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호(號)를 허하다. >
“처음 장터가 열리고, 교환권이 돌 때는 늘 전장이나 상단에 교환권이 남아 있었습니다. 초반에 풀린 교환권이 계속 돌았으니깐요. 헌데, 어느 날부터 들어오는 교환권보다 나가는 교환권이 많아졌습니다.”
“네. 그래서 이제 전장에 남아 있는 교환권 잔여분이 은 200냥 치밖에 없습니다.”
“오 그렇다는 말은 순수하게 2200냥 분량의 재화가 상단과 전장을 통해서 흐르고 있다는 말로 알아들어도 되겠는가?”
“아마도, 그 이상일 것입니다. 교환권 때문에 왔다가 다른 상인들에 비해 궤나 저울로 장난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곡식이나 의복을 살 때 우리 상단으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춘봉 상단에 대한 신용과 신뢰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는 거군. 이런 신뢰를 저버리지 않게 자네들이 좀 더 신경을 쓰게나.”
교환권의 유통 흐름이나 만족도를 보면 충분히 더 수량을 늘려도 될 것 같았다. 특히나, 최대 장수를 공시하는 것이나 언문을 가르쳐 주는 것 같은 서비스에 사람들이 신용하는 것 같았다.
한명회와 추가로 교환권을 늘리는 것을 논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교환권을 한양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사용처를 늘리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네. 헌데 호조의 서리이신 권항필 나리를 단주님이 좀 데리고 가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요?”
“권 서리를?”
호조에서 사옹원 사람들의 호적을 정리하기 위해 보내준 이후로 공랑 점포에서 패악을 부려 원종이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혼인식을 하며 전장 쪽의 일을 돕게 했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듯했다.
“뒷배경을 믿고, 상단의 오추 행수나 가패의 참렬행수를 비롯해 모두 다 아랫사람으로 여겨 부리다 보니 다들 불만이 많사옵니다.”
이미 죽은 권신인 권람의 9촌 조카라는 배경과 양반이라는 신분적 우월로 사냥꾼 출신인 오추나 도공 출신인 참렬을 업신여기는 것 같았다.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권항필을 솎아내는 것이 맞는 일인데, 애매했다.
우선은 호조에서 호적등록에 도움을 주기 위해 보냈지만, 어느 정도는 감시의 의도도 가지고 보냈다는 것을 알기에 대놓고 내치기에는 호조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명분을 가지고 종이 만드는 지방의 절이나 인삼밭을 핑계로 문경으로 보내버리면 될 것 같은데, 이게 또 눈에 안 보이면 어떤 패악을 부릴지 더 걱정이 되는 인사였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편함 없게 해줄 테니 조금씩만 참게나.”
“네. 그리고, 저희와 고정적으로 고기와 벌통을 거래하고 있는 백정이 찾아와 단주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백정이?”
“네. 눈치를 보면 고기를 팔 때 교환권으로 받아서 쓸 수 있는지를 허락 받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단주님께 직접 이야길 하고 싶다고 강짜를 부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들어오게 하게나.”
설탕이 없었을 때 조청이나 벌꿀을 이용했었고, 그런 꿀과 밀랍을 백정들이 파리를 쫓기 위해 키우는 벌통에서 조달했었다.
지금도 꾸준하게 꿀과 밀랍을 납품 받고 있기에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만나줘야 했다.
더구나 푸줏간에서 교환권을 쓰고 싶다는 눈치라고 하니 나쁘지 않은 사용처였다.
“그래, 이름이 거철이라고? 푸줏간에서 고깃값으로 교환권을 쓰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요. 그리고 나리. 저... 그것이... 절대 나리의 이름을 욕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라 제 푸줏간에 춘봉이라는 이름을 쓰면 아니 되겠습니까요?”
“응? 내 호(號)를 푸줏간에 쓰고 싶다고?”
“아니 미친놈이! 어딜 천한 푸줏간에 춘봉이라는 이름을 쓰겠다고 하는 것이냐? 이놈이 우리를 아래로 보는 것이냐?”
“네놈이 단주님을 꼭 봬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었느냐?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감히 양반의 호를 쓰겠다고!?”
원종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행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욕지거리까지 하며 거철이에게 뭐라고 했다.
“워워 다들 그만들 하게나.”
“안 됩니다! 저놈을 혼구녕을 내줘야 합니다. 단주님의 호를 푸줏간에 쓰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저놈이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놈이 좋다 좋다 해주니깐 미쳐서 날뛰는 겁니다. 저런 놈은 멍석말이를 한 번 해줘야 합니다.”
“아 글쎄 다들 조용히 하라니까 그러네.”
금방이라도 들고 일어나려는 행수들을 진정시키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철이에게 물었다.
“그래 왜 내 호를 푸줏간에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이냐?”
“저... 그것이 다른 푸줏간과는 다른 인상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상?”
“네. 사실, 이 푸줏간이라는 것이 각 시장마다 있는 게 아니라 도살장 인근에 몰려 있습니다요. 그래서 푸줏간이 줄줄이 있다 보니 어디가 어느 푸줏간이지 구분이 어렵습니다요. 해서 가게에 춘봉이라는 이름을 내걸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요.”
“흠. 가게의 인지도를 위해서군.”
“이놈이 결국, 단주 님의 호를 이용해 먹으려는 놈이었구나. 이놈을 그냥! 콱!”
“멍석을 말깝쇼?”
“아이고, 죄송합니다요. 이게 다 제 욕심이었습니다요. 용서해 주십시오. 그저 춘봉이란 이름을 쓰게 되면 손님이 더 오지 않을까 하여... 제가 헛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요. 용서해 주십시오.”
거철이는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는데, 이게 현대인의 관념에서 보자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오히려, 이런 이름, 브랜드에 대한 것을 고민하고 도입하려고 한 거철이란 녀석이 다른 백정들과 다르게 보였다.
“좋다. 춘봉이라는 이름을 가게에 쓸 수 있게 해주겠다. 다만, 내가 정한 규칙을 다 따라야 쓸 수 있을 것이다.”
원종은 교환권의 사용처를 늘리는 일이기도 했고, 왕십리에서 기르고 있는 돼지도 100마리 가까이 늘어났기에 고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직영 가게를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단주님! 아니 됩니다. 단주님의 호(號)가 푸줏간의 이름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호를 욕보이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푸줏간에도 춘봉이라는 이름이 걸리게 되면 다른 양반들은 물론이고 같은 상인들도 우리를 얕잡아 볼 것입니다.”
“호(號)를 욕보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쓰는 호를 바꾸면 되는 것이지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리고, 양반들이나 상인들이 얕잡아 보면 어떤가? 우리가 더 규모도 크고 돈도 더 많은데 무슨 상관인가?”
“하, 하오나 그렇게 되면 위신에 문제가 생깁니다.”
“처음이 어려운 것이야, 처음이. 춘봉 상단을 처음 만들어 닭털 옷인 나이기온 옷을 팔았을 때는 양반이 옷을 판다고 욕을 먹었었어.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겨울이 되면 우리가 만들어 판 나이기온 옷을 다들 꺼내어 입고, 만들어 입네. 이렇듯이 처음이 어려운 것이야.”
“하오나 푸줏간이옵니다. 천한 백정들이 고기를 썰어 파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오히려 이 백정 일을 하는 이들을 우대해 줘야지. 그리고 푸줏간도 푸줏간 나름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야. 이름이 거철이라고 했지?”
“네. 나리.”
“네 호를 쓰고 싶다면, 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푸줏간도 내 가게여야 해. 즉 내 아래로 들어오라는 거네. 지금 푸줏간을 접고 내 밑으로 들어오겠나?”
“거, 거두어만 주신다면 그 풀로 묶는다는 그것까지 하겠습니다요.”
“춘봉이란 이름 아래 들어 온다고 해도 결초보은(結草報恩)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게 시키지도 않을 것이고. 우선은 푸줏간이란 이름부터 바꾸지.”
원종은 붓을 들어 정육점(精肉店)이라고 썼다.
“이제는 고기를 파는 곳이 푸줏간이 아니라 정육점이라고 할 것이네. ‘춘봉 정육점’이 이제 고기를 사고, 파는 가게의 이름이네. 그리고, 상단과 전장처럼 춘봉이란 이름 아래 한 개의 사업체가 될 것이네.”
“정육점이라... 뭔가 이름이 좋습니다.”
거철이는 마치 자신이 이름을 받은 것처럼 몇 번이나 정육점을 읊조렸다.
“그리고, 단순하게 도살장에서 죽은 고기를 가져와 파는 게 아니라 우리 농장에서 키우고 있는 돼지와 닭을 팔 것이고, 그 고기로 만든 고기 순대를 팔게 될 것이네. 단순한 고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상품화된 고기를 파는 것이지. 이러면 정육점도 푸줏간이 아니라 일반 상점이 되는 것이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에 따라 백정도 상인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 안의 뜻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거철이는 우선 내일 나와 같이 왕십리 춘봉 농장으로 가지.”
“네, 네. 감사합니다요.”
“오추 행수가 거철이에게 우리 춘봉 상단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이 있고, 각 사업을 맡은 행수들의 이름을 알려주게. 언문을 모른다면 언문도 가르쳐야 할 것이야.”
“네. 알겠습니다.”
오추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행수들이 백정인 거철이를 받아들이고 푸줏간을 하겠다는 말에 불만을 가졌으나,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푸줏간이 아닌 정육점이라는 새로운 가게를 한다고 하니 원종에게 더는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원종이 진행했던 일들이 다들 파격적이었기에 이 정육점이라는 것에도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오히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추 행수가 우면산이나 구룡산 일대에 도토리나무가 많은 산을 구매해 주게나.”
“도토리나무가 많아야 하옵니까?”
“그래 그 도토리로 돼지를 키울 것이네. 왕십리에서 키우는 돼지를 구룡산 아래로 옮겨 도토리로 키울 것이네. 다른 나무는 벌채를 하고 도토리나무를 많이 심으면 돼지의 먹이가 풍부해질 것이야.”
“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햄인 고기 순대를 만들기 위해서 옮기는 것이기도 했지만, 왕십리에서 키우는 돼지의 마릿수가 한계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사료 없이 음식물쓰레기나 잡곡식으로 키우는 것은 아무리 원종이 부유하다고 해도 100여 마리가 한계였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맛을 위해서 이베리코 식으로 도토리나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산 아래이기에 호랑이 같은 유해 조수 문제가 생기겠지만, 사옹원처럼 일꾼 겸 사냥꾼을 두고, 올무나 덫을 빽빽하게 설치해 둔다면 막을 수 있을 터였다.
***
원종이 권항필의 문제와 교환권의 추가 인쇄까지 고민하며 집으로 가니 내수사의 전수(典需)인 이치현이 와 있었다.
“장터 이후로 이야길 하자고 하셔서 근 두 달을 기다렸습니다. 장터는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더군요.”
“모든 것이 다 전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장터의 음식들이 맛있다고 치하해 주시다 보니 다들 전하의 칭찬을 받은 음식이 궁금하여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하의 은혜이지요.”
“그렇지요. 그럼 이제 장터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말라카와의 무역 일을 이야기해봅시다.”
“혹시 그사이에 전하께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셨는지요?”
“물론 했소이다. 전 제조가 내수사 독단적으로 하는 것을 염려하는 듯하여 전하께 이야기를 드렸다오. 내수사가 왜 무역에 나서야 하는지 아뢰니 전하께서는 좋다고 하셨소이다.”
“혹시 어떻게 이야기를 올렸고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설탕과 후추를 소금처럼 전매하면 종친들의 생활이 좀 더 윤택하게 될 것이라고 했소이다. 그래서 내수사가 따로 배를 띄어야 한다고 하자 전하께서는 종친들의 삶이 좋아진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해주셨소이다.”
이치현의 말을 듣고 보니 속에서 짜증이 확 치솟았다.
설탕과 후추를 소금처럼 전매하게 되면 중간에 중간 상인이 하나 더 끼어들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직접 가져온 자들의 이익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걸 사야 하는 백성들은 더 비싸게 구매하게 되는 것이었다.
“해서 전하께옵서는 전 제조의 특임 마패를 회수하지 않고, 무역 함선의 규모를 늘리기로 하셨소이다. 우선은 내수사의 배 2척이오.”
무역선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조정의 컨트롤을 받는 내수사 같은 이들이 끼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 다녀와서 무역으로 어떻게 수익을 만들어내는지를 확인하게 되면 우리를 빼고 직접 하려고 할 터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내 사적 사업체가 되어 있는 사옹원을 빼앗으려고 할지도 몰랐다.
조정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족쇄처럼 달라붙는 것은 사절하고 싶었다.
이걸 어떻게 잡음 없이 거절할까 고민하는데, 밖에서 급하게 마당쇠가 뛰어왔다.
“나리! 나리!! 궐에서 선전관이 왔사온데. 속히 궐로 들라 하십니다.”
“선전관이?”
원종보다도 전수인 이치현이 더 놀라 했다.
“의관을 정제하는 동안 선전관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겠소이다.”
이치현이 나가 선전관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옷을 입고 나서는데, 이치현과 선전관이 같이 붙어 이야길 해주었다.
“남도에서 상소(上疏)가 빗발치듯이 올라오고 있기에 전하께서 급히 호출하셨다고 하오.”
< 225. 호(號)를 허하다. > 끝