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72화 (272/327)

272. 뜻밖의 전력강화. (1)

"그 말은 원나라 황손의 신분을 버리고 조선의 일반 백성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오? 아니면, 섬을 벗어나 원나라에 가고 싶다는 말이오?"

“하 보시오. 조상들이 이 제주라는 곳에 온 지 100여 년이 넘어가오. 우리가 지금 원나라로

간다고 원나라 말을 하며 그들과 섞여서 잘살 수 있을 것 같소?"

투르안은 물론이고, 이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전부다 제주도의 방언이 섞인 조선말이었고, 원나라 몽골어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의 5세대 이상 150년이 흐르며 조상들이 쓰던 말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꼴들을 보시오. 설령 원나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제대로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겠소?"

원종은 투르안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명나라의 훼방이 있더라도 원나라의 황족답게 살 수 있는 재물을 가져왔을 터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가져온 재산들을 까먹었을 터이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가진 재물 없이 북원의 땅으로 간다면 황손 대우는 고사하고 약탈당해 노예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조선의 왕이 허락해 준다면, 원나라의 신분을 버리고 마음대로 말을 키우며 사람들과 섞여 살고 싶소."

얼핏 보기에는 이 마을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그런 마을로 보였는데, 투르안의 이야길 듣고 보니, 단순한 마을이 아니었다.

일본의 부락민이나 유태인의 게토(ghetto) 같이 강제적인 격리 성격을 가진 마을인 것

같았다.

아마도, 목호의 난으로 인해 제주 사람들이 많이 죽었을 터이고, 그런 반란을 일으킨 원나라 출신들에 대한 반발심이 이들을 고립시켰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립의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다.

가난한 삶은 물론이고, 자신의 혈통을 '읽을 줄도 모르는 종이 뭉치'로만 증명할 수 있는 현실이 지금 이들을 대변했다.

헌데, 제주 목사인 임영철과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이 원나라 후손들을 주의하라고만 했지. 주거지를 옮기거나 뭘 어떻게 하면 안 된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럼 이 제주도를 벗어나게 해주면 내게 뭘 해줄 수 있소?"

그들의 조상인 몽골 기병처럼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다면 내 밑에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도 생각났다.

“수군 훈련원의 장이라고 했는데, 그 벼슬로 가능한 것이오?"

투르안은 글씨는 몰라도 멍청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훈련원의 장이 공식 직함이지만, 내 처가가 힘이 좀 있소.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 대감이 내

처조부이고, 마누라의 외할아버지가 영의정인 한명회요. 두 분의 이름은 들어 보았소?"

제주도 구석에 살더라도 신숙주와 한명회의 이름은 들어 보았는지 투르안은 놀랐다.

“영의정이 재상이라는 직책인 것은 나도 알고 있소. 진짜 우릴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거요?"

"물론이오, 대신에 이제는 원나라의 후손이라는 신분은 쓰지 못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해도 되겠소?"

"이미 버리고자 마음먹은 혈통이오."

"좋소. 그럼, 내가 이 섬을 벗어나게 해주고, 살아갈 방도까지 만들어 주겠소. 대신에 10년 동안 내 호위대에서 일을 해주시오."

"호위대? 거기에 사람이 많이 필요한 거요?"

“나를 호위하는 개인적인 일부터, 상단을 호위하는 일도 하게 되오. 늘 사람이 필요하오. 그리고, 호위대가 되면 나라에서 녹이 나오는 갑사의 신분을 가질 수 있을 것이오. 같이 온 이들도 모두 내 호위이며 훈련원의 갑사들이오.”

투르안은 박치산과 호위들을 보았는데, 다들 좋은 갑주를 입었고, 무기도 제대로 장비한 정예로 보였다.

“우리 마을 사람을 다 합치면 200명이 넘는데, 그걸 다 받아줄 수 있소?”

“그것밖에 되지 않소? 난 한 4~500명은 되는 줄 알았소.”

투르안의 말에 원종은 겨우 그것밖에 안 되냐며 걱정 말라고 웃어줬다.

“마을 사람 모두를 받아준다면 하겠소. 이 빌어먹을 섬을 벗어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10년쯤이야. 거기다 제대로 먹고살게 해준다면 그 이상도 해줄 수 이소."

“좋소이다. 그럼, 우선 내 말을 따라주시오..."

***

“아니, 원나라 달자 놈들이 제주에 사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놈들이 훔쳐 간 돼지와 양을 되찾아 오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는 것도 어이가 없네. 현일 형은 이게 말이 되는 거요?"

"참아야지. 지금은 우리가 훈련원의 감사이지만, 훈련원이 완성된 후 초시를 보게 되면9군관이 될 것이니 그때까지는 참아야지."

가장 나이가 많은 심현일은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다른 세 명을 달래었다.

"유자광 어르신이 내리신 명을 우리가 제대로 수행하려면 기분 나쁘더라도 도정(都正)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하네."

심현일은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병조참의 유자광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다른 세 명을 달래었다.

말을 타고 움직이고 있는 이들이 바로 유자광이 수군 훈련원에 보낸 자들이었다.

“휴. 참긴 하겠지만, 이거 원 훔쳐 간 양을 되찾아 오라는 일이나 시키니."

“그것도 달리 생각하게나. 훈련원 건물을 만드는 데 동원되지 않고, 이렇게 말을 타고 밖으로 돌 수 있으니 괜찮다고 말일세. 사실, 우리가 건물 만드는 일에 열심히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심현일의 말에 다른 세 명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건물을 짓는 데도 눈치를 보며 대충 일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건 또 맞습니다. 크헉!”

크게 웃던 한수광의 머리에 뜬금없이 숲에서 날아온 화살이 꽂혔고, 한수광은 짐짝처럼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본래라면 심현일이 이런 한수광을 급히 챙겼겠지만, 그도 이미 날아든 화살에 맞아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4명이 화살에 맞고 황천길을 건너가 버린 것이었다.

숲에서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돛 오름 마을의 장한들이었다.

“몸을 뒤져 돈 되는 것은 다 챙기고, 물러난다. 우리 화살은 그대로 놔둔다."

죽은 이들의 재물과 말은 알뜰하게 챙겼지만 자신들의 표식이 새겨진 화살은 그대로 둔 채 마을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투르안과 원나라 사람들이 살던 마을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고, 그들은 빼앗은 말 네 마리를 가장 큰 집 앞에 묶어 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비워진 마을에 원종의 호위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능숙하게 묶여 있던 말을 되찾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가져온 피를 사방에 뿌려라!"

호위대가 눈에 띄기 쉬운 곳에 준비해온 피를 뿌려대자 피 냄새가 사방에 자욱하게 깔렸다.

그렇게 제주도에서 170여 년간 이어져 오던 원나라의 후손들은 불에 탄 재들과 함께 사라졌다.

***

"이런, 어찌 이런 일을 내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저지른 것이오...”

제주 목사 임영철은 훈련원의 도정(都正)이자 실질적인 책임자인 원종이 가져온 서신에 머리가 아파 왔다.

“제주에 오자마자 이리 난리를 치면 어찌하오. 왜 그들을 다 죽여 버렸소? 이 일을 어찌한다.”

“훈련원의 재산을 강탈하고 조선의 군관들을 먼저 죽였기에 복수를 한 것뿐입니다. 그들의

마을에서 '춘(春)' 낙인이 찍힌 말을 되찾았고, 죽은 갑사들에게 남겨진 화살도 그들의

화살이었습니다. 증거가 이리 명확하지 않습니까.”

"허나 왜 다 죽여버렸냐는 거요."

“목사님은 그대로만 상신해 주시면 됩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책임은 그대가 진다고 해도 이런 일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내 평판은 바닥을 칠 것이 아니오."

“목사의 자리는 그대로 보존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원나라의 후손들을 신경 쓰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흠, 그건 그렇지만, 명나라에서 혹여나 무슨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어서 그러오"

“조보를 아니 보셨습니까? 명의 조열대부(朝列大夫) 좨주(祭酒)직을 받은 사람이 저입니다.”

원종의 호언장담하는 말을 듣곤 임영철도 이 어린 관리의 뒷배가 든든하다 못해 넘친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병환으로 물러난 신숙주의 손녀사위이자 한명회의 외손녀 사위이니 원나라 후손들을 다

죽였다고 해도 아무 일 없을 터였다.

“흠흠. 그럼. 내 있는 그대로 올리도록 하겠소이다.”

***

수군 훈련원의 재산을 강탈하고 갑사를 죽인 원나라 후손들을 불태워 죽였다고 장계가

올라오자, 다들 아직 제주도에 원나라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들을 다 불태워 죽였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오랑캐의 후손을 죽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더구나 병조참의 유자광은 자신이 꽂아 넣은 이들이 원나라 후손들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자

길길이 날뛰었고, 훈련원의 도정인 원종이 100여 명을 불태워 죽여 복수했다고 하자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한다고 떠들어 대었다.

“병조참의는 진정하게. 헌데, 그 원나라 후손들을 제주에 보낸 것이 명나라이니 그게 걸리는군. 사관은 국서들을 확인하여 명에서 원나라인들에 대해 우리에게 문의를 하거나 언급한 일이 있는지를 알아보게.”

사관들은 성종의 명에 명나라와 주고받은 국서와 실록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전조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원의 위순왕 콘츠부카(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자)의 아들 바이바이와 그의 내시 복기를 명에 다시 불러들였고, 이후 다시 제주로 보냈다는 기록이 마지막 기록이옵니다."

"그 이후로는 아예 없는가?"

"네. 전하. 그 이후로는 명에서 연락이나 안부를 물어 오는 것이 아예 없었사옵니다."

“아마도 북원이 멀리 쫓겨서 갔고, 이후 위협이 되지 않으니 명나라에서도 잊어버린 것

같사옵니다."

"그럼 명에서도 시간이 흘러 다들 잊고 있는 존재들이었으니 괜히 다 죽였다고 명에 알려 들출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네 전하. 그냥 묻어두도록 하겠나이다.”

“그렇게 하지. 다음 장계는?"

***

한편 임시로 만들어진 수군 훈련원의 건물에는 갑자기 들어온 사람들로 인해 부산스러웠다.

미리 움직인 원나라 후손들이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즐거워하는 소리였다.

더해서 남녀를 불문하고 긴 머리카락을 잘랐고, 남자들은 수염까지도 자르게 했다.

다른 제주도민들과 그리 깊은 교류를 가지지 않았기에 이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은 거의 없을 터였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기에 이렇게 조치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신체 발부 수지부모'에서는 자유롭구만."

그러고 보니 원종이 조선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소중히 여겨라.'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실제 조선 사람들은 상투를 들기 위해 머리카락도 잘랐고, 수염도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 자르기도 했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남겨주신 것이라고 해도 불편하면 손질하는 것이 당연했다는 말이었다.

다만, 현대인들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란 말을 일제 강점기의 단발령과 함께 배우다 보니, 진짜 조선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살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현대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변장을 위해 머리카락과 눈썹, 수염까지 다 바꾼 이들을 보니 그제야 뛰어난 기마병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수의 기마병이었지만, 이들이 중간 간부가 되어 새로 받아들이는 기마병들을 가르친다면 금세 강병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이렇게 꾸미고 보니 딴 사람 같군. 그럼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고, 새마음 새 뜻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잔치를 열도록 하지. 준비한 말을 잡아라!"

원종은 미리 나이 든 말을 준비해 두었는데, 말을 잡으라는 소리에 투르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대는 아니 단주는 말을 먹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도 없으오? 말고기를 먹으면 3년 동안 부정 탄다는 말 모르오?"

“말고기 먹고 부정 탔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걸 왜 믿겠소? 그저, 고기를 주는 말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소.”

"하하하. 좋소이다. 말고기를 먹고 싶었어도 먹지 못했던 한을 오늘 풀어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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