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밥은 잘 먹어 놓고...
“맞네. 말로만 보면 나시고랭을 밥 튀김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럴 때는 볶는 것이라고 봐야 하네. 즉, 볶음밥이지."
숙수들은 새로운 음식이라고 받아쓰기 바빴다.
그리고 대신들은 은근슬쩍 눈치를 보더니 다가왔다.
“상선. 전하께서는 이 나시고랭을 만드는 걸 보러 오지 않으시는가?”
“네 전하께서는 더는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 그럼 잘되었군. 전 제조! 그 밥 튀김이라는 나시고랭을 한 번에 많이 하면 안 되겠나?
한꺼번에 많이 해서 나누는 거로 말이야. 지금 아얌고랭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게 말이야. 가능한가?"
"그것이..."
아무리 임금이 먹지 않는다지만, 미희들이 먹을 밥을 하며 자기들 것도 같이 해달라는 말은 선을 넘은 말이었다.
조선이 사대부들의 나라라곤 하지만, 이건 예법에 어긋난다고 뭐라고 하려 했지만, 조리법을 생각해보니 이게 또 나시고랭의 전통적인 조리 방법과 딱 맞아떨어지기는 했다.
본래 한 번 볶은 밥을 다시 볶아 먹는 것이 나시고랭의 원류였는지라 업장에서는 대량의 밥을 기본양념으로 한 번 볶고, 그걸 다시 소분해서 볶아 내는 것이 기본 조리법이긴 했다.
"흐음. 이 나시고랭이란 음식은 한두 명이 먹기 위해 소량 조리하는 것보다 대량으로 조리해서 여러 취향에 맞게 다시 볶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긴 합니다. 해서 그 전통적인 방법으로 조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에 조리하는 것이 대신들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상선에게 말로 어필했다.
원종은 우선 안남미로 밥을 안치며 수라간에 보관되어 있던 말린 새우를 절구로 찧어 가루로 만들었다.
나시고랭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케찹 마니스(Kecap manis)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케찹 마니스는 우리가 아는 토마토 케찹과는 다른 소스인데, 발효시킨 대두콩에 향신료와 설탕을 넣어 뻑뻑하게 만든 간장이었다.
계피와 육두구, 정향이 들어갔고, 발효를 거쳐 단맛을 만들어내기에 흔한 간장처럼 보이지만, 짜지 않은 특이한 간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발효된 케찹 마니스를 지금 구할 수가 없기에 씨간장에 계피, 육두구, 정향 가루를 넣고, 감칠맛과 농도를 맞추기 위해 말린 새우 카루와 설탕을 넣어 비슷한 맛을 만들어내었다.
케찹 마니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트라시(trassi)라는 해산물 장(醬)인데, 새우와 해산물을 발효시켜 만드는 구릿구릿한 냄새가 나는 장(醬)이었다.
이것도 지금 당장 구하지 못하니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묵은 새우젓갈을 물에 씻어 짠맛을 제거하곤, 오래 묵어 곰팡이가 핀 된장과 버무렸다.
여기에도 말린 새우 루를 넣어 점도와 감칠맛을 조절하니 얼핏 비슷한 맛은 되었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나시고랭 소스를 만들었기에 본격적으로 조리를 시작했다.
대야와 같이 평평하고 얇게 만든 큰 냄비를 가져와 불을 확인해서 조절할 수 있는 화덕에 냄비를 올렸다.
먼저, 코코넛 기름에 케찹 마니스와 트라시를 넣어 볶았다. 화력이 좋다 보니 금세 갈색으로 변했고, 얇은 냄비 바닥에 은근슬쩍 눌어붙기 시작했다.
수라간 숙수들이 잘게 썰어둔 파와 양파, 당근을 넣었고 가장 빨리 익는 양파가 익어가자 안쳐 두었던 안남미를 세 주걱 퍼서 냄비에 넣었다.
"으응? 한 번에 많이 한다고 하지 않았나?”
성종이 없으니 가까이 와서 보고 있던 서거정이 계속 참견을 했다.
“씨밥..."
"응? 뭐라고?"
"이것이 씨밥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소량으로 씨앗을 뿌리듯이 밥을 넣어 볶는다는 겁니다.”
"아아, 그렇구만. 난 또 다른 속된 말인지 알았지. 하하하.”
씨발, 아니 씨밥이 볶아지며 마이야르 반응으로 갈색이 되자 계란을 10개 까 넣고는 밥과 계속 볶았다.
코코넛 기름이 솥에 코팅이 되어 있었지만, 계란이 익어가며 솥 바닥에 눌어붙기 시작했고, 그런 눌어붙은 것을 나무 주적으로 계속 긁어서 떼주며 볶는 작업을 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고 밥을 볶아 먹을 때 불판에 눌어붙은 볶음밥이 유달리 맛있듯이 나시고랭이 맛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눌어붙으며 볶는 조리법 때문이었다.
사실, 쌀알 전체에 아미노산 환원당의 화학반응인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기에 그냥 간장, 액젓만 넣고 볶아도 맛이 있었다.
거기에 코코넛 기름의 고소함과 해산물이 베이스가 된 산미 깊은 소스, 계란의 단백질, 갖은 야채가 들어가니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 나시고랭이었다.
씨밥이 완전히 볶아진 것 같자 다시 안남미로 지은 밥을 다섯 주걱을 넣어서 볶았다.
새로 들어간 밥도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키며 갈색으로 볶아지면 다시 추가로 밥을 퍼 넣어
눌어붙는 바닥을 뒤집으며 볶았다.
계속 이렇게 마이야르 반응을 주며 볶자 대야 같은 냄비 솥이 가득하게 밥으로 들어찼고 원종은 그 냄비를 들어 옆으로 빼 두었다.
"저걸 먹는 게 아닌가?"
“먹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닙니다. 그전에 줄을 서십시오.
닭고기가 들어가는 나시고랭과 해산물이 들어가는 나시고랭, 그리고, 염소 고기가 들어가는 나시고랭으로 줄을 서십시오."
원종의 말에 다들 뭘 먹어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염소가 정력에 좋다는 생각에 염소 고기가 들어가는 줄에 사람들이 몰렸고, 해산물이 들어가는 나시고랭에는 가장 작은 인원이 줄을 섰다.
원종은 다른 숙수들 세 명에게 냄비와 주걱을 잡게 했는데, 각각 닭고기와 해산물, 염소 고기를 기름에 볶게 했고, 케찹 마니스와 트리시를 넣어 맛을 만들었다.
이후 먼저 볶아둔 밥을 넣어 다시 볶게 했는데, 그렇게 세 가지의 나시고랭이 만들어졌다.
본래 이 조리법은 더운 남국에서 주로 하는 조리법인데, 더운 날씨상 매번 계속 새로운 밥을 볶는게 힘들다 보니 미리 대량으로 밥을 볶아두고, 주문에 따라 추가된 것만 빠르게 볶아서 섞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두 번을 볶이며 마이야르 반응을 하다 보니 나시고랭이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나시고랭을 상선에게 가져가도록 했는데, 상선은 곤란해했다.
"전 제조. 이러면 곤란하외다. 미희분은 네 분이시오. 세 가지만 준다면 문제가 생기오."
상선의 말에 무슨 맛을 더 해줄까 고민하다 기름으로 튀기듯이 계란 프라이를 하나 했고, 가지에 밀가루를 묻혀 튀겨 내었다.
기본 볶음밥에 가지 튀김과 계란 프라이를 올려내자 다른 세 가지 나시고랭에 밀리지 않는
겉모습은 되었다.
“이렇게 네 가지이지만, 또 전하께서 보시고 동하실 수 있으니 이 네 가지를 다 섞어 볶은 것도 하나 올리리다.”
그렇게 총 5가지 나시고랭을 상선이 들고 갔고, 대신들은 숙수들이 볶아 내는 세 가지 나시고랭을 맛보며 서로 바꿔서 먹어본다고 난리였다.
“아얌고랭이 닭볶음이라고 했는데, 볶아진 닭고기가 들어가 있으니 그럼 이건
아얌나시고랭인가?"
"그렇게 치면 이 둘을 합치면 염소아얌나시고랭인가?"
"아니 그냥 이름만 다 붙이면 되는 게 아니라니까. 이건 그냥 나시고랭에 고명으로 닭고기나 염소 고기가 올라간 거라고 봐야지.”
"흠. 하긴 그렇구먼. 그런데 기름에 볶았음에도 뻑뻑하거나 느글거리지 않는군. 저 새우를 갈아 넣은 양념장만 있으면 집에서도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맛있게 즐기자 숙수들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먹어보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원종은 남은 코코넛 기름과 빻아두었던 새우 가루를 활용할 요량으로 밀가루와 계란, 소금으로 반죽을 했다.
반죽에 새우 가루를 다 털어 넣었고, 밀대로 반죽을 밀어 얇게 만든 후 술잔으로 찍어 눌러 둥글게 반죽을 뜯어내었다.
“본래 이 떼어낸 반죽을 바짝 말려서 써야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그냥 기름에 튀기겠네."
달궈진 코코넛 기름에 들어간 새우 반죽은 파사삭거리면서 2배로 부풀어 올랐다.
“바짝 말려서 튀기면 그 크기가 4~5배로 커지네."
뽀얗게 흰색으로 튀겨진 반죽을 원종이 먹었는데, 반죽 그대로 튀겨 바싹한 맛은 덜했지만, 분명 새우 맛이 나는 새우 칩이었다.
말려서 튀긴다면 현대에서 먹어보았던 알 새우 칩 맛이 재현될 것 같았다.
그리고, 둥글게 뜯어내고 남은 반죽은 다시 뭉쳐서 칼로 얇게 썰어 튀겼는데, 싱거운 새우깡 맛이 났다.
튀겨진 새우깡에 소금을 쳐서 맛을 보니 시원한 맥주가 떠오르는 안주의 맛이었다.
동남아에서 뭘 먹을 때마다 마셨던 타이거 맥주 생각에, 보리에 여유가 생기면 바로 맥주부터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 이 튀겨진 새우 반죽은 너무 맛있습니다. 단무지와 먹으니 배가 불러도 그냥 술술
먹어집니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숙수들도 새우칩과 새우깡을 먹었는데, 다들 맛있다고 감탄했다.
“오이를 썰어 만드는 초절임과 먹어도 맛있을 거네. 전하께서 이제 나시고랭을 만들어 올리라 하면 이 새우칩과 새우깡도 같이 튀겨서 올리도록 하게나. 물론, 다음에는 바짝 말린 다음에 튀겨야 할 게야."
"넵. 명심하겠습니다."
새우칩과 새우깡을 숙수들에게 알려주며 자리를 뜨려는데 멀리서 성종이 오고 있었다.
"보시오. 여기에 어디에 이국의 사람이 있소? 이 나시고랭을 조리한 자는 조선 사람이오. 전 제조 이리 오게나."
성종은 미희들을 모두 데리고 왔는데, 성종의 말처럼 진짜 자기들과 같은 남국의 사람이 없는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지짜 조선 사람이 이걸 했다니 놀라워..."
미희들은 그래도 몇 개월 동안 말을 배웠는지 어눌하긴 했지만 분명 조선말을 썼다.
그리고, 미리 튀겨둔 새우깡과 새우칩을 보더니 이것도 고향에서 먹었다며 좋아했는데, 그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왜 성종이 미희들에게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뭔가 얽매이지 않는 그런 행동이 있었기에 사대부 집안에서 엄하게 교육받은 여인들이 가지지 못한 발랄함이 있었다.
그런 모습에 성종이 반한 것 같았다.물론, 미희들이 다들 가슴이 크긴 했다. 흠흠.
미희들의 호평에 성종도 기뻐서 내게 포상을 내리겠다고 했는데, 사실 내가 가진 것이 많기에 뭘 줘야 할지를 고민할 정도였다.
“전하. 전 제조의 재주가 많으니 그 재주를 쓸 수 있는 벼슬을 내려주시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맞사옵니다. 전 제조를 승차시켜야 하옵니다.”
"하긴. 지금의 제조 자리가 좀 그렇긴 하지. 내일 경연에서 논해보고 전 제조에게 알맞은 직을 고민해 보도록 하겠다.”
성종의 말에 다른 대신들이나 숙수들이 승차하게 된 것을 축하해 줬는데, 과연 요리를 하는 일에 지금 자리보다 맞는 자리가 있는지 궁금했다.
***
"이쪽이네. 어서 오게."
대충 숙수들에게 더 가르쳐 주고 궐을 빠져나가려는데, 처숙부인 좌승지 신정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승정원의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처숙부님 때문에 처조부님께 야단을 맞았었습니다."
"하하하. 그야 당연하지. 내가 부탁한 미녀들을 이리 잘 구해올지는 아무도 몰랐거든. 그저 전하의 유희 상대나 되어 드리면 된다 여겼는데, 이리 빠져드실지는 몰랐지. 그건 그렇고, 내가 정말 힘을
쓴다고 힘들었네.”
“힘을 쓰셨다구요? 저를 위해서요?"
“그래. 내가 자네의 사옹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른 승지들과 험악하게 입씨름을 하고 오는 길이네. 자네는 정말 내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야."
"네? 사옹원을요?"
"그래. 자네가 사옹원을 책임지고 있는 제조이지 않은가. 다들 사옹원에서 나오는 청화백자 때문에 눈에 불이 들어와 있다네."
그제야 원종은 아차 싶었고, 대신들이 자신을 승차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 것이 괜히 괘씸하게 느껴졌다.
“아니 밥은 잘 얻어먹어 놓고, 이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