 여겨 거짓 항복으로 방심하게 만들고 연회를 열어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
고형만에게 오목마을은 발해방의 혈사가 일어난 마을이자 가장 큰 마을이라는 소릴 들었었기에 제대로 된 싸움을 여기서 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오목마을이 보이게 되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누족들이 도망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무기를 들고나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먹을거리를 들고나와서는 손을 흔들고 웃어줬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고 선장이 보기에 저기에는 훔쿠시 부족은 없는 거요?"
“아닙니다. 훔쿠시 부족이 있습니다. 저 양쪽 어깨에 게 모양의 문양을 가진 이들은 훔쿠시 부족입니다."
“우리가 발해방과 조선 사람이라는 것도 도망친 이들로 인해 알았을 터인데, 왜 환영을 하는 것이지? 이(李) 쿠타키 부족장이 알아보시오."
이 쿠타키가 먼저 작은 배로 내려 상황을 알아 오는 동안 발해방 사람들은 놈들이 사람을 죽여 놓고도 환영하고 있다며 더 화를 내며 방방 뛰었다.
“의외입니다. 훔쿠시 부족을 비롯한 네 개 부족이 우리 부족처럼 조선 부족의 밑으로 들어가고ㅇ싶다고 합니다. 조선의 상단을 환영하며 큰 부족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답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단주님. 놈들은 발해방의 혈사를 피하고자 조선인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만인 놈들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고형만이 말하지 않더라도 아이누족들이 위험을 피하고자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의심스럽다고 환영하는 이들을 무작정 죽이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향후 아이누족들을 다스려 북해도를 운영하는 데 힘이 들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구를 확 늘릴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이것이 기만전술이라면 치명적인 전술이었다.
어찌할지 고민을 하며 배를 대려고 하는데, 뭔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점을 깨달았다.
“이 쿠타키 부족장. 물어볼 게 있네. 자네들은 우리에게 귀부를 요청할 때 딸과 제물을 보냈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흑곰의 가죽에 예물을 담아 드렸었지요.”
“딸을 바치는 것이 이곳의 예법인가?"
“예법의 뜻은 잘 모르나, 작은 부족이 큰 부족의 아래로 들어갈 때는 부족의 딸을 바치는 것이 기본입니다. 부족의 딸을 통해 아들을 낳게 되면 부족이 합쳐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작은 부족의 딸과 큰 부족의 아들이 합쳐지는 혼인동맹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딸을 바치는데,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큰 부족이 거부를 할 때 말일세. 그때는 딸도 그냥 돌아오나?"
"아닙니다. 거부된 딸은 부족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미 큰 부족에게 바친 예물이기 때문에 제 딸이 아니게 됩니다.”
이 쿠타키의 말을 듣자 확실해 졌다.
배를 대는 것을 환영하며, 조선 부족의 일원이 되겠다는 놈들이 예물만 들고 있고, 딸들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번 예물로 바쳐지면 자기 딸이 아니기에 딸들을 희생하기 싫어서 아예 딸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 쿠타키 또한 말을 하면서도 다른 부족들이 딸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인상을 썼다.
“보십시오. 놈들은 우릴 속이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먼저 들이쳐야 합니다."
고형만은 당장이라도 전투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환영 인파에 여자들이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하는 입 주위 문신만 봐도 바로 여자구나 확인할 수 있는데, 여자가 별로 없습니다. 보통은 이런 환영하는 일에는 여인들을 내세워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것이 기본인데, 여자가 거의 없습니다."
선장 염호진도 찬찬히 살펴보고는 고형만의 편을 들었다.
“우선은 저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게. 우리는 아직 상륙 전이야. 웃으며 상륙해야 하네.
그래야 저것들을 한 번에 몰아붙일 수 있지 않겠나?"
내가 결정을 내리자 염호진은 바로 웃으며 화포에 장약을 채우라는 명을 내렸고, 병장기를 준비하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 신호용으로 쓰는 나각(소라나팔)을 불게 하고 북을 치게 했다.
다른 배에서는 나각 소리와 북소리를 듣고 전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각 소리와 북소리에 이어 태평소를 불게 했는데, 길게 이어지는 소리에 아이누인들은 자신들의 환대에 넘어간 것으로 생각했다.
"먹을 것을 던져 주며 병사들을 내리게 해라. 얼굴은 웃으라고 해라!"
선원들도 장창과 방패를 들고 상륙을 시작했고, 박 투르안의 기마병이 내릴 차례가 되자 내가 깃발을 들어 흔들었다.
[펑! 퍼펑!]
정면이 아닌 옆면으로 배를 대고 있던 대운선 두 척에서 화포 여섯 발이 아이누족에게 쏟아졌다.
큰 탄환이 아닌, 새끼손톱만 한 산탄이 쏟아졌기에 백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한 번에 나뒹굴어 버렸다.
환영한다며 웃고 있던 바닷가가 순식간에 피에 절은 비명이 흐르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 뒤로 박 투르안의 제주 기병들이 뛰쳐나와 아이누족들을 밟아 버리자 아이누족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릴 속이려고 했던 놈들이다. 조선과 우리 춘봉 상단의 무서움을 알려주어라."
기마병들이 달려들어 짓밟아대는 사이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발해방 사람들도 뛰쳐 들었는데, 푸른 물의 바다가 금세 핏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제길, 들통났구나. 우리는 산으로 들어간다.”
해안가가 보이는 숲에 숨어 있던 소 사다쿠니와 왜인들은 일이 잘못된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바로 몸을 뺐다.
“저쪽 숲에서 움직임이 있습니다. 뒤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