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말뚝 권관. >
사실 원종과 삼식이가 향하는 회령의 회령개시(會寧開市)는 앞으로 몇백 년 후에나 생기게 되는 시장이었다.
본래라면 청나라가 들어서고 명나라와 다툴 때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의 강권으로 생기게 되는 시장의 이름이 회령개시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한반도의 동북 끝인 회령과 경원을 위시한 두만강 유역에는 조선인과 여진인들의 마을과 부락이 있었고, 교역과 분쟁이 늘 함께 일어나는 곳이었다.
특히 고려 시대 윤관이 9성을 만들어 여진인들을 몰아내었으나, 동북방에 치우친 위치 탓에 이주민이 없어 결국 9성을 여진인들에게 돌려주면서 동북방의 혼란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 여진인에 대한 영향력이 있던 태조가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고, 태종이 도호부(都護府 정복한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변경에 설치했던 군사적 성격의 행정 기구)를 만들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호부의 앞에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가을이라 아직 얼지 않은 두만강을 배로 거슬러 올라갔는데 대운선은 올라가지 못해 한선 여덟 척만이 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었다.
“되련님. 이곳 사람들은 가죽 모자에 가죽 두루마리를 입었는뎁쇼.”
“그러게. 이곳에는 아직도 나이기온이 들어오지 않았나 보구나. 이거 의외로 나이기온이 장사가 되겠는걸.”
도호부 인근의 사람들은 조선인이나 여진인이나 상관없이 다들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도호부의 하급 무관인 권관에게 나이기온 옷을 아냐고 물으니 알고는 있다고 했다.
“한양에서 나이기온을 입어는 보았는데, 이곳으로 발령이 나자 그냥 두고 왔소이다. 닭털이나 오리털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이곳엔 닭이나 오리가 잘 없소이다. 그저 있는 건 개나 토끼, 오소리뿐이오.”
“그렇군요. 그럼, 여기에서 장사를 하려면 어디서 허락을 받으면 됩니까?”
“그런 허락 같은 것은 받을 필요가 없소이다. 그냥 난장을 펴면 되오. 헌데, 이렇게 배를 타고 온 상인이 정말 오랜만에 오는 것인데. 동래의 내상들이오?”
권관의 이야길 듣고 보니 이제까지 이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상인들이 동래의 내상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에게 배를 빼앗긴 동래 내상 박영철이 이곳까지 와서 거래를 했던 것 같았는데, 배를 빼앗긴 이후로는 온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양에서 온 춘봉 상단이오. 앞으로는 못해도 1년에 2~3번은 올 것이오.”
“그럼, 혹시 한양으로 돌아갈 때 내 편지 좀 전해주면 아니 되겠소?”
“뭐, 한양에 편지만 전해주는 거라면야 어렵지 않소이다.”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알겠다고 했는데, 이게 소문이 났는지 도호부 내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동래 내상이 배가 없어 찾아오지 않자 집안에 연락을 제대로 못 했던 것이었다.
대부분이 하삼도와 경기도에서 온 이들이었는데, 군역으로 머나먼 곳으로 오다 보니 한자를 아는 하급 권관들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미리 써둔 것이었다.
“진기야. 네가 맡아서 일을 좀 해줘야겠구나.”
원종은 배다른 동생인 진기에게 도호부 사람들의 편지를 접수하게 했는데, 아예 이 편지를 배달하는 우정(郵政)사업을 따로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식이가 움직이는 14척의 한 선에 동래 지점의 희재가 운영하는 배가 4대, 벽란도와 한양에서 운영하는 게 2대였으니 뱃길로 잇는 우정사업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항구에서 내륙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상단과 거래하는 보부상을 통해 전해주면 되는 것이니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우정사업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보부상이나 그 방향으로 가는 이들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전달해 주게 하고, 편지를 받으면 얼마의 여비나 먹을 것을 주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수익이 크진 않더라도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리고, 편지와 물건을 보내주는 우정사업을 춘봉 상단에서 접수한다고 하면 상단으로 손님을 모객하는 효과도 있을 터였다.
더구나, 각 지역마다 편지를 전해주는 가격을 우표처럼 교환권으로 정해버리면 자연스레 전국으로 교환권 사용도 알려질 터였다.
사업적으로 충분히 유지가 가능하고 상단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진기에게 편지를 접수할 때도 양식을 만들어 주었다.
현대 택배 양식으로 보내는 사람과 주소, 받는 사람과 받는 주소를 쓰게 만들었고, 선불 착불을 구분하게 하여 겉면에 도장을 찍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물론, 주소라고 해봐야 경상도 문경현 윗마을 큰 바위 옆 막청이 집 같은 주소다 보니 정확할 수는 없었다.
원종은 북방에서 힘들게 군역을 치루는 이들이었기에 첫 편지는 무료로 다 보내주기로 했고, 각 지역 상단으로 보내고 하는 원가 계산이 끝나면 그때부터 값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그 알약은 무슨 알약이오?”
진기가 편지를 접수 받는 옆에 상단의 난장이 깔렸는데, 도호부의 병사들이 난장에 관심을 가졌다.
“방설환(防泄丸)이라고 하오. 급한 설사를 막아주고, 배앓이를 그치게 만들어 주오.”
“오! 그것도 내 한번 들어보았소이다. 여름에 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들은 이 방설환이 특효라고 들었소. 족제비 털을 줄 테니 값에 맞게 약을 주시오.”
방설환은 아궁이나 굴뚝 안쪽에 오랫동안 그을음이 눌어붙어 만들어지는 ‘백초상’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약이었는데, 한번 아궁이에서 채취를 하면 몇 년 후에나 다시 채취할 수 있는 재료였다.
그래서 한번 만들고 난 이후 그 재료 수급이 힘들어 대량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여러 군 마마의 제염권을 인수하며 그 소금을 구워내던 오래된 아궁이에서 백초상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다.
해서 교역 물품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방설환을 만들 수 있었고, 회령으로 오며 챙겨 온 것이었다.
병사들은 겨울이 오면 배앓이를 잘 하지 않는데도, 다들 한 번씩 방설환을 들어보았다며 숨겨두었던 동물 가죽을 꺼내 방설환을 구매해갔다.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본 여진인들까지 방설환을 가죽과 교환해 갔고, 양초와 나이기온 같은 고급 물품은 사향과 우황, 황명(소가죽으로 만든 아교)을 가져와 물물교환을 해갔다.
여진 말을 하는 귀화인 김고도개가 있다 보니 물물교환 소통도 나름대로 수월했다.
며칠이 지나자 인근 여진 부락에도 우리가 왔다는 것이 소문이 났는지 인삼과 호랑이 가죽, 바다표범 가죽 등등 수십 마리의 가죽을 싸 들고 오기 시작했다.
대운선에 실려있는 물건도 필요해 한선 4척이 두만강을 두 번이나 왕복하며 화물을 날랐다.
예로부터 거란과 여진인들은 인삼이나 호피 같은 가죽으로 곡식을 구했는데, 배를 여덟 척이나 가져온 상인은 처음이라며 싣고 오는 물량이 많다며 환영해 주었다.
그들의 부락에도 초대를 받아 물물교환을 했고, 정기적인 교역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장사를 한다고, 소기의 목적 중 하나인 좋은 장수를 구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제조의 벼슬과 병마 절제사라는 신분을 밝힐 수도 없었기에 병부를 보고 누가 무과 급제자고 누가 병사들을 이끌고 나서서 공을 세우고 했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되련님 쉽게 가시지요. 도호부에서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하급 권관이 누구인지 물어보고 그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뇨.”
“가장 오랫동안 있었지만, 아부 능력만 있고, 병사들을 이끌 줄 모르면 어떻게 되겠느냐.”
“가장 오래 있으면서 살아 있다면 능력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뇨? 그리고, 병사들에게 가장 좋은 권관이 누구냐고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오호, 그러면 가장 능력 있는 이를 알 수 있겠구나.”
“그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뇨. 병사들이 가장 좋다고 하는 권관은 아마도 자신들에게 별로 뭐라고 하지 않는 권관일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만 피하면 되는 것입니다뇨.”
“오호!”
삼식이의 말을 듣고 보니 취사병으로 있었던 때가 떠올랐다.
FM대로 일을 시키면 곱창 장교라고 싫어했고, 대충 술렁술렁 시키면 일 안 시킨다고 좋은 장교라고 병사들은 이야길 했었다.
그런 경우까지 생각해서 병사들에게 권관들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자네는 여진족과 싸워야 한다면 어느 권관 휘하에서 싸우고 싶은가?”
“흠. 가장 좋은 권관과 싫은 권관에 이어 휘하에 들어 싸우고 싶은 권관을 물으시니 흠....일단 군역이라 목숨을 살리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박치산 권관이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어째서 박치산 권관인가? 좋은 권관이나 싫은 권관에는 없던 이름인데.”
“뭐 사실,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고 하는 것은 무과를 급제하고 오는 권관이라면 다 비슷합니다요. 헌데, 그중에서 가장 병사들이 상하는 것을 걱정해주는 권관이라서 뽑았습니다요.”
“병사들이 상하는 것을 걱정하는 권관이라고?”
“네. 병사들을 걱정해주니 휘하에 있으면 더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요? 그래서 휘하에 들어 싸우고 싶은 권관은 박치산 권관입니다요. 아, 이러면 가장 좋은 권관으로 박 권관님을 이야기해야 하려나.”
원종은 병사의 말을 듣고는 바로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초임으로 오게 되는 이곳에서 공을 세워 후방으로 가려고 할 터였다.
그러면 병사들이 상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공을 우선시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헌데, 박치산이라는 권관은 병사들이 상하는 것을 걱정했으니 병력의 소중함을 아는 이라고 판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없더라도 무모한 공격을 하거나 기분에 따라 병사를 움직이지도 않을 터였다.
교차 검증을 위해 몇몇 병사들에게 더 물어보고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자, 권관 박치산을 따로 불러 만났다.
“서른 살에 무과 급제 후 도호부에서 5년이나 있었다고 하던데, 후방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소?”
“한양의 상인이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갑자기 큰 갓을 쓰고 앉아 있으니 신분을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구랴. 어디서 온 사람인지부터 밝히시오.”
원종은 박 권관의 말에 성종에게 받았던 마패를 꺼내어 보였다.
박 권관은 마패를 꺼낸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마패에 새겨져 있는 여덟 마리 말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품계에 따라 마패의 말 숫자가 달라지며, 영의정이 일곱 마리 말이 그려진 마패를 쓴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양반이 꺼낸 마패에는 여덟 마리의 말이 새겨져 있었으니 왕의 명을 직접 수행하는 전권 대사를 상징하는 마패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전권 대사를 상징하는 마패는 근래에 말라카에 다녀와 설탕과 후추 등 여러 기물을 들고 온 전원종 제조에게 내려졌다는 것을 조보(朝報)에서 보고 알고 있었다.
박치산은 도호부까지 많은 배를 이끌고 올 정도의 어린 상인이라면 바로 알아챘어야 했는데 알아보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패를 알아보았으니 내 묻겠네. 나와 같이 일하나 해보지 않겠는가?”
작가의말
이 도호부(都護府)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정복한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변경에 설치했던 군사적 성격의 행정 기구였습니다.
하지만, 태종 13년 1,000호 이상이 사는 변방을 다 도호부로 만들며 도호부의 성격을 바꾸어 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이민족을 끌어안기 위한 이민족 행정 기구에서 일반적인 변방의 행정 기구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 태종의 법제 이후로 북방 여진족에 대한 통치 종주권이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후 세종이 여진인들을 귀화시키는 방향으로 북방의 여진족을 끌어 안으려고 하지만, 여진에서 후금이 만들어지고 청나라가 되면서 태조 이성계 때부터 관계가 이어지던 여진족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지게 되어 버립니다.
더해서 실제 이순신 장군도 무과 급제 후 북방에서 첫 근무를 했는데, 임관지가 동구비보(董仇非堡 함경도 삼수)라는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근무하다 후방으로 갔다가 다시 오고 하며 3번이나 함경도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보통 이렇게 함경도에서 3번이나 근무하는 것이 특이 케이스였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소위 임관으로 강원도 원통에 갔다가 후방 배치로 빠졌다가 다시 원통...또 후방으로 갔다가 또 강원도 원통으로 가는 케이스입니다. ㅎㅎ
3연벙도 아니고 3원통 수준의 북방 근무를 겪은 이순신 장군은 확실히 대단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