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운명의 소용돌이. (1) >
“오호라. 1년에 백미 20섬을 받는 선원이 되고 싶으면, 1년에 3섬을 받는 수군으로 3년의 역(役)을 져야 한다는 말이로군.”
“네. 전하. 그렇게 한다면, 선원이 되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수군에 지원하는 이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군절도사들이 올린 상소처럼 수군이 부족한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정승이나 판서가 1년에 70~90석을 받는데, 선원이 1년에 백미 20석을 받는 것이 여전히 과한 것 같긴 하지만, 괜찮은 것 같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면, 그렇게 선원이 되기 위해 수군에 지원하는데, 선원이 생각보다 돈이 안 될 경우에는 어쩌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만약 그리 된다면, 사관(士官)이라는 계급을 따로 만들어 수군에 종사토록 해야겠지요. 그것으로 감당이 안 된다면 제 상단의 조운선 선원으로라도 모두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흠. 전 제조가 그리 확답을 하니 믿어줘야겠지. 말에 책임을 지기로 했으니. 그럼 선원학교라는 것도 전 제조가 맡아줘야겠네. 이번에 많은 돈을 벌었고, 다음 무역에서도 큰돈을 벌 것이니 그 정도는 감당을 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원종은 갑자기 자신에게 돈을 내라며 덤터기를 씌우듯 이야기하는 성종의 말에 놀았다.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직 지학(志學)도 되지 않은 이에게 수군의 교육을 맡기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상단에서 모두 다 고용할 수도 있다고 했고, 결과적으로 선원이 된다면 자네에게 이득을 안겨줄 것이니 자네가 그 운영을 책임지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안 그런가?”
“그... 그렇습죠.”
그렇게 한강 변에서 수군과 선원을 비교하고 선원학교까지 만드는 것까지 결정이 되자 궐로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찬찬히 생각해 보니 성종이 이번에 제대로 삐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선원들에게 몇천 냥의 은을 녹봉으로 줄 수 있고, 장터라던지 상단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규모를 알게 되자 뭔가 백안시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종의 시선이 달라진 것이 왠지 내수사의 전수인 이치현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수사에서 배를 띄우기 위해 이익을 계산하고자 우리 상단을 관찰했을 것이고, 말라카 무역으로 인해 벌어들인 규모와 상단, 점포에서 벌어들이는 재화의 규모를 대충이나마 파악했을 터였다.
그런 큰 돈 이야기를 성종에게 하며 내수사에서도 배를 띄워야 한다고 했을 터이니 성종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제까지는 맛있는 요리를 바치며 어린 동생같이 보였던 이가 알고 보니 돈을 쌓아두고 사는 거부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누구는 바닥에서 혼자 컸고, 누구는 운 좋게 장인을 잘 만나 왕이 되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 자연스레 자수성가한 신하가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물론 아직은 어리기에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돈을 많이 쓰고 원종이 생각보다 더 거물이라는 사실에 원종을 보는 성종의 시선에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했다.
이럴 때는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전하. 소신이 사재를 털어 수군과 선원학교를 만들도록 하겠나이다.”
미운털이 박혀 있을 때는 엎드려서 뱉어내야 했다.
“좋아. 그럼, 선원학교의 규모는 그해 수군이 되기 위해 지원하는 이들의 숫자와 동일하게 해야 하네. 그 숫자만큼만 선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겠네.”
“네. 명심하겠나이다.”
“그럼, 지금의 사옹원 제조의 직으로는 무리가 있으니, 전 제조에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겸직하게 하고 선원학교를 그의 직하에 두도록 하라.”
원종이 선원학교를 맡겠다고 하자 마치 짜여진 것처럼 그 규모를 정해주었고, 벼슬까지 겸대(兼帶)할 수 있게 착착 결정되어 명이 내려오니 원종은 뭔가 짜인 판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처조부인 신숙주와 한명회를 보았다.
신숙주는 굳은 표정이었고, 한명회는 잘되었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입김이 닿았구나.’
다만, 이것이 내수사 전수인 이치현의 입김인지, 아니면... 한명회의 입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
“해서, 선원이 없기에 내수사의 배 2척에 들어가는 선원을 제가 맞춰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사옵니다. 아시다시피 병마절제사는 문신이 겸직하게 되는 힘없는 관직이라 정3품이라고 하더라도 어찌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특히나 이번 상소로 인해 제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구요.”
“흐음.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리다니 참으로 안타깝소이다. 그럼, 내가 전하께 아뢰어서 특별히 내수사의 배에는 수군 출신의 선원을 태울 수 있게 간청을 드려보도록 하겠소.”
“네. 그렇게 해서 누전선 2척을 준비하실 수 있다면 선단에 포함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내수사 이치현의 얼굴을 보면 그가 뒤 작업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명회라는 건데, 이게 더 문제였다.
그의 의도가 내 춘봉 전장을 탐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역 한 번에 몇천 냥을 벌어들이는 것을 봤으니 돈에 따라 움직이는 권력을 감시하려고 하는 것으로도 보였고, 아니면 내게 고삐를 채우려고 하는 의도로도 보였다.
우선은 교환권 문제도 있었기에 한명회를 만나러 갔다.
“아직 교환권의 가치가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이번에는 4천 냥을 찍도록 하지. 그리고 400냥을 더 찍어 내게 주게나.”
한명회는 아무렇지 않게 이번에도 1할을 더 찍어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네도 400냥을 더 찍어서 하게나. 선원학교를 만들려면 돈이 들어가지 않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원학교를 만들기 위해 남도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수영이 있는 남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을 테지. 번잡한 한양을 떠나 이참에 종희와 신혼을 제대로 즐겨 보게나. 얼른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간을 길게 보게. 하하하.”
시간을 길게 보라는 한명회의 말에서 뭔가 확신을 얻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신숙주의 손녀이자 한명회의 외손녀인 종희와 혼인을 했기에 신숙주나 한명회를 언제나 내 편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을 이제는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외손녀 사위이니 한명회를 완전한 아군으로만 생각했는데, 권력은 부자(父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처럼, 돈을 따라 흐르게 되는 권력의 속성을 아는 한명회는 자신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를 경계하고 목줄을 채워 한계를 정해주려는 것 같았다.
그런 한명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를 아군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할 때 보여주고 오픈할 것과 숨겨둘 것을 정해서 철저히 관리해야 할 것 같았다.
***
“교환권 5천 냥 치를 찍고, 400냥 치의 교환권은 예전처럼 부원군께 전해드리게.”
“그럼 공시는 어찌할까요?”
“일전 2천 냥에서 4천 냥이 추가되었다고 바로 공시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6천 냥까지 천천히 증가 시킨 것으로 공시하게나.”
공시되는 금액은 6천 냥 치지만, 실제로는 7800냥 치를 찍어 600냥을 한명회에게 주고 1200냥은 우리가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 냥은 따로 빼서 동래에 500냥 치를 쓰게 하고, 나머지 500냥은... 앞으로 생길 목포지점에서 쓸 수 있게 준비하게나. 바로 압착기와 기술자들을 부르게나.”
원종은 본인이 들고 있던 교환권의 동판을 꺼내며 바로 교환권 인쇄 작업을 준비했다.
“응? 사람이 두 명 줄었구만. 무슨 일이지?”
“저... 그것이 그만두었습니다.”
“뭐? 왜? 주자소(鑄字所)에서 데리고 올 때 서운하지 않게 대우를 해준 것 같은데.”
“그게 서리 권항필이 있었지 않습니까?”
“권 서리가 그 둘을 못살게 굴어 그만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전장에서 꼴통 짓을 한다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을 했었는데, 기어코 사고를 친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닙니다. 권 서리가 그 두 사람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다른 곳? 어디인가?”
“정확히는 모르오나 권 서리가 전장과 상단의 몇몇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놈들이 단주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더 좋은 대우를 해준다는 곳으로 간다며 그만두었습니다.”
“전장과 상단에서도 사람을 빼갔다고? 금산이를 불러라.”
어쩐지 권항필이 며칠 안 보인다고 했었는데, 이놈이 사고를 친 것 같았다.
삼식이와 함께 연근해 교역을 하던 금산이가 한양에 있었기에 급히 불러들여 권항필의 행적을 조사하게 했다.
“행적을 살펴 뒤를 쫓다 보니 경상 쪽인거 같았습니다. 헌데, 누가 전주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경상은 경강상인의 준말로 한양 강변에 상권을 가진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상은 우리 춘봉 상단이 조운 운송과 전국의 물자 유통에 뛰어든 이후 자리를 많이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경상이 우리 쪽 사람을 빼갔다는 말에 왠지 우리를 따라 하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산이가 경상들이 뭘 하는지 계속 확인하여 보고하거라.”
원종은 트러블 메이커였던 권항필이 제 발로 나간 것이 시원하긴 했으나 나름의 노하우를 가진 이들을 데리고 나갔다는 것이 찝찝했다.
그래서 직원들에 대한 단속을 해야 하나 싶어 강제적인 감시와 복지혜택으로 묶어 두는 것을 고민하다 복지혜택으로 결정을 했다.
금산이에게 전장이나 상단에 일하는 일들을 살게 할 사택을 만들게 지시했다.
일반 상인들이 사는 초가집보다 황토 벽돌로 지은 네모반듯한 집을 짓게 하고, 직원들을 모여 살게 할 생각이었다.
좋은 집과 한동네에서 살게 되면 가족들의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고 한동네에서 살 듯이 직원들이 같이 움직이게 되니 이탈률도 낮아질 터였다.
그렇게 복지혜택으로 서로 간의 작은 정으로 묶어 두겠다는 소극적인 대응을 지시했다.
“단주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권서리와 같이 나간 이들은 다들 단주님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다른 이의 꾀임에 빠져나갈 사람들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 같은 공인들을 이렇게 대우해주시고 중한 사람이라고 아껴주시는 분은 단주님 밖에 없으니 저희가 다른 곳으로 갈 일은 없습니다요.”
교환권을 찍어 내면서 내가 사람들에 대해 걱정하자 금산이나 공인들이 먼저 나서서 이야길 했다.
주자소에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새로운 기술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었고, 만드는 책들도 언문으로 된 쉬운 책 위주라 오히려 더 일할 맛이 난다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이들의 말에 마음이 든든했지만, 조정의 명 하나에도 산산조각이 날 수가 있는 것이 상단이었고, 돈질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미래의 한국에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재계 순위 7위의 국제상사가 그냥 박살이 나버렸었고, 1년에 몇억을 준다는 말에 중국 업체에 특허기술을 넘기기도 하는 것이 직장인이었다.
그때와 비교해서 더 절차나 법이 지켜지지 않는 시대이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힘이었다.
한명회의 은근한 의도로 곤욕을 치렀고, 갑작스러운 권항필의 인력 빼가기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했다.
내 사람을 빼가게 되면 보복을 당한다는 무서움이 있어야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단순하게 선원 수급을 위한 선원학교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사관학교를 만들어 사병을 길러내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힘이 없으니 이제까지는 신숙주와 한명회의 그늘을 빌려 안전을 도모했지만, 이제는 힘을 길러 그 그늘을 벗어날 때가 온 것이었다.
< 227. 운명의 소용돌이.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