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종실과 혈통. (2)
정인지의 말에 대신들의 머리에 떠오른 미희들의 모습은 조선의 여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우선 다들 피부가 가무잡잡했고, 머리 크기도 조선의 여인들보다 작았다. 머리뿐만 아니라 몸의 골격 자체가 왜소하여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그리고 미희들 옆에 성종의 모습을 대입시켜 태어나는 2세를 생각해 보니 노신인 정인지의 말이 확 와닿았다.
위엄있고 강건해야 하는 제왕의 모습과는 맞지 않게 골격이 얇은 왕자들이 태어날 것 같았다.
태조대왕부터 지금의 성종까지 모두 다 키가 큰 무인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기에 기골에서부터 제왕의 품격이 나타난 것이 조선의 왕들이었다.
허나, 미희들의 몸을 타고 태어나 작은 골격을 가진 왕이 나온다면 이제까지의 그런 품격이 줄어들 것 같아 염려되긴 했다.
성종도 그런 체구의 문제를 생각하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걱정 마십시오. 전례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한명회가 입을 열었다.
“부원군께서는 이국의 피가 섞인 전례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성종은 물론이고 다른 대신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북방의 지역 특성상 여진인들과의 자연스러운 혼혈을 이야기하는 건가 싶었다.
"북방의 여진인들이나 옛 발해의 유민인 거란족과 섞인 그런 이야기가 아니옵니다. 여진이나 거란인들은 사실 우리 조선인과 그 뿌리가 같다고도 볼 수 있기에 이국의 피가 섞인 것이라 하기도 애매하지요. 더구나 전조 때는 대놓고 원나라의 피가 섞이지 않았습니까?”
정인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이 한명회가 받아쳤다.
"그런 자연스러운 혼혈이 아닌, 인위적인 제왕의 혼혈도 전례가 있습니다. 바로 동진의 효무제의 예입니다."
"아아!”
"옳거니!"
대신들은 물론, 성종도 기억이 나서 무릎을 쳤다.
'그래, 후궁의 베개에 질식당해 죽었다고는 하지만, 동진의 효무제 사마요는 그 어미가 검은 피부의 곤륜노라고 했지?'
동진의 사마요.
효무제라 불리는 그는 흑인과의 혼혈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아비인 회계왕(會稽王) 사마욱에게는 본래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는 그 어미와 함께 반란을 꾀해 죽었고, 셋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스물이 넘기 전에 요절을 했다.
해서 42살까지 후사가 없던 사마욱은 관상가에게 후사를 이을 여자를 찾으라는 명을 내렸고, 그렇게 찾은 여자가 왕부에서 방직 일을 하는 곤륜노 여인 이능용이었다.
흔히 곤륜노란 곤륜산맥 너머 피부가 검은 이들을 말하는데, 인도인이라는 말도 있고,
캄보디아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인도까지 넘어온 아프리카의 흑인이라는 말도 전해지는데, 그 자료가 부족해 그저 피부가 검은 곤륜노로 전해질 뿐이었다.
하여튼, 사마욱은 흑인인 곤륜노와의 사이에서 사마요를 낳았고, 흑인과의 혼혈이었음에도 동진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나라의 시조인 칭기즈칸 또한 여러 나라의 여인들을 비로 맞아해 후손을
보았으나, 그 체구가 작았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아비를 닮아 뛰어난 전사였다고 합니다."
“밭이 아니라 씨앗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전례를 보았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예조에서는 소국들의 공주를 받아오는 법도를 정비하라!"
성종은 세상의 모든 여인들을 품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했다.
***
“삼식이 네가 할 일이 많다.”
“네. 오키나와의 왕가와 대만의 왕가에 국서를 전해주고 채비하도록 하겠습니다요."
“그 일 외에도 전하께서는 외국의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신 것 같다. 왜에서도 여자를 구해서 바쳐야 할 것 같으니, 오키나와와 왜에서 미색이 뛰어난 여인이 보이면 데리고 올 수 있도록 하거라.”
더불어 발해방 사람들이 개척하게 되는 북해도와 삼봉도(루스키섬)에는 아이누족도 있었기에 거기의 여자들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전하께서는 아마도 새로운 여인을 구하게 될 때마다 후하게 포상을 하실 거다."
"그렇다면 그렇게 천하절색이 아니라도 괜찮겠네요. 옛날 고사에 죽은 천리마를 바치면 천금을 주었다는 그 고사와 같은 거 아닙니까요?”
"하하하. 그래 맞다. 처음에는 아마 천금매골(千金買骨)과 같을 것이다. 미색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이국의 여인이라 할지라도 큰 포상을 하실 것이다."
"그렇게 소문이 나면 아마 모든 상단들이 새로운 미녀를 바치려고 할 것이니 진짜 예전 진시황의 아방궁처럼 궐에 미녀들이 넘치게 되는 거 아닙니까요? 그러면..."
"어허, 입이 보살이니라. 그런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말 거라. 네가 걱정하는 그것처럼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선은 맡은 바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구나."
"네엡, 국서들을 전달하고 진귀한 미인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요."
사실, 이미 신정이 이국의 미희 4명을 바쳐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었기에 교역에 나선 이들은 다들 미인을 얻기 위해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
제주도로 가기 전에 원종은 사옹원에서 만들어지는 청화백자의 3할만이 춘봉 상단에게 가고 나머지 7할은 내수사와 다른 상단에게 간다는 조건으로 훈련원에 대한 혜택을 더 받아 내었다.
사옹원을 잃을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손에서 멀어지게 되니
씁쓸했다.
대신에 문경에 있는 가마를 청화백자를 만드는 곳으로 하고, 남해에 있는 가마에서는 소뼈로
만드는 본자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원종이나 다른 이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 사옹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어허! 감히 어딜 가려는 게냐? 너희들은 역(役)에 묶인 이들인데 어딜 간단 말이냐!"
“썩 물러서거라!”
원종이 본자기의 비밀이 샐까 두려워 사옹원 입구에 만들어 출입을 관리하던 수호문 앞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소리요? 우린 이미 역을 다 치른 이들이요. 여기 호적을 보시오. 이미 1년 전에 역을 끝낸 사람들이오."
새로이 사옹원 가마를 담당하게 된 정7품관인 참군과 종7품관인 부사정은 그들이 내민 호적을 확인했다.
그리고 모두가 2년 전에 다 역을 끝낸 이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아니, 그럼 역을 다 치르고도 2년이나 여기에 남아 있었다는 말이오? 그게 말이 되오?"
참군 이현동은 여러 역(役)을 관리해온 자였지만, 역을 치르고도 2년이나 남아 고된 일을 계속한 자들은 처음 보았다.
보통은 정해진 역의 일수를 채우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2년이나 남아서 일을 했다고 하니 기묘했다.
“그럼, 다음 역을 맡은 이들은 어디에 있소?"
“우린들 어찌 아오? 우린 역을 치르면서 다음 역을 치를 이들이 오지 않아서 그냥 계속 있었던 것일 뿐이오. 이제는 관리도 바뀌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니 어서 문이나 열어 주시오."
참군 김현동은 사람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곤, 부사정 허근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게
했다.
그러자, 3년 넘는 기간 동안 도자기를 빚는 역을 지어야 할 자들을 아예 불러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의 관리를 개판으로 한 것이었다.
물론, 원종이 사옹원을 책임지게 되며 기술의 습득을 위해 도공들의 대우도 좋게 해주어 다들
자발해서 남은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더는 인원이 필요치 않아 역을 지는 도공들을 부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제 관리하던 춘봉 상단의 사람들이 철수를 하니 도공들도 사옹원을 떠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참군 김현동은 깔끔하게 정리된 호적과 호패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갑사들에게 도공들을 강제로..."
당장 도공들이 없으면 돈이 되는 청화백자를 생산하지 못하니 강제로 도공들을 남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산에서 가죽옷을 입고 활과 창을 든 흉악한 인상의 50여 명이 내려와 도공들과 합류하자 강제로 도공들을 구금하라는 명을 내릴 수가 없었다.
“흉악하게 생긴 네놈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이제까지 사옹원 인근에서 조수 구제를 하던 사냥꾼들입니다. 저희도 이제는 여기에 남을
이유가 없어 떠나고자 하니 어서 문이나 열어 주십쇼. 쩝쩝."
덩치가 커다랗고, 짐승의 고기를 입에 물면서 답하는 놈들을 보니, 강제로 구금하면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참군 김현동은 입구의 문을 열게 했고, 사냥꾼과 도공들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병사 수도 사냥꾼들보다 작았고, 옷과 병장기에 핏물이 배어 피 냄새가 나는 사냥꾼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옹원에 역을 짊어질 도공이 없다는 것이 급하게 보고되었고, 부랴부랴 역을 짊어질 도공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4년 가까이 사옹원에서 도자기를 만들며 기술을 화려하게 꽃피웠던 도공들 대신 끌려온 도공들이 억지로 만든 청화백자의 품질은 조악할 수밖에 없었다.
***
“허허. 다들 사옹원에서 나온 것인가?"
“네. 이제까지 제조님. 아니, 이제는 절제사님의 사람들이 사옹원에서 손을 떼며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마치 예전의 사옹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지자 다들 뿌리치고 나온 것입니다.”
제주도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싣고 있는데, 150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뭔가 했는데, 사옹원의 도공들과 사냥꾼들이었다.
“새로 온 관리들이 쉽게 보내주던가?"
“처음에는 안 보내주려 했는데, 다행히 다들 호적을 새로 만들며 역을 짊어졌다는 확인을 받아 두었기에 보내주었습니다."
“하하하. 이거 서리였던 권항필이가 일을 참 잘해주고 갔구만."
지금은 경상과 붙어 전장과 교환권을 만들고 선단까지 굴리며 짜증 나게 하는 자였지만, 그가 쉽게 쉽게 가자고 만들어준 호적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소 뒷걸음질에 사옹원이란 큰 쥐를 다시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새로 만든 남해의 도자기 가마는 오롯이 내 것이었기에 이들을 데리고 가서 일을 시켜도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볼 수 있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은데, 그게 힘들다면 배라도 타고 싶습니다요."
"도자기 기술자들인 자네들을 왜 다른 일을 시키겠나? 남해에 새로 만든 가마로 다 같이 가세나. 그리고 사냥꾼들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남해에서 조수 구제하며 침입자들을 잡으면 되네. 물론, 배를 타고 싶은 이들은 배를 탈 수 있게 해주겠네."
도공들을 배에 태우면서도 손익 계산이 절로 되었다.
기술자가 없는 사옹원에서 나오는 청화백자는 품질이 우리가 만든 것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단가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고, 고품질을 앞세워 다른 상단의 거래도 망치게 할 수 있었다.
내 손을 떠나갈 수밖에 없어서 포기를 했었는데, 다시 내 손에 들어왔으니 사람들을 사람답게 대우해주고 한 것이 빛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게 그 상인은 사람을 남기라는 그겁니까요?"
"그래, 삼식아. 이제 사람을 남겼으니 사람이 먹을 것을 남겨보자꾸나. 염소와 양은 다 도착을 했느냐?”
“네. 돼지 30마리에 양 100마리, 염소 40마리를 배에 실었습니다."
“그럼 출발하자. 방향을 바꿔서 남해에 들러 도공들을 내려주고, 제주도로 가자꾸나.”
***
이때의 제주도는 제주목이라 불리며 지금의 제주항 인근에 사람들이 몰려 살았는데, 제주목 관아도 그곳에 있었다.
삼식이의 상단과 희재 상단의 배까지 15척의 배에서 사람들과 짐이 내리고 돼지와 염소, 양이 내리자 제주목사인 임영철은 깜짝 놀랐다.
“잡아먹을 짐승을 이리 많이 가져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