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종실과 혈통. (1)
원종은 노사신을 따라온 숙수들이 가져온 불판을 빌렸고, 명나라의 하급 군관 두 명의 투구와 등갑도 빌렸다.
“투구와 등갑이라니... 이걸로 음식을 할 수 있소?"
노사신은 숙수들을 이끌고 온 상황이라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네. 지금 만들려는 음식은 과회(궈쿠이)라고 하는데 전쟁 중에 만들어진 음식입니다.
그래서 이런 투구와 등갑으로 하는 것이옵니다.”
“솥, 기름통 과(銅)자에 투구 회(盜)자를 쓰는 걸 보니 투구를 이용해서 튀기거나 굽는 거겠구려.”
“맞습니다. 그 이름의 유래를 제대로 보여드리기 위해 투구와 등갑으로 다 하고 싶지만, 요즘의 투구들은 통찌 쇠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투구를 솥 삼아 쓸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 그래도 아주 오래된 전쟁 중에 만들어진 음식이라니 기대가 되는군.”
노사신은 데리고 온 숙수들이 자세히 볼 수 있게 가까이 불렀는데, 다들 내 명성을 알기에 눈에 불을 켜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원종은 투구를 물에 씻곤 투구 안에 밀가루와 소금, 설탕, 달걀을 넣었고, 물과 들기름을 1:1로 넣어 반죽을 했다.
군관은 자신이 쓰고 다녀야 하는 투구에서 반죽을 하는 것이 화가 났지만 계급이 깡패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갑옷 등갑을 펼쳐선 기름을 바르고, 반죽을 떼어내 등갑에서 치대었다.
찰기가 생기자 밀대로 밀어야 했는데, 숙수들이 가져온 짐에는 나무 밀대가 없었다.
“그 나무 지팡이 좀 빌려주시오. 한 뼘 길이만 자르면 되오."
원종은 사신단을 따라온 짐꾼이 가지고 있는 굵은 나무 지팡이를 빌려서는 갑옷을 빼앗긴
군관에게 한 뼘 길이로 자르도록 시켰다.
"제가 할 말은 아닌데, 나무 밀대가 너무 짧은 것 아닙니까?"
군관도 밀대로 밀어서 만드는 음식을 해본 건지 되물어 왔다.
“아니네. 이 음식에는 딱 한 뼘 길이의 밀대면 되네."
원종은 군관이 잘라낸 짧은 밀대로 반죽을 길게 늘였는데, 반죽의 폭은 손가락 세 마디 길이로 10cm 정도였지만 반죽의 길이는 1척(30cm)이나 되었다.
그렇게 얇게 민 반죽 위에 숙수들이 가져온 참깨를 뿌리고 반죽을 김밥 말듯이 돌돌 말았다.
그리고, 군관이 가지고 있던 육포도 가루로 만들어 뿌렸고, 이제 올라오기 시작하는 쑥도 캐서 반죽에 올려 말았다.
김밥처럼 돌돌 말린 반죽들을 보니 페스츄리 (pastry)빵 생지처럼 보였다.
사실 이대로 오븐에 구우면 투박하긴 해도 페스츄리 빵처럼 여러 겹의 층이 생긴 빵이 될 터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 언제 오븐을 만들어 굽고 하겠는가. 진(陣) 중에서 현실적으로 만들어 먹기에는 굽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그래서 돌돌 말린 과회 반죽을 세로로 세워 손으로 꾹 눌러 호떡 모양처럼 굽기 좋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이 투구와 등갑도 통짜 쇠로 만들었기에 투구에 기름을 넣어 튀겨 내거나, 등갑을 불에 올려 등갑 위에서 과회를 구워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투구도 등갑도 통짜 쇠로 만들지 않기에 일반 불판에서 구워야 합니다.”
불판에 들기름을 듬뿍 뿌리고는 튀기듯이 과회를 구워 냈는데,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먹어도 충분히 먹을 만하겠지만, 튀겨낸 후 오븐에서 기름을 빼듯 한 번 더 구워주면
바삭거리는 질감이 살아나 참으로 맛있기 때문이었다.
투구만 통짜 쇠로 되었다면 투구를 겹치고 그 안쪽으로 불을 피워 간이 오븐을 만들 수도 있었을 터였지만, 통짜 쇠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대신에 겉면에 물과 섞은 간장을 살짝씩 발라주었고, 간장 대신 설탕을 겉에 뿌려서 내주기도 했다.
“킁킁, 튀겨진 기름이 간장과 섞여서 그런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는군.”
아직 뜨거운 과회를 종이에 싸서 노사신은 한입 베어 물었다.
여러 겹으로 돌돌 말린 모습을 눈으로 보고 먹어서 그런 건지 그 겹과 겹 사이에 있던 참깨와 쑥, 육포의 맛이 느껴져서 다채로운 맛이 났다.
간장을 발라 먹을 때는 마치 밥을 대신해 먹는 끼니의 느낌이 났고, 설탕을 발라 먹었을 때는 식사 후 입가심으로 먹었던 가수저라(카스테라) 같은 느낌이 났다.
“왜 자네가 원행 중에 먹기 좋은 음식이라고 한 줄 알겠군. 만드는 것이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주 좋구만. 건번처럼 질리지는 않겠어."
노사신 외에도 명나라의 관리들도 먹어보더니 건번보다 이 과회가 더 좋다며 원행 중에 몇 번이고 먹어도 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기름에 튀기듯 구우니 한 번 대량으로 만들면 몇날 며칠을 먹을 수도 있으니 확실히 진(陣)
중에서 만든 음식답군."
“역시, 좨주(祭酒)직 벼슬을 받은 것이 그냥 받은 게 아니구만."
"과찬입니다. 사실 이 과회에는 두장(또우장)이라 불리는 두유를 같이 마시면 더 좋습니다. 다만, 원행을 하면서 두장을 만들기가 쉽지 않으니, 제대로 솥이 있는 곳에 도착하면 두유를 만들어서 과회를 같이 먹어보십시오."
중국에서는 한국의 꽈배기같이 기름에 튀긴 유조(요우티아오)를 두장(두유 또는 또우장)과
먹는 것이 흔한 아침 식사였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유조 대신 고기 조각이 든 과회를 두유와 먹는 사람도 많았는데, 거의 카스테라 빵과 우유의 조합처럼 모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두장(두유)이라면 약이나 마찬가지이니 노곤한 원행 길에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
명의 관리들은 두유를 같이 먹으란 말을 마치 보약을 같이 먹으라는 말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아직까지 콩이 다른 작물에 비해 비싼 이유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이유도 있었다.
두유가 중국 전역에 알려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인데, 당시 한 고조 유방(劉邦)의 손자인 유안이 회남왕으로 봉해져 어머니와 함께 회남으로 옮겨갔다.
지금도 중국의 서안(장안)에서 회하(淮河) 이남인 회남으로 가는 것이 힘든데, 당시의 긴 여행을 그의 어머니가 버티지 못하고 병이 들어버렸다.
유안은 편찮으신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회남에서 가장 좋은 콩을 구해 갈아 끓여 그 국물을 어머니께 매일 올렸다.
그 정성이 통한 것인지 어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이 사연이 천하에 알려져 콩으로 만든 두장(두유)은 마치 보약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약선요리로 만귀비님의 총애를 받는 이유가 있구만. 어서 북경으로 오게나. 아니지, 배를 타고 간다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겠군.”
“네. 저는 배를 타고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지 않을 북경이었지만, 입으로는 간다고 해야 했다.
더해서 노사신이 데리고 가는 숙수들에게 과회를 튀기듯이 구운 후 오븐에서 기름을 빼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두유와 함께 내어 먹을 때 견과류를 올려내는 법도 알려주었다.
고래들의 싸움에서 새우인 숙수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
"우리 조선이 명나라를 상국으로 여기듯이 대만 국은 우리 조선을 상국으로 여기며 따르고
있습니다."
명의 사신이 떠났기에 원종이 대만의 일을 조정에서 언급하며 국서를 경연에 올렸다.
"대만 국은 우리 조선을 종주국으로 여기며 대만 왕가의 성씨를 내려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기쁘구나. 일전에 왔던 대만 국의 왕자가 조선의 부흥을 보고 제대로 감명을 받아
섬기기로 한 것이구나."
성종은 명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며 약소국인 조선의 상황에 울화통이 터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대로 조선이 명나라처럼 종주국의 입장이 되니 기분이 좋았다.
“과인은 대만의 왕가에 이(李)씨 성씨를 내려주고 싶은데 어떤가? 큰집과 작은집처럼 같은 성을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불가하옵니다. 당장은 같은 성씨를 내려주어 대접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도 큰집,
작은집으로 지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사옵니다."
“맞사옵니다. 저 바다 건너 왜를 보십시오. 옛 백제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하던 자들이 고려를
지나며 이제는 그 뿌리를 잊고 왜구가 되어 노략질하고 있지 안 사 옵니까? 섬에 갇혀 사는 족속들은 그 뿌리를 잊기 쉬우니 대만 국이라고 해도 이씨 성씨를 내려주는 것은 아니 되옵니다."
신하들은 같은 이 씨를 내려주면 안 된다고 막았고, 서거정은 훗날 오히려 대만이 커지게 되면 그 반대로 자기들이 큰집이라고 우길 수 있다고 이야길 하자 성종은 시무룩해졌다.
'시간이 흘러 대만이 커져 큰집을 자처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고 하지만, 우리 조선도 계속 커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우리 조선은 더 크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성종은 속으로 생각한 말을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신하들의 말속에 은연히 조선의 한계를 정해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하, 종주국인 조선과 섬기는 대만이 짝을 이룬다는 의미로 짝 대(對) 성씨를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짝 대(對) 자라... 조선과 대만이 짝을 이룬다는 말이니 의미가 있군. 부원군은 어찌 생각하오?"
성종은 이제까지 아무 말 없는 한명회에게 물었는데, 한명회는 그저 좋다고 말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냥 방관하는 눈빛이었다.
딸인 공혜왕후가 아프다 보니 만사가 귀찮고 흥미가 없는 것이었다.
“짝을 이룬다는 의미를 부원군도 좋다고 하니 짝 대(對)를 내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아예 성씨의 의미대로 대만의 혈통에서 알맞은 딸이 난다면 후궁으로 들이는 법도도 만드는 것이 어떻겠소?"
대만 왕가의 성씨를 정하는 일에서 짝을 이룬다는 의미를 지닌 '대'씨를 정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후궁을 들인다는 법도까지 쭉쭉 나아가자 대신들은 수군거릴 수밖에 없었다.
원종이 보기에도 성종이 대만의 여자를 후궁으로 들이고 싶어 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게 보자 다르게 판단이 되었다.
'아니다. 지금 성종의 말은 개인의 욕심을 위한 것이지만, 이것은 크게 보면 이득이 큰 정책이다.'
성종의 색욕을 빼고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좋은 정책이 없을 것 같았다.
조선 왕가의 법도로서 대만 왕가의 딸을 조선의 후궁으로 들인다는 것을 정해두면 대만으로서는 왕비 가문으로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 이득이었고, 훗날 대만의 피가 섞인 아이가 조선의 왕이 된다면 조선과 대만을 합병하는 것에도 큰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대만 왕가에 딸이 없으니 당장 닥칠 문제도 없을 터였다.
“대만을 직접 다녀온 소신은 대 찬성이옵니다. 거리가 멀어 조선과 대만의 동질성을 만들기가
힘이 드온데, 혈연으로 묶이게 된다면 이득이 많옵니다. 전조인 고려 때처럼 아예 대만 국의
왕자에게 정비로 조선의 종친을 보내는 것도 저는 주청을 드리옵니다."
원나라가 공주를 고려의 왕과 혼인시켰듯이 주도권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혼인정책이 최고의 전략이었다.
조정의 대신들도 오랑캐와 같은 남국의 이족에게 종실의 공주를 보내는 것이 찝찝하긴 했으나, 국익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좋은 정책인 것 같다고 내 의견에 동조했다.
“좋군! 전 절제사의 말대로 하도록 하겠다. 예조에서는 종실의 공주를 정비로 보내는 것과 대만 왕가의 공주를 후비로 들이는 것에 대한 예법을 정리하라. 그리고, 남국의 여러 나라의 왕가들에게 정식으로 입궐하라고 상단 상선들을 통해 알리도록 하라."
새로운 여자들을 법도에 따라 들일 수 있게 된 성종은 기분이 좋은지 남국의 소국까지도 이런
법도를 확대하라고 종용했다.
"소신은 반대하옵니다! 대만의 공주를 들여오게 되더라도 방계의 종친과 혼인을 시켜야 하옵니다."
노신인 정인지가 반대를 했다.
"전하께서 이번에 들이신 이국 출신의 미희들을 보니 체구가 작았사옵니다. 태조대왕과 전하의 큰 체구가 이국의 핏줄을 타고 작아질까 염려스럽사옵니다."
정인지의 말에 그제야 대란 대신들도 이국에서 온 미희들의 특징이 떠올랐다.
[작가의 말]
페스츄리처럼 여러 겹이 있는 과회 (궈쿠이)는 다른 유래도 있습니다.
힘들게 딸이 낳은 외손자가 미월 (弥月 한달)을 넘기자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반죽을 돌돌 말아 구워 만들었다는 유래입니다.
사실 어느 유래가 맞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