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71화 (271/327)

271. 제주도의 잊혀진 사람들.

제주 목사 임영철은 제주도에서 키우는 작은 똥 돼지와 달리 크기가 크고 머리와 엉덩이가 검은 금화(金華猪) 돼지를 보곤 군침을 삼켰다.

“돼지가 한 30~40마리 되는 거 같은데, 저거 언제 잡아먹나? 그리고 인분으로 저리 키우는 게 가능한가?"

술을 좋아하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임영철은 돼지고기 맛을 아는지 입맛을 다셨다.

“일단 돼지 종자가 탐라에서 키우는 것과 다릅니다. 명나라에서 들여온 종자라 저리 크게 자랍니다. 먹이로는 도토리를 주로 먹이는데, 제주도에도 상수리나무가 많은 곳이 있습니까? 도토리가 맺히는 나무말입니다.”

"오호! 도토리를 먹여 키우는 것이었군. 도토리라면 동백동산 숲 인근에 많긴 하지만 거긴 습지라서 사람이 살기에는 좋지 않아."

동백동산 숲이라는 곳에 도토리나무가 있기만 해도 다행인데, 습지라고 하니 더 좋았다.

돼지가 좋아하는 것이 먹는 것 다음으로는 진흙목욕이었으니 사람이 살기 힘들더라도 돼지를 키우기에는 좋을 것 같았다.

더구나 맹수가 없는 제주도의 특성상 방목해서 키워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조선의 관료라면 탐라(耽羅)라는 말 대신 제주(濟州)라는 말을 써야 하네. 고려 때

탐라국의 성주(星主)나 왕자(王子)의 작위를 가진 토호들을 태종대왕과 세종대왕이 없애셨는데, 관료들이 다시 탐라라고 부르는 것은 안 될 말이야."

낮술에 취한 듯이 얼굴이 붉었던 임영철은 보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본래 탐라국은 고려 태조 때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탐라국을 이루던 고(高)씨, 양(梁)씨, 부(夫)씨의 세 성씨 왕족들은 성주나 왕자라는 작위를 받아 토호로 있었다.

그러다, 원나라 때 목호들이 들어와 섞이며 제주도는 탐라국 출신과 원나라 출신들이 섞여 한반도 본토와는 다른 성향의 구성민들이 만들어졌었다.

그러다 목호의 난으로 원나라 사람들이 정리되며 힘을 잃었고, 조선이 개창되자 태종대왕이 이들의 힘을 더 뺐다.

성주와 왕자의 작위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변경하며 중앙 관직으로 이들을 보듬어 탐라의 흔적을 지운 것이었다.

그렇게 세종대왕 시절 제주 목사의 제주 장악력이 커지자 좌 우 지관 자리 자체를 없애 버리며 탐라국의 토호들을 지워버린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조선의 관리가 탐라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그간의 태종과 세종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도 있는 시대이니 말을 조심하긴 해야 했다.

“헌데, 이 양과 염소도 키우기 위해 다 데리고 온 것인가?"

임영철은 돼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양이 100여 마리에 염소가 40여 마리가 넘어 보이자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양과 염소의 수를 늘리려면 숲을 없애 개간을 해야 할 거네."

“초지가 부족한 겁니까?"

"맞아. 훈련원이 들어선다는 닭머르 해안을 넘어 동쪽으로 있는 동백동산의 숲을 개척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말을 키우는 데도 빠듯한 사정이라 양과 염소를 키우는 게 힘들 거네."

제주도에서 몇 마리의 말을 키웠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 우왕 5년

(1379년)부터 공양왕(恭讓王)4년(1392년)까지 13년간 고려가 원과 명에 약 3만 필의 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었다.

말의 임신 기간은 대략 340일 정도였으니 2년에 한 번씩 암말에게서 새끼를 받는다고 해도 암말만 최소 6천 마리 이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숙종(肅宗) 28년(1702) 목사 이형상(李衡祥)에 의해 제작된 '탐라순력도'에는 관에서 기르는 말이 9372필이었다고 했으니, 민간에서도 비슷한 숫자를 기른다고 봤을 때 제주도에서

기르는 말은 최소 7천 마리에서 최대 2만 마리까지 예상이 가능했다.

제주 목사였던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는 말 외에도 제주의 인구가 나와 있었는데,

43,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숙종 시기보다 200여 년 전이니 제주도의 인구는 4만 명보다 더 작을 것 같았다.

인구 2명당 말 1마리에 가까운 수치였다.

“훈련원을 세우는 데 목재가 많이 들기에 개간을 하면서 목재도 챙기고 초지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헌데 그쪽 너머에는 주의해야 하는 게 있네.”

“늪지 같은 것 말입니까?"

“자연 지형 같은 게 아니네. 동백동산을 지나 반나절 말로 움직이면 돛 오름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 앞에 있는 다랑쉬 오름과의 움푹한 곳에 원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네."

"네? 원나라 사람들이요? 목호의 난 때 최영 장군에게 모두 죽지 않았습니까?"

원나라가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해 북쪽으로 쫓겨가고 고려 공민왕이 명을 받아들일 때

제주도에 있던 원나라 목호들은 그런 고려의 명을 따르지 못한다고 난을 일으켰었다.

당시 최영 장군이 토벌을 하며 제주도의 원나라 목호들을 다 죽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목호들 '테우리(Teuri 말치기)'는 죽었으나 살아남은 자들도 많았지. 고려 충렬왕 때(1277년)부터 목호의 난이 일어났던 공민왕 때 (1374년)까지 100여 년 넘게 여기가 고향이라고 자라왔던 목호들은 탐라의 세 씨족과 섞여 있었거든.”

"그럼, 자연스레 제주의 사람들과 섞여 들었을 터인데, 지금까지도 그들은 따로 살고 있는

것입니까?"

"목호의 난 이후 그냥 가만히 두었다면 자연스레 섞여서 테우리들도 제주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하지만, 그게 안 되었지."

목호의 난 이후 다른 일이 있었다는 임영철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떠오르는 사건은

없었다.

“목호의 난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 명나라에선 투항했던 원나라의 황족들을 이 제주도로 보내

버렸네.”

“아! 그들의 구심점이 생겨 버린 것이군요."

목호의 난 이후 자연스레 사람들과 섞여 들어 사라질 사람들이었지만, 원나라의 황족들이 나타나 구심점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맞아. 그래서 주의하라는 것이네. 조정에서는 원나라의 황족들이니 꺼림칙하지만, 명나라에서 살라고 보낸 것인 만큼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어.”

사실 명나라가 제주도에 유배 형식으로 원의 황족들을 보낸 것이기에 제주도의 안정을 위해서 그냥 죽이고 돌림병으로 죽었다고 해버려도 명나라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나, 지금 명나라는 만귀비의 황자로 인해 후계구도까지 복잡한 상황이니 그냥 흐지부지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조선이 왜구들과 다른 점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유배를 받아 온 이들이라도 원의 황족이니 그냥 살게 해주는 것이 조선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자네의 양이나 염소를 훔쳐 간다고 해도 내가 나서주기 힘드네. 제주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훈련원의 재산이니 자네가 알아서 해야 할 게야. 그러니 키우더라도 잘 간수하게나."

“설마 원나라의 황족이 훔치기야 하겠습니까?"

"황족이면 뭐하나 먹고 살기 빠듯하면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이지. 하여튼 그들과 일이 생겨도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하게나. 나중에 저 돼지를 잡아먹을 때나 불러주게. 맛나 보이는군. 하하.”

제주 목사 임영철은 머리 아픈 일에는 나서기 싫다며 그대로 관아로 돌아가 버렸다.

훈련원 숙소를 짓는 일은 삼식이와 행수들이 맡아서 하니 원나라의 후예들을 만나보고자 길을 나섰다.

어떤 이들인지 궁금증도 들었지만, 내가 데리고 온 양과 염소를 키우는 데 서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전 몽골이 전 세계를 휘어잡았을 때처럼 기마술이 뛰어나다면 훈련원의 교수로도 초빙하고 싶었다.

현재는 배를 타는 수군 위주의 편성이지만, 기마대에 대한 준비도 어느 정도는 해두어야

규슈지역의 곡창지대를 점령하고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저기 동산이 돛 오름인데, 무슨 일로 돛 오름을 찾는 것인가요?"

거친 베옷을 입고 꼴을 베던 아이들은 갑주를 걸친 호위대의 모습에 눈치를 보며 되물어왔다.

훈련원을 맡게 되며 박치산 권관과 호위대들을 다시 갑사로 임명하여 관군들의 갑주를 입혔기에 겉모습에서부터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여기에 원나라 출신의 후손들이 산다고 들었는데, 알고 있느냐?"

“며, 명나라에서 오신 겁니까?"

아이들은 갑주와 관복을 입은 우리를 보곤 명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뭔가 기다리던 이들이 드디어 왔구나 하는 그런 반응이었다.

"아니다. 조선의 관리들이다."

명나라 사람일 거라고 좋아하던 아이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해졌고, 우릴 자신들의 마을로

이끌었다.

***

“생각과는 좀 다른 거 같습니다.”

박치산의 말대로 원나라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원나라의 황손들이기에 당연히 게르(ger)나 유르트(yurt) 같은 천막을 지어 살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들이 사는 집은 그저 제주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돌로 지어지고 풀로 만든 지붕이 올라간 초가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살림살이도 그렇게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제주 목사는 아는 얼굴인데, 제주 판관이오?"

듬성듬성 난 턱수염을 가진 이가 나왔는데, 원나라 특유의 머리 모양도 없었고, 그저 길게

머리카락을 땋아 있었다.

"닭머르 해안에 들어설 훈련원의 장(長)이오. 헌데, 진짜 원나라의 후손들이 맞는 거요?"

행색으로 사람을 판별하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원나라의 황손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흥! 내가 원 세조의 9대손인 투르안이오."

투르안이라고 이름을 밝힌 자는 집안에서 뭔가를 꺼내 왔는데, 종이 뭉치였다.

명나라에서 받은 서신들 같았는데, 돌돌 말려있는 서신들이 놓여있는 방향도 제각각이라 한자를 모르는 것 같았다.

“믿겠소이다. 오늘 온 이유는 말을 타고, 테우리(Teuri 말치기)일을 할 수 있는 이를 구하려고 온 것이오. 남자가 몇 명이나 있소?"

“테우리? 캬하하 이제 우리도 쓰지 않는 말을 쓰는군. 말을 몇 마리 키우기에 말치기를 구하는 거요?"

“말은 10여 마리지만, 염소가 40마리에 양이 100마리요. 앞으로 말과 소는 더 늘 것이오."

“흥, 그건 두 사람이면 되는 일이군. 10여 명이나 찾아왔기에 기대했는데...”

목동을 두 명 구하러 왔다는 말에 모여들던 사람들도 고개를 돌렸다.

“테트리, 조쿠낙! 너희 둘이 가거라.”

30여 명의 남자들 중에서 투르안에게 호명된 둘은 만세를 부를 것처럼 좋아했다.

"여기 사정이 안 좋은 것이오?"

“보면 모르오? 조선의 관리라고 하면 혹시 명나라나 원나라에 편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소?"

“방법은 있소만, 원나라는 당신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 것 같고, 명나라도 당신들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소이다."

"제길. 그걸 바로 이야기하다니."

투르안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젊은 관리가 쉽게 내뱉은 말에 상처를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이야기 한 것이었으니깐.

투르안은 이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자신들의 현실에 화가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만 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왕에게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소? 조선의 백성으로 살고 싶으니 이 빌어먹을 섬을 떠날 수 있게 이야기를 넣어 보고 싶소."

*

[작가의 말]

실제 원나라에서는 큰 섬을 개간해 초지를 만들었고, 섬이기에 맹수가 없다 보니 일본 침공을 위해 제주도에 왔던 몽골인들은 제주도가 말을 키우기 좋은 낙원과 같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해서 원나라 혜종은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밀릴 때 도망칠 수 있는 행궁을 제주도에 만들라고

지시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가 중원을 점령하자, 투항했던 원나라 황족들의 거처를 고민했는데, 섬이기에

도망치기 어렵고, 명과 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가 지리적 이점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해서 원에서 투항한 원의 위순왕 콘츠부카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자)의 아들 바이바이 (佰伯)와 양왕(王) 바자오르미(원세조의 다섯째 아들 우케치의 후손)의 가속을 제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이후로도 양왕 바자오르미의 자손인 아얀테무르 등도 명에 투항하자 제주도로 보내어 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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