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다시 한양으로.
키 큰 잡풀과 수목들을 쳐내어 개간된 산오름에서 윈총은 길게 줄로 된 자를 대어 바둑판처럼 구역을 나누어 돌담을 쌓게 했다.
그리곤 각 구역마다 숫자와 이름이 쓰인 나무 푯말을 세웠다.
“자, 여기 나뭇가지들이 들어 있는 물통을 보면 '천왕'이라고 쓰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기 저 푯말에 쓰여있는 글씨도 '천왕'이라고 쓰여있다. 글씨를 모르더라도 모양이 같은 걸 알아보겠느냐?"
한글로 쓰여 있었지만, 도민들은 다들 글을 몰랐기에 모양으로 같은 글씨라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이 천왕이라고 쓰인 물통에서 자라는 나뭇가지를 꺼내 같은 글씨가 쓰여있는 구역에 심으면 된다. 나무를 심는 법은 이렇다."
원종은 직접 나무 삽으로 한 뼘의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심고 손으로 흙을 단단하게 눌러줬다.
그러곤 물을 흠뻑 뿌려주었다.
"이렇게 하면 나뭇가지 심는 것이 끝난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요."
원종은 사람들을 10명씩 조로 나누어 각 조마다 한 구역씩을 맡겼다.
“자네 조는 천왕, 자네 조는 반야, 자네 조는 관음, 자네 조는 연하..."
조원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알려주고 일을 맡기곤 이들이 제대로 나무를 심는지를 꼼꼼히
확인했다.
“이 구역별로 붙인 이름이 뭔가 뜻이 있는 겁니까? 그리고, 저 나무는 무엇이기에 이리 심는 것입니까?"
리더십은 있지만, 일자무식인 박투르안에 비해 박조쿠낙은 꽤 머리가 돌아가고 호기심이 많은 자였다.
"천왕, 반야, 관음, 연하, 노고, 오도, 바래, 촛대, 두류 등등 모두 조선 본토에 있는 지리산 봉우리의 이름이지."
"허면, 왜 지리산 봉우리 이름을 구역별로 나눠서 나무를 심게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이름 그대로일세. 이 나무들은 천왕봉에서 채취해서 물에서 키운 나무이기에 천왕이라고
푯말을 세운 구역에 심는 것이네."
“그럼, 각 봉우리마다 나뭇가지를 잘라 와서 키운 거란 말인데, 저 나뭇가지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바로 차(茶)나무네. 각 봉우리에서 자생하고 있던 차나무의 가지들을 꺾어 이 제주도 오름에
심는 것이지."
박조쿠낙은 차나무가 무엇인지를 몰랐기에 감을 잡지 못했다.
“이 나무들은 오래전 한반도가 신라라고 불릴 때 중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네."
알려지기로는 통일신라 흥덕왕 시절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보내와 지리산 일대에 그 씨를 뿌려 차나무를 키웠다고 알려져 있었다.
훨씬 전인 가야가 존재할 때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말도 있지만, 사료적으로는 통일신라 때가 맞았다.
이때 당에서 보낸 차나무의 종류가 잎이 큰 대엽종의 하나라고 하는데, 차나무 자체가 워낙에 변종이 많고, 같은 종류의 나무라도 자라는 환경에 따라 그 잎이 가지는 타닌의 양이 달라지기에 맛이 똑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잎이 돋아나는 시기와 채집 시기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는 것이 차나무인지라 균일한 맛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 구획을 정해 키우는 것이었다.
물론, 미묘한 맛의 차이를 알아낼 정도로 다도에 정통한 자가 조선에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원종도 이 차나무를 심으면서도 과연 이 차나무를 수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실제 녹차든 홍차는 영국에 전해지고 그게 전 유럽으로 퍼져 인기를 끄는 것은 2~300년이나 지난 미래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차 문화가 중국에서 발달했다곤 하지만 유럽인이 오지 않는 지금 시대에는 차를 팔아서 수익을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훗날 유럽인들이 오고 차(茶)의 시대가 왔을 때 차가 없어서 모든 이익을 중국에 다 내어주기는 싫었다.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미리 차밭을 만들고 여러 품종의 차를 만들어 훗날을 대비해야 했다.
“그럼, 저 멀리 천축을 지나 회교도들이 사는 곳 너머에 있는 색목인들이 이 차를 좋아해서 비싸게 사 간다는 말입니까?"
지리산에서 딴 찻잎으로 만든 녹차를 마셔본 박조쿠낙은 씁쓰름한 맛의 녹차 맛이 인기가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다.
"그래, 여기에 설탕을 넣어 먹거나, 잎을 그늘에서 삭혀 홍차로 만들어 먹으면 여러 가지 맛을 낼 수 있네."
녹차를 산화시킨 찻잎에 말린 귤껍질과 국화를 넣은 홍차도 내어주니 조쿠나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설탕을 넣고 다른 게 들어가니 쓴맛이 줄어들어서 먹을 만합니다."
“앞으로 저 차나무가 자라면 방금 먹은 것 같은 차를 만드는 일을 자네가 해야 할 거야. 그리고 이걸 보게."
원종은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는데, 상자 안에는 닭털을 넣은 비단 방석이 깔려 있었고, 그 방석 위에 깨지지 않는 본자기 찻잔과 주전자, 작은 찻숟가락이 고정되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종이로 만들어진 사각 상자가 도자기의 위쪽에 맞춘 것처럼 놓여 있었는데, 종이상자에는 천왕, 관음, 반야라고 이름이 쓰여있었다.
"찻잎을 이렇게 도자기와 구성해서 판매를 할 것이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가?”
"네. 아주 고급스럽습니다. 차라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차를 제대로 모르는 이가 봤을 때도 고급스러워 보인다면 다행이군. 하지만, 이건
보급형이네. 진짜 고급은 이거야.”
원종은 다시 상자를 꺼내었는데, 검은색의 상자였다.
"아예 상자를 나전칠기(漆器)로 만든 것이지. 어떤가?"
검은 바탕에 오색의 빛을 뿌리는 매각 껍질이 꽃과 나비 모양으로 붙어 있자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아니 고급스러움을 넘어 예술품으로 보였다.
제주도에서 이런 나전칠기를 본 적 없는 박 조쿠낙은 반짝이는 조개껍질이 떨어지진 않는지 신기해서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그런 조쿠낙의 모습에 원종은 미소를 띠었다.
이런 반응을 원한 것이었다.
검고 윤기 나는 옻칠 위로 오색의 빛을 뿌리는 매각이 붙어 그림을 나타내고 있으니 처음 보는
이는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나전칠기 찻잔 세트를 들고 말라카에 가게 되면 다들 조쿠낙처럼 신기하게 나전칠기를 볼
터였다.
원종은 제주도로 오며 전복 껍데기를 해녀들에게 모아오면 곡식으로 주기로 했는데, 그렇게 모인 전복 껍데기가 이렇게 나전칠기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다만, 옻칠에 들어가는 옷은 베트남이라 불리는 대월에서 구해온 것이었다.
한반도에도 옻나무가 자라는데 왜 베트남에서 옷을 구해왔는지 의아하겠지만, 옻나무에 있는
독성 때문이었다.
옻나무를 잘못 만지면 옷 독이 올라 고생을 하게 되는데, 베트남에서 자라는 옻나무에는 그 옻 독의 원인이 되는 우루시올(Urushiol) 성분이 거의 없기에 가려움을 유발하는 독이 거의 없었다.
물론, 옻칠을 했을 때 그 견뢰도에서 한, 중, 일의 옻칠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지만, 옻 독이 올라 고생하는 작업자들을 생각한다면 베트남의 옻이면 충분했다.
“정말 고급스럽습니다. 차를 마시지 않아도 그냥 가지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고급스러운 구성품에 들어가는 차를 조쿠낙 자네가 생산해야 할 것이니 임무가 크네.”
조쿠낙은 자신들이 기르는 나무에서 딴 잎이 고급스러운 구성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원종의 허락을 얻어 나전칠기 상자와 일반 상자를 일일이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켜주었다.
다들 이런 멋진 제품을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것에 좋아했다.
물론, 이 상자 하나의 가격이 말 한 마리를 넘는 가격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고, 그 수익에서 일정 부분을 나눠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기뻐했다.
***
"그리고, 차나무가 이 산오름을 가득 채우면 먹는 것에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야."
원종은 찻물을 우려먹은 후 물에 불은 찻잎을 꺼내 밥 위에 올렸다.
그리고, 다른 삶아진 야채를 넣고 간장을 넣어 비빔밥을 했다.
“차를 우려먹은 찻잎은 이렇게 채소처럼 먹을 수도 있으니 미약하나마 먹거리에 도움이 될
것이네."
그리고, 찻물에 밥을 말아 단무지와 삭힌 김치를 먹는 것도 보여주자, 다들 찻물에 말아 먹거나 찻잎을 넣어 비빔밥을 해 먹었다.
“차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각 구역마다 닭도 키우도록 하게. 닭이 차나무에 기생하는
벌레들을 잡아먹어 줄 것이고, 닭똥은 차나무의 비료가 되어 줄 것이야. 물론, 달걀도 줄 것이고."
주식은 아니지만, 찬으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산오름에서 생산된다는 걸 알게 되자 다들 의욕이 생겼다.
이런 차밭이 16~17세기까지 유지되어 유럽에 홍차 바람이 불게 되면, 제주도는 돈방석에 앉게 될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도자기와 차를 패키지로 묶은 세트 상품으로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제주도민들을 위해 마로 만든 실과 그물도 보급을 했는데, 철새로 지나가는 새들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미 남도 일대에 보급해서 새고기를 훈제하여 재미를 본 것이라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군 훈련원 건물이 완성되자 상선들이 전국 각지에서 수군이 되고 싶다고 오는 이들을 실어 오기 시작했다.
본래 도서의 사람이라 수군 역을 지어야 하는 이도 있었고, 수군에서 근무 후 선원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자원을 했기에 금세 500명 넘게 훈련생들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런 훈련생들은 수군임에도 육지에서 제식 훈련을 시켰고, 목포에서 만들어져 온 총통을 쏘는 훈련도 시켰다.
그 이후로는 배를 타고 나가 그물로 생선을 잡는 훈련을 하며 배를 모는 것을 배웠고, 이후로 방패병과 노병 등으로 나눠 훈련을 시켰다.
"단주님 속히 한양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처조부이신 신숙주 대감께서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동래 지점의 희재가 보급을 위해 제주에 오며 신숙주의 죽음을 알렸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기에 무덤덤했지만, 이제까지 자신을 가장 많이 지지해주었던 사람이 이제는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박투르안. 가장 날랜 이들로 20명을 뽑게 같이 한양으로 가세나. 그리고 100여 명은 상선에 태워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경험할 수 있게 하게."
"그렇지 않아도 언제나 이 섬을 떠날 수 있을지 고대했소이다. 크흐흐, 한양이라. 하하하 드디어 보게 되는구나."
한양으로 가게 된 이들이나 상선을 타고 북방과 규슈, 오키나와까지 호위대로 가게 된 이들은 고향과 같은 제주도를 처음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다들 배를 처음 타보는 것이라 멀미를 하고 생쇼를 했지만, 금세 적응을 했다.
***
“벽란도에 들렸을 때와는 다르군. 사람들이 다들 슬픔에 젖어 있는 것 같아."
원종은 한강을 거슬러 오르기 전에 벽란도에서 먼저 짐을 풀고 했었기에 벽란도는 평상시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한양의 나들목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자 마주치는 이들의 얼굴에서 슬픔과 걱정을 볼 수 있었다.
벽란도의 사람들에 비해 한양의 성민들은 신숙주의 죽음을 기리는 것 같았다.
“단주님 말씀드리기 송구하나, 처조부님 때문에 사람들이 슬퍼서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뭣 때문에 다들 저리 얼굴이 어두운 건가?"
"어제저녁에 말라카로 떠났던 만상과 내수사의 배가 당도했는데, 돌아온 배가 3척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3척? 분명 떠날 때 4척이었고, 중국 남부에 가서 배를 더 구매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3척밖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네.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상해서 돌아왔습니다."
“저런, 그래서 다들 슬퍼하는 것이었구만."
“네. 그리고, 한양 전장 때문이기도 합니다.”
*
[작가의 말]
실제 보성이나 하동 쌍계사 인근의 차 밭에서도 어느 이랑과 고랑, 어느 나무에서 딴것인지 까지 구분을 해서 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대홍포 차의 경우에는 우이산 암벽에 자라는 4그루에서 채집한 잎으로 만들어야 대홍포라는 이름을 쓸 수 있고, 같은 지역의 같은 나무에서 채집해도 대홍포라는 이름을 쓰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모수에서 가지를 꺾어 다른 나무에 접붙이기를 하거나 가지를 키워 다시 심은 차나무에도 그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